[고상백의 의료인문학 칼럼]
질병과 치유의 사이
[메디칼타임즈=고상백 교수 ]인간의 고통과 회복, 특히 중병을 앓는 환자와 이를 돌보는 사람과 의료인의 관계는 오랜 시간 동안 의학과 미술의 교차점에서 탐구되어 왔다. 병든 몸과 회복의 여정 속에서 인간은 어떤 감정을 느끼고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로버트 포프(Robert Pope)는 이 질문에 대해 그림으로 대답한 화가이다. 캐나다 출신의 포프는 1980년대 초 20대 후반에 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암의 진단에서 치료, 회복에 이르는 전 과정을 회화로 기록하였다. 질병과 치유, 환자와 의료진 사이의 복합적 감정, 치료의 공간인 병원을 회화로 풀어낸 독보적인 예술가이다. 포프는 의학이 바라보는 신체와 환자가 겪는 질병의 경험 사이의 간극을 직시했으며, 회화를 통해 그 거리를 우리에게 보여주려 했다. 암 진단을 받은 그는 자신이 직접 겪은 암 진단과 치료, 회복의 전 과정을 하나의 예술적 탐색이자, 사회적 목격으로 치환했다. 포프는 자신을 포함해 다양한 연령, 인종, 계층의 환자들을 병원의 공간 속에서 관찰하며, 의료기술과 종교, 가족과 고독, 밤과 창문에 이르기까지 병원이라는 '사회 속의 작은 세계'를 그려냈다. 그림. 로버트 포프. 의사들에 대한 탐구, 1990 Robert Pope. Study for Doctors, 1990그는 엑스레이실, 병동, 병원 예배당, 항암 주사실, 대기실을 넘나들며 환자의 가족 뿐만 아니라 의료진의 회진에 동행했고, 암 환자인 친구들과도 경험을 공유하며 예술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다. 그의 작업은 동시에 기록이고, 회복이며, 예술적 선언이었다.'의사들에 대한 탐구'라는 작품은 의사들의 시선과 환자의 고독을 동시에 담고 있다. 그림은 의사들이 입원실에 회진을 돌면서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을 보여주며, 그들 앞에는 의사를 기다리는 환자가 있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은 정제되고 통제된 위치에 서 있다. 환자는 그림 하단에 발만 보임으로써 중심에서 비껴나 있다. 이 그림의 구성은 권력의 비대칭을 드러내고 있다. 의사는 집단적으로 익명적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환자는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과학과 진단이 중심이 되는 의료 환경에서 환자는 이름을 잃고, 하나의 사례로 환원된다. 하지만 포프는 환자의 자리에서 의사들을 바라보면서 오히려 상황을 역전시키고 있다. 그림. 로버트 포프. 포옹. 1990 Robert Pope. Hug 1990의사들은 과학자일까, 아니면 어둠 속에서 오싹하게 드러나는 하얀 주름진 가운을 입은 판사일까? 포프는 의사들을 위압감 넘치는 무리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은 의료 집단이 지닌 권위와 거리감, 의사들 간 계층적 질서를 섬세하게 암시하며, 병원이라는 제도적 공간에서 환자가 느끼는 불안과 고립을 대비 시키고 있다.비슷한 감정적 긴장감은 '포옹 (The Hug)'이라는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이 그림은 의료 장비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서로를 껴안는 한 쌍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포프는 여기서 고통 속에서도 지속되는 관계와 정서적 유대를 부각시킨다. 삐죽 솟은 링거 봉과 투명한 튜브는 육체적 고통의 상징인 동시에, 그 사이를 뚫고 건네는 ‘접촉’은 인간적 회복의 가능성을 상징하고 있다. 치료는 의사에게서 환자에게 일방향적으로 흐르는 기술의 행위가 아니다. 때로는 감정과 접촉, 이해와 공감, 기다림과 연결의 방식으로 '회복'이라는 이름을 강조하고 있다.포프는 치유를 치료와 구분한다. 치료는 절차이자 기술이고, 몸의 고장을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치유는 몸을 넘어선 이야기이다. 그는 병실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그리기도 하고, 밤의 병동에서 홀로 깨어 있는 환자의 상념을 묘사하기도 한다. 이는 병이 단순한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존재론적 경험임을 강조 하는 것이다. 병든 몸은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를 경험하고, 치유란 그 단절로부터 다시 세계와 접속하는 과정이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산 (Mountain)'은 병실 내부와 멀리 보이는 산의 대비를 통해 병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병실 안에서는 병에 의해 약해진 환자와 저 멀리 암처럼 다가오는 산이라는 존재가 환자를 압박하고 있으며, 그를 위로하는 돌봄자의 관계가 대비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원래는 돌봄자의 인물이 없었지만, 그의 존재가 더해지면서 '질병은 혼자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그림에 새겨졌다. 포프는 환자에게는 의사보다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림. 로버트 포프. 산 Robert Pope. Mountain 로버트 포프의 예술은, 말하자면 질병의 미학이 아니라, 질병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경험과 삶을 그린다. 그는 병원을 고통의 장소로만 그리지 않는다. 그곳은 또한 사랑, 유대, 기다림, 심지어 희망이 발생하는 공간이다. 암 환자의 삶은 단지 통계나 임상 결과로 파악할 수 없는 복합적 층위가 있다. 포프는 이 모든 층위를 시각화하여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업은 의학적 시선의 확대를 요구하며, 환자 중심의 의학이란 무엇인가를 되묻고 있다. 질병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엑스레이와 같이, 그의 그림은 마음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장치가 된다.로버트 포프의 작업은 환자로서의 경험과 인간 존재에 대한 묵상이며, 의학이 놓칠 수 있는 인간 내부의 진동을 시각화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의학과 환자의 관계를 객관화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내밀한 감정과 사회적 상호작용을 생생하게 기록하였다. 그의 작품은 암 환자를 단지 병든 몸으로 환원시키는 의학적 시각에 대한 반론이며, 동시에 의료현장에서 환자의 존엄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를 묻는 시각적 선언이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환자 중심의 의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의료인들에게 깊은 통찰을 제공하며, 병이 삶의 일부분이 되었을 때 우리가 어떤 태도로 서로를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다시금 환기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