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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닮은 나, 나를 닮은 누군가

[메디칼타임즈=가톨릭 관동의대 배지섭(본과 1년) ]"당신은 올해 어떤 사람을 닮고 싶으신가요?"나는 매년 초, 닮고 싶은 인간상을 상정하는 습관이 있다. 이는 곧 나를 정의하는 방식이자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정립하는 나만의 나침반이다.그런데 요즘 '나'를 정의해 나가는 과정이 조금은 벅차다. 많고 많은 일들이 한 해를 관통해 온 2024년이었기에, 선뜻 어느 한 사람을 상정하기가 힘든 2025년 연초였던 것 같다."나부터 나를 잘 알아야 합니다. 나부터가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수많은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속으로 곱씹었던 말들이다. 자기계발서나 인문학 서적들을 읽다 보면 언젠가 내가 원하는 목표를 뚜렷하게 그려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도움은 되었겠지만, 많은 이들이 느끼듯 그 모든 내용이 내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것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그렇게 자기계발서를 읽어 온 지도 어느덧 1년이 넘어가던 2025년 2월, 설날 연휴 아침에 뜻밖의 인스타그램 DM이 도착해 있었다."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제가 2024년에 만났던 사람 중 존경하는 사람 탑 5에 들어요. 온 마음 다해 형의 앞날을 응원합니다. 너무 기뻐요, 형을 알게 돼서"너무나 뜻밖의 선물이었다. 소위 말하는 받침에 'ㅅ'이 들어가는 20대 중반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2025년이 된 지금, 이 친구의 새해 인사는 내게 있어 수없이 읽었던 자기계발서 이상의 울림을 선사해 주었다. 문득 왜 그런지 분석해 보고 싶어졌기에, 내가 상정했던 인간상을 하나씩 꼽아 보며 과거를 돌아보았다.2022년에는 동기와 의대 선배들을, 2023년에는 함께 일한 동료이자 친애하는 조교진을, 2024년에는 단체를 이끄는 대표님들과 내 진로에 뼈저린 조언을 건네주신 다양한 교수님들을 롤모델로 삼으며 살아왔다. 어느덧 수많은 인간상을 마주해 온 2025년 초, 과연 올해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은 누구일지 스스로에게 자주 묻고 또 고민하던 시기였다.닮고자 하는 인간상을 상정하면, 그 사람을 동경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며, 어느새 내 바운더리 깊숙한 곳에 안착시켜 놓는다. 그리고 한 해가 마무리될 즈음엔, 연초에 떠올렸던 그들의 실루엣과 연말 나의 실루엣이 얼마나 겹쳐 보이는지, 어쩌면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에서였을까, 되새겨 보곤 한다.해마다 목표로 하는 인간상이 달라졌다는 것은 해를 거듭할 때마다 내 마음속의 인간상에 대한 시선이 산뜻하게 불어오는 봄바람에 흔들리듯 조금씩 일렁였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아니, 어쩌면 이제는 누군가를 동경한다기보다는 그저 나 자신과의 대화를 반추해 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설날 연휴에 받은 위의 DM 한 통은 이러한 내 생각에 확신을 심어주었다.이번 2025년의 첫 상정은 다음과 같다. 내가 누군가를 닮고 싶다고 판단했듯, 어느 어여쁜 어린 영혼이 나를 닮고자 하는 인간상으로 삼았을 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나 자신을 가꾸는 것이다.이는 지난 2024년 하반기부터 활동해 온 비영리단체 투비닥터의 슬로건과도 부합한다. '의대생과 젊은 의사의 성장 러닝메이트'. 되돌아보면 내 주변에는 나로 하여금 나의 포텐셜을 터뜨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았다. 내가 받아 온 것들이 많기에, 이제는 나 또한 후학에게 그들의 내재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참된 '기회'를 선물해 주고 싶다.내가 추구하는 인간관계의 형상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단 두 줄로 표현할 수 있다. 나를 알고,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효용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동시에 사람과의 생각 교류를 도모할 수 있는 편안하고도 진중한 이미지의 매개체로서 작용하고 싶다.'기회'의 되물림이 빛나는 이유는 나에게서 기회를 받은 후학이 그들의 후학에게 또다시 새로운 기회의 장을 선물해 주기 때문일 터. 다름 아닌 '인적 자원의 교류를 도모하고, 이를 선순환으로 연결 짓는 것'. 사람을 이어 주고, 사람의 잠재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려고 한다.그러한 과정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사람들과의 교류 속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재정의하며 한층 더 성장하는 뜻깊은 시간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와 함께 발맞춰 걸어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경험인지 잘 알기에, 이제는 내가 그런 동반자가 되어 보고 싶다. 언젠가 누군가 나를 떠올리며 "그 사람을 알게 되어 기뻤다"고 말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오늘도 나 자신을 가꾸어 나가려 한다.
2025-06-16 05:00:00젊은의사칼럼

Bye bye, my comfort zone

[메디칼타임즈=단국대 본과 3학년 박정은 ]더 많은 사람에게 닿고 싶다.의과대학 입학 4년 차에 내가 내린 결론이자, 창업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이유였다. 환자 한 명 한 명과 마주하는 일도 분명 의미 있지만, 진료실 너머 사회 전체에 파장을 일으키고 싶은 갈망이 있었다. 의료를 통해 더 넓게, 더 깊숙이 세상에 스며들고 싶다는 생각이 점차 커져 갈 때, 반짝이는 단어들을 찾았다. AI, 디지털 헬스케어, 빅데이터 — 기술이 의료와 만났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은 무궁무진했고, 상상하자니 가슴이 뛰었다.물론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 반짝이는 것들 대부분이 사실은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것들이라는 걸. 가까워진 듯하면 멀어지고, 붙잡으려 하면 막상 거기에 없는 상황이 부지기수라는 걸. 하지만 그땐 알지 못했기에, 그 잠재력에 매료된 나는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에 발을 들이며 관심사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회사도 다니고, 직접 프로덕트도 기획하고 제작해 보며 부딪혔다. 그러다 올해 초, 부진한 기업들이 사업을 철수하듯, 나 역시 헬스케어 도메인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오늘 칼럼에서는 그런 내 중단과 방향 전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당연한 서비스가 만든 역설한국 의료 시스템의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이 분야를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한 지 몇 개월이 지나서였다. 한국에서 의료는 '당연한' 서비스다. 우리나라에서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하루가 24시간이다'만큼이나 자명한 명제다. 전 국민이 누리는 원활한 의료 접근성은 분명 자랑스러운 성과이고, 현대 국가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사회 안전망이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은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에서 난제이자 큰 제약으로 작동하고 있다.OECD 의료 이용률 최상위권과 치료 중심의 의료 시스템. 이는 미래 의료의 기치로 손꼽히는 4P(Preventive, Predictive, Personalized, Participatory) 중 첫 번째 P인 예방(Preventive) 의료와 대치되는 우리나라의 의료 이용 행태를 보여준다. 이렇듯 구조적 한계와 치료 중심의 사고방식이 깊이 뿌리내린 환경에서는, 예방 중심의 서비스 모델이 성공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B2C 디지털 헬스케어 서비스가 '예방과 관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분명한 제약이다.게다가 낮은 진료비와 높은 의료 접근성은 사용자 설득의 난도를 배가시킨다. 치료에 비해 예방과 관리는 장기간에 걸쳐 비용을 투자해야 하며, 그 효과를 가시적으로 확인하거나 체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혈당 관리, 저속 노화 등 특정 키워드로 건강관리에 대한 관심이 증대한 것은 반가운 변화지만, 이를 위해 장기적으로 비용을 지출하는 것에 대한 소비자 저항은 여전히 크다.공급자와 수요자 사이의 이해 불일치더 근본적인 문제는 서비스 자체의 설득력 부족에 있었다. 대부분의 디지털 헬스케어 제품은 내게 공통적인 생각을 들게 했다. '사용하면 분명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굳이 돈을 지불하고 싶지는 않다.' 심지어 무료로 제공된다 해도, 지속적으로 사용할 만큼 매력적이거나 효과적인 서비스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특히 의료인이 주도하는 프로젝트에서 이러한 문제가 더욱 두드러진다. 공급자 중심적 사고가 시장 검증 과정을 생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의료인은 자신의 임상 경험과 통찰을 바탕으로 제품을 기획하고 곧바로 제작에 착수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의 '꼭 필요할 것이다'라는 뜨거운 확신은, 사용자 입장의 '필요하니 비용을 지불해야지' 하는 차가운 판단과 쉽게 일치하지 않는다. 둘 사이엔 보통 생각보다 훨씬 큰 간극이 존재한다. 이러한 불일치는 자생 가능한 시장성을 보장하지 못하고, 기술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하는 제품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는다.새로운 길이런 어려운 문제 조건에도 불구하고, 분명 이 미션을 해결해 낼 사람은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 난제를 타개할 만한 기발한 아이디어가 내게는 없었고, 산업에 대한 흥미도 전과 같지 않았다. 결국 나는 지금 당장은 이 분야가 나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나의 길이 벽에 부딪혔다면 곧장 다른 길로. 그렇게 나는 의료 밖의 다른 서비스 분야를 탐색하게 되었다.IT 창업 동아리에 들어간 건 그 과정의 첫걸음이었다. 거기서 나는 내가 별로 관심 없다고 착각했던 것들과 마주했다. 생산성 도구, 플랫폼, 커머스, 인슈어테크 등 IT 산업의 다른 영역들을 살펴보니, 디지털 헬스케어와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무엇보다 명쾌했다. 사회재적 성격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서비스 도메인에서는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시장 논리가 훨씬 깔끔하게 작동했다. 그 점이 매력으로 다가와, 현재는 여러 분야의 서비스를 접하고 즐겁게 흡수하고 있다. 의료 말고도 이렇게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재미가 있고, 사람들의 일상에 녹아 있는 다양한 영역의 산업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는 일이 내게는 꽤나 흥미진진하다.초심자가 되어 얻은 성장의 기회'의대생'이라는 간판만으로 실체 없는 도메인 전문성이 어필되었던 이전과 달리, 홈그라운드를 벗어난 나는 이제 아무것도 모르는 초심자의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좋다. 아니, 이쪽이 더 좋다.이전까지 나는, 많은 의대생들이 흔히 빠지는 '도메인 전문성을 갖췄다는 착각'에서 자유롭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생각 자체가 착각이었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서비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근거 없는 자신감과 낙관주의에 기대어 곧바로 기능 기획에 들어갔다. '이건 분명히 필요할 거야'라는 주관적 판단과, 내 입맛에 맞는 자료들을 근거 삼아 확신을 쌓았다. 방향과 결론을 미리 정해두고, 그에 맞는 이유를 끼워 맞춘 셈이다.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정말로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인가?'라는 질문을 출발점으로 삼고, 내 아이디어가 실제로 시장에서 검증 가능한 구조인지부터 차근차근 따져 본다. 그것은 이 분야가 무엇보다 고객 경험을 중시하고 강조하는 덕분이다.이 과정을 지나며 자꾸 떠오르는 문장이 하나 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본래는 날카롭고 파괴적인 메시지를 가진 문장이지만, 나는 그것을 조금 다르게 읽어 본다. 나를 다시 써내려가기 위한 파괴. 재조립을 위한 해체. 그를 위해 나는 익숙한 것들을 의도적으로 흔들고, 경계를 파괴해 본다. 편안했던 소속감, 너무 익숙한 길, 의심해 본 적 없는 지식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일찍 정해놓은 미래의 대본 같은 것들에 맞서서.연고 없는 길을 가는 건 여전히 낯설고, 불확실성을 선택하는 일은 언제나 두렵다. 하지만 그 두려움 속에는 어떤 선명한 짜릿함이 있다. 진짜 성장은 언제나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법이고, 안전한 곳에만 머무는 삶은 결코 나를 더 크게 만들 수 없으니까. 사뭇 비장하게 외쳐 본다. Bye bye, my comfort zone!
2025-06-09 05:00:00젊은의사칼럼

직관의 시대, 우리는 왜 현장으로 향할까

[메디칼타임즈=고려의대 2학년 강지민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가 분리 상태를 극복하고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모든 시대와 모든 문화에서 동일한 문제, 곧 어떻게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가, 어떻게 결합하는가, 어떻게 자신의 개체적 생명을 초월해서 합일을 찾아내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해 왔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1956)』 중에서바야흐로 봄 날씨가 만개한 요즘, 사람들은 다양한 경험을 위해 밖으로 향한다. 지난해 사상 최초로 천만 관중을 돌파한 한국프로야구(KBO)는 올해도 여전히 식지 않는 인기를 자랑하고 있다. 탁 트인 공원 곳곳에서는 각종 페스티벌이 열리고, 전시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연일 성황이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해외여행 상품도 판매 시작과 동시에 매진되기 일쑤다.침대에 누워 6인치짜리 스마트폰을 통해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유명 피아니스트의 공연을 손쉽게 감상할 수 있는 요즈음이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진 간접 경험의 접근성에도, 사람들은 점점 더 '직접 가보는 것'에 열광하고 있다. 어쩌면 이 욕구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 삶의 결핍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짜 연결은, 스크린 너머가 아닌 '현장'에 있다. 그리고 내게 그 사실을 처음 알려준 것은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와 함께 간 야구장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매일 저녁 식사 후 야구 중계를 보곤 하셨는데, 어느 날 내가 경기에 관심을 보이자 곧장 야구장에 데려가셨다.아버지가 응원하시는 구단인 기아 타이거즈와 한화 이글스의 경기였는데, 대전에서 자란 필자에게 너는 한화 이글스를 좋아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정작 원정팀 응원석인 3루를 예매하셨던 기억이 난다.그날 한화 이글스는 대승을 거뒀지만, 경기 결과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무엇보다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들이 공의 궤적 하나하나에 같이 기뻐하고, 아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그 안에 속해 있는 것만 같은 감각이 들었고 나 역시 괜스레 기분이 좋아서 이후로도 아버지 어깨 너머로 조금씩 야구를 보고, 야구 이야기가 나오면 가끔 아는 척도 하곤 했다.대학에 진학한 이후, 혼자 서울에서 자취하게 되면서 SNS와 각종 콘텐츠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시간이 많아졌다. 절대적인 연결은 쉬워졌지만, 정작 혼자라는 고독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야구장에 다시 가기 시작했다.중계 화면이 훨씬 더 잘 보이고, 티켓팅은 전쟁이며, 경기 시간보다 이동 시간이 더 긴데도 자꾸 구장으로 발길이 향했다. 경기 내용보다 중요한 건, 야구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이다. 역동성, 열기, 하나 되는 느낌, 처음 보는 사람과 어깨동무하고, 같이 열광하는 것… 오직 현장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생각해 보니 야구장 밖에서도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종종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오랜 기간 좋아하던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를 갔다. 수록곡 가사까지 다 외울 정도로 열정이 있었지만, 부모님 없이 서울로 향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많이 긴장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한 공간에서 혼자 곤두선 상태로 대기하다가, 콘서트 시작 음악이 나오며 긴장이 탁 풀리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몽글몽글하고 반짝거리는, 분홍색 바람으로 온 공연장이 뒤덮인 것 같았다. 옆에 서 있던 일본인 팬분과 간단히 간식도 나누고,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웃으며 수다를 떨기도 했다. 국적도 언어도 다르지만, 같은 노래에 웃고, 떨리고, 환호할 수 있던 그 모든 순간은, 같은 대상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우리가 모두 연결된 덕택이었다.이렇게 무엇이든 직접 가서 보는 것을 좋아했던 나지만, 학업에 열중하던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 입학과 동시에 찾아온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주저함이 커졌다. '내가 이 돈과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을까?', '모든 걸 즐기고 오지 않으면 아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늘 따라붙었다. 정말 좋아하는 일에만 가야 한다는 강박도 생겼다. 이왕 가는 건데 소위 말하는 대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후회 없이 모든 것을 하고 오지 않으면 마치 실패인 것처럼 말이다.이런 생각을 바꿔준 것은 뜻밖에도 한 인디 페스티벌이었다. 바쁜 시기였고, 아는 가수도 많지 않아 공연 전날까지 망설였지만, 친구의 권유로 억지로 끌려가다시피 했다. 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지금 내가 갈 때가 맞는지 고민했지만, 막상 도착한 현장은 상상 이상으로 따뜻했다.자유롭게 듣고 싶은 공연을 감상하고, 때로는 잔디밭에 누워 이야기도 나누고, 맛있는 간식도 사 먹으며 부푼 마음으로 하루를 가득 채웠다. 직접 가서 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다. 모든 걸 알아야 할 필요도, 완벽하게 즐겨야 할 부담도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우리는 초연결(hyper-connectivity) 사회를 살고 있음에도 역설적으로 직접 경험에 더욱 열광한다. 수많은 사람들과 손가락 터치 한 번으로 연결될 수 있지만, 정작 그런 연결이 근본적으로 우리 내면의 불안을 해소하지 못할 때도 많다.나와 같은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과 같은 시간 속에, 또 같은 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또 다른 프롬이 말한 바와 같은 '분리 상태 극복'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때로는 비록 서로 말 한마디 섞지 않더라도, 같은 무언가에 열광하고 있는 그 느낌이, 고독을 덜어주는 강력한 힘이 된다.직접 간다는 것은 단지 눈으로 보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곳의 사람들과 숨을 섞고 열기를 공유하며, 유대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한 번 지나간 경험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당신의 선택에 따라 우리의 하루하루는 그저 스쳐 가는 순간이 될지도, 커다란 온기를 선사하는 추억이 될지도 모른다.(마지막으로, 한화 이글스의 이번 시즌 가을야구 진출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2025-06-02 05:00:00젊은의사칼럼

언젠가 다시 켜질 조명을 기다리며

[메디칼타임즈=건국의대 3학년 김채연 ]영화 <마리아>(2024)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오페라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 봤을 가수가 있다. 한국인이라면 물론 위대한 가수 조수미를 가장 먼저 떠올리겠지만, 그 이전에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디바로 일컬어지는 마리아 칼라스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영화 <마리아>(2024)에서는 안젤리나 졸리가 마리아 칼라스로 분해 전설적인 프리마돈나의 말년을 연기한다. 그러나 예술의 정점을 찍은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렇듯, 그녀 또한 상당히 우울한 말년을 보냈다.영화에서 '마리아'는 전설로 불리는 '라 칼라스'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애를 쓴다. 그녀는 피부근육염(dermatomyositis)이라는 면역 질환에 시달리며 피부와 목이 마치 '보라색 개구리처럼' 부어오르는 끔찍한 병을 안고 무대에 서야 했다.이 병은 끊임없이 마리아의 목소리를 침범하고 그녀를 도저히 무대에 설 수 없게 하며 공연 직전에 공연을 취소하는 무책임한 예술가로 만들었으며, 결국에는 모두가 기억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형편없이 망치고 말았다. 전성기 시절의 목소리를 되찾으려 남몰래 극장에서 아리아를 부르는 마리아를 두고, 반주자는 말한다. "당신 목소리에서 희망이 보여요."물론 용기를 북돋아주려 한 말이었겠지만 전 세계를 통틀어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가히 신적인 목소리의 소유자였던 마리아에게 고작 희망이 엿보일 뿐이라는 평가는 형편없이 자존심을 구겨대는 문장이었을 것이다. 50대의 마리아 칼라스는 전성기가 지난 가수였다. 기량이 예전 같지 않음을 기자와 반주자보다도 그녀 스스로가 가장 먼저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나에게, 우리에게 전성기란 언제였을까?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본과 생활을 시작한 의학전문대학원 학생으로서 종종 나이를 실감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본과의 산더미 같은 공부량 앞에서 밤을 새고 난 다음, 한숨 자고 일어나면 멀쩡했던 이십 대 초와는 달리 이틀 내리 밤샘의 후폭풍에 시달리거나, 수백 장짜리 슬라이드를 외우면서 확실히 예전보다 암기력이 떨어졌음을 느꼈노라고 동기들과 웃으며 자조하는 때가 그렇다.그래도 정신없이 공부만 하던 본과 1, 2학년 때는 그 정도 짧은 찰나들에 지나지 않았는데, 휴학을 하고 비슷한 나이대의 주변 친구들을 둘러보니 그 속도의 차이가 더욱 명징하게 다가왔다. 대부분은 안정적인 직장이 있고 누군가는 가정을 꾸리기도 한다. 수입을 모으고 재산을 불리고 노후를 대비하는 동갑내기 사회인들 앞에서 나는 아직도 한 치 앞도 모르는 불분명한 휴학생(이 신분조차 한동안 명확하지 않았다!)에 불과했다.그런 의미에서 작년 한 해는 인터미션 같은 시간이었다. 인생의 전성기를 화려한 조명의 무대로 비유한다면, 막과 막 사이에 불을 끄고 숨을 돌리는 인터미션도 물론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무대극과의 가장 큰 차이를 꼽으라면, 불이 언제 다시 켜질지, 켜진다면 무대의 조명일지 퇴장을 알리는 객석의 조명인지를 모른다는 불안이라 할 수 있겠다.이십 분 내외라고 정해진 무대극의 막간과는 달리, 길이도 형태도 불분명한 막간을 지내며 '이미 남들보다 늦었다'며 떠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고 나 또한 그중 하나였다. 다시 불이 들어올까? 마리아를 습격한 병마처럼 갑작스럽게 꺼진 조명이 영원한 어둠으로 남아버리는 건 아닐까? 이대로 내 인생의 전성기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는 얄팍한 희망에만 기대야 하는 미래만 남아 있다면?영화에서 마리아 칼라스는 노래를 하러 몇 번이고 반주자가 있는 극장을 찾아간다. 밖에서 엿듣던 파파라치에게 '끔찍한 노래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무례한 질문을 받기도 한다. 그녀는 다시 무대에 오를 생각은 없다고 말하지만, 누구보다 간절하게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미 불이 꺼진 극장에서 또다시 조명이 켜지고 빛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까지 그녀는 필사적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몇 년 늦긴 했다지만 아직은 젊은 날이 한참 남았으니 물론 그녀와는 같지 않다. 그럼에도 예고 없이 찾아온 인터미션 앞에서 의연하게만 버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기나긴 '휴식'을 불안과 우울로 하루하루를 소모할 수도 있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료하게 흘려보내는 것도 시간을 견디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누구도 예상할 수 없이 갑작스레 눌린 일시정지 버튼이 언젠가 또다시 눌릴 때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를 예습하기에 좋은 시간이다.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이미 흘려보낸 시간들을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현재보다 나은, 혹은 나았던 것처럼 보이는 과거에 지나간 전성기라는 이름을 붙이고 불이 꺼진 객석에서 하염없이 끌어안고 기다리게 될지도. 하지만 뒤를 돌아보느라 앞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 그보다는 이 갑작스럽고 안온한 시간을 충분히 흡수해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르는 다음 막을 만끽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데 쓰는 편이 훨씬 긍정적일 테다.지금껏 바쁘게 달려왔던 시간 속에서 문득 잊고 살았던 '나'를 또다시 알아가며, 어떤 태도와 표정으로 삶을 꾸려 나가야 할지 고민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꾸준히 할 수 있는 취미를 찾고, 학교 공부가 아닌 또 다른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이야기를 하며 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나는 찾아가는 중이다.그리하여 현재를 보내는 방법을 깨닫고 나면 이 다음으로 찾아올 미래도 조금 더 단단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갑자기 찾아온 휴식처럼 갑자기 찾아올 분주한 삶도 여유 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나를 만들기 위해.영화의 마지막에서 마리아는 파리의 자기 방에서 통유리창의 빛을 받으며 아리아를 부른다. 그 천사 같은 목소리에 파리 시민들이 하나둘씩 모여 넋이 나간 듯 그녀의 노래를 감상하는 광경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쓰러져 숨을 거둔다. 생의 마지막 노래로 그녀는 그녀의 관객을 만족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니, 그녀가 찾아 헤매던 '라 칼라스'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겠다.이렇듯, 전성기는 끝나지 않는다. 지나간 것 같아도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다. 그러므로 언제나 차분하게 다음에 올라갈 막을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선물처럼 다시 켜질 조명을 기다리면서.
2025-05-26 05:00:00젊은의사칼럼

나의 공간에서 늙어간다는 것

[메디칼타임즈=순천향의대 3학년 오명인 ]차에서 내리자 차갑고 맑은 공기가 뺨을 스쳤다. 간호사 선생님은 어느새 뒷좌석에서 커다란 가방 두 개를 꺼내 어깨에 메고, 익숙한 듯 아파트 입구를 향해 걸어가고 계셨다. 엘리베이터 거울에는 검은 숏패딩 아래 흰 실습 가운이 어정쩡하게 삐져나온 내 모습이 비쳤다.초인종을 누르고 보호자분께 인사를 드린 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곧장 환자분이 계신 방으로 향했다. 그곳엔 가정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공호흡기와 병원용 침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환자분이 내 존재를 불편해하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눈빛으로 인사를 건넸다.지난 12월, 나는 서울대학교병원 재택의료클리닉에서 2주간 실습 인턴으로 참여했다. 언제부터 재택의료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급히 대학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날 아침 등교 전 뵀을 때만 해도 평소와 다름없었는데, 몇 시간 그 병실 옆 좁은 공간에 누워 계신 할아버지를 마주했다. 나의 꿈의 직장인 병원이,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숨을 내쉬는 차가운 죽음의 공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체감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죽음은 병원에서 일어난다.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많은 이들은 햇살이 드는 창가의 침대에서 가족 곁에서 눈을 감는 평온한 죽음을 상상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대한민국 국민 열 명 중 일곱은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왜 우리는 '집에서 늙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삶의 마지막을 병원에서 맞이하게 될까? 이 질문이 맴돌았다. 그래서 나는 병원이 아닌 집을 선택한 이들과, 그들을 돌보는 의료진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간호사 선생님은 능숙하게 활력 징후를 측정하고, 의사 선생님은 PEG 튜브를 교체하셨다. 보호자는 환자 곁의 정리된 의료용품 더미 속에서 필요한 물품을 익숙하게 꺼내왔다. 병원이 아닌 환자의 침실로 장소만 바뀌었을 뿐,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병원에서는 환자가 진료실로 걸어오지만, 재택의료에서는 우리가 환자의 삶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질병이나 신체 상태뿐 아니라, 그들의 거주 환경 전체가 치료의 한 부분이 된다. 예를 들어, 환자 브리핑에서 '걷기 힘든 환자'라고 말씀드리자, 교수님은 "환자 집 화장실 문턱은 봤니?"라고 질문하셨다.실제로, 기어서 화장실까지 가는 환자에게는,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넘는 문턱 하나도 삶의 질과 건강을 좌우할 수 있는 요소였다. 집을 방문할수록 환자의 공간은 더 많은 것을 보여줬다. 침대의 높이, 환자와 보호자의 관계, 병원에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골목이 어떻게 환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하게 되었다.그리고 재택의료 클리닉은 이 정보를 통합해 전인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다학제 회의에서는 간호사, 의사, 사회복지사가 각자의 관점에서 환자를 분석하고, 함께 케어 플랜을 수립했다.비대면 진료 외래도 재택의료의 또 다른 축이다. 우리는 영상통화를 통해 환자와 보호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처방을 내린다. 병원 방문이 어렵고 위험한 환자를 위해 보호자가 직접 약을 수령하러 오기도 한다. 진료실을 벗어난 진료, 카메라 너머의 진료. 그 과정은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질문을 남겼다.왜 정작 병원에 가장 가기 어려운 사람들은, 원격 진료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을까? 실제로 원격의료는 병원에 갈 시간이 부족한 젊은 층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 모순을 실감할수록 나는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에 닿게 되었다. 바로 '거동이 불편한 이들이 어떻게 집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실습 중 만난 환자들의 병명은 치매, 담도암, 파킨슨병,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희귀질환 등 천차만별이었지만, 병원에 올 수 없다는 것을 공통점으로 가졌다. 와상 환자 몇 분의 집에 방문한 뒤 교수님께 어떤 생각이 드는지 질문을 받았다.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그들의 삶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지 몰라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이분들은 죽음을 기다리는 걸까? 그 순간 교수님은 이것이 그분들의 '일상'임을 상기시켜 주셨다. 곧이어 만난 한 환자는 안구 마우스를 사용해 우리에게 "자주 보니 좋아요"라는 인사를 건넸다. 방금 전까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있었다고 했다. 실습 전에는 말기 환자들이 어떻게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지 알고 싶었다.하지만 실습을 마치고 난 지금, 나는 오히려 '어떻게 하면 움직일 수 없는 환자들이 집에서 지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물론 임종 준비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준비를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말기의 초입과 죽음 사이, 그 시간을 어떻게, 어디서 보내느냐는 매우 실질적인 문제다.실습을 마친 뒤, 나는 상급종합병원이 아닌 지역 일차의료기관에서의 재택의료가 궁금해졌다. 성남시에 위치한 재택의료 전문기관인 '집으로의원'에 연락해 진료 현장 참관을 요청드렸고, 원장님은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이번에도 나는 흰 가운 위에 패딩을 걸친 모습으로 진료 현장을 따라다녔다.상급종합병원의 재택의료가 중증 와상 환자의 케어에 집중되어 있다면, 일차의료기관은 만성질환자의 관리와 일상적 처치가 중심이었다. 환자의 상태는 제각각이었지만, '병원에 오는 것이 어려운 환자에게 직접 찾아간다'는 점은 같았다.집에서 병을 앓는다는 건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평온하지만은 않았다. 병원에서는 손을 뻗기만 해도 받을 수 있는 의료 서비스를, 집에서는 스스로 하거나 보호자의 손에 의지해야 한다. 언제 닥칠지 모를 응급상황에 대한 불안도 늘 존재한다. 그리고 집에서 죽는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에게 선택지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더 힘들고 고단할지라도, 자신의 터전에서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선택지. 그 선택이 가능해야 우리는 집에서도 존엄하게 늙어갈 수 있다.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환자를 찾아가는 병원'이 생기는 그때, 우리는 삶의 마지막을 '어디서' 보낼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2025-05-19 05:00:00젊은의사칼럼

1980년 5월에는 당신이 있다

[메디칼타임즈=단국의대 1학년 유우선 ]9호선 급행 열차는 늘 사람이 많다. 고속터미널역에서 9호선 열차를 탈 때면 헙, 하고 숨을 한 번 들이키는 식의 각오와 함께 몸을 실을 정도다. 1월 초의 어느 날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열차는 만원이었고, 나는 간신히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9호선에 몸을 실었다.기우뚱 몸을 세우자, 내 바로 앞 좌석에서 조그마한 아기가 엄마의 무릎에서 방싯방싯 웃고 있었다. 이렇게 예쁜 아기 앞에 서 있다니 오늘은 행운이네, 생각했다. 노래도 내가 좋아하는 밴드의 가장 즐겨 듣는 노래. 왠지 오늘의 9호선 여정은 금방 지나갈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에어팟을 뚫고 날카로운 외침이 들린 것은 그 예감이 든 직후였다."국민 여러분! 광주 사태에 속지 마십시오!"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다음에는 '광주 사태'라는 말에 광주에서 무슨 사고가 났나 덜컥 겁이 났다. 광주는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목포로 이사를 간 10대 시절에도 툭하면 놀러 다니던 이웃 도시였다.여전히 부모님은 주말마다 광주를 찾으시고, 내 친구들도 광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 고함이 터질 만한 일이 대체 무엇일지 마음이 조급해졌다. 즉각 뉴스 앱을 켜려고 서둘러 음악을 멈췄다. 그러자마자 즉각 더 날카로운 고함이 귀에 내리꽂혔고, 나는 그제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여러분은 지금 다들 속고 계신 겁니다! 5·18은 민주화 운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폭도입니다! 죄다 간첩들입니다!"나는 고개를 돌려 고함의 근원지를 눈으로 좇았다. 희끗한 머리를 질끈 동여맨 중년의 여자가 내 옆에서 위의 문장을 반복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지하철 칸 내에서 그녀를 보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여자는 오히려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자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손가락을 쳐들고 지껄였다."폭도, 그래, 폭도들이라고. 그것도 모르면서 당신들은 나를 미친 인간이라고 부르지? 여러분, 지금 뜨끈뜨끈하게 보일러 틀고 사시지요? 나는 말이야, 보일러도 틀고 살지 않아! 관리사무소가 간첩들에게 장악당했기 때문이지. 간첩, 간첩 투성이야! 사기꾼, 폭도, 간첩!"아, 그 여자를 무어라고 지칭하면 좋을까. 대충은 알았다.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다는 것. 이들은 유튜브에도, 뉴스 댓글창에도 있었다. 5·18 민주화 운동을 광주 사태라고 칭하고, 1980년 목숨을 잃은 광주의 시민들을 폭도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았다. 그러나 눈을 부릅뜨고 '폭도'라며 고함을 내지르는 이를 목도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여자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보다 못한 젊은 남자가 조용히 하시라고, 신고하겠다고 말을 꺼냈으나, 그녀는 신고라는 말에 더욱 흥분했는지 길길이 날뛰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동작역이 목적지였는지(용산에 가려고 했던 걸까?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금방 내렸다. 내리는 순간까지도 내 건너편에 서 있는 중학생 소년들에게 너희는 역사를 다시 배워야 해, 하며 삿대질하던 그녀를 나는 지하철 문이 닫힐 때까지 똑바로 응시했다.그 후에도 나는 오래 음악을 다시 틀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 대다수는 신기한 구경을 했다 생각했는지 일행과 속닥거리고, 키득거리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웃지 않는 아기와 눈을 맞추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나는 별로 웃기지가 않았는데, 아기도 그런 모양이었다. 마음이 아팠다.모든 사람들이 5·18 민주화 운동이 내가 배운 것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대학에 입학해 고향인 전라남도를 떠난 직후에 깨달았다. 5월이 이렇게나 조용하게 지나간 것이 처음이었다. 나의 5월은 늘 바빴고 다채로웠다.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5월이면 늘 행사가 가득했다. 5·18 민주화 운동 기념 영상을 시청하고, 민주화를 주제로 하는 백일장에 참여하고, 5·18 민주화 운동 기념 공원으로 소풍을 가고. 그 5월은 마치 다른 세상의 시간인 양, 대학 입학 첫해의 5월 18일은 너무도 평범했다. 추모 행사도 기념 활동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걸 문제 삼는 사람도 없었다.하기야, 나도 수많은 행사를 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해 대단히 깊이 고민하거나, 역사 속에 희생된 시민들을 떠올리며 처절하게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다. 나에게도 그 일은 그냥 교과서와 영상 자료가 반복적으로 읊는 역사 속 사건일 뿐이었으며, 먼 과거의 시간에 존재하던 타인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나는 내가 태어난 고장에서 벌어진 사건이니까 행하던 당연한 관습이 끝이 났구나, 하고 결론내렸고, 고요한 18일의 위화감은 금세 해소되었다.그러나 2024년 12월의 3일, 해소된 줄 알았던 위화감은 섬뜩한 환영이 덧씌워진 채로 내게 엄습했다. 유리창이 깨진 국회의사당, 무장한 군인, 울부짖는 시민들이 생중계되는 화면은 끔찍하게도 낯설지가 않았다. 어린 시절 그토록 보았던 5·18 민주화 운동 다큐, 역사책 하단에 삽입된 폐허가 된 광주의 사진이 화면과 겹쳤다.그 잔혹한 친숙함 하에서 우리 가족은 분주히 서로의 안위를 확인했다. 누군들 그 비상식적인 사태에 그러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 12월에 나는 유별나게 부모님께 자주 연락했고 부모님 역시 일가친척들에게 여느 때보다 자주 연락하셨다.1980년 광주의 군인이셨던 외삼촌 할아버지는 극도의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다시금 떠올리시곤 일주일을 앓아누우셨고, 외할머니는 몇 번이고 그 해에 외할아버지가 광주에 가지 못하게 했다는 말을 반복하며 눈물을 훔치셨다. 12월 3일은 독극물처럼 우리 가족 사이에 퍼져 있었다.한 가지 또 인상적인 점은, 우리 가족은 그 독극물에 지지 않으려 바득바득 반응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로 뭉쳤다. 주말마다 목포 평화 광장에 집결한 시위 사진이 분노에 찬 활자와 함께 가족 단톡방에 올라왔다. 할머니와 가족들은 광주 음악 분수 앞에 모여 민주화를 갈구하는 표어가 적힌 플래카드를 자랑스러워했다. 생전 왕래하지 않던 친척과도 얼굴을 마주하고 연락을 하며 서로의 마음과 기억을 살폈다.그리고 비로소 9호선에서 '광주 사태'라며 무자비하게 고함을 지르는 여자를 마주하고서야 나는 12월 3일이 내 주변에서 선명한 족적이 된 이유를 정확히 깨달았다. 나의 윗세대는 경험했고, 나는 교육받은 1980년의 역사가 2024년의 우리와 맞닿아 잔혹한 이야기로 흐르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그 여자가 나간 9호선에 흐르던 가벼운 키들거림은 내게 더 이상 해소되지 못할 정도로 커진 위화감을 부풀렸다.5·18 민주화 운동은 더 이상 어느 지역의 관습으로, 납작한 교과서 속 활자로 끝나서는 안 될 것이었다. 미약하게만 느껴지는 과거와 현재의 연결이, 그로부터 기인하는 공포와 절망이, 다시 그것으로부터 쌓아 올리는 결의가 현 상황에 필요할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그 길로 나는 5·18 민주화 운동을 짚어 나갔다. 역사책을 탐독했고 어린 시절 보았던 다큐를 다시 시청했으며 5·18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광주에 가서 5·18 민주화 운동의 전시관으로 쓰이는 전일빌딩에 방문했다. 전일빌딩에 오래 서서 당시 시민들의 사진과 일기, 영상과 보고서를 읽었다. 처음으로 모든 것이 생경하게 피부에 다가왔다.무장한 군인들의 얼굴은 어느 순간 나의 외삼촌 할아버지 같았고, 피 흘리며 쓰러지는 여자는 엄마 같았으며, 주먹을 불끈 쥐고 행진하는 고등학생, 대학생들은 꼭 나와 같았다. 전시된 모든 화면의 모습이 12월 3일 생중계되고 보도되던 그 화면과 꼭 같았다. 2024년 12월과 1980년 5월은 한 겹으로 포개져 내가 서 있는 시간대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나는 1980년에 서 있었다.그리고 1980년 5월에 서 있는 사람은 당신이기도 할 것이다. 나와 어깨를 맞대고 현재를 살아가는 당신 역시 그 시대에 있다. 나는 그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남의 것으로만 생각했던 역사의 아픔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은 아주 순식간이라는 것. 멀게만 생각했던 역사의 흐름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삶의 물결과 매우 유사한 모양새라는 것. 역사는 당사자성을 동반한다.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하고,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 역사와 주변인에 관심을 갖고 현상에 문제 의식을 가져야 하며 멈추지 않고 개선해야 한다. 나아가려는 투지를 가져야 한다. 역사의 위인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허울 좋은 소리도, 타인을 위한다는 도덕적인 명분도 아니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어찌 보면 이기적인 단 한 가지 이유에서 기인하는 제안이다.과거와 현재는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우리의 현재를 위해,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쟁취하는 결의를 가져야 할 것이다.
2025-05-12 05:00:00젊은의사칼럼

멈췄다, 발 내딛기

[메디칼타임즈=연세의대 4학년 박태웅 ]부모님께서는 예과 2학년 때부터 운전면허를 따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타고 있는 당신의 차를 넘겨줄 테니 어서 따라, 다른 집이면 감사하다며 허겁지겁 학원에 갈 노릇인데, 어찌 이리도 시큰둥하냐며 타박하셨다. 나는 항상 똑같이 되받았다.기름값, 유지비, 관리비, 보험비를 학생이 안정적으로 낼 수 있느냐, 이건 조선에 코끼리를 보내는 꼴이다. 어머님께서 넘겨주려 한 차는 안타깝게도 폐차장에 직행했고, 나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지하철에 몸을 맡겼다.딱히 불편함은 없었다. 서울 내에서는 자가용 차를 몰 이유가 없을 정도로 교통 인프라가 훌륭했고, 어쩌다 한 번씩 국내 여행을 떠날 때면 지역 내에서 택시를 타는 게 차라리 나았다. 이동할 때 자면 되니 피곤하지도 않지, 렌트 비용에 기름값 아끼지, 술 마실 때 걱정할 필요도 없지. 된통 사람들은 왜 직접 운전해서 여행 가려고 야단일까 싶었다. 꿋꿋이 네이버 지도와 KTX 앱을 달고 두 다리로 걸어 다녔다. 그렇게 27살이 됐다.두 번째 압박이 찾아왔다. "입대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젠 정말 따야 하지 않겠니? 나이 들면 운전해야 할 일도 많을 텐데" 이번에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요, 평생 운전면허 없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 따고 들어갈게요. 약속" 그 말을 하고 2개월이 지났다. 입대가 다음 주인데, 도로 주행 연습은 시작도 안 한 상태. 눈 질끈 감고 잔소리 몇 번 들으면 훈련소일 텐데, 하루하루 흘려보내기도 아까워 죽을 노릇인데, 벌써 별의별 변명거리만 궁리하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슬펐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서, 6시간만 연습하면 딸 수 있는 운전면허조차 따기 싫어 도피하는 부질없는 사람이 되었다. 고작 14개월 만의 일이었다. 1년 넘게 반복된 도전과 좌절은 꽤 치명적이었다. 노력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는 과정은 먼 옛날의 일만 같았다. 나는 무언가를 시작하고 매듭지을 수 없는 사람이 됐다. 그렇게 글에 대한 스터디, 일본어 공부, 교지 활동, 그 무엇조차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입대만을 기다리며 일상을 보냈다.운전면허도 마찬가지였다. 생각은 늘 비슷하게 흘러갔다. 곧 1년 반 쉬는데 굳이 새로운 도전을 할 필요는 없었다. 사서 고생할 바에 한 끼라도 더 맛있는 거 먹는 게 합리적이라고 느껴졌다. 열심히 노력했는데 떨어지면 정말 개쪽이었다. 쥐구멍에 들어가는 정도론 끝나지 않을 일이었다.침대에 누워 두 시간 동안 멍하니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군대에 들어가 무기력의 관성에 잠기고 싶지 않았다. 경기도의 한 운전면허 학원에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6시간 치 수업을 모두 예약하고, 학원비를 입금했다. 왕복 3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학원에 찾아가 이틀간 수업을 듣고, 정말 오랜만에 필기도 하며 코스를 외웠다. 그렇게 입대가 겨우 3일 남은 목요일, 아슬아슬하게 운전면허를 땄다.기뻤다. 온갖 호들갑을 떨며 친구들에게 운전면허를 땄다고 자랑했다. 그깟 운전면허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오랜만에 나의 힘으로 온전히 무언가를 이뤄내는 경험은 꽤 벅찼다. 그제야 깨달았다. 한번 느끼기 시작한 무력감은 어떻게 사람을 늪에 서서히 잠기게 하는지, 그리고 한번 경험한 성취감은 어떻게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지.나는 그 이후로 놀라울 정도로 나아졌다. 친구들과 함께 밥 먹는 순간의 소중함을 다시 느꼈고, 어떤 주제에 대해 몇 시간이고 떠들 수 있는 즐거움을 다시 얻었다. 그렇게 입대가 하루도 채 안 남은 지금, 그렇게 미루고 미루던 운전면허 덕분에 스스로를 되찾을 수 있었다.기약 없는 내일을 기다리는 삶은 무척이나 지치고 고통스러웠다.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학생들이 많았고, 작년을 담담하게 지낸 이들도 봄을 보내며 하나둘 무너져갔다. 마치 모래사막을 걷는 것처럼, 앞으로 발을 내딛어도 제자리에 돌아오는 듯했다.그리고 지금, 나는 그들에게 말을 전하고 싶다. 잠시 멈췄다 발을 내딛어도 괜찮다고. 우린 한 번의 좌절로 멈출 수 있지만, 한 번의 행복으로 또 나아갈 수 있다고.운전면허 학원에서 강사가 건넨 한마디가 떠오른다. "거, 힘내라는 말은 못 해주는데 사탕이라도 입에 하나 넣어줄 테니까 천천히 먹으쇼" 썩 맛없던 그 싸구려 사탕은, 왠지 모르게 힘내라는 말 열 마디보다도 위로가 됐다. 부디 여러분에게도 싸구려 사탕 같은 순간이 찾아오길. 
2025-05-06 05:00:00젊은의사칼럼

우리 아들이 이세계 전생을 한 것 같아

[메디칼타임즈=인제의대 4학년 김성재 ]"3개월 전에 아들이 죽었어. 하지만 나는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우리 아들은 이 세계로 전생을 한 것 같으니까..."하야마 미오는 3개월 전 하나뿐인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게 된다.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시간의 끝에 그녀가 내린 결론은 다소 코믹해 보이기도 한다. 갑자기 트럭에 치여서, 다른 세계로 전생하고, 세상을 구하고 돌아온다는 아들이 즐겨 읽던 만화의 서두를 보고서 말 한마디 섞어본 적 없던 고등학교 동창을 떠올린 것이다."우리 아들이 죽었어. 하지만 우리 아들은 이 세계 전생을 한 것 같아. 넌 학창 시절부터 그런 만화를 봤잖아. 다시 돌아올 방법을 찾아줘."본 만화의 장르는 판타지가 아니라 드라마다. 등장인물들은 이 세계를 넘나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표지 속에서 상복을 입은 채 아들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하야마 미오의 표정은 어째서인지 차분하다.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들이 죽지 않고 이 세계에서 세상을 구하고 있노라고 믿고 있다. 방어기제 부정(Denial) 혹은 합리화(Rationalization)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는 이 세계로 가는 방법을 닥치는 대로 모색하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도망치는 것은 안락하다. 현실에서도 말이다. 나 역시 회피를 즐겨 한다. 내 인생의 신조는 오로지 건강과 행복이기에 귀찮고 복잡한 것은 미루고 나중에 생각한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알 수 없기에 현재만을 살아간다. 나는 그냥 하루하루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산다. 주로 기분이 좋다.그러나 나에게는 아쉽게도 영원히 도망칠 수 있는 각력과 심폐지구력이 없다. 결국 모든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저주로 남아 삶을 황폐화하고, 언젠가는 더 크게 몸집을 불려 필연적으로 다시 등장한다. 특히 밤에.잠을 청하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은 후회스러운 과거와 불안한 미래. 회피는 회피일 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고통으로 돌아오는 것은 필연이다. 사실은 괴롭다.하야마 미오 역시 이 세계로 향하는 방법을 찾으며 울기도 웃기도 하지만, 결국 극단적인 상태로 치닫게 된다. 그녀는 영원히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떠올린다."아, 이거? 죽으려는 거 아니야. 이 세계 전생하려는 거지"그때 헐레벌떡 달려온 그의 동창 도바라 토모타는 지난 며칠 동안 미오의 이 세계 연구를 도운 장본인이다. 이 세계 전생이라는 소재를 매우 좋아했던 그는 그녀에게 외친다."이 세계는 없어요. 저는 그 세계를 정말 좋아해요. 제게 있어서 이 세계란 구원이고, 꿈이고, 근사한 것이죠. 그러니까... 이 세계가 꿈만 같은 지어낸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어요"방어기제가 붕괴한 미오는 몹시 괴로워하지만, 작품에서 최초로 감정을 한껏 드러내며 울부짖는다. 죄책감, 고통, 절망. 댐이 개방되어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듯 분출되면 그 후에 남은 것이 있다.나를 위해 이곳에 달려온 토모타, 그와 함께 이 세계를 연구한 허무맹랑하지만 즐거웠던 시간. 그저 그곳에 존재할 뿐인 자연,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했던 기억. 이들은 미오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고통만이 그녀의 전부가 아니라는 증명이었다.미오는 그간 진실로부터 도망쳐왔다. 과연 미오가 아들이 이 세계에 살아 있다고 믿었던 시간은 '회피'이기 때문에 그른 것이었을까? 나는 조금 다르게 그 시간을 '휴식'이라고 표현하고 싶다.미오는 훌륭한 방어기제를 펼쳐 우선 자신의 신체를 안정시켰다. 이 세계의 존재는 미오에게 당장 오늘을 살아갈 힘을 주었다. 밥을 먹게 해주었고 잠을 자게 해주었다.그렇게 번 시간 동안 토모타와 함께 웃을 수 있었고, 그 기억이 다시금 그녀를 지지하는 뿌리가 되었다. 그녀는 본인도 모르게 다시 살아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다.이 세계가 가짜임을 알게 된 순간, 그녀는 미뤄뒀던 숙제를 하듯 감정을 고통스럽게 소화했지만,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흔들거리면서도 끝내 일어설 수 있었다. 그 모습은 측은하면서도 숭고했다.몇 시간이 흘렀을까, 미오는 아들이 없는 이 세계가 이미 이 세계로 느껴지기에 새로 시작해야겠다고 말한다. 비록 모든 것이 완벽한 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그녀에게 다음이 주어졌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감당할 수 없는 것들과 맞닥뜨린다. 영원한 회피란 없기에 언젠가는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투쟁의 과정이 무결할 필요는 없다.완벽하지 않아도, 극적이지 않아도, 평범한 우리는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중요한 것은 보급이다. '무조건 회피'가 아닌, '일단 휴식'하는 것.삶은 장기전이기에 우리의 전술은 휴식과 보급을 고려해야만 한다. 체력을 안배하고 마음이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자. 괴로운 것 말고도 우리의 삶을 이루는 것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깨닫자.나는 이런 핑계를 대고 또 복잡한 것으로부터 달아난다. 고민해야 할 일이 많지만 운동을 하고 오토바이에 올라타 목욕탕으로 향한다. 개운하게 나오면 우유 한 잔 마시고, 집에 와서 나른하게 만화를 읽는다.이 순간이 영원한 낙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다. 토모타의 말처럼 현실에 이상향은 없으니까.그럼에도 내색 없이 지쳤을 나의 정신과 육신을 달래려 '휴식'한다. 나약한 나는 그래야만 다음 날 전장으로 복귀할 수 있다.물론 모두의 상황과 방식은 천차만별이니 감히 말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다 행복하자고 하는 일 아니겠는가.때론 괜한 마음 졸임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보다는 그저 잘 먹고 잘 잤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5-04-28 05:00:00젊은의사칼럼

죽음에서 배운 것

[메디칼타임즈=가톨릭관동의대 1학년 정지은 ]한 달 전,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죽음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갑작스레 혼수상태에 빠지신 뒤 위태롭게 이어지던 숨결은 끝내 멈췄고, 이후 모든 것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삼일장을 치르고, 염을 하고, 화장을 하고, 마지막으로 마주한 할머니는 한 줌의 뼛가루로 남아 계셨다.몸이 불편하셔도 예쁜 옷을 고르고 반짝이는 귀걸이를 즐겨 하시던 분이, 작은 통 하나에 담겨 외할아버지 곁에 안치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스물다섯이 되어서야 비로소 죽음이라는 것을 실감했다.병실에서 마지막으로 잡았던 손의 온기가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 "할머니, 나 왔어. 조금만 일어나 봐요" 속삭이며 손을 꼭 쥐었던 그 순간, 내 목소리에 맞춰 심박수가 아주 미세하게 반응하던 모습에 잠시나마 희망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너무 조용히, 그리고 너무 빠르게 사라졌다. 허무했다.불과 며칠 전만 해도 함께 식사하며 "우리 강아지 예쁘다"고 웃으시며 용돈을 쥐여 주시던 그 모습이 선명한데, 이제는 더 이상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낯설고 아득했다. 살아 있는 동안 쌓은 기억들은 단단하게 느껴지지만, 그것이 얼마나 쉽게 흩어질 수 있는지를 마주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밀려왔다. 아, 죽음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항상 '뇌출혈로 쓰러지신 할머니를 보며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문장을 초등학생 때부터 생활기록부 장래 희망 칸에 써왔던 나였다. 하지만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에 의사를 위한 길을 걷고 있는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생명을 살리는 기술을 배우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죽음을 피하는 법'에 집중한다. 더 빠르게 진단하고, 더 정확하게 치료하며, 위기를 예측하는 법을 익힌다. 나 또한 더 열심히 공부하면,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지금까지 굳게 믿어왔다.하지만 환자의 호흡이 점차 옅어지고, 심전도의 파형이 수평선이 되는 그 침묵의 순간은 그 어떤 책도, 교수님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 어딘가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내미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모든 기술과 지식이 무력해지던 그 순간, 한 번도 진지하게 물어본 적 없는 질문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의사는 병을 다루는 법은 배워도, 사람을 이해하는 법은 얼마나 배우고 있는 걸까.의대생들이 해부학 실습에서 바라본 장기들, 강의실에서 오가는 병명들 사이로는 한 사람의 삶과 기억, 관계가 좀처럼 스며들 틈이 없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병원의 풍경도 마찬가지이다. 환자는 종종 '케이스'로 불리고, 병의 흐름은 수치로 정리된다.하지만 마지막 순간의 할머니를 떠올리며, 나는 처음으로 그 수치 하나하나에 감정의 결과, 관계의 무게가 실려 있음을 실감했다. 책 속의 질병과 병실 속 한 사람 사이에는 말로 다 전해지지 않는 간극이 존재했다.그리고 그 거리를 기꺼이 좁히려 애쓰는 일, 고통과 이별의 순간을 함께 견디는 태도야말로, 우리가 오래도록 길러야 할 감각일지도 모른다. 무표정한 숫자 뒤에 숨은 마음을 헤아리고, 침묵 속 말해지지 못한 의미를 읽어내는 일…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의사가 평생 익혀야 할 진짜 언어일 것이다. 병을 고치는 사람이라는 역할 이전에, 생의 끝자락에 선 누군가의 마음을 끝까지 들여다보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서야 조금씩 배워간다.겨우 출발선에 선 나는 여전히 서툴고 흔들리는 의대생이지만, 예전보다 조금은 더 여문 마음으로, 누군가의 마지막을 외롭지 않게 함께할 준비를 하려 한다. 나의 글을 읽는 당신도 어쩌면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마주하고 나처럼 상실감이 클지도 모르겠다.흔들리고 있는 당신에게, 그 감정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그 시간이 당신을 더욱 깊고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 이 길의 끝에서 또 다른 이의 이별을 조금 덜 쓸쓸하게 안아줄 수 있기를.
2025-04-21 05:00:00젊은의사칼럼

퍼펙트 데이를 완성하는 법에 대하여

[메디칼타임즈=경북의대 2학년 노정연 ]칼럼을 기고하기 시작한 지 어느덧 약 6개월이 지났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네 편의 글을 작성해 오면서 이번만큼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가 막막했던 순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불운과 불행이 연이어 몰려오는 듯한 요즘입니다. 상식이라 믿었던 것들은 점점 퇴색되어 가고, 곳곳에서 마음 아픈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너무 거대해서 도저히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불행이 주변을 맴돌고 있는 듯합니다.개인적인 불행을 다루는 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방안을 마련해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광범위한 불행에 대해서는 아직 면역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셨거나, 하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정답을 드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시의성 있는 글을 쓴다는 건 참 어렵습니다.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고, 어제의 해답이 오늘의 오답이 되는 일도 부지기수이기 때문입니다. 희미한 낙관이 구체적인 절망으로 변질되어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오기도 하고요.당연히 저는 이 모든 걸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아마도 모두가 그런 것처럼요. 무엇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면, 무엇이 어떻게 바뀔지를 두려워하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을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이 더 나은 해결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거대한 문제에 직면한 사람은 패닉에 빠지기 쉽습니다. 상황에 대해 열렬한 분노를 쏟아낼 수도 있고, 외압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찾아오는 무기력감에 허우적대기도 하죠. 저 또한 여러 비극적인 소식들을 접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절 괴롭혔던 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하지만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것은 목적 없는 분노와 무기력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해답 중 하나를 한 영화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퍼펙트 데이즈>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퍼펙트 데이즈>는 한 화장실 청소부의 일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언뜻 보면 거창해 보이는 제목과 달리 영화의 내용은 그렇게 흥미진진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한 남자의 반복되는 일상을 따라갈 뿐이라서요. 그는 매일매일 그에게 주어진 일과를 성실히 수행합니다.일과가 끝난 후에는 분재를 가꾸고, 헌책방에서 책을 사서 읽고, 올드팝을 듣거나 카메라를 다루기도 하면서요. 또한 동료나 가족이, 혹은 생면부지의 타인일지라도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처하면 본인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도움을 줍니다.처음 영화를 시작했을 땐 다소 뜬구름 잡는 듯한 느낌이 들던 제목이었지만, 영화를 다 본 후엔 이보다 완벽한 제목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꼭 엄청난 무언가를 해내지 않아도, 매일이 비슷한 하루인 것만 같아도 '퍼펙트 데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성심성의껏 스스로를 돌보며, 자신을 돌보듯 타인을 돕는 삶.꼭 거창한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당장 모든 상황을 바꾸진 못하더라도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바꿔 나가는 것. 가장 쉽지만 또 어려운,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삶의 태도가 아닐까요? 저는 이보다 더 완벽한 해답을 찾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흔히들 현재를 제외한 시간대, 즉 과거나 미래를 떠올릴 때면 주요 사건들을 위주로 단편적인 장면들을 떠올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결론 또는 결과가 조명되고, 그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과정은 잊히기 쉽습니다. 그래서인지 일상을 돌보는 일의 중요성까지 같이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더 공을 들여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스스로를 잘 돌보는 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한 발짝 더 나아가 본인이 할 수 있는 일로서 타인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의 하루를 '퍼펙트 데이'로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그로 인해 스스로의 진정한 '퍼펙트 데이'를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모두 각자의 '퍼펙트 데이'를 완성하실 수 있기를 바라고 있겠습니다.
2025-04-14 05:00:00젊은의사칼럼

흰 가운을 입고 다시 마주한 의학과 기술

[메디칼타임즈=경북의대 이진규 졸업생 ]4년이 흘렀다. 풋내기 본과 3학년이었던 내가 이제는 흰 가운을 입고 환자를 진료한다. 학생 시절, 넘치는 패기를 담아 세 차례 기고한 글에는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모든 의대생이 임상의사를 꿈꾸는 것은 아니며, 의사는 병원 밖에서도 환자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의사가 되어 그때 썼던 글을 다시 읽으며 당시의 열정과 지금의 현실을 음미해 본다. 감회가 새롭다."이 기술이 과연 환자에게 도움이 될까?"8년 전, 의료기기를 연구하는 대학원생이던 나는 이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공학적으로 혁신적인 기술이었지만, 실제 환자에게 닿지 못하는 현실이 답답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의문에 대한 답을 공동 연구하던 의대 교수님으로부터 들려왔다."미안하지만, 환자들한테 별 도움 안 될 것 같은데요?"그때 나는 땀에서 전해질 농도를 측정하는 센서를 개발하고 있었다. 며칠 밤을 지새우고, 지도교수님에게 혼나기를 여러 차례, 대학원생의 피와 땀이 스며든 결과물을 들고 의대 교수님께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돌아온 대답은 냉담했다."전해질 수치를 매일 재는 사람은 없어요. 입원해서 내일모레 하는 중환자라면 모를까"그 말은 마치 사형선고처럼 차가웠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다음 날, 지도교수님께서 센서 디자인을 완전히 바꾸자는 연락을 주셨다. 그동안 정들었던 센서들을 모두 폐기 처분해야 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의사가 그렇다면, 그런 거니까.대학원 과정 내내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나를 괴롭혔고, 그 괴로움에 두 발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대학원에서 의과대학으로, 그리고 대학병원으로. 그동안 나이 앞자리가 바뀌었고, 세상도 많이 변했다. 나는 이제 겨우 흰 가운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는데, 기술은 이미 저 멀리 앞서가고 있었다.이른 아침,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와 컴퓨터 앞에 앉는다.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Perplexity로 최신 협심증 진료지침에서 달라진 내용이 있는지 확인한다.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며 어제 숨이 차다고 왔던 환자의 심전도 결과를 확인한다.심전도 사진을 찍어 ECG Buddy 앱의 분석 결과와 내가 생각한 해석을 한 번 더 확인한다. 결국 환자를 더 큰 병원에 의뢰하기로 결정한 후 진료 의뢰서를 적는다. 작성한 문서가 어색하거나 오타가 없는지 최종 확인을 위해 ChatGPT의 도움을 받는다.이처럼, AI는 이제 우리 삶에서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이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ChatGPT 없이는 문서 작업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의료에서도 마찬가지다. AI는 이미 의료 현장 곳곳에 도입되었다. 환자가 하는 말을 실시간으로 듣고 요약한 뒤 진료 차트에 자동으로 입력하는 서비스, AI를 활용한 흉부 X-ray 판독, 피부 질환을 진단하는 분석 서비스 등이 대표적이다. 대학병원에서도 AI의 역할은 점점 커지고 있다. 위암 수술에 사용되는 복강경에 AI 기술이 도입되어 실시간으로 혈관과 구조물을 식별하고, 보행 장애 환자의 걸음 패턴을 분석해 개인 맞춤형 치료법을 제안하기도 한다.그러나, 의료 현장에서의 파괴적 혁신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소프트웨어로 시작한 AI 혁신이 로봇과 같은 하드웨어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 AI 기반 내시경은 이미 초보 소화기내과 의사보다 높은 정확도를 보이며, 사람의 피부처럼 온도, 압력, 습도를 감지하는 전자 피부도 개발 중이다. AI와 로봇 기술의 발전이 의료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고 있다.4년 전 기사의 마지막 문장에서는 '눈앞으로 다가온 기회 혹은 위기를 적극적으로 붙잡으라'고 외쳤다. 그러나 지금 의사가 되어 마주한 위기는 훨씬 더 가까이 와 있다. 다시 말해,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기회가 있다. 기회는 용기 있는 자가 차지하는 법이다.4년 전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묻는다.두 눈과 두 발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냐고.
2025-04-07 05:00:00젊은의사칼럼

성장, 휴학을 통한 성찰

[메디칼타임즈=단국대학교 의대 본과 3학년 박정은 ]우리 집엔 수학의 정석 같은 다이어리가 많았다. 흑심 자국이 삼월을 넘어서는 다이어리를 찾기가, 중고서점에서 집합 단원 이상으로 필기 된 수학의 정석을 찾는 일만큼 어려웠다. 그러다 작년에 드디어 (혹은 기어코) 나는 일 년간의 일기 쓰기 완주에 성공했다. 디지털로 기록해 아날로그 다이어리들은 이번에도 아쉽게 되었지만.최근 궁금한 마음으로 내가 쓴 일기를 들춰봤다. 그새 많은 일, 생각, 감정이 시간을 메웠기에 몇 개월 전의 내가 얼마나 낯설까 설레기도 했다. 슥 훑자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5월, 6월, 7월, 10월… 성장 이야기를 하지 않는 달이 없었다.귀신이 씌어도 어떤 이름을 가진 것이 씌어야 이렇게 줄곧 '성장, 성장' 염불을 외우려나 고민을 잠깐 해봤다. 일기의 첫 장에서 내가 세운 가장 높은 목표는 좋은 성적을 받아 큰 병원에서 수련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나는 더 큰 꿈을 진심으로 이루고 싶어 했다.또 하나 발견한 사실은 나의 고민의 결이 항상 비슷하다는 것이다. 성장을 향한 열망과 다른 중요한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잃고 주기적으로 풍랑에 휩싸인다. 벌써 올해 새 일기장에서 비슷한 갈등 구조를 가진 고민이 등장했다. 부끄럽지만 함께 페이지의 내용을 엿보러 가자.휴학 중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과 경험, 독서는 내 진로의 청사진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특히 내가 해외 수련이라는 가능성을 고려하게 된 것은, 모순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스스로에게 큰 충격이었다.나는 금요일만 되면 본가로 갔다가 월요일 아침에서야 수업시간을 맞춰 학교로 내려왔을 만큼 유독 가족애가 끈끈했다. 이것이 한반도 해안선을 따라 결계를 친 것도 아닐진데, 나는 한국을 벗어나 산다는 생각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탄생과 죽음은 내게 만고불변의 진리였다.그런데 내 세상이 넓어지자 '가장 먼저 적용되는 신약, 합리적인 규제 체계, 열려있는 연구 환경'이 실로 얼마나 매력적인 조건인지 강력하게 체감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내 안에서 '외국에서 살 수도 있는 거지 뭐'하는 입장이 등장했다. 곧바로 '가족은?'이라는 질문이 이제껏 그랬듯 간단히 반동을 제압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놀랍게도 내 머릿속에서는 성장하기 위해서라면, 더 큰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서라면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고통을 불가피한 희생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는 입장이 우세했다. 스스럼없이 성장이라는 가치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넘기려 했다.하지만 그런 낯선 내 모습에 곧 죄책감과 두려움, 회의감이 수묵처럼 번졌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해? 무엇을 위해서? 성장만으로 삶이 충족될 만큼 이 가치가 절대적인가? 생각이 충돌하고 갈등이 발생해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지금 알을 깨고 있어서 아픈 건지, 알이 아닌 것을 깨고 있어서 아픈 건지 혼란스러웠다.우리가 살아가는 이 무한경쟁 시대는 성장을 신앙처럼 권장한다. 미디어는 꿈을 크게, 그리고 거침없이 꾸는 것이 논의의 여지없는 선이라고 주입한다. 허풍 같은 목표를 내뱉고 끝내 그를 실현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경제경영 매대에 놓여 있을 뿐, 독자의 태도를 보면 신화와 다를 게 없다.하지만 꿈이 자애롭다는 생각은 순진한 믿음이다. 꿈이 주는 황홀한 이미지에 지나치게 빠지면, 꿈은 그사이 우리 뒷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슬쩍 차간다. 바로 현실을 소중히 여기는 감각이다. 그것을 빼앗기면 성장이라는 미명 하에 현재의 행복과 즐거움을 계속해서 미루게 된다. 그리고 미룬 것들은 친절하게 적립되지 않는다.전부 소멸될 운명일 뿐이다. 겸연쩍은 고백으로 예를 들면, 내 주변에는 성장과 일에서 순수한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유독 많다. 이 편향성은 내가 그런 친구들을 찾아 나선 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성향을 가진 친구들과의 만남을 미루고 늦추다 결국 잃게 된 소산이기도 하다.하나의 가치는 세상을 바라보는 제한된 렌즈일 뿐, 결코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다. 인간의 삶은 다채로운 색상이 어우러진 팔레트다. 사랑, 신의, 친절, 지적 탐구, 예술적 감상, 유머, 자연과의 교감 - 이 모든 경험이 성장과 “함께”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비로소 충만한 삶이 완성된다.성장은 이 가치들 사이에서 특별히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위치에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위치 조정에 실패하고 하나의 가치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인생의 결말은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 안전하게 확인할 수 있다.)시간의 터널을 지나 내 일기장을 들춰보며, 나는 뜻밖에도 내면의 갈등 패턴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현재의 행복을 미루는 습관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내 삶에 자리 잡았는지 깨닫고, 현재는 이를 쫓아내 그 자리에 여유를 다시 심으려 노력 중이다.무한히 이어지는 성장의 계단을 오르며 그 속도를 유지하거나 가속하는 데 집착하기보다, 이제는 계단 곳곳에서 멈춰 주변을 둘러볼 여유와 지혜를 얻게 된 것이다. 성장은 여전히 내게 중요한 가치이지만,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지 않는다. 현재에 단단히 뿌리내린 꿈만이 진정으로 실현되며, '최대'가 아닌 '최선'의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당장 깨달음이 생생하더라도, 결국 가치 사이 최적의 균형점을 잡기 위한 흔들림은 삶의 전반에 걸쳐 계속될 것이다.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한쪽으로 기울더라도, 하지만 나는 이 두 세계 사이에서 나만의 중심을 찾아가는 여정을 명랑하게 이어갈 것이다. 삶의 방랑자로서, 목적지 만큼이나 그 길 위에서의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2025-03-31 05:00:00젊은의사칼럼

'삶'을 치료하는 법

[메디칼타임즈=건국의대 3학년 김채연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진료를 이어온 라파엘클리닉의 일요일은 언제나 온갖 국적의 노동자들로 분주하다. 그러나 정신과 클리닉을 개시한 첫날, 정신과 선생님과 보조 봉사자였던 나는 한참이나 목을 빼고 환자를 기다려야 했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서, 혹은 정신과 진료라는 이름 자체가 생소하기에 정신과 클리닉을 찾는 환자가 드물었기 때문이다.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이어가던 몇 마디 화제도 떨어져 가던 참이었다. 이대로 환자 한 명도 보지 못한 채 첫 진료를 끝마치게 되는 걸까 하는 걱정이 들던 차에, 드디어 첫 환자가 왔다. 순박한 눈망울의 동양계 중년 남환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몇 년째 밤에 잠들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정신과 진료와 다른 과와의 가장 큰 차이점 중의 하나는 문진의 상세함이다. 물론 개인차도 있겠지만, 정신과에서는 환자의 정신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 직업이나 생활 습관과 같은 세세한 질문을 반드시 던져야만 한다. 불면증이라는 진단명을 입에 올리기 전 선생님은 환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부드럽게 물으셨다.환자는 한국에 온 지 10년이 넘었고, 방글라데시에 아이들을 두고 왔다고 했다. 공장에서 일하며 교대근무를 하기에 밤낮이 바뀐 생활을 일주일에 절반가량하고 있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불면 경향이 3년 전, 아내의 불륜으로 이혼을 겪은 이후로 심해졌다.이런 식으로 인내심을 갖고 차분히 환자의 내력을 듣는 것이 정신과 치료에선 아주 중요하다. 증상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라포 형성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기숙사나 작은 원룸이 그들이 한국에서 잠을 청할 수 있는 공간의 전부다.교대근무 때문에 밤에 일을 해야 하기에 잠을 쫓아내는 커피는 달고 살아야 한다. 대부분은 한국어나 영어가 그렇게 유창하지 않고 속을 털어놓을 가족도 멀리 있는 경우가 많으니 자기 이야기를 나누기 쉽지 않을 거라 짐작했다.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은 환자는 진료가 끝난 이후 정신과 선생님에게 '당신은 정말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는군요!' 라며 기분 좋은 미소를 건넸다. 정신과 진료가 처음이라던 환자는 삼십 분이 넘는 진료 끝에 홀가분한 얼굴로 진료실을 나섰다. 선생님께 받은 수면 위생 교육과 미량의 수면제 처방전을 손에 쥔 채였다.나는 라파엘 클리닉에서 3년 정도 꾸준히 봉사를 했지만, 이런 식으로 클리닉을 찾는 이주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밀접하게 들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환자 중심적 치료로 의학의 패러다임이 바뀌고는 있다지만 환자의 질병의 원인을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한정된 시간 안에 정보를 뽑아내야 하는 의사들이 환자 개개인을 온전히 알아가기란 여전히 쉽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이주노동자와 같은 의료 소외계층은 라파엘클리닉으로 많이 몰리기 때문에 한 명 한 명을 다룰 시간이 길지 않아, 정신과에서 이렇게 그들을 알아갈 기회를 얻은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사회의 '사각지대'에 있는 환자들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꺼내 놓을 상대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들에 대해 들을 기회가 없었더라면 나 역시 그런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평생을 흘려보냈을지도 모른다.육체의 병도 마음의 병도 결국은 삶에서 비롯되는 것이니만큼 병을 제대로 마주하고 치료하기 위해서는 환자의 삶에 대한 이해가 필수이다. 그걸 위해서는 평소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내 삶의 등장인물이 아닌 그들 자체로 온전히 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의 입체적인 고통이 있음을 이해하고, 기꺼이 그 고통을 수반하는 삶을 탐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의사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삶'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아닐까.정신과 진료의 문턱이 많이 낮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정신과 약은 마약성 약물이라고, 정신과에는 '미친' 사람들만 간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정신과도 다른 과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람을 치료하기 위한 곳이고, 다른 과에서 듣기 힘든 환자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장소이다.그러니 앞으로도 더 많은 이주노동자가 이런 사실을 깨닫고 정신과의 문턱을 넘어 주었으면 좋겠다. 아주 유창한 대화를 할 수는 없을지라도, 언제나 그들의 말을 듣기 위한 선생님과 봉사자들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해당 사례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2025-03-24 05:00:00젊은의사칼럼

불완전한 내일을 향해

[메디칼타임즈=김승직 기자]매년 새해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찾게 되는 곳이 있다. 새로운 시작과 함께 신선한 자극을 마주하고 싶은 마음에 안국역 근처 국립현대미술관을 찾는다. 현대미술은 때로는 난해하고, 때로는 불편하며, 때로는 충격적이기도 하다.하지만 그 속에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예술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대의 아픔과 희망, 불안과 열망을 표현한다. 예술에 대해 문외한이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매력적이다. 작품 앞에 서면 틀린 해석도, 부족한 이해도 없다. 오히려 그 불완전한 해석 속에서 더욱 풍부한 작품의 의미를 만들어낸다.이번 방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관람객들의 소망을 실시간으로 반영해 가상현실로 구현하는 인터랙티브 설치였다. 참여자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세상을 키워드로 입력하면, 그것이 하나의 가상세계로 만들어지는 흥미로운 시도였다.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 결말이었다. 모두의 '선한 의도'로 시작된 소망들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결국 세계의 종말로 귀결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었다. 수천 번을 새롭게 시도해도 대부분의 결론은 '멸망'이었다. 개인의 작은 소망이 모여 예상치 못한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내는, 마치 나비효과 같은 현상이었다.이 작품이 더욱 깊이 다가왔던 것은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게임, 웹툰, 드라마에서 유행하는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 소재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완벽한 삶에 대한 갈망을 반영한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올바르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 그리고 그 속에서 찾고자 하는 진정한 행복에 대한 열망.작품 속 참여자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키워드를 입력하며 다른 결말을 찾으려 했던 것처럼, 우리도 완벽한 세상을 향한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려는 시도는 때때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으며, 선의의 개입조차도 복잡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에 의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곤 한다.이러한 예술적 통찰은 지난해 우리가 겪은 사회적 혼란과도 맞닿아 있다. 특히 의료계를 둘러싼 갈등은 단순한 정책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가치 충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의료 정책 개혁을 추진하는 정부와 이에 반발하는 의료계의 대립은 단순한 이해관계를 넘어, 의료 시스템의 본질과 윤리에 대한 논쟁으로 확산되었다. 문제는 어느 쪽도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불신과 반목만 깊어졌다는 점이다.이는 미술관에서 본 가상현실 작품과도 닮아있다. 참여자들은 각자의 희망을 입력하며 이상적인 사회를 그려보려 했지만, 결국 예상치 못한 균열과 붕괴를 목격해야 했다. 의정 갈등 역시 각자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나, 결과적으로 사회적 혼란과 의료 시스템의 불안을 초래했다.작품이 보여준 것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다. 선의가 반드시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현실이었다. 복잡한 사회 구조 속에서 개인과 집단의 의도는 끊임없이 변형되며, 때로는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왜곡되기도 한다.그러나 현실의 벽에 가로막힌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그 가능성을 좇는다. 현실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본능적 열망이 우리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것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현실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며,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방식이다.어떤 현실이 닥치더라도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도전한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도, 선의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미술관에서 마주한 작품처럼, 우리의 삶도 완벽한 답을 찾을 수 없는 끝없는 탐구다.현대미술이 난해하면서도 매력적인 이유는 정답이 없기에 각자의 시선으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신념과 가치가 충돌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고민하며 나아간다. 때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기대와 다른 결말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상을 향한 여정을 멈추지는 않는다.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것은 단순한 이상주의가 아니라, 삶을 견디고 의미를 찾는 인간의 방식이다. 비록 도달하지 못할 이상향일지라도,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더 나은 가능성의 문을 열어준다.새해의 첫걸음을 내딛으며 다시 한번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 세상을 바라는가? 우리의 작은 바람들은 어떤 파장을 만들어낼까?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도 길을 찾고자 하는 이 과정 자체가 어쩌면 이상향을 향한 가장 인간적인 여정일지 모른다. 그러니 오늘도 우리는 걸어간다. 불완전하지만 아름다운, 더 나은 내일을 향해.
2025-03-17 05:30:00젊은의사칼럼

잠시 멈춘 발걸음, 새로이 보인 세상

[메디칼타임즈=고려의대 2학년 강지민 ]얼마 전, 지난해 다리 골절로 인해 삽입했던 철심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병실에 누워 있는데, 작년 여름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몸속 이물질을 제거했다는 후련함보다도, 다리를 다쳤던 그 시간이 내게 남긴 흔적이 더 깊었다.남들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골절이라지만, 그 골절이 내게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한순간에 찾아왔다. 격한 운동을 한 것도 아니었고, 주의를 다른 데 두고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계단에서 살짝 삐끗한 대가로 갑작스러운 중족골 골절과 전치 6주 판정을 받았다. 그렇게 6월의 첫날, 여행을 비롯한 모든 일정을 취소한 채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게 되었다.한 달 반 간의 요양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옷을 입고, 씻고, 물을 따라 마시는 것과 같이 이전까지는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던 일상생활이 수 배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 되었다. 집 안에서도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는데, 집 밖은 단순한 불편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고난의 연속이었다. 목발을 짚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정상인'을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처음으로 버스를 탄 날을 잊을 수 없다. 슬슬 밖으로 나가도 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신나서 목발을 들고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낑낑거리며 신발을 신고, 경비실 앞 계단을 내려오니 벌써부터 팔이 저리고 목발을 지지하는 겨드랑이가 아파왔다. 일부러 저상버스가 오는 시간에 맞추어 정류장으로 나갔지만, 그 배차간격이 길고 또 불규칙적이라 타기가 어려웠다.그렇다고 일반 버스를 타자니, 계단이 가팔라 승하차가 두려웠다. 지하철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빠른 환승' 칸을 알려주어 애용하던 지도 어플에는 엘리베이터 위치가 제대로 표시되지 않았고, 대합실로 올라와도 외부로 나가려면 또다시 엘리베이터를 찾아 헤매야 했다. 심지어 서울역에서는 택시 승강장까지 내려가는 길의 에스컬레이터가 멈춰 있어 계단을 붙잡고 한 발 한 발 내려온 적도 있다.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물리적 불편함이 아니라, 사람들의 태도였다. 목발을 짚고 있으면 당연히 자리를 양보받을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나는 여태껏 대중교통에서 단 한 번도 노약자석에 앉아본 적이 없었고, 앉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버스에서 아무도 노약자석에서 일어나지 않아 결국 임산부석에 앉았던 날, 큰 충격을 받았다.그 자리마저 한 아주머니가 양보해준 것이었다. 물론 외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개개인의 사정이 있겠거니 하면서도 '내 깁스와 목발이 보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일부러 짧은 하의를 입어 깁스를 드러냈음에도 좌석을 빠르게 채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3~40분을 서서 지하철을 탄 날도 있었다.그때 깨달았다. 지금껏 수도 없이 대중교통을 탔는데도, 왜 나는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를 탄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는지를 말이다. 물론 지금 당장 본인의 힘듦이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겠지만, 그 기저에는 사람들의 무관심이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정상인'일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교통약자를 위한 배려가 왜 필요한지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그리고 사실, 나 역시도 다리를 다치기 전까지는 이러한 문제를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 역시 '정상인'의 입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이러한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었다. 내 어려움이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교통약자를 얼마나 배려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라는 점이었다. 지나치게 짧은 횡단보도의 초록불 시간, 보행 보조 기구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은 도로 설계, 그리고 이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까지—이제는 그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잠깐의 경험이었지만, 나 역시 교통약자의 입장이 되어 보니 그들의 어려움이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 비로소 보였다. 이전의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곳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뼈저리게 느꼈다.우리는 누구나, 언젠가는, 약자가 될 수 있다. 어린이, 노인, 임산부, 그리고 다리를 다친 누군가.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정상적인' 사람들만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고, 그 구조는 쉬이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적인 우리의 인식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누구나 교통약자가 될 수 있으며, 그 불편함을 줄이기 위한 배려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것이다. 상투적인 말일 수 있지만, 작은 관심들이 모이면 이동 약자에 대한 배려가 당연하다는 사회적 풍조가 형성될 것이고, 이는 결국 기존의 정상인을 기준으로 설계된 사회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개선되는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이동의 자유는 단순한 편의가 아닌 인간의 기본적 권리다. 그리고 그 권리가 모두에게 보장될 때, 비로소 사회는 성숙해진다. 비록 속도는 다르더라도, 모두가 불편함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소망한다. 
2025-03-10 05:00:00젊은의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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