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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들이 이세계 전생을 한 것 같아

[메디칼타임즈=인제의대 4학년 김성재 ]"3개월 전에 아들이 죽었어. 하지만 나는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우리 아들은 이 세계로 전생을 한 것 같으니까..."하야마 미오는 3개월 전 하나뿐인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게 된다.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시간의 끝에 그녀가 내린 결론은 다소 코믹해 보이기도 한다. 갑자기 트럭에 치여서, 다른 세계로 전생하고, 세상을 구하고 돌아온다는 아들이 즐겨 읽던 만화의 서두를 보고서 말 한마디 섞어본 적 없던 고등학교 동창을 떠올린 것이다."우리 아들이 죽었어. 하지만 우리 아들은 이 세계 전생을 한 것 같아. 넌 학창 시절부터 그런 만화를 봤잖아. 다시 돌아올 방법을 찾아줘."본 만화의 장르는 판타지가 아니라 드라마다. 등장인물들은 이 세계를 넘나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표지 속에서 상복을 입은 채 아들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하야마 미오의 표정은 어째서인지 차분하다.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들이 죽지 않고 이 세계에서 세상을 구하고 있노라고 믿고 있다. 방어기제 부정(Denial) 혹은 합리화(Rationalization)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는 이 세계로 가는 방법을 닥치는 대로 모색하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도망치는 것은 안락하다. 현실에서도 말이다. 나 역시 회피를 즐겨 한다. 내 인생의 신조는 오로지 건강과 행복이기에 귀찮고 복잡한 것은 미루고 나중에 생각한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알 수 없기에 현재만을 살아간다. 나는 그냥 하루하루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산다. 주로 기분이 좋다.그러나 나에게는 아쉽게도 영원히 도망칠 수 있는 각력과 심폐지구력이 없다. 결국 모든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저주로 남아 삶을 황폐화하고, 언젠가는 더 크게 몸집을 불려 필연적으로 다시 등장한다. 특히 밤에.잠을 청하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은 후회스러운 과거와 불안한 미래. 회피는 회피일 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고통으로 돌아오는 것은 필연이다. 사실은 괴롭다.하야마 미오 역시 이 세계로 향하는 방법을 찾으며 울기도 웃기도 하지만, 결국 극단적인 상태로 치닫게 된다. 그녀는 영원히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떠올린다."아, 이거? 죽으려는 거 아니야. 이 세계 전생하려는 거지"그때 헐레벌떡 달려온 그의 동창 도바라 토모타는 지난 며칠 동안 미오의 이 세계 연구를 도운 장본인이다. 이 세계 전생이라는 소재를 매우 좋아했던 그는 그녀에게 외친다."이 세계는 없어요. 저는 그 세계를 정말 좋아해요. 제게 있어서 이 세계란 구원이고, 꿈이고, 근사한 것이죠. 그러니까... 이 세계가 꿈만 같은 지어낸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어요"방어기제가 붕괴한 미오는 몹시 괴로워하지만, 작품에서 최초로 감정을 한껏 드러내며 울부짖는다. 죄책감, 고통, 절망. 댐이 개방되어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듯 분출되면 그 후에 남은 것이 있다.나를 위해 이곳에 달려온 토모타, 그와 함께 이 세계를 연구한 허무맹랑하지만 즐거웠던 시간. 그저 그곳에 존재할 뿐인 자연,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했던 기억. 이들은 미오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고통만이 그녀의 전부가 아니라는 증명이었다.미오는 그간 진실로부터 도망쳐왔다. 과연 미오가 아들이 이 세계에 살아 있다고 믿었던 시간은 '회피'이기 때문에 그른 것이었을까? 나는 조금 다르게 그 시간을 '휴식'이라고 표현하고 싶다.미오는 훌륭한 방어기제를 펼쳐 우선 자신의 신체를 안정시켰다. 이 세계의 존재는 미오에게 당장 오늘을 살아갈 힘을 주었다. 밥을 먹게 해주었고 잠을 자게 해주었다.그렇게 번 시간 동안 토모타와 함께 웃을 수 있었고, 그 기억이 다시금 그녀를 지지하는 뿌리가 되었다. 그녀는 본인도 모르게 다시 살아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다.이 세계가 가짜임을 알게 된 순간, 그녀는 미뤄뒀던 숙제를 하듯 감정을 고통스럽게 소화했지만,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흔들거리면서도 끝내 일어설 수 있었다. 그 모습은 측은하면서도 숭고했다.몇 시간이 흘렀을까, 미오는 아들이 없는 이 세계가 이미 이 세계로 느껴지기에 새로 시작해야겠다고 말한다. 비록 모든 것이 완벽한 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그녀에게 다음이 주어졌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감당할 수 없는 것들과 맞닥뜨린다. 영원한 회피란 없기에 언젠가는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투쟁의 과정이 무결할 필요는 없다.완벽하지 않아도, 극적이지 않아도, 평범한 우리는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중요한 것은 보급이다. '무조건 회피'가 아닌, '일단 휴식'하는 것.삶은 장기전이기에 우리의 전술은 휴식과 보급을 고려해야만 한다. 체력을 안배하고 마음이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자. 괴로운 것 말고도 우리의 삶을 이루는 것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깨닫자.나는 이런 핑계를 대고 또 복잡한 것으로부터 달아난다. 고민해야 할 일이 많지만 운동을 하고 오토바이에 올라타 목욕탕으로 향한다. 개운하게 나오면 우유 한 잔 마시고, 집에 와서 나른하게 만화를 읽는다.이 순간이 영원한 낙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다. 토모타의 말처럼 현실에 이상향은 없으니까.그럼에도 내색 없이 지쳤을 나의 정신과 육신을 달래려 '휴식'한다. 나약한 나는 그래야만 다음 날 전장으로 복귀할 수 있다.물론 모두의 상황과 방식은 천차만별이니 감히 말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다 행복하자고 하는 일 아니겠는가.때론 괜한 마음 졸임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보다는 그저 잘 먹고 잘 잤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5-04-28 05:00:00젊은의사칼럼

죽음에서 배운 것

[메디칼타임즈=가톨릭관동의대 1학년 정지은 ]한 달 전,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죽음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갑작스레 혼수상태에 빠지신 뒤 위태롭게 이어지던 숨결은 끝내 멈췄고, 이후 모든 것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삼일장을 치르고, 염을 하고, 화장을 하고, 마지막으로 마주한 할머니는 한 줌의 뼛가루로 남아 계셨다.몸이 불편하셔도 예쁜 옷을 고르고 반짝이는 귀걸이를 즐겨 하시던 분이, 작은 통 하나에 담겨 외할아버지 곁에 안치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스물다섯이 되어서야 비로소 죽음이라는 것을 실감했다.병실에서 마지막으로 잡았던 손의 온기가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 "할머니, 나 왔어. 조금만 일어나 봐요" 속삭이며 손을 꼭 쥐었던 그 순간, 내 목소리에 맞춰 심박수가 아주 미세하게 반응하던 모습에 잠시나마 희망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너무 조용히, 그리고 너무 빠르게 사라졌다. 허무했다.불과 며칠 전만 해도 함께 식사하며 "우리 강아지 예쁘다"고 웃으시며 용돈을 쥐여 주시던 그 모습이 선명한데, 이제는 더 이상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낯설고 아득했다. 살아 있는 동안 쌓은 기억들은 단단하게 느껴지지만, 그것이 얼마나 쉽게 흩어질 수 있는지를 마주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밀려왔다. 아, 죽음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항상 '뇌출혈로 쓰러지신 할머니를 보며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문장을 초등학생 때부터 생활기록부 장래 희망 칸에 써왔던 나였다. 하지만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에 의사를 위한 길을 걷고 있는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생명을 살리는 기술을 배우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죽음을 피하는 법'에 집중한다. 더 빠르게 진단하고, 더 정확하게 치료하며, 위기를 예측하는 법을 익힌다. 나 또한 더 열심히 공부하면,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지금까지 굳게 믿어왔다.하지만 환자의 호흡이 점차 옅어지고, 심전도의 파형이 수평선이 되는 그 침묵의 순간은 그 어떤 책도, 교수님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 어딘가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내미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기술과 지식이 무력해지던 그 순간, 한 번도 진지하게 물어본 적 없는 질문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의사는 병을 다루는 법은 배워도, 사람을 이해하는 법은 얼마나 배우고 있는 걸까.의대생들이 해부학 실습에서 바라본 장기들, 강의실에서 오가는 병명들 사이로는 한 사람의 삶과 기억, 관계가 좀처럼 스며들 틈이 없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병원의 풍경도 마찬가지이다. 환자는 종종 '케이스'로 불리고, 병의 흐름은 수치로 정리된다.하지만 마지막 순간의 할머니를 떠올리며, 나는 처음으로 그 수치 하나하나에 감정의 결과, 관계의 무게가 실려 있음을 실감했다. 책 속의 질병과 병실 속 한 사람 사이에는 말로 다 전해지지 않는 간극이 존재했다.그리고 그 거리를 기꺼이 좁히려 애쓰는 일, 고통과 이별의 순간을 함께 견디는 태도야말로, 우리가 오래도록 길러야 할 감각일지도 모른다. 무표정한 숫자 뒤에 숨은 마음을 헤아리고, 침묵 속 말해지지 못한 의미를 읽어내는 일…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의사가 평생 익혀야 할 진짜 언어일 것이다. 병을 고치는 사람이라는 역할 이전에, 생의 끝자락에 선 누군가의 마음을 끝까지 들여다보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서야 조금씩 배워간다.겨우 출발선에 선 나는 여전히 서툴고 흔들리는 의대생이지만, 예전보다 조금은 더 여문 마음으로, 누군가의 마지막을 외롭지 않게 함께할 준비를 하려 한다. 나의 글을 읽는 당신도 어쩌면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마주하고 나처럼 상실감이 클지도 모르겠다.흔들리고 있는 당신에게, 그 감정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그 시간이 당신을 더욱 깊고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 이 길의 끝에서 또 다른 이의 이별을 조금 덜 쓸쓸하게 안아줄 수 있기를.
2025-04-21 05:00:00젊은의사칼럼

퍼펙트 데이를 완성하는 법에 대하여

[메디칼타임즈=경북의대 2학년 노정연 ]칼럼을 기고하기 시작한 지 어느덧 약 6개월이 지났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네 편의 글을 작성해 오면서 이번만큼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가 막막했던 순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불운과 불행이 연이어 몰려오는 듯한 요즘입니다. 상식이라 믿었던 것들은 점점 퇴색되어 가고, 곳곳에서 마음 아픈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너무 거대해서 도저히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불행이 주변을 맴돌고 있는 듯합니다.개인적인 불행을 다루는 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방안을 마련해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광범위한 불행에 대해서는 아직 면역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셨거나, 하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정답을 드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시의성 있는 글을 쓴다는 건 참 어렵습니다.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고, 어제의 해답이 오늘의 오답이 되는 일도 부지기수이기 때문입니다. 희미한 낙관이 구체적인 절망으로 변질되어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오기도 하고요.당연히 저는 이 모든 걸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아마도 모두가 그런 것처럼요. 무엇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면, 무엇이 어떻게 바뀔지를 두려워하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을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이 더 나은 해결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거대한 문제에 직면한 사람은 패닉에 빠지기 쉽습니다. 상황에 대해 열렬한 분노를 쏟아낼 수도 있고, 외압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찾아오는 무기력감에 허우적대기도 하죠. 저 또한 여러 비극적인 소식들을 접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절 괴롭혔던 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하지만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것은 목적 없는 분노와 무기력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해답 중 하나를 한 영화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퍼펙트 데이즈>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퍼펙트 데이즈>는 한 화장실 청소부의 일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언뜻 보면 거창해 보이는 제목과 달리 영화의 내용은 그렇게 흥미진진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한 남자의 반복되는 일상을 따라갈 뿐이라서요. 그는 매일매일 그에게 주어진 일과를 성실히 수행합니다.일과가 끝난 후에는 분재를 가꾸고, 헌책방에서 책을 사서 읽고, 올드팝을 듣거나 카메라를 다루기도 하면서요. 또한 동료나 가족이, 혹은 생면부지의 타인일지라도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처하면 본인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도움을 줍니다.처음 영화를 시작했을 땐 다소 뜬구름 잡는 듯한 느낌이 들던 제목이었지만, 영화를 다 본 후엔 이보다 완벽한 제목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꼭 엄청난 무언가를 해내지 않아도, 매일이 비슷한 하루인 것만 같아도 '퍼펙트 데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성심성의껏 스스로를 돌보며, 자신을 돌보듯 타인을 돕는 삶.꼭 거창한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당장 모든 상황을 바꾸진 못하더라도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바꿔 나가는 것. 가장 쉽지만 또 어려운,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삶의 태도가 아닐까요? 저는 이보다 더 완벽한 해답을 찾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흔히들 현재를 제외한 시간대, 즉 과거나 미래를 떠올릴 때면 주요 사건들을 위주로 단편적인 장면들을 떠올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결론 또는 결과가 조명되고, 그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과정은 잊히기 쉽습니다. 그래서인지 일상을 돌보는 일의 중요성까지 같이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더 공을 들여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스스로를 잘 돌보는 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한 발짝 더 나아가 본인이 할 수 있는 일로서 타인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의 하루를 '퍼펙트 데이'로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그로 인해 스스로의 진정한 '퍼펙트 데이'를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모두 각자의 '퍼펙트 데이'를 완성하실 수 있기를 바라고 있겠습니다.
2025-04-14 05:00:00젊은의사칼럼

흰 가운을 입고 다시 마주한 의학과 기술

[메디칼타임즈=경북의대 이진규 졸업생 ]4년이 흘렀다. 풋내기 본과 3학년이었던 내가 이제는 흰 가운을 입고 환자를 진료한다. 학생 시절, 넘치는 패기를 담아 세 차례 기고한 글에는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모든 의대생이 임상의사를 꿈꾸는 것은 아니며, 의사는 병원 밖에서도 환자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의사가 되어 그때 썼던 글을 다시 읽으며 당시의 열정과 지금의 현실을 음미해 본다. 감회가 새롭다."이 기술이 과연 환자에게 도움이 될까?"8년 전, 의료기기를 연구하는 대학원생이던 나는 이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공학적으로 혁신적인 기술이었지만, 실제 환자에게 닿지 못하는 현실이 답답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의문에 대한 답을 공동 연구하던 의대 교수님으로부터 들려왔다."미안하지만, 환자들한테 별 도움 안 될 것 같은데요?"그때 나는 땀에서 전해질 농도를 측정하는 센서를 개발하고 있었다. 며칠 밤을 지새우고, 지도교수님에게 혼나기를 여러 차례, 대학원생의 피와 땀이 스며든 결과물을 들고 의대 교수님께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돌아온 대답은 냉담했다."전해질 수치를 매일 재는 사람은 없어요. 입원해서 내일모레 하는 중환자라면 모를까"그 말은 마치 사형선고처럼 차가웠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다음 날, 지도교수님께서 센서 디자인을 완전히 바꾸자는 연락을 주셨다. 그동안 정들었던 센서들을 모두 폐기 처분해야 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의사가 그렇다면, 그런 거니까.대학원 과정 내내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나를 괴롭혔고, 그 괴로움에 두 발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대학원에서 의과대학으로, 그리고 대학병원으로. 그동안 나이 앞자리가 바뀌었고, 세상도 많이 변했다. 나는 이제 겨우 흰 가운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는데, 기술은 이미 저 멀리 앞서가고 있었다.이른 아침,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와 컴퓨터 앞에 앉는다.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Perplexity로 최신 협심증 진료지침에서 달라진 내용이 있는지 확인한다.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며 어제 숨이 차다고 왔던 환자의 심전도 결과를 확인한다.심전도 사진을 찍어 ECG Buddy 앱의 분석 결과와 내가 생각한 해석을 한 번 더 확인한다. 결국 환자를 더 큰 병원에 의뢰하기로 결정한 후 진료 의뢰서를 적는다. 작성한 문서가 어색하거나 오타가 없는지 최종 확인을 위해 ChatGPT의 도움을 받는다.이처럼, AI는 이제 우리 삶에서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이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ChatGPT 없이는 문서 작업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의료에서도 마찬가지다. AI는 이미 의료 현장 곳곳에 도입되었다. 환자가 하는 말을 실시간으로 듣고 요약한 뒤 진료 차트에 자동으로 입력하는 서비스, AI를 활용한 흉부 X-ray 판독, 피부 질환을 진단하는 분석 서비스 등이 대표적이다. 대학병원에서도 AI의 역할은 점점 커지고 있다. 위암 수술에 사용되는 복강경에 AI 기술이 도입되어 실시간으로 혈관과 구조물을 식별하고, 보행 장애 환자의 걸음 패턴을 분석해 개인 맞춤형 치료법을 제안하기도 한다.그러나, 의료 현장에서의 파괴적 혁신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소프트웨어로 시작한 AI 혁신이 로봇과 같은 하드웨어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 AI 기반 내시경은 이미 초보 소화기내과 의사보다 높은 정확도를 보이며, 사람의 피부처럼 온도, 압력, 습도를 감지하는 전자 피부도 개발 중이다. AI와 로봇 기술의 발전이 의료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고 있다.4년 전 기사의 마지막 문장에서는 '눈앞으로 다가온 기회 혹은 위기를 적극적으로 붙잡으라'고 외쳤다. 그러나 지금 의사가 되어 마주한 위기는 훨씬 더 가까이 와 있다. 다시 말해,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기회가 있다. 기회는 용기 있는 자가 차지하는 법이다.4년 전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묻는다.두 눈과 두 발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냐고.
2025-04-07 05:00:00젊은의사칼럼

성장, 휴학을 통한 성찰

[메디칼타임즈=단국대학교 의대 본과 3학년 박정은 ]우리 집엔 수학의 정석 같은 다이어리가 많았다. 흑심 자국이 삼월을 넘어서는 다이어리를 찾기가, 중고서점에서 집합 단원 이상으로 필기 된 수학의 정석을 찾는 일만큼 어려웠다. 그러다 작년에 드디어 (혹은 기어코) 나는 일 년간의 일기 쓰기 완주에 성공했다. 디지털로 기록해 아날로그 다이어리들은 이번에도 아쉽게 되었지만.최근 궁금한 마음으로 내가 쓴 일기를 들춰봤다. 그새 많은 일, 생각, 감정이 시간을 메웠기에 몇 개월 전의 내가 얼마나 낯설까 설레기도 했다. 슥 훑자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5월, 6월, 7월, 10월… 성장 이야기를 하지 않는 달이 없었다.귀신이 씌어도 어떤 이름을 가진 것이 씌어야 이렇게 줄곧 '성장, 성장' 염불을 외우려나 고민을 잠깐 해봤다. 일기의 첫 장에서 내가 세운 가장 높은 목표는 좋은 성적을 받아 큰 병원에서 수련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나는 더 큰 꿈을 진심으로 이루고 싶어 했다.또 하나 발견한 사실은 나의 고민의 결이 항상 비슷하다는 것이다. 성장을 향한 열망과 다른 중요한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잃고 주기적으로 풍랑에 휩싸인다. 벌써 올해 새 일기장에서 비슷한 갈등 구조를 가진 고민이 등장했다. 부끄럽지만 함께 페이지의 내용을 엿보러 가자.휴학 중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과 경험, 독서는 내 진로의 청사진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특히 내가 해외 수련이라는 가능성을 고려하게 된 것은, 모순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스스로에게 큰 충격이었다.나는 금요일만 되면 본가로 갔다가 월요일 아침에서야 수업시간을 맞춰 학교로 내려왔을 만큼 유독 가족애가 끈끈했다. 이것이 한반도 해안선을 따라 결계를 친 것도 아닐진데, 나는 한국을 벗어나 산다는 생각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탄생과 죽음은 내게 만고불변의 진리였다.그런데 내 세상이 넓어지자 '가장 먼저 적용되는 신약, 합리적인 규제 체계, 열려있는 연구 환경'이 실로 얼마나 매력적인 조건인지 강력하게 체감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내 안에서 '외국에서 살 수도 있는 거지 뭐'하는 입장이 등장했다. 곧바로 '가족은?'이라는 질문이 이제껏 그랬듯 간단히 반동을 제압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놀랍게도 내 머릿속에서는 성장하기 위해서라면, 더 큰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서라면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고통을 불가피한 희생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는 입장이 우세했다. 스스럼없이 성장이라는 가치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넘기려 했다.하지만 그런 낯선 내 모습에 곧 죄책감과 두려움, 회의감이 수묵처럼 번졌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해? 무엇을 위해서? 성장만으로 삶이 충족될 만큼 이 가치가 절대적인가? 생각이 충돌하고 갈등이 발생해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지금 알을 깨고 있어서 아픈 건지, 알이 아닌 것을 깨고 있어서 아픈 건지 혼란스러웠다.우리가 살아가는 이 무한경쟁 시대는 성장을 신앙처럼 권장한다. 미디어는 꿈을 크게, 그리고 거침없이 꾸는 것이 논의의 여지없는 선이라고 주입한다. 허풍 같은 목표를 내뱉고 끝내 그를 실현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경제경영 매대에 놓여 있을 뿐, 독자의 태도를 보면 신화와 다를 게 없다.하지만 꿈이 자애롭다는 생각은 순진한 믿음이다. 꿈이 주는 황홀한 이미지에 지나치게 빠지면, 꿈은 그사이 우리 뒷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슬쩍 차간다. 바로 현실을 소중히 여기는 감각이다. 그것을 빼앗기면 성장이라는 미명 하에 현재의 행복과 즐거움을 계속해서 미루게 된다. 그리고 미룬 것들은 친절하게 적립되지 않는다.전부 소멸될 운명일 뿐이다. 겸연쩍은 고백으로 예를 들면, 내 주변에는 성장과 일에서 순수한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유독 많다. 이 편향성은 내가 그런 친구들을 찾아 나선 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성향을 가진 친구들과의 만남을 미루고 늦추다 결국 잃게 된 소산이기도 하다.하나의 가치는 세상을 바라보는 제한된 렌즈일 뿐, 결코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다. 인간의 삶은 다채로운 색상이 어우러진 팔레트다. 사랑, 신의, 친절, 지적 탐구, 예술적 감상, 유머, 자연과의 교감 - 이 모든 경험이 성장과 “함께”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비로소 충만한 삶이 완성된다.성장은 이 가치들 사이에서 특별히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위치에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위치 조정에 실패하고 하나의 가치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인생의 결말은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 안전하게 확인할 수 있다.)시간의 터널을 지나 내 일기장을 들춰보며, 나는 뜻밖에도 내면의 갈등 패턴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현재의 행복을 미루는 습관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내 삶에 자리 잡았는지 깨닫고, 현재는 이를 쫓아내 그 자리에 여유를 다시 심으려 노력 중이다.무한히 이어지는 성장의 계단을 오르며 그 속도를 유지하거나 가속하는 데 집착하기보다, 이제는 계단 곳곳에서 멈춰 주변을 둘러볼 여유와 지혜를 얻게 된 것이다. 성장은 여전히 내게 중요한 가치이지만,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지 않는다. 현재에 단단히 뿌리내린 꿈만이 진정으로 실현되며, '최대'가 아닌 '최선'의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당장 깨달음이 생생하더라도, 결국 가치 사이 최적의 균형점을 잡기 위한 흔들림은 삶의 전반에 걸쳐 계속될 것이다.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한쪽으로 기울더라도, 하지만 나는 이 두 세계 사이에서 나만의 중심을 찾아가는 여정을 명랑하게 이어갈 것이다. 삶의 방랑자로서, 목적지 만큼이나 그 길 위에서의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2025-03-31 05:00:00젊은의사칼럼

'삶'을 치료하는 법

[메디칼타임즈=건국의대 3학년 김채연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진료를 이어온 라파엘클리닉의 일요일은 언제나 온갖 국적의 노동자들로 분주하다. 그러나 정신과 클리닉을 개시한 첫날, 정신과 선생님과 보조 봉사자였던 나는 한참이나 목을 빼고 환자를 기다려야 했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서, 혹은 정신과 진료라는 이름 자체가 생소하기에 정신과 클리닉을 찾는 환자가 드물었기 때문이다.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이어가던 몇 마디 화제도 떨어져 가던 참이었다. 이대로 환자 한 명도 보지 못한 채 첫 진료를 끝마치게 되는 걸까 하는 걱정이 들던 차에, 드디어 첫 환자가 왔다. 순박한 눈망울의 동양계 중년 남환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몇 년째 밤에 잠들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정신과 진료와 다른 과와의 가장 큰 차이점 중의 하나는 문진의 상세함이다. 물론 개인차도 있겠지만, 정신과에서는 환자의 정신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 직업이나 생활 습관과 같은 세세한 질문을 반드시 던져야만 한다. 불면증이라는 진단명을 입에 올리기 전 선생님은 환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부드럽게 물으셨다.환자는 한국에 온 지 10년이 넘었고, 방글라데시에 아이들을 두고 왔다고 했다. 공장에서 일하며 교대근무를 하기에 밤낮이 바뀐 생활을 일주일에 절반가량하고 있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불면 경향이 3년 전, 아내의 불륜으로 이혼을 겪은 이후로 심해졌다.이런 식으로 인내심을 갖고 차분히 환자의 내력을 듣는 것이 정신과 치료에선 아주 중요하다. 증상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라포 형성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기숙사나 작은 원룸이 그들이 한국에서 잠을 청할 수 있는 공간의 전부다.교대근무 때문에 밤에 일을 해야 하기에 잠을 쫓아내는 커피는 달고 살아야 한다. 대부분은 한국어나 영어가 그렇게 유창하지 않고 속을 털어놓을 가족도 멀리 있는 경우가 많으니 자기 이야기를 나누기 쉽지 않을 거라 짐작했다.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은 환자는 진료가 끝난 이후 정신과 선생님에게 '당신은 정말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는군요!' 라며 기분 좋은 미소를 건넸다. 정신과 진료가 처음이라던 환자는 삼십 분이 넘는 진료 끝에 홀가분한 얼굴로 진료실을 나섰다. 선생님께 받은 수면 위생 교육과 미량의 수면제 처방전을 손에 쥔 채였다.나는 라파엘 클리닉에서 3년 정도 꾸준히 봉사를 했지만, 이런 식으로 클리닉을 찾는 이주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밀접하게 들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환자 중심적 치료로 의학의 패러다임이 바뀌고는 있다지만 환자의 질병의 원인을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한정된 시간 안에 정보를 뽑아내야 하는 의사들이 환자 개개인을 온전히 알아가기란 여전히 쉽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이주노동자와 같은 의료 소외계층은 라파엘클리닉으로 많이 몰리기 때문에 한 명 한 명을 다룰 시간이 길지 않아, 정신과에서 이렇게 그들을 알아갈 기회를 얻은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사회의 '사각지대'에 있는 환자들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꺼내 놓을 상대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들에 대해 들을 기회가 없었더라면 나 역시 그런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평생을 흘려보냈을지도 모른다.육체의 병도 마음의 병도 결국은 삶에서 비롯되는 것이니만큼 병을 제대로 마주하고 치료하기 위해서는 환자의 삶에 대한 이해가 필수이다. 그걸 위해서는 평소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내 삶의 등장인물이 아닌 그들 자체로 온전히 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의 입체적인 고통이 있음을 이해하고, 기꺼이 그 고통을 수반하는 삶을 탐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의사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삶'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아닐까.정신과 진료의 문턱이 많이 낮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정신과 약은 마약성 약물이라고, 정신과에는 '미친' 사람들만 간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정신과도 다른 과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람을 치료하기 위한 곳이고, 다른 과에서 듣기 힘든 환자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장소이다.그러니 앞으로도 더 많은 이주노동자가 이런 사실을 깨닫고 정신과의 문턱을 넘어 주었으면 좋겠다. 아주 유창한 대화를 할 수는 없을지라도, 언제나 그들의 말을 듣기 위한 선생님과 봉사자들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해당 사례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2025-03-24 05:00:00젊은의사칼럼

불완전한 내일을 향해

[메디칼타임즈=김승직 기자]매년 새해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찾게 되는 곳이 있다. 새로운 시작과 함께 신선한 자극을 마주하고 싶은 마음에 안국역 근처 국립현대미술관을 찾는다. 현대미술은 때로는 난해하고, 때로는 불편하며, 때로는 충격적이기도 하다.하지만 그 속에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예술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대의 아픔과 희망, 불안과 열망을 표현한다. 예술에 대해 문외한이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매력적이다. 작품 앞에 서면 틀린 해석도, 부족한 이해도 없다. 오히려 그 불완전한 해석 속에서 더욱 풍부한 작품의 의미를 만들어낸다.이번 방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관람객들의 소망을 실시간으로 반영해 가상현실로 구현하는 인터랙티브 설치였다. 참여자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세상을 키워드로 입력하면, 그것이 하나의 가상세계로 만들어지는 흥미로운 시도였다.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 결말이었다. 모두의 '선한 의도'로 시작된 소망들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결국 세계의 종말로 귀결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었다. 수천 번을 새롭게 시도해도 대부분의 결론은 '멸망'이었다. 개인의 작은 소망이 모여 예상치 못한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내는, 마치 나비효과 같은 현상이었다.이 작품이 더욱 깊이 다가왔던 것은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게임, 웹툰, 드라마에서 유행하는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 소재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완벽한 삶에 대한 갈망을 반영한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올바르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 그리고 그 속에서 찾고자 하는 진정한 행복에 대한 열망.작품 속 참여자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키워드를 입력하며 다른 결말을 찾으려 했던 것처럼, 우리도 완벽한 세상을 향한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려는 시도는 때때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으며, 선의의 개입조차도 복잡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에 의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곤 한다.이러한 예술적 통찰은 지난해 우리가 겪은 사회적 혼란과도 맞닿아 있다. 특히 의료계를 둘러싼 갈등은 단순한 정책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가치 충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의료 정책 개혁을 추진하는 정부와 이에 반발하는 의료계의 대립은 단순한 이해관계를 넘어, 의료 시스템의 본질과 윤리에 대한 논쟁으로 확산되었다. 문제는 어느 쪽도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불신과 반목만 깊어졌다는 점이다.이는 미술관에서 본 가상현실 작품과도 닮아있다. 참여자들은 각자의 희망을 입력하며 이상적인 사회를 그려보려 했지만, 결국 예상치 못한 균열과 붕괴를 목격해야 했다. 의정 갈등 역시 각자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나, 결과적으로 사회적 혼란과 의료 시스템의 불안을 초래했다.작품이 보여준 것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다. 선의가 반드시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현실이었다. 복잡한 사회 구조 속에서 개인과 집단의 의도는 끊임없이 변형되며, 때로는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왜곡되기도 한다.그러나 현실의 벽에 가로막힌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그 가능성을 좇는다. 현실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본능적 열망이 우리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것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현실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며,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방식이다.어떤 현실이 닥치더라도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도전한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도, 선의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미술관에서 마주한 작품처럼, 우리의 삶도 완벽한 답을 찾을 수 없는 끝없는 탐구다.현대미술이 난해하면서도 매력적인 이유는 정답이 없기에 각자의 시선으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신념과 가치가 충돌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고민하며 나아간다. 때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기대와 다른 결말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상을 향한 여정을 멈추지는 않는다.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것은 단순한 이상주의가 아니라, 삶을 견디고 의미를 찾는 인간의 방식이다. 비록 도달하지 못할 이상향일지라도,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더 나은 가능성의 문을 열어준다.새해의 첫걸음을 내딛으며 다시 한번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 세상을 바라는가? 우리의 작은 바람들은 어떤 파장을 만들어낼까?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도 길을 찾고자 하는 이 과정 자체가 어쩌면 이상향을 향한 가장 인간적인 여정일지 모른다. 그러니 오늘도 우리는 걸어간다. 불완전하지만 아름다운, 더 나은 내일을 향해.
2025-03-17 05:30:00젊은의사칼럼

잠시 멈춘 발걸음, 새로이 보인 세상

[메디칼타임즈=고려의대 2학년 강지민 ]얼마 전, 지난해 다리 골절로 인해 삽입했던 철심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병실에 누워 있는데, 작년 여름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몸속 이물질을 제거했다는 후련함보다도, 다리를 다쳤던 그 시간이 내게 남긴 흔적이 더 깊었다.남들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골절이라지만, 그 골절이 내게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한순간에 찾아왔다. 격한 운동을 한 것도 아니었고, 주의를 다른 데 두고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계단에서 살짝 삐끗한 대가로 갑작스러운 중족골 골절과 전치 6주 판정을 받았다. 그렇게 6월의 첫날, 여행을 비롯한 모든 일정을 취소한 채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게 되었다.한 달 반 간의 요양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옷을 입고, 씻고, 물을 따라 마시는 것과 같이 이전까지는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던 일상생활이 수 배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 되었다. 집 안에서도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는데, 집 밖은 단순한 불편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고난의 연속이었다. 목발을 짚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정상인'을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처음으로 버스를 탄 날을 잊을 수 없다. 슬슬 밖으로 나가도 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신나서 목발을 들고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낑낑거리며 신발을 신고, 경비실 앞 계단을 내려오니 벌써부터 팔이 저리고 목발을 지지하는 겨드랑이가 아파왔다. 일부러 저상버스가 오는 시간에 맞추어 정류장으로 나갔지만, 그 배차간격이 길고 또 불규칙적이라 타기가 어려웠다.그렇다고 일반 버스를 타자니, 계단이 가팔라 승하차가 두려웠다. 지하철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빠른 환승' 칸을 알려주어 애용하던 지도 어플에는 엘리베이터 위치가 제대로 표시되지 않았고, 대합실로 올라와도 외부로 나가려면 또다시 엘리베이터를 찾아 헤매야 했다. 심지어 서울역에서는 택시 승강장까지 내려가는 길의 에스컬레이터가 멈춰 있어 계단을 붙잡고 한 발 한 발 내려온 적도 있다.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물리적 불편함이 아니라, 사람들의 태도였다. 목발을 짚고 있으면 당연히 자리를 양보받을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나는 여태껏 대중교통에서 단 한 번도 노약자석에 앉아본 적이 없었고, 앉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버스에서 아무도 노약자석에서 일어나지 않아 결국 임산부석에 앉았던 날, 큰 충격을 받았다.그 자리마저 한 아주머니가 양보해준 것이었다. 물론 외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개개인의 사정이 있겠거니 하면서도 '내 깁스와 목발이 보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일부러 짧은 하의를 입어 깁스를 드러냈음에도 좌석을 빠르게 채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3~40분을 서서 지하철을 탄 날도 있었다.그때 깨달았다. 지금껏 수도 없이 대중교통을 탔는데도, 왜 나는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를 탄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는지를 말이다. 물론 지금 당장 본인의 힘듦이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겠지만, 그 기저에는 사람들의 무관심이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정상인'일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교통약자를 위한 배려가 왜 필요한지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그리고 사실, 나 역시도 다리를 다치기 전까지는 이러한 문제를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 역시 '정상인'의 입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이러한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었다. 내 어려움이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교통약자를 얼마나 배려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라는 점이었다. 지나치게 짧은 횡단보도의 초록불 시간, 보행 보조 기구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은 도로 설계, 그리고 이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까지—이제는 그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잠깐의 경험이었지만, 나 역시 교통약자의 입장이 되어 보니 그들의 어려움이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 비로소 보였다. 이전의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곳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뼈저리게 느꼈다.우리는 누구나, 언젠가는, 약자가 될 수 있다. 어린이, 노인, 임산부, 그리고 다리를 다친 누군가.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정상적인' 사람들만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고, 그 구조는 쉬이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적인 우리의 인식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누구나 교통약자가 될 수 있으며, 그 불편함을 줄이기 위한 배려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것이다. 상투적인 말일 수 있지만, 작은 관심들이 모이면 이동 약자에 대한 배려가 당연하다는 사회적 풍조가 형성될 것이고, 이는 결국 기존의 정상인을 기준으로 설계된 사회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개선되는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이동의 자유는 단순한 편의가 아닌 인간의 기본적 권리다. 그리고 그 권리가 모두에게 보장될 때, 비로소 사회는 성숙해진다. 비록 속도는 다르더라도, 모두가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소망한다. 
2025-03-10 05:00:00젊은의사칼럼

나의 연인을 위하여

[메디칼타임즈=단국의대 1학년 유우선 ]질투는 나의 힘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91) 수록고등학교 1학년, 국어 과제로 '시 한 편을 해석하고 감상 발표하기'라는 과제가 있었다. 시를 무척 좋아하는 학생이던 나는 당시 푹 빠져있던 여러 작품을 두고 한참 고심했고, 이윽고 상단의 작품을 선택했다.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 선택 이유는 마지막 구절이었다.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던 생이었으나, 단 한 번도 가장 중요한 사랑을 하지 못했다는 시구에서 느껴지는 정체 모를 슬픔에 나는 매료된 것이었다.과제를 하며 찾아본 다양한 해석들은 공통적으로 이 시가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며 젊은 날의 탄식과 반성을 노래'하고 있다고 했다. 젊은 날의 탄식이라. 열일곱의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정서였다.나는 꾸준히 기형도 시인을 탐구하고, 참고서를 뒤지며 시를 분석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도통 왜 질투가 힘이 되는지, 왜 희망의 내용이 질투뿐이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과제가 끝날 때까지 나는 정서의 이해가 아니라 표현의 미학에만 기대어 시를 읽어냈다. 이러한 미완의 감상을 가진 채, '질투는 나의 힘'은 내 고등학교 한 계절을 지배했다가 서서히 기억의 지평선을 넘어갔다.이 아름답고도 모호한 시가 다시금 나에게 떠오른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것은 한순간 극적으로 떠오른 회상은 아니었다. 시작은 매일 아침 읽는 뉴스에서 불어닥친 한기였다. 추운 날씨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서슬 퍼런 뉴스들은 내 피부에 보이지 않는 건선을 돋우는 것 같았다.어느 날에는 새로운 미국의 대통령이 가자지구의 주민들을 다른 나라로 이주시키고, 가자지구를 미국이 소유한 후에 이를 지중해 휴양지로 개발할 것이라는 뉴스를 보았다. 오래 곪은 분쟁을 금권주의적으로만 접근한 그 뉴스가 불편해 다른 창을 열었다.이번에는 끝없이 미뤄지는 쪽방촌 공공주택 및 도시재생사업으로 인해 주민들의 주거 불안정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뉴스가 휴대폰을 타고 넘어와 나를 압도했다. 이처럼, 현 사회의 뉴스들은 과하게 비인도적이었고, 나는 그것을 끔찍하게 느꼈다.사실 사회는 냉담해진 지 오래였다. 다수의 현대인은 타인의 문제에 관여했을 때 발생하는 손해(그것이 '배려'라 불릴지라도)를 피할 수 있는 방관을 선호한다. 이에 더해 과거, 미래 세대와의 대화를 통해 사회의 융합을 꾀하기보다는 당장 받을 수 있는 혜택만을 가늠하여 움직인다.또한 어떤 이들은 실리적이라는 이유로 배우고 싶은 전공을 애써 포기하고 취업에 유리한 대학 진학을 선택한다. 이런 물질주의적 경향은 쌓이고 굳어져 우울한 뉴스를 방출하는 지금의 사회를 형성했다. 누군가는 이렇게 살고 싶어서 그러겠느냐, 사회가 우릴 이렇게 만든 것이다, 라고 반박할 것이다.틀린 말은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내 옆의 이웃과 비슷한 수준의 삶을 영위하길 바라고, 팍팍한 사회에서 이를 실현하는 데에는 많은 수고가 드니까. 그러나 나는 이 당연한 과정에 위화감을 느꼈다. 우리가 사회에 투입하는 수고들의 결값이 보편적인 수준의 삶은 되겠으나, '행복'을 성취할 수 있는지는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우리는 꼭 '어떻게 행복해질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다수에게 편승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위화감은 거기까지였다. 세상은 이런 곳인가 보다, 하는 수긍, 그리고 나는 다르니까, 라는 우월감, 그게 끝이었다. 그렇게 순순히 위화감에 순응한 내가 사랑하던 시를 기어코 꺼내든 것은 올 초였다.나에게는 참 존경하던 사람이 있었다. 내가 꿈꾸던 일을 독보적으로 해내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는 그를 보면서 나에게도 저런 발전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싹 틔운 생각으로, 나는 새로운 도전을 하나씩 시작했다.동시에 그 사람과 점점 가까운 사이가 될수록 내가 얼마나 더 그에게 많이 배울 수 있을지 기대가 되었고, 더욱 그를 선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로 그 관계는 깨졌고 나는 그에게 크게 상처받았다.그때 나는 그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못났던 것은 그 사람이니까, 나는 빛나야 했다. 이를 원동력으로 나는 바쁜 2024년을 보냈다. 'AI 시대'에 편승하기 위해 열심히 코딩 강의를 듣고 디지털 헬스케어 행사를 다녔다. 갑작스러운 휴학에도 열정을 잃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어 랩실을 다니다가 난생처음 보는 분야를 배워보기도 했다.그래, 분명 이 과정들은 나에게 흔적을 남겼다. 나는 즐겁게 배웠고, 신나게 탐색했다. 그리고 안도했다. 이 정도면 나, 다른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고 '열정적인 의대생'으로 멋지게 살고 있구나, 하고. 그러나 신년이 되어 우연한 자리에서 그 사람을 마주한 순간 내 안도는 위선의 탈을 벗고 추한 본모습을 드러냈다.오랜만에 마주한 그는 작년보다 더욱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멋졌다. 내가 여기저기 찍어댄 흐린 족적이 아니라, 내가 소망했던 진짜 열정을 가지고 그에 따른 성과를 일군 모습이었다. 분명 과거의 나는 그 사람보다 더 나았으므로 현재의 나도 그 사람보다 멋있어야 했는데, 무언가 놓친 기분이었다.그날 밤 나는 내가 작년에 새로운 배움에서 느꼈던 희열을 복기하려고 애썼다. 새 분야를 헤매인 만큼 그들은 나의 것이 되었던가? 내가 얻길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러나 자문할수록 더 선명해지는 것은 '안도'라는 탈을 쓴 '인정욕구'였다. 나는 전혀 멋지지 않았다. 그 순간 '다수에게 편승한 행복'을 남의 것으로 간주했던 기억이 살아나 나를 찔렀다.나는 내가 업신여겼던 불행한 현대인이었다. 나를 움직인 것은 스스로를 사랑해서 디딘 발걸음이 아니라 타인을 좇은 질투 어린 뜀박질이었다. 내가 작년에 얻은 것은 구질한 인정욕구뿐이었다. 그제야 나는 '질투는 나의 힘'을 이해했다.사랑받고 싶어서 지칠 줄 모르고 공중을 쏘다녔으나, 결국 자기만의 행복을 찾지 못하고 타인을 향한 질투만이 남아버린 기형도 시인의 슬픔은 나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저 안타까웠던 시의 정체 모를 슬픔은 이제 나의 것이 되어 내 시야를 부옇게 흐려놓고 있었다.그렇게 나는 시를 한참 끌어안고 슬픔 속에 침잠해 있었다. 그러나 곧 이 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나의 것이라고 인정한 불행을 타파할 방법을 궁리해야 했고, 어떻게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뾰족한 수가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무작정 책을 읽어치웠다. 나처럼 슬픔을 느낀 사람, 동시에 고뇌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정처 없는 탐독 끝에 마주한 이는 독일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이었다.나의 슬픔을 해결할 실마리가 담긴 에리히 프롬의 저서는 <소유냐 존재냐>이다. 이 책에서 에리히 프롬은 인간을 '소유적 실존양식'과 '존재적 실존양식', 두 종류로 나누어 구분한다. '소유적 실존양식'이란, 남들과 비교하여 자신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 지에 의해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고 행복을 느끼는 방식이다.친구, 애인과 같은 인간관계, 건강, 심지어 '자아'마저 소유하고자 하는 이 방식은, 스스로의 육체, 사회적 지위, 지식을 포함한 자산, 그리고 타인에게 과시하고 싶은 이미지를 가지려 노력한다. 이렇게 '소유물'로부터 자아를 확인하는 경험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누구나 부러워하는 국내 판매량 1위의 외제차를 소유함으로써 '좋은 차를 타는 나'라는 자아가 실존하게 되는 양식이다.'존재적 실존양식'은 정확히 반대되는 어순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양식은 우리 자신, 총체적인 나로부터 모든 경험이 시작되는 양식이다. 하고 싶은 것을 능동적으로 인식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에 따라 독립적으로 움직이며, 자유롭게 관계를 맺고 행동한다. 즉, '나'라는 자아가 원하는 것을 원인으로 하여 발생하는 다양한 경험들로 삶을 꾸리는 것이다.다시 차의 예시로 설명하자면, 가솔린차의 탄소 배출량이 자신의 친환경적인 가치관에 반한다고 생각하여 전기차를 구입하는 행위를 통해 자아를 실현함으로써 실존하는 양식이다. 프롬은 인간이 '존재적 실존양식'을 택할 때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며, 이상적인 사회가 나타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이러한 프롬의 견해는 언뜻 보기에 뜬구름 잡는 소리 같다. 현 사회는 '소유'로 만연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사적 재화 인정을 기본 원리로 하여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적 실존양식을 버리라는 주장은 경쟁력 없는 말로 보인다.그렇지만 우리 존재에 대한 고민 없이, 남들보다 더 가지려는 '소유'를 통해 남들의 시선으로 규정되는 삶이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 수 있는가? 쓰라린 일이지만, 나의 경우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인정욕구를 충족하고 열정이라는 이미지를 소유함으로써 실존하려고 애썼으나, 이내 그것이 나에게 진정한 존재 의미를 가져다줄 수 없음을 뼈아프게 느꼈다. 허울뿐인 인정을 사고자 타인들이 유의미하다고 판단하는 영역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움직이고 싶은지 물어야 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야말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이었다.이러한 질문의 변화는 나에게만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한랭한 위화감이 현대인을 덮치는 현재, 이 질문은 당신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외부의 목소리가 들리는 창을 잠시 닫아두고 생각해 보자. 비인도적 뉴스는 결국 남의 일이므로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정녕 없는가?당장 물질적인 이득이 없으므로, 미래 세대의 안녕을 고민하는 일은 아무 쓸모가 없는가? 나의 꿈과 지적 욕망을 좇는 일은 타인의 인정과 사회적 안정을 버려가면서까지 추구할 가치가 없는 행위인가? 우리는 알아야 한다.소유적 실존양식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냉담하게 바라보던 뉴스가 언젠가 우리에게 잔혹한 현실로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시큰둥하게 생각하는 '세대 간의 배려와 화합'이 후에는 나의 소중한 부모에게, 자식에게 절실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외면한 나의 꿈이 평생의 후회로 남아 나를 갉아먹을 수도 있다는 것을.이처럼 서로 착취하고 질투하며 당장의 편의만을 생각할 때, 불행의 돌림노래 같은 사회는 실현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 질문이 필요하다. '무엇을 소유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이 질문이 멀리 퍼지고 반복된다면, 사람들이 '물질의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스스로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능동적인 행동이 되어 점점 더 널리 퍼져나가면, 결국 사회 전체가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갈 낼 수 있을 것이다.이 글을 다 쓰고 나는 도서 출판을 주제로 한 온라인 강의를 들으러 간다. 당장 이 온라인 강의를 듣는 것이 사회적으로 유망하다 판단되는 역량을 키워준다거나, 누군가가 대단한 일이라고 박수쳐 줄 만한 과제는 아니다. 그저 나의 연인을 위한 일이다. 언젠가 책을 출판해보고 싶은 '나'라는 존재에게, 관심 있는 일에 열정을 태워보고 싶은 '나'라는 연인에게 해줄 수 있는 사랑의 행동일 뿐이다.그렇지만 그 사랑만으로도 나는 강의를 듣는 한 시간 동안 행복해진다. 앞으로도 나는 자주, 시간을 내어 나의 연인을 돌아보고 대화해보려 한다. 타인에 대한 질투를 동력으로 하는 기형적인 전진을 하지 않기 위해. 단 한 번도 그러지 못했더라도, 이제는 조금씩 스스로를 더 사랑하기 위해.
2025-03-03 05:00:00젊은의사칼럼

죽음을 마주하며

[메디칼타임즈=연세의대 4학년 박태웅 ]외할아버지께서는 작년 4월에 소천하셨다. 나는 몇 달간 알 수 없는 괴로움에 시달렸다.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혼란스러웠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혼란의 시작은 겨울이었다. 처음으로 죽음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외상센터에 실려 온 환자의 죽음. 처음 마주했을 때, 그는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다.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그저 교수님들이 시키는 대로 복부 초음파를 봤고, 배운 대로 열심히 CPR을 했다.흉부를 압박할 때마다 귀에서 피가 주룩주룩 흘러나왔다. 그는 갈비뼈를 부술 듯이 눌러대는 기계를 낀 채 얼마간 더 버티더니, 30분 뒤에 사망선고를 받았다. 교통사고 현장을 도우려다 차에 치인 선한 사람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당직실에 들어와 30분 동안 멍하니 천장을 보다 잠에 들었다. 다음날 일과가 끝나자마자 pc방에 들어가 막차가 끊길 때까지 게임을 했다. 기분이 썩 괜찮았다. 하루 만에 멘탈을 잡다니, 나 정도면 정말 건강하게 잘 이겨낸 거라고 다독였다. 그렇지, 필수과 가고 싶으면 이 정도는 무뎌야지 했다. 그렇게 죽음을 잘 이겨냈다 싶었다.그런데 내가 알고 지내던 이의 죽음은 그렇게 간단히 삼킬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계속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쓰러지셨을 때 좀 도와드렸다면 2차 병원에라도 갈 수 있지 않았을까? 대학병원 상황이 괜찮았다면 응급실에서 돌아가라고 했을까? 3차 병원에 입원했다면 절반의 확률이라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맨 앞에서 휴학하자고 투쟁하자고 외친 것에 대한 업보인가?그럼에도 열심히 공부하라니, 외할아버지는 지금 상황을 알고 그러신 걸까? 그 질문들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마음의 괴로움은 덩달아 커졌다.생각과 감정이 떠오르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것들은 시간이 갈수록 명확한 문장의 형태를 띠기보단, 그저 혼란함만 남긴 채 흩어졌다. 사라지기 전에 글에 담아야 했다. 무작정 한글 파일을 열고 타자를 쳤다. 문장이 이어지지 않았다. 생각의 파편만 한 줄씩 쌓일 뿐, 더 뿌옇게 헝클어지기만 했다. 며칠을 고민해도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아, 내 그릇에는 아직 담을 수 없는 글이구나 싶었다. 그 당시의 강렬함을 몇 달이 지나서야 상기하는 것은 어쩌면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 같다. 한 문장만 남기고 글을 다 지웠다. '죽음을 목도하는 것은 얼마나 하찮고도 고통스러운 일인가.' 나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속에서 끌어내지 못했다. 괴로움을 느끼고 망각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그렇게 9월쯤 마무리될 일이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없다는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차오를 정도로, 외할머니는 소중한 분이었다. 그분께서 돌아가실 때도 이렇게 단순히 괴로워하고, 망각하며 이겨낼 자신은 없었다.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노인, 우리 외할머니. 평생을 교육자로 사시다 은퇴 후에도 복지관에서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70세가 넘어서도 서예와 미술에 전념하시는 우리 외할머니. 유머로 외가의 분위기를 책임지시고 늘 따뜻하게 자식들을 맞아주시는 우리 외할머니. 그분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건 나에겐 정말 어려웠다. 마냥 오래 사시길 빌고 싶었지만 이마저도 죽음을 유예할 뿐, 피할 수는 없었다.이번엔 부재와 괴로움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외할머니께 최선을 다하면 후의 괴로움이 덜 할까 싶었다. 여러 가지 것들이 떠올랐다. 함께 여행을 갈까, 자주 찾아뵐까, 이야기를 많이 나눌까.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나는 내가 최선을 다했고 외할머니께서도 행복하셨음을 증명해 줄, 실체를 지닌 무언가가 필요했다.그때 외할머니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셨음이 떠올랐다. 명절에 내려가면, 사진첩을 뒤적거리며 그 시절에 담긴 추억들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듣게 만드는 그 입담. 우리는 종종 둘러앉아 그분의 위트에 깔깔거리며 무척이나 웃었다. 구술 생애사가 제격이었다.이번 설에 인도네시아로 다 같이 가족여행을 가니까, 그 김에 인생 인터뷰를 신나게 해 버리는 것이지. 그리고 그걸 쫙 정리해서 가족들과 외할머니께 나눠드리면, 가족들은 그분을 언제든 추억할 수 있어서 좋고 외할머니는 인생을 쭉 돌아볼 수 있어서 좋고. 계획은 완벽했다.그 이후는 척척 진행됐다. 작년 말에 동생과 외할머니댁에 놀러 가 당사자의 허락을 받았고, 함께 여행할 가족들의 동의도 모두 받아냈다. 인터뷰는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 시작되어 한 주에 걸쳐 진행됐다. 이제 남은 거라곤 180쪽 분량의 녹음본을 열심히 타임라인에 따라 뜯어고치는 일. 그 또한 외할아버지의 기일 전에는 마무리되지 않을까 싶다.모든 과정은 즐거웠다. 외할머니의 입담은 여전하신지라, 인터뷰를 한번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몇십 년이 눈앞에서 휘리릭 지나갔다. 처음으로 발령받은 초등학교에서 애들을 후딱 보내고 바다로 나가 헤엄쳤던 이야기, 고등학교 때 김치를 머리에 이고 몇 시간을 걸어 기숙사로 옮기던 이야기, 손자를 방학마다 업어 키우며 시장에 데리고 다녔던 이야기, 하나도 빠짐없이 정겹고 소중한 얘기들이었다.그렇게 이야기는 100여 년 전의 이름 모를 누군가부터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나에게까지 이르렀다. 모든 인터뷰가 끝났을 때, 나와 외할머니는 서로 이어져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무척이나 따뜻했다.죽음이 두려웠다. 그것이 너무나도 이질적인지라, 나는 죽음을 마주하기는 커녕 목격하며 느낀 감정조차 단어로 풀어내지 못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아직도 두렵다. 온전히 마주하지도 못한다. 외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글을 쓰지 못한 것처럼, 외할머니의 경우는 글의 서두조차 쓰지 못할 테다. 하지만, 이제 죽음 앞에서 마냥 괴로움에 잠기진 않기로 마음먹었다.과거를 기록하고 추억하며,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 같이 웃으며 행복을 나누는 것, 그리고 이어져 있음을 느끼는 것, 나는 죽음을 그렇게 마주하고자 한다. 어서 글을 외할머니와 가족들에게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2025-02-24 05:30:00젊은의사칼럼

선악의 해부학

[메디칼타임즈=인제의대 3학년 김성재 ]2024년 노벨문학상 시상식, 한강은 말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그녀는 청중에게 질문했고, 세계에 질문했고, 자신에게 질문했다.그 문제는 내게도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미스터리였기에 나 또한 답해보려 애썼다. 개인적으로 그 모순을 가장 편안하게 납득시켜주는 논리는 현상을 생물학적인 원칙에 대입하는 것이었다. 유전자와 본능의 세계에서는 윤리와 법 역시 인간이 안정된 사회 유지를 위해 만들어낸 도구에 불과해진다.선과 악, 옳고 그름의 개념조차도 그렇게 만들어 낸 것일 뿐, 인간은 누구나 본인의 정신적 안녕을 위해 살아간다. 나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삶에 임하려 해왔다.하지만 노벨상 수상자의 질문이 쉽게 해결될 리가 만무했다. 생각과 달리 현실은 문제를 어렵게만 만들었던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만 본다면 사이코패스는 병리적 현상으로 처벌보다는 치료의 대상에 가깝다.그런데 어째서 나는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데도 수십 명을 무자비하게 살인하고 쾌락을 느꼈다고 진술한 범죄자를 용서하고 싶지 않은가? 어째서 그를 악으로 규정하고 싶은가?이러한 물음의 연쇄는 최근 나의 일상을 흔들었던 거취 문제와 뒤섞이며 진통을 야기했다. 학교로부터 휴학을 모두 소진한 사람은 제적 대상이니 복학하라는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예과 2학년을 마치고 1년의 휴학계를 제출한 적이 있었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은 전교생 600여 명을 통틀어 50명 정도였는데, 각자의 사정이나 학적 상태는 모두 달랐다.우리는 난생처음 보는 학칙도 들여다보며 매일 논의했지만 어째서인지 학칙은 한없이 모호하게만 느껴졌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제적이라는 단어가 큰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유급과 등록금은 그에 비하면 작은 문제였다.더 많은 것을 걸고 투쟁하는 전공의 선배들이나 24학번 등을 생각했을 때 어떻게든 투쟁에 참여하겠다는 이도 있었고, 토사구팽 당하지 않기 위한 확실한 보호책이 없다면 두렵다는 이도 있었다. 내부의 통일된 결론은 없었고, TF의 가이드라인은 '휴학 가능자는 휴학, 휴학 불가능자는 수업 거부'였다.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은 꾸준히 TF에 보호책을 강구했다. TF는 제적 가능성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실명투표를 진행했고, 나를 비롯한 90% 정도가 수업 거부를 결정했다. 동시에 의대생과 의사를 위한 익명 커뮤니티에서는 인제대 휴학 불가자들에 대한 비난 여론이 조성되었다. 부모님의 안부를 묻거나, 언젠가 만나면 꼭 기억해주겠다는 훈훈한 그림이 연출되었다. 지인의 실명이 업로드되었다. 수업 거부에 투표한 친구였다.옳고 그름이 없다고 믿는 이라면 당연히 수업 거부를 택한 자, 복학을 선택한 자, 비난하는 자 모두가 각자의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행동했다고 인식해야만 했다. 모두가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한 것뿐이었다.이토록 폭력적인 비난을 퍼붓는 사람도 대의를 위한 투쟁의 독전대이자 선봉장이었을 것이며,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가족이자 연인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시각은 이탈자를 아니꼽게 보았던 나의 과거도 합리화해주는 최선의 선택임이 틀림없었다.결국 인제대 휴학 불가능자의 99%가 수업 거부를 선택했고, 익명 커뮤니티에는 퍼부었던 비난에 대한 사과와 거칠게 행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게시글이 업로드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그 글을 머리로는 이해했어도 깊이 납득하기가 어려웠던가? 어째서 나는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데도 그다지도 사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가?이 글은 그런 질문들로부터 시작되었고, 나는 실마리를 풀기위해 기억을 반추하기 시작했다. 바깥으로 시선을 향해있을 필요가 없었다. 다른 존재와 마찬가지로 나의 삶 역시 빈번히 선악이 겹쳐진 형태였으니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분노의, 누군가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었다.다만 내장에서 죄와 영광이 동시에 흘러나오는 현상은 건강에 이롭지 않았다. 선과 악이 치덕치덕 달라붙어 끔찍한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유달리 깊게 시달렸기에 치료는 오래 걸렸지만 끝내 성공했다.이후로는 행복만을 위해 모든 것을 즐겁고 가볍게 여기며 살고있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고민은 족쇄가 되어 이토록 자유롭게 나아가는 삶을 저해할 것만 같았고, 실제로 그런 상념이 몹시 괴롭히던 적을 떠올리며, 고민하지 않기 위해 단순하면서도 나를 합리화 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었다.매일같이 선악의 저울을 들이미는 세상에서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규정하는 것은 너무나도 아늑한 결론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악이 뚜렷하게 구분되는가? 그 또한 아늑한 결론일 것이다.결국 옳고 그름에 대한 고민을 멈추려면 본인이 납득할 수 있어야만 했다. 납득 없는 아늑함 속에서는 불협화음만 되풀이될 뿐이었으니. 그제서야 떠올린 것이다. 처음 모순의 누더기 같은 나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위해 걸렸던 인고의 시간을. 어떤 법칙보다 복잡하고 회색보다도 회색지대에 있는 것이 바로 인간과 인간의 세계이기에 해부하고 고뇌한 끝에 겨우 납득하고 나아갈 수 있었다. 오직 그 고민의 시간만이 치료였다는 것을, 그제서야 떠올린 것이다.공교롭게도 마침 읽고 있던 《데미안》이 더욱 바람을 불어주었다. 등장인물 데미안은 시대의 진리라고 여겨지던 기독교 교리에 대한 그만의 해석을 펼치는데,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을 진정한 강자라고 여기거나, 예수를 보고 회개한 도둑보다 도망친 도둑을 예찬하는 등, 주인공 싱클레어가 알고 있었던 세계와 윤리관을 뒤흔든다. 그리고는 어느 날 편지를 한 통 보낸다."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부숴야 한다"더욱 치밀한 구성과 메시지가 있는 소설이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안내하는 데미안과, 그에 따라 끊임없이 세계를 탐구하는 싱클레어의 모습이었다. 싱클레어는 끝내 나아가는데 성공한다. 그가 세계를 부수고 나와 자아를 가득 채울 수 있던 까닭은 안주하지 않는 용기와 헤맬지라도 길을 찾아가려는 태도에 있었다.《데미안》은 결말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알을 깨기 위한 투쟁으로 묘사하며 전쟁을 미화한다는 논란을 남겼다. 흥미롭게도 《데미안》 그 스스로가 카인의 이야기나 도둑에 대한 일화처럼 옳고 그름에 대한 물음을 남김으로 인해 메시지가 더욱 완성된 듯 느껴졌다. 전쟁을 새로운 세계를 향한 과정으로 묘사하는 것은 옳은가, 그른가?삶은 뉴스나 익명 커뮤니티뿐 아니라 소설에서까지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물어댄다. 미천한 견문을 가진 나에게 살인마에 대한 선악 규정과 익명 커뮤니티에 대한 납득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정답이 존재하지도 않지만, 멈춰서는 안된다.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만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선택하고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한강은 자신의 질문에 답했다. "오래 전 이미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그 불가능한 수수께끼를 대면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오직 글쓰기로만 그 의문을 꿰뚫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글쓰기, 고뇌, 경험…그 도구가 무엇이든, 나아가려는 자는 세계를 해부하는 행위를 멈춰서는 안 된다. 설령 해답이 없을지언정.
2025-02-17 05:00:00젊은의사칼럼

'아픔'을 겪어내는 삶에 대하여

[메디칼타임즈=경북의대 1학년 노정연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한 문장으로 설명한다면 어떨까? 만들어낸 문장은 제각각 다르겠지만 아마도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환자'와 '치료' 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방식은 천차만별일지라도 궁극적으로 의사가 하는 일을 요약하자면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렇기 때문에 의사가 되기 위한 교육에서도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환자의 질병에 대해 이해하는 것'과 '이를 치료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과연 이것만으로 충분할까? 최근 접한 책들을 통해 나는 이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그런 시기가 있다. 비슷한 질문을 가진 책들이 연이어 찾아오는 시기 말이다. 일부러 그러려던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도 읽고 있는, 혹은 읽을 예정인 책들을 들추어보면 유사한 주제에 대한 책이 몇 권씩 쌓여 있던 적이 꽤 많았다.그럴 때면 내가 책을 찾은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찾아 준 것만 같아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그러나 꼭 답해야만 하는 질문들이 책들을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이번 겨울에 찾아온 질문은 '아픔'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아픔을 겪어낸 삶, 그리고 겪어내고 있는 삶 속에서 드러나는, 질병 경험이 전반적인 삶의 궤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자주 고민하게 되었다.이전에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를 읽었을 때부터 관심을 가져온 주제이지만, 쉽게 결론을 지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기에 오랫동안 유예해 왔던 질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아픈 몸을 살다』의 번역가이신 메이 작가님의 투병 경험과 성찰을 담은 『아프다는 것에 관하여』를 읽고 다시금 이 주제에 대해 골몰하지 않을 수 없었다.『아픈 몸을 살다』의 도입부에서는 책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병(condition)이 삶에서 특정한 조건/상황/한계(condition)가 되었을 때 그 안에서 살아가며 배우고 생각한 것을 적은 책이다. '아프다는 것을 읽고 쓰기'에 관한 책이다. 말과 고통에 대한 책이다. 고통의 교육에 관한 책이다. 우리를 지상으로 잡아끄는 중력에 대한 책이다. 괴물이고 고통이고 기적인 몸을 산다는 것에 관한 책이다" (메이(2024), 아프다는 것에 관하여, 복복서가)그동안의 의학 교육에서는 대부분 질병을 정상성이 깨진 일시적인 상태로 간주하고 이를 회복하는 방법에 대해 중점으로 가르쳤다. 하지만 이러한 '질병관'은 점차 변화하고 있다. 눈부신 진보를 이루면서 여러 불치병/난치병들에 대한 치료법을 발견해 내고 있지만 여전히 해결할 과제들은 많이 남아있다.오히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알츠하이머, 파킨슨병 등 예전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퇴행성 질환과 여타 만성 질환 등이 속속들이 사회 문제로 급부상하고 있는 추세이다. 물론 이를 타파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는 것도 너무나 훌륭한 해결 방안이지만, 앞으로의 의학 교육에서는 '질병과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이해 또한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몸의 고통은 이해받기 어려운 경험이다. 특히 만성 질환이라면, 장기간 고통 속에 있다면 더욱 그렇다. 고통은 날씨처럼 외부에서 관측할 수 있는 객관적인 상황으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매우 주관적이고 내밀한 경험이다. 연이은 고통에 대해 홀로 정확히 측정할 수 없으니 외부에 이에 대해 전달한다는 것 또한 쉽지 않다.뛰어난 작가들조차 고통에 대해 쓰는 일을 꺼렸다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외부로 전달될 수 없으니 당연히 이해받기 어렵다. 심하게 말하면 근본적인 이해는 현재로서는 아예 불가능하다. 그렇게 고통받는 환자는 '자신의 몸속에 갇히게' 된다. 질병 경험이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또한 '아픔'은 비가역적인 경험이다.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종류의 아픔이든 아픔을 겪기 전의 자아와 그 이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지나온 고통 혹은 지금 겪고 있는 고통들은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이며 일종의 '고통 자료실'을 만든다. 이는 과거를 회상할 때도 쓰이지만,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자 할 때도 열린다.우리는 우리의 몸이라는 한계(condition) 속에 갇혀 있고, 평생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고통을 미리 겪어 본 사람에게는 계속 시도하고자 하는 의지가,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끈기가 깃든다.다른 사람을 고통 저편에 홀로 두고 싶지 않다는 마음. 인류애, 동지애, 측은지심, 연민 등 다양한 단어로 수식될 수 있으나 결코 어떤 단어로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마음이 샘솟는다. 이렇게 고통의 경험은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가도, 타인과 나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많이 아파본 만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그렇다면 고통을 겪어내는 이들을 매일 마주하는 의사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같은 아픔을 겪어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운명에 달린 일이다. 또한 같은 질병을 겪더라도 그 과정에서 느끼는 바는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아마도 평생 답을 구해야 할, 그럼에도 뾰족한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은 질문이지만, 최소한 끝없이 시도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고통이라는 벽 너머에 환자를 홀로 두지 않도록. 그리고 언젠가 그 벽이 기울어 땅에 가닿으면 당신의 세상을 넓혀줄 다리가 될 것이라고 외쳐야만 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결코 가닿을 수 없더라도 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그것이 누군가의 고통을 대하는 사람이 되는 일의 무게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고 고민하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늦은 만큼 더 열심히, 마음을 다해 고민해야 할 것 같다.
2025-02-10 05:00:00젊은의사칼럼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메디칼타임즈=충남의대 1학년 김태훈 ]그렇다면 나는 퍽 건강하지 않은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학교를 가지 않으니 풀어질 대로 풀어졌다. 최근까지 새벽 4시에 자고 점심 즈음에 일어났다. 삼시세끼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았다.이번 달부터 반드시 운동하겠다는 선언은 1년 전부터 지금까지 공허한 메아리요, 지인들과의 대화 속 흔한 농담거리에 불과했다. 날씨가 어떻든 가만히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누워 있는 채로 쌓여 있는 할 일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갑갑했다. 최근 들어 하는 일이 많아졌기에 더 강렬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남과 비교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인턴십을 열심히 다니고 있고, 누군가는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고…조급함과 자괴감이 움직이지 않는 침대 속의 나에게서 스멀스멀 피어나왔다. 이렇게 부끄러웠던 일상을 공유하는 이유는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이 우연하게 작은 변화들만으로 바뀌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첫 번째 변화, 기상에 강제성이 생겼다. 2주 전부터 9시 출근을 시작했다. 의무감으로 아침 일찍 일어났다. 덕분에 아침을 챙겨 먹었고, 거꾸로 가던 수면패턴이 돌아왔다. 규칙적인 생활은 하루의 시작을 더욱 활기차게 만들어주었다. 삼시세끼를 꼬박 챙겨먹게 되니 먹는 양도 늘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점은 아침의 '여유'를 알게 됐다는 것이다.차가운 아침 공기와 함께 밖을 걸어다니며 익숙한 공간들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었다.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거리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기도 했다. 칙칙한 콘크리트 거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우리 동네를 다시 보게 되었다.두 번째 변화,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창구가 생겼다. 짜증나거나 피곤한 일상이 반복되면서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취미의 필요성을 통감했다. 인터넷상의 자극적인 글들과 영상에서 벗어나 이불 밖으로 나가야 했다.이 상황을 나는 단순 호기심에 시작한 동네 보드게임 모임에서 해결했다. 대화하며 카드를 주고받고,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 즐거웠다. 최근에는 해저도시 건설을 테마로 한 '언더워터 시티즈'라는 보드게임을 했다.보드게임 한판에 3시간이 걸리더라도 재밌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게임 안에서의 역할에 집중하고 그 시간 자체를 즐기니 괜한 경쟁심을 가지지도 않게 됐다. 보드게임이라는 건전한 취미를 통해 나 자신을 환기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도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세 번째 변화, 속해 있는 단체에서 오프라인 만남을 많이 가지게 됐다. 내가 속해 있는 비영리단체 투비닥터에서 임원진을 맡으며 일반 팀원들과 멀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과 직접 만나는 시간을 늘려보자 생각했다. 구성원들을 만나면서 서로의 일상부터 단체의 방향성까지 직접 만나 논의하는 시간을 보냈다.비대면으로 회의를 하는 것보다 더 다양한 의견을 듣고 나의 관점을 넓힐 수 있었다. 실제 만남에서 오는 교감은 온라인으로는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얼굴을 마주하고 나누는 대화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만들어주었다. 이는 관계의 질적 향상으로 이어졌다.이러한 변화들은 단순한 일상의 변화를 넘어서 나의 삶의 질을 전반적으로 향상시켜주었다. 규칙적인 생활, 의미 있는 취미 활동, 그리고 진정성 있는 대인관계는 건강한 삶의 토대가 되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나는 이제 21개월의 사회복무 기간을 앞두고 있다. 인생의 큰 변곡점일 수도 있는 시점에서, 건강한 습관들을 하나하나씩 갖추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의 사회복무 기간도 이러한 건강한 습관들을 더욱 단단히 다지는 시간으로 만들어가고 싶다. 나의 게을렀던 일상에 공감하는 이들에게도 응원의 말을 건네고 싶다. 건강해지자. 건강해야 뭐든 이룰 수 있다.
2025-02-05 10:13:00젊은의사칼럼

나무

[메디칼타임즈=단국의대 3학년 박정은 ]낯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엔 어김없이 상념들이 출렁인다. 그런 날은 허공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파트 단지를 뱅글뱅글 돌곤 한다. 그날 내가 그 나무를 발견할 수 있었던 건 발자국을 통해 길바닥에 생각들을 배수하는 이 귀갓길 의식 덕분이었다.겨울을 맞은 나무들은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잎과 색 같은 요소들을 계절에게 전부 빼앗기고, 획일적인 흑갈빛 껍질만을 두른 채 겨울 풍경의 소품이 된다. 시각적 편안함을 제공하는 무개성 속에서 돌연 한 그루의 나무가 나의 초점을 되찾게 했다.바짝 마른 제 껍질을 찢고 그 틈으로 새 가지를 살뜰하게 밀어 올리고 있는 나무였다. 보기만 해도 아파서, '으' 하는 침음을 나도 몰래 삼켰다. 치열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누군가는 기괴하다고 느낄 만큼 전형을 벗어난 형태였다. 하지만 내게는 겨울날에 막 터진 꽃망울이라는 환상 같기도,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아 보이기도 했다.나무에게서 나를 보았다. 안온하면서 고루했던 몇 겹의 겉껍질들을 나 역시 올해 뚫고 나왔다. 의술이 직업적 책무의 전부인 줄 알던 순진한 편협함을 깨고 나온 일이 시작이었다.이어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에 몹시 신중했던 성향에서 세상과 융화하는 표면적을 넓힌 일, 사람과 집단에 대해 '헤어질 결심'을 한 일, 변화와 가능성을 유쾌한 가벼움으로 맞이하기로 결심하고 두 번의 이사를 혼자서 해낸 일까지. 작고 뒤틀린 껍질과 비판적 사고 없이 받아들였던 세상의 기본값을 나도 나무처럼 하나씩 분쇄했다.  이 파열의 과정 자체는 내게 고스란히 희락이었다. 백지상태의 아이가 세상을 환희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책상이 없는 사회의 다른 분야에 무지했던 나 역시 비슷한 체험을 했다. 디지털 헬스케어, AI를 비롯한 테크, 창업, 경제, 사회, 디자인, 코딩 등 배우고 알아서 나를 채울 수 있는 분야가 너무 많았다. 그 사실에 가슴이 뛰고 눈이 반짝였다.어릴 적 처음 도서관에 간 날, 000 총류 서가부터 900 역사 책장까지 모두 읽어야지 다짐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날의 설렘과 열의가 다시 피어오른 듯했다. 분야를 막론한 지식들을 흡수했고 새로운 경험과 체험을 허겁지겁 삼켰다.해커톤, 스타트업 PM, 랩 인턴, 각종 세미나와 박람회 등 사회의 다양한 지형을 주체적으로 탐색하는 과정에서 내가 느낀 것을 희락보다 섬세하게 설명하는 단어는 없었다. 확장하는 시야를 알아채는 일은 '희'를, 미지에 가지를 뻗는 행위는 '락'을 주어 나를 전율케 했다.그 어느 때보다 삶이 생동했고 재밌었다. 나는 경험의 총량이 개인의 성장 정도를 결정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올해 내가 한 경험은 그 수만큼 나를 성장시킬 것이었고, 이런 나의 믿음은 미래의 내 모습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며 더 열정적으로 경험을 찾아 나서게 했다.하지만 연말이 되자 나는 이 믿음을 폐기해야 할 혼란에 처했다. 다양한 경험보다 하나의 경험에서 깊이를 추구하는 게 정답이었을까? 경험의 연속에서 깊이를 백안시한 적은 없지만, 매끈한 완결성을 가진 단일 경험이 조잡한 이음매를 가진 다수의 경험보다 좋은 선택 같았다. 한 분야에서 쌓아 올린 경험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복리효과를 내곤 한다.그러나 서로 다른 분야의 경험들은 때때로 너무 낯설어서, 경험의 주인인 나조차도 가끔 가지들을 연결하는 서사를 상기해야 했다. 그 밤, 걸음을 늘어뜨려 나를 나무 앞에 서게 한 고민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다. 나는 나의 경험들 사이 연속성을 헐겁게 느꼈고, 가지를 뻗을 수 있는 수많은 방식 중 나의 것이 최적이었는지를 의심하고 있었다.매섭게 뺨을 때리는 바람을 무시하고 오래 나무를 올려다봤다. 볼이 얼얼해질 즈음, 읽고 있던 소설에서 모티프가 되는 문장이 떠올랐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상념의 굴레에 빠진 나를 보다 못한 나무가 열쇠를 떨어뜨려 준 것 같았다. 그렇다. 하물며 내 앞에 굳건하게 서있는 이 나무도 제 선택이 최선인지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곧고 높게 뻗은 그의 가지는 봄볕을 가장 먼저 받아내는 축복이 될 수도, 장마철 강풍의 첫 번째 시험대가 될 수도 있다.자신이 내린 선택이 정답인지, 최선인지, 가장 큰 보상을 가져다주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삶은 예측 불가능할뿐더러, 잭슨 폴록이 흩뿌리는 물감처럼 무질서한 궤적을 그려내는 삶을 우리는 오직 한 번 살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결코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 속을 헤매는 대신, 앞으로 나는 포착에 집중해 순간을 풍성하게 만들어보려 한다. 포착에 대한 나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경험과 거리를 두며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태도를 버리고, 모든 경험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희락 같은 감정을 날카롭게 느끼고 발견하는 일'이는 경험을 하나의 논리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강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경험 고유의 빛과 결은 순간의 감정에서 비롯되며, 오직 그 안에서만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개성 강한 경험들 사이 마찰을 줄이고, 지나간 경험과 다가올 경험을 더 편안하게 소화하게 할 것이다.새로운 결심의 기념으로 내가 포착한 나무의 분투를 찍어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삼았다. 그의 격렬한 의지로 탄생한 앙상한 가지뿐만 아니라, 녹음의 풍성한 머리채, 여름 햇살에 몽땅 타 빨갛고 바삭 거리는 머리칼, 흰 가발을 쓴 나무의 민머리 등 나무의 여러 모습이 앞으로 나의 사진첩에 가득 포착될 것 같다고 예감하며 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집을 향했다.*칼럼에 등장하는 소설 속 문장은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에서 발췌했습니다.
2025-02-03 05:00:00젊은의사칼럼

의대정원은 정치적 문제가 아닙니다

[메디칼타임즈=경북의대 본과 1학년 제형준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26년도 의대 '증원 규모'를 원점에서 논의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드디어 각 학교의 현장 교육 여건을 고려해보겠다고도 말했습니다. 교육과 수업 문제로 고민했을 의대생들에게도 미안하다고 사과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아직 무지하거나, 고의적으로 26년도 의대정원 '감원'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25년부터 마주할 교육환경을 중심으로 이를 비판하고자 합니다.첫 번째로, 해부용 시신(카데바) 수급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의대 교육과정은 강의식 수업만으로 진행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의대생은 해부실습을 거치며 인체 구조를 익혀야 합니다. 경북대학교는 2개 학년(예과 2학년, 본과 1학년)이 기간을 나누고, 학년 내 오전/오후 분반을 나누고, 한 분반에서 8명씩 카데바 1구를 가지고 실습합니다. 시신 1구를 32명이 나눠 사용하는 식입니다. 매년 약 450구의 카데바가 전국 의대의 해부학 교육에 활용되므로, 2000명 확대를 강행한다면 매년 전국에 카데바가 270구 더 필요합니다. 보건복지부는 "힘을 합쳐서 시신을 마련해보자" "시신을 수입해오겠다" "인공지능 시뮬레이션으로 대체해라"라고만 말합니다. 시신 기증 윤리, 검역·전염병, 시뮬레이션(?) 해부실습에 따른 교육 질 저하가 심히 우려됩니다.두 번째로, 병상 수가 부족해 임상실습이 불가합니다. 카데바로 해부실습을 하며 인체의 구조를 익혔다면 병원에서 가서 환자들을 직접 대하는 임상실습을 거쳐야 합니다. 학생 한 명이 제대로 실습 교육을 받으려면 10개 병상이 필요한데, 현재 대학별 부속병원 병상 수로는 증원된 학생들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25학번과 유급한 24학번 의대생들이 총 7500명으로 교육 가능한 수준의 2.5배입니다. 그들이 본과 3학년이 되기 전까지 4년 안에 전국 모든 대학병원 규모를 2.5배로 확장시킬 수 있겠습니까? 원광대학교는 학생의사 1인당 1.5개 병상을 갖추고 있어 원래도 임상실습 환경이 열악했는데 이제는 1인당 0.9개 병상이라는 놀라운 실습 환경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대로라면 해부도 못 해보고, 환자도 못 만나본 의사들이 배출됩니다.25년도부터는 의대생을 제대로 교육할 방법이 없다는 현실을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을 포함해서 정부가 인정해야 합니다. 한 해에 3000명을 교육할 수 있는데 25년도에 7500명을 동시에 교육해야 합니다. 피해를 최소화할 유일한 방법은 26, 27학년도 의대 정원을 '감원'하고 25학번과 유급한 24학번을 분산시키는 것입니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께서는 26학년도 감원도 대화 주제로 올려놓자고 결단해주십시오. 그것이 원점 논의이고 의대생들이 납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화 요건입니다.의대 정원은 '합의'의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 양보해서 좋게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교육 여건에 대한 가능/불가능의 문제입니다. 정보는 초고령화에 따른 의료비 폭증을 모두 건강보험으로 감당할지, 건강보험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의료이용률을 얼마나 낮춰야 할지에 대한 미래의 고찰에 실패했습니다. 모든 의료는 필수의료인데 왜 '기피과'가 생기는지와 지역의료가 왜 붕괴하는지에 대한 과거의 고찰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무엇보다도 증원 규모가 현재 가지는 비현실성을 계속 외면하고 있습니다.국민 1인당 의사 외래 진료 횟수 (2020) 자료 출처:보건복지부의료란 '여론'을 좇을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여론을 따라 의료를 설계해온 결과 이상한 체계가 만들어졌습니다. 한국은 사회화 된 의료를 시장의 수요대로 배분하기 때문에, 환자의 본인부담률이 의료보장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데도 의료 이용이 타 국가에 비해 엄청나게 높습니다. 환자는 의료서비스의 가격을 인지할 수 없는데 이용에 제한이 없으니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 탓입니다. 의료를 무제한으로 이용하기를 원하는 여론을 따른 결과 우리의 건강보험은 곧 고갈될 예정입니다. 또한 한국은 국민이 불편하고 불공평하다는 이유로 진료권(의료의 지역 제한)을 폐지하였습니다. 이루 의료 수요와 의료기관은 수도권으로 집중되었고, 의료의 지역화는 불가능해졌습니다. 이번 사태에서도 여론에 따라 의대 정원을 밀어붙이는 동안 교육 파행은 철저히 외면되었습니다. 한국이 이미 많이 망가졌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도저히 한국 의료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제가 사회에 가장 오래 몸담을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께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26년도 의대 '감원'을 결단해주시길 바랍니다.
2025-01-20 05:00:00젊은의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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