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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없는 도시 필수의료 존속할 수 있나

[메디칼타임즈=손문호 칼럼위원]얼마 전 한 중앙지는 「올해 '입학생 0명' 초등학교 전국에 210곳… 5년 전보다 81% 늘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충격적인 통계를 보도하였다. 전국 210개 초등학교에 올해 신입생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단순한 교육 현장의 위기가 아니다. 이는 지역 공동체의 존립 기반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지표다. 출생이 멈춘 지역에서 과연 의료는 유지될 수 있는가. 특히 소아청소년과와 산부인과와 같은 필수의료 영역은 어떤 전제 위에서 존속할 수 있는가. '신입생 0명'이라는 숫자는 교육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의료 체계의 지속 가능성을 근본부터 다시 묻게 만드는 질문이다.1. 소아청소년과: 수요가 사라진 진료과소아청소년과는 출생아 수와 직접적으로 연동되는 진료과이다. 출생아가 연간 수십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군 단위 지역에서는 외래 수요 자체가 형성되기 어렵다. 영유아 건강검진과 예방접종, 경증 감염 질환 진료는 소아청소년과 의원 운영의 기반이지만, 아동 인구가 급감하면 이 구조는 유지될 수 없다. 응급·중증 환자는 이미 광역 거점병원으로 이송되고 있으며, 지역 내에서 완결되는 소아 진료 체계는 점차 해체되고 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외래 환자 수가 확보되지 않는 한, 의원급 운영은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이는 사명감이나 정책적 의무 배치의 문제가 아니라, 수요 기반이 붕괴된 구조적 현실이다.2. 산부인과: 인프라의 붕괴와 재건의 어려움산부인과는 더욱 복합적인 조건을 요구한다. 분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24시간 전문의 상주 체계, 마취과와 소아과의 협진, 수술실과 신생아실 운영, 응급 대응 인력 확보가 필수적이다. 여기에 높은 의료사고 보험료 부담까지 더해진다. 연간 분만 건수가 극소수에 불과한 지역에서는 이러한 인프라를 유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미 많은 지역에서 분만실이 폐쇄되었고, '분만 취약지'를 넘어 '분만 불모지'로 전환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분만실이 닫히는 순간 숙련 인력은 지역을 떠나고 협진 체계는 해체된다. 재건은 단기간에 가능하지 않다.3. 의사 수 증원은 해법이 될 수 있는가의료정책은 흔히 "의사가 부족하다"는 전제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의료 공백이 발생하면 인력 부족을 원인으로 규정하고, 의과대학 정원 확대나 지역 배치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신입생이 단 한 명도 없는 지역에서 문제의 본질은 과연 의사 수에 있는가. 그곳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은 의료 인력이 아니라 의료를 성립시키는 인구 기반이다. 출생이 멈춘 지역에서는 소아 환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분만 건수 역시 유지될 수 없다. 마취과·소아과 등 협진 체계도 붕괴된다. 결국, 남는 것은 응급 상황에서의 이송 체계뿐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단순히 의사를 배치하는 정책은 구조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필수의료는 특정 인력 1인의 존재만으로 완성되는 체계가 아니다. 이는 인구 규모, 지역 경제, 협진 인력, 응급 인프라가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생태계 위에서만 유지된다. 생태계가 붕괴된 자리에서는 공급 확대가 아니라 구조 재설계가 선행되어야 한다.4. 필수의료의 재정의와 체계 전환신입생 0명 지역에서 의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다른 접근이 요구된다. 과거의 인구 구조를 전제로 "지역마다 동일한 병원을 유지해야 한다"는 방식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첫째, 광역 거점병원을 중심으로 한 통합 분만·소아 진료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일정 규모 이상의 진료 건수를 확보할 수 있는 중심 병원에 자원을 집중하고, 고위험 환자를 신속히 이송하는 체계를 병행해야 한다.둘째, 고위험 산모와 소아 환자를 위한 응급 후송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단순 이송을 넘어 의료진 동승, 신속 전원 프로토콜, 정보 공유 체계가 포함된 통합 네트워크가 필요하다.셋째, 순회 진료와 원격 모니터링을 결합한 모델을 도입해야 한다. 상시 상주 인력으로 모든 기능을 유지하기 어려운 지역에서는 주기적 방문 진료와 디지털 기반 건강 관리 체계를 통해 최소한의 접근성을 확보할 수 있다.넷째, 지역 보건소 기능을 고도화하여 예방 중심의 1차 건강 관리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인구가 감소하는 지역일수록 치료 중심 구조보다 만성질환 관리와 건강 증진 기능이 중요해진다.이제는 분산형 공급 모델에서 밀집형·집중형 안전망 모델로의 전환을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맺음말「입학생 0명 초등학교 210곳」이라는 통계는 교육 정책의 경고가 아니라, 지역 사회 전체의 구조적 변화를 알리는 신호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사라진 공간에서 필수의료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 없이 단순한 의사 수 증원만을 반복한다면, 우리는 문제의 본질을 비껴가게 될 것이다. 필수의료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그리고 그 구조는 지금, 근본적인 재설계를 요구하고 있다.
2026-03-17 05:00:00이슈칼럼

연명의료결정법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고 자기결정을 존중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하 연명의료결정법)이 2018년부터 시행되었다.시행 후 연명의료 중단 건수는 2018년 3.1만 건(사망자 대비 비중 10.6%)에서 2024년 7.0만 건(19.6%)으로 증가하였고 2025년 8월 기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자 수는 300만 명(19세 이상 인구 6.8%)으로 나름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생애 말기 현장에서는 여러 문제점으로 환자, 보호자, 의료진, 돌봄 제공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특히 이행 시기와 관련된 혼란은 법 제정 시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연명의료 유보·중단의 이행은 임종기에서만 가능하다. 이행 시기와 관련하여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연명의료'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하는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체외생명유지술, 수혈, 혈압상승제 투여와 그 밖에 담당 의사가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할 필요가 있다고 의학적으로 판단하는 시술로서 치료 효과 없이 임종과정의 기간만을 연장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임종기에서만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을 이행할 수 있다. 대한의사협회의 입장,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이 이행되는 현장과 최근 발표된 김태경 등의 보고서(연명의료, 누구의 선택인가: 환자 선호와 의료현실의 괴리, 그리고 보완방안)를 살펴본다.의료행위는 신체 침습을 동반한다. 충분한 설명에 의한 동의를 거쳐 침습적인 의료행위는 그 정당성을 확보한다. 충분한 설명에 의한 동의는 거부를 전제로 하며 이러한 거부는 연명의료 유보·중단의 윤리적·법적 토대를 이룬다. 충분한 설명에 의한 동의 없는 신체 침습은 고문이 있고 예외적으로 응급의료법, 감염병예방법에서 가능하다.임종기에서만 침습적인 의료행위를 적법하게 유보·중단할 수 있다면 그 이전에 유보·중단하는 것은 불법적인가? 그리고 비윤리적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비윤리적이지는 않다.먼저, 대한의사협회의 연명의료 유보·중단에 대한 입장을 살펴본다.대한의사협회 의사윤리강령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 환자의 인격과 자기결정권을 존중, 죽음을 앞둔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 환자가 인간답게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선언하였고 의사윤리지침에서는 제35조 "말기 환자가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노력, 말기 환자의 의사를 존중하여 치료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했다.대한의사협회의 공식적인 입장인 KMA POLICY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지'에서 "연명의료 중지에 대한 논의는 환자의 치료 거부권의 맥락에서 논의해야 하며, 환자의 죽을 권리와 연결 지어서는 안 된다. 연명의료 중지에 대한 논의는 임종기 환자 혹은 말기 환자 등 환자의 회생 가능성이 없는 경우를 전제로 한다. 환자의 회생 가능성이 없는 경우 환자의 치료 거부권을 존중해야 한다"라고 하였다.2024년 7월 대한의사협회는 남인순 의원의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와 말기 환자의 구분을 없애고, 말기 환자에게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하여 환자가 존엄하고 편안하게 생애 말기를 맞이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법안(의안번호 2201001)에 대하여 "말기 환자로의 통칭·통합을 통해 환자의 최선의 이익과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면서 환자의 존엄과 가치를 드높이고 보호하도록 하여야 할 것"으로 찬성 의견을 냈다.대한의사협회는 의사의 전문성과 전문가적 양심에 기초한 판단을 바탕으로 말기에서도 연명의료의 유보·중단이 가능함을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천명하고 있으나 현실의 법 적용은 그렇지 않다.허대석 교수 등은 '연명의료결정법 적용에 따른 문제점과 개선 방향'에서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실제 현장에서는 임종 과정을 명확히 진단하는 것은 어렵다. 임종 과정이라는 애매한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기다리다가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 시기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잔여 생명의 예측은 불확실성이 큰 영역이기 때문에 예측되는 잔여 생명 기간을 기준으로 말기, 임종 과정을 구분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말기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은 의학적 쟁점이 없는 상태로 대부분의 나라가 최선의 이익을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 두 가지 상황은 엄격히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말기'로 통일되어야 한다"라고 하여 말기로의 통일을 주장하였다.2025년 12월 11일, 김태경 등은 "연명의료, 누구의 선택인가: 환자 선호와 의료현실의 괴리, 그리고 보완방안"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 보고서에서 "현행법은 이행 시점을 '임종기'로 한정하고 있어 국제 기준에 비해 적용 범위가 좁다는 지적, 우리나라와 달리 대부분의 주요국은 의학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말기 상태에서도 환자 또는 가족의 의사에 따라 연명의료 결정 절차를 개시할 수 있도록 한다. 임종기 이전 단계에 있더라도 의학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로 판단되는 경우에는 이행 요건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라고 하였다.의료전문가 단체와 현장에서 환자를 돌보는 의사들 그리고 정부 출연 연구소가 한목소리로 말기로의 통일·통칭을 주장함에도 그 목소리를 외면하면 원하지 않는 신체 침해를 동반한 연명의료가 지속되면서 국민이 고생한다.연명의료결정법의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 이행 시기가 임종기에서 말기로의 통일·통칭이 하루빨리 실현되어 말기에서도 연명의료의 유보·중단이 가능해져 환자의 연명의료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존중받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가 보호되기를 기원한다.
2026-03-16 05:00:00이슈칼럼

누굴 위한 '지역·필수·공공의료실' 신설인가

[메디칼타임즈=경남의사회 마상혁 공공의료위원장] 간판 바꾸기 전에, 먼저 반성부터 '지역·필수·공공의료실' 신설, 국민을 위한 것인가 행정을 위한 것인가보건복지부가 올해 상반기 중 '지역·필수·공공의료실'을 신설한다고 밝혔다. 필수의료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으니 이를 전담할 실장급 조직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연간 1조 1,300억 원 규모의 특별회계도 설계 중이고, 5년간 총 4조 원에 달하는 신규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 숫자만 보면 대단한 의지처럼 보인다.그러나 솔직히 말하자. 기대가 전혀 없다. 아니, 기대가 없는 것을 넘어 이것이 국민을 향한 또 하나의 기만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책임 없는 곳에 해법도 없다지금 한국 의료가 처한 위기—응급실 공백, 소아과 붕괴, 지역 의료 소멸—는 하루아침에 생긴 일이 아니다. 수십 년간 누적된 정책 실패의 결과다. 그 정책을 주도적으로 설계하고 집행해 온 주체가 바로 보건복지부다.그런데 지금 그 보건복지부가 새 조직을 만든다고 한다. 무엇이 잘못됐는지에 대한 반성은 어디에도 없다. 어떤 정책이 실패했고, 왜 실패했으며, 누가 책임을 졌는지에 대한 평가 한 줄이 없다. 그저 '법이 통과됐으니 조직을 만들겠다'는 행정적 논리만 있을 뿐이다.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조직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새 조직은 새로운 예산 낭비의 창구가 될 공산이 크다. 2026년 보건복지부 예산은 137조 원이다. 이 막대한 예산을 편성하면서 현장의 전문가들, 의료 일선의 의사들, 그리고 정작 의료를 이용하는 국민들과 얼마나 깊이 소통했는가? 거버넌스를 강조했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형식적 절차만 갖춘 채 독단으로 진행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순환보직이 만든 전문성의 공백보건복지부 내 순환보직 관행은 정책의 질을 떨어뜨리는 구조적 원인 중 하나다. 복잡한 의료 시스템을 이해하려면 최소한 수년의 경험이 필요하다. 그런데 담당 공무원은 1~2년 만에 바뀐다. 의료 현장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채 법과 예산을 다루다 보니 정책이 현실과 동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지역·필수·공공의료실이 생겨나도 결국 같은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예산만 낭비하는 부서가 하나 더 추가되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국회와 의료계, 각자의 직무유기잘못된 정책을 견제해야 할 국회는 어땠는가. 무능의 극치를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닫은 채, 얕은 지식으로 자기 주장만 되풀이했다. 필수의료 공백이 현실화되는 동안에도 정치적 셈법에 따라 움직였다.대한의사협회도 자유롭지 않다. 전문가 집단으로서 국민에게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고, 정부 정책에 날카로운 비판과 합리적 대안을 제시해야 할 역할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의협은 권력 다툼에 함몰돼 있다. 국민의 신뢰를 잃은 전문가 단체는 존재 가치를 잃는다.■  '필수의료'라는 말의 함정'필수의료'라는 개념 자체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당장 생명이 위태로운 응급 상황만을 필수의료라 부를 것인가? 만성질환 관리, 소아 발달 평가, 정신건강 돌봄도 삶의 질과 생명에 직결된다. 개념의 범위가 좁을수록 정책의 사각지대는 넓어진다.우선순위를 명확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응급의료와 중환자 진료에서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사법 리스크다. '환자가 사망하면 의사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서가 사회 전반에 자리 잡고 있는 한, 어떤 유능한 의사도 고위험 진료 현장에 자원하려 하지 않는다. 코로나 유행 당시에도 경험했듯, 국민과의 소통과 공감대 형성을 위한 노력은 거의 전무했다. 제도만으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  진짜 해법은 겸손에서 시작된다해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방향은 오히려 단순하다. 보건복지부 공무원들이 열린 마음으로 전문가와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정책에 반영하는 것, 정치인들이 짧은 지식으로 판단하지 않고 현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정치 색채가 강한 시민단체는 배제해야 한다.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목소리를 국민의 목소리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예산과 법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신뢰다. 신뢰는 투명한 반성과 개방적 소통에서 비롯된다. 지금 보건복지부와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은 새 조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난 날의 과오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더 겸허한 자세로 현장에 다가가는 것이다.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반성 없는 움직임은 국민을 피로하게 만들 뿐이다. 한국 의료를 돌아올 수 없는 상태로 몰아가고 있는 흐름을 되돌리려면, 먼저 그 흐름을 만들어 온 사람들의 진정한 책임 인식이 선행돼야 한다.
2026-03-09 05:00:00이슈칼럼

재택의료의 새로운 과제

지난 2월 13일 보건복지부는 장기요양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 선정 결과를 발표했다. 2023년 28개 시·군·구 28개소로 시작한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기관은 통합돌봄법 시행을 앞둔 현재 전국 229개 모든 시·군·구에 설치되었으며, 총 422개소로 확대되었다.복지부는 의료-복지-돌봄-주거 등 통합 돌봄을 지역 사회에서 구현하기 위해 각 분야별 핵심 서비스 제공 기관을 설치하려고 노력했으며, 의료 서비스는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 참여 기관을 중심으로 제공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이와 같이 빠른 속도로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 기관을 확장했다.재택의료는 일회성의 방문진료와 다르게 재택에 있는 거동이 불편하며 현저한 기능 저하가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대표적으로 장기요양 등급자 등) 환자 중심의 포괄적인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해서 환자의 기능의 보존 또는 향상을 돕고 이를 통해 지역사회 지속 거주(Aging in place)를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의료이다.보건복지부의 발표에 따르면 2025년 6월 기준 약 1만여 명의 환자가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에 참여했으며, 재택의료 이용자의 경우 응급실 방문 횟수 및 입원 일수가 감소하며, 의료비 절감 등의 유의미한 성과를 도출했다고 한다.복지부, 공단, 전문가 및 현장 서비스 제공 의료 기관이 다 함께 노력해서 얻은 의미 있는 결과이며, 앞으로 초고령화 사회에 대비하여 의료가 나아갈 방향을 잘 보여준 시범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민이 지역사회 지속 거주를 위한 재택의료를 누리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첫째, 국내 재택의료의 미충족 의료를 생각한다면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 단일 모형이 아닌 다양한 모형이 필요하다.잠재적 재택의료 대상 환자의 숫자는 차이는 있으나 약 50만 명에서 100만 명 정도로 예상한다. 현재 국내 장기요양 등급자의 숫자가 약 150만 명에 육박하며, 중증 장애인이 약 100만 명, 요양원 및 요양병원 이용 환자가 약 50만명, 연간 암 사망자 수 9만명 등등을 고려하면 25년 6월 기준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 이용환자 1만 명은 잠재적 환자 숫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숫자이다. 더욱이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은 장기요양 등급자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장기요양 등급자가 아닌 다양한 집단의 환자는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없다.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은 의사-간호사-사회복지사의 다학제 팀을 단일 의료기관 내에 구성하여 환자에게 포괄적인 재택의료를 제공하는 모형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국내 1차 의료기관의 85%를 차지하는 단독 개원 의원의 경우 간호사-사회복지사를 고용할 만큼 재택의료 환자를 진료하기가 어렵다. 지역사회 내 재택의료지원센터를 설치하여 1인 의원의 재택의료 참여를 지원하는 체계는 미충족 의료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둘째,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 모형의 분화가 필요하다. 현재 재택의료센터 현황은 의원급 의료기관 229개소, 한의원 111개소, 병원·의료원 63개소, 보건소가 19개소가 참여하고 있다. 특히 의원, 병원, 의료원 등 현대 의학을 기반으로 한 의료기관이 제공하는 재택의료 서비스와 한의학을 기반으로 한 재택의료를 수행하는 한의원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유사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음에도 동일한 모형으로 분류되고 있다.재택의료는 현대 의학에 기반한 모형으로 외국에서 발전해왔으며, 필수적으로 제공되어야 하는 서비스는 1. 포괄평가와 케어플랜의 수립 2. 만성질환 관리를 위한 약물 처방 및 검사 및 다제약물 관리 3. 급성기 질환에 대한 대처 및 응급실 이용 예방 4. 치매 환자의 행동심리증상에 대한 약물적/비약물적 개입 5. 주기적인 가정방문과 환자 및 보호자에 대한 교육 6. 비위관, 도뇨관, 욕창 처치 등 와상 환자의 필요에 대한 대용 7. 노인 증후군에 대한 관리 및 재활 치료 등이며, 이러한 서비스 중 한 가지라도 부족한 부분이 발생하면 부족한 부분으로 인해 지역사회 지속 거주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의료기관의 종별 및 유형에 따라 위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접근과 전략이 다를 것이므로 향후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 모형을 구분하여 모집하고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마지막으로, 오랜 기간 외래에서 유지된 좋은 환자-의사를 지속할 수 있는 모형이 필요하다. 외래에서 지속해서 환자를 치료하던 의사가 재택에 가서 지속적인 의료를 제공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의료 서비스는 없다.재택의료의 대상이 되는 환자의 다수는 오랜 기간 지역 의료기관에서 건강 및 질병 관리를 받아왔고, 그 환자를 가장 잘 아는 의사가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환자를 잘 아는 의사가 재택의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수가 및 제도가 필요하다.현재는 재택의료에 참여하는 의원이 턱없이 부족하여 수소문하여 재택의료기관을 찾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기존의 환자-의사 관계는 사라지게 되며, 새로운 환자-의사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인지 저하를 겪고 있는 환자들의 경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하기 때문에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 경우가 더 빈번하게 된다.대한민국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중 몇 되지 않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하여 선진국의 반열에 진입한 국가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재택의료의 대상이 되는 75세 이상 후기 고령자는 경제 성장의 초석이 된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의 혜택도 받지 못하여 매우 높은 노인 빈곤을 겪고 있다.필자는 대한민국 성공 신화 스토리는 이분들의 행복한 삶의 마무리로 완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건강보험의 지속성도 중요하지만 이 분들을 의료비 절감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존엄한 삶의 마무리를 위해 사회가 함께 지원하기를 바란다. 재택의료도 이 분들의 행복한 삶에 중요한 역할로 자리매김하길 기원해본다.
2026-03-03 05:00:00이슈칼럼

위기 속 리더십, 교체가 능사는 아니다

박용현 회장[메디칼타임즈=박용현 회장]대한의사협회 집행부에 대한 불신임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민주적 조직에서 지도부에 대한 평가와 책임 요구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위기 국면에서의 선택은 평시와 달라야 한다. 지금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단순하다. 집행부 교체가 과연 현재 의료계가 직면한 문제의 본질적 해법이 될 수 있는가.오늘날 의료계를 둘러싼 환경은 어느 한 집행부의 역량만으로 규정되거나 해결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의대 정원 확대 정책, 필수의료 재정 구조 개편, 비대면 진료의 제도화, 직역 간 역할 조정 문제 등은 국가 보건의료 정책의 방향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는 장기적 구조 변화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과제들이다. 개인의 판단 착오나 협상 미숙으로 환원하기에는 사안의 규모와 복잡성이 지나치게 크다.위기 상황에서 리더십 교체는 분명 하나의 선택지일 수 있다. 그러나 교체가 곧 해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책 대응의 연속성이 단절되고, 대외 협상에서 신뢰의 공백이 발생할 위험이 존재한다. 정부와의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국면에서 지도부가 교체될 경우, 그 자체로 협상 동력이 약화될 수 있다. 외부에서는 이를 내부 분열로 해석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협상은 논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관된 메시지와 안정된 대표성이 중요한 자산이다.물론 집행부에 대한 비판과 견제는 필요하다. 어떤 조직이든 긴장과 균형을 통해 발전한다. 그러나 그 방식이 반드시 즉각적인 교체일 필요는 없다. 정책 대응 과정의 투명성을 강화하고, 회원 소통 구조를 보완하며, 대의원회의 감시 기능을 실질화하는 방식으로도 충분히 개선은 가능하다. 사람을 바꾸는 일은 가장 눈에 띄는 조치일 수 있지만, 제도를 다듬는 일은 더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있다.지금 의료계가 처한 상황은 내부 정쟁에 에너지를 소모할 여유가 많지 않다. 외부 정책 환경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사회적 시선 또한 예리하다. 이럴 때일수록 조직의 안정성과 전략적 통합이 중요하다. 위기의 순간에 잦은 리더십 교체가 반복될 경우, 장기적 신뢰 자산은 점차 약화될 수밖에 없다.집행부 교체는 감정적 해소의 수단이 아니라 전략적 판단의 결과여야 한다. 냉정한 평가와 합리적 보완을 통해 조직의 대응력을 높이는 길이 우선이다. 의료계의 미래는 단순한 인적 교체가 아니라, 일관된 방향성과 치밀한 전략 속에서 만들어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분열의 확장이 아니라 역량의 집중이다. 위기 속에서 조직이 선택해야 할 길은 흔들림이 아니라 균형이며, 충동이 아니라 책임이다.
2026-02-26 08:47:00이슈칼럼

신입 회계사들, 전공의 미래일 수 있다

[메디칼타임즈=대한의료정책학교 장재영 교육연구부장] 작년 공인회계사 선발인원은 1200명으로 2018년에 904명과 비교하면 300여명의 차이가 난다. 그런데도 AI의 도입 및 미채용 합격생의 누적으로, 당해 합격자 대비 수습기관 등록률은 28.2%에 그쳤다고 한다. 정식 등록을 위해 회계법인 실무 수습이 필요한 직군 특성을 고려하면, 대형 회계법인들에서의 채용인원 감소는 뼈아프다. 비회계법인에서의 수요가 많아 선발인원을 늘렸다지만, AI라는 대체제가 등장하여 신입 회계사는 업무를 배울 공간이 없어진 것이다. 결론만 가리면 의료계와의 공통점이 보인다. 흔히 빅5라고 불리는 대형병원의 AI 도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고, 진료지원인력이 상당 부분 주니어 의사들의 일을 대체하게 되면서 병원 경영진들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사회적으로 전문의는 꼭 필요하므로, 전공의 수를 줄일 순 없을 것이다? 부디 조직 내 낙관론의 또 다른 희생양이 되지 않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그래서 더더욱 전공의는 '교육생', 다소 자존심이 상할 수 있지만 '학생의 연장'이라는 정체성을 버려서는 안 된다. 병원은 대단히 노동집약적인 공간이고, 숙련된 의사가 되기 위해선 상당 부분 도제식 교육이 꼭 필요하다. 전문의는 임상의이면서 의과학자로서의 역량을 지니고 있어야 하기에, 규모 있는 병원에서의 수련도 필수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근로자로서의 정체성이 앞설 경우, 전공의 업무는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항목으로 분해된다. 반대로 배우는 사람, 학생을 대체한다는 것은 매우 어색하다.마침, 교육생으로서의 정체성을 내세울 수 있는 최소한의 바탕이 생겼다. 2월 21일부터 전공의법 개정안의 몇몇 조항이 실행된다. 주당 근무시간 감소가 빠진 것은 아쉬운 대목이나 - 시범사업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위로를 뒤로하고 – 연속 근무시간 감소, 임산부 보호, 육아/질병/입영에 의한 휴직, 앞 3개 사항에 대한 평가 등 당장 전공의들의 복지와 관련된 조항들이다. 특히 '평균 주 근무시간에 휴가/휴직 기간을 산입하지 아니한다' '육아/질병/입영 등 사유로 휴직을 신청하는 경우 허용하여야 한다' 등의 조항은 그동안 전공의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 놓였었는지 방증한다. 하지만 동시에 앞으로 그 디테일이 굉장히 중요해질 조항도 있다. 임신/출산 전공의의 추가 수련에 대한 내용, 지도전문의 세부 역할에 관한 규정, 전공의 수련 실태조사의 시행 및 환류 여부는 앞으로 전공의들이 더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내용이다.갈 길이 멀지만, 근로하는 전공의로서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것들은 법적으로 보장이 될 예정이다. 무엇보다 전공의 노조 설립 이후, 개인 전공의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문제들이 신고되고 공론화될 수 있는 환경이 열렸다. 앞으로 수련환경평가 등 보장된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기에 좋은 구조가 만들어질 것이다.전공의 업무의 다수는 AI와 진료지원인력이 대체할 수 있다. 대체할 수 있지만, 대체되지 않기 위해서는 장차 사회 구성원들의 건강을 책임질 전문의 후보생, 즉 교육 대상이라는 정체성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과거와 달리 그렇게 해도 될 배경들이 하나둘 만들어지고 있다.전공의법 개정안, 전공의노조의 출범 등 가용 가능한 자원을 잘 활용하여 근로자로서의 권리를 보장받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를 위한 포지셔닝이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는 참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관대하다. 어렸을 적, 어른들의 간섭을 피해 '공부 중'이라는 세 글자를 요긴하게 썼던 것을 기억하자.
2026-02-23 05:00:00이슈칼럼

의대증원, 국민 기만하는 정책은 필패한다

[메디칼타임즈=경남의사회 마상혁 공공의료위원장] 정부가 지역의료 문제 해결을 위해 의과대학 정원 확대를 천명한 뒤 불과 5개월 만에 그 결과를 발표하였다. 추계위원회와 보정심의위원회라는 절차를 거쳤다고는 하나, 의료인력 수급이라는 고도로 복잡한 문제를 다루기에 5개월은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다. 인구구조의 변화, 질병 패턴의 전환, 의료기술의 발전, 지역별 수요의 편차, 의료인력의 유출입 동태—이 모든 변수를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의료인력 수급 추계는 단순한 산술이 아니라 고도의 전문적 작업이다. 이를 5개월이라는 시간 안에 완성했다는 것은,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절차를 역순으로 밟았다는 합리적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추계위에서 만 명 이상 부족하다는 수치가 나왔고, 이후 보정심에서 이를 줄였다. 그런데 왜, 어떤 근거로 조정했는지는 명확히 공개되지 않았다. 의료인력 추계를 위한 방법론은 국제적으로도 수요기반 모델, 공급기반 모델, 벤치마크 모델, 활용기반 모델 등 다양하며 각각의 전제와 한계가 다른데,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모델 선정 과정에서 방법론적 논란을 자초하였다. 더구나 이전 정부에서 수행한 추계와 유사한 결과를 반복적으로 발표함으로써,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권이 원하는 숫자를 생산하는 주문형 연구기관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연구의 독립성과 객관성이 담보되지 않는 국책연구기관은 그 존재 가치 자체를 의심받아 마땅하며,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할 정당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다.정부는 추계위에 의사 출신 위원들이 참여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전문가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참여한 전문가들의 증언에 따르면 실상은 정반대였다. 의견이 실질적으로 수렴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으며, 이미 결정된 방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형식적 참여에 불과했다. 보정심의 분위기는 더욱 일방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참가자 대부분이 정원 증원에 찬성하는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런 구조에서 반대 의견이 반영될 여지는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한 전문가 단체가 결국 들러리에 불과했다는 비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거버넌스의 외형은 갖추었되 실질은 부재한, 전형적인 껍데기 민주주의의 표본이다.현 정부는 시민참여를 유독 강조하고 있으며, 이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의료정책에서 전문가의 목소리를 형식적으로만 수렴하고, 이미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밀어붙이면서 충분한 의견 수렴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는 것은 시민참여라는 가치 자체를 훼손하는 행위이다. 전문가 참여를 강조하면서 전문가의 목소리를 묵살하는 것, 그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다.그런데 정원 확대를 논하기에 앞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교육환경이다. 현재 다수의 의과대학은 강의실 공간부터 부족한 상황이다. 기초의학 및 임상의학 교수 요원은 만성적으로 결원 상태이며, 임상실습 과정의 질적 수준은 수련병원의 여건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이러한 기반 위에 정원만 늘리겠다는 것은 부실 교육을 제도적으로 양산하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역사는 이 점에 관하여 이미 한 차례 뼈아픈 교훈을 남긴 바 있다. 1980년대 시행된 졸업정원제가 그것이다. 당시 준비 없이 도입된 정원 확대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 새벽부터 등교하지 않으면 강의실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고, 뒷자리에서는 칠판의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해부학 실습에 필요한 시신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겨울에만 제한적으로 실습이 가능했다. 유급률이 치솟았고, 열악한 환경을 견디지 못해 중도 포기하는 학생이 속출했다.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방치였으며, 의학교육의 이름을 빌린 졸속이었다.그런데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놀라운 발언들이 나오고 있다. 전 보건복지부 박민수 차관은 당시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말하였고, 보정심에 참가한 한 인사는 그때 그렇게 했어도 지금까지 잘 버텨온 것이 아닌가라고 이야기했다고 전해진다. 이 발언들의 저의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열악한 교육환경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인가. 수준 낮은 교육을 용인하자는 것인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의 교육과정에 대충이라는 단어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과거의 실패를 부정하는 자들이 미래의 정책을 설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정책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정원이 늘어난 이상 남은 것은 교육의 질에 대한 철저한 관리이다. 교수 대 학생 비율, 실습 시설의 적정성, 임상실습의 질적 수준에 대한 엄격한 평가 기준이 수립되어야 하며, 기준 미달 대학에는 정원 감축을 포함한 실효적 제재가 뒤따라야 한다. 교육의 질 보장은 의과대학 과정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졸업 후 인턴과 레지던트 수련과정까지 포괄해야 한다. 일정 시간만 채우면 전문의 시험 응시 자격을 자동으로 부여하는 현행 방식은 재검토되어야 하며, 역량 기반 수련 체계로의 전환을 본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학교와 병원 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에도 사안의 경중에 따라 엄격한 징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의사라는 직업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에 대해서는 관용이 있어서는 안 된다.이 정책에서 가장 치명적으로 간과된 문제는 시간이다. 지금 당장 정원을 늘린다 하더라도 그 학생들이 모두 졸업하고 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한다는 보장이 없다. 설령 합격하더라도, 의과대학 6년에 인턴 1년, 전공의 3년에서 5년을 거쳐 독립적 진료가 가능해지기까지 최소 10년 이상이 소요된다. 지난 10년 동안 지역의료는 어떻게 버틸 것인가. 이에 대한 구체적 대책이 전무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방의 응급실이 문을 닫고 있고, 산부인과가 사라지고 있으며, 소아과가 폐업하고 있다. 10년 뒤를 위한 정책은 있으되 오늘의 위기를 넘길 방안은 없다는 것, 이것이 이 정책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이다.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지역의료 붕괴는 의사 수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지방 붕괴라는 거시적 구조 변동의 한 단면이다. 인구 감소, 고령화, 젊은 층의 수도권 집중, 지방 경제의 위축, 생활 인프라의 열악함…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얽힌 구조적 문제를 의과대학 정원 확대라는 단일 처방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위험한 단순화이다. 많은 정치인과 국민이 의사 머릿수만 늘리면 된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의사 수가 늘어나도 지역에 머물 유인이 없으면 그들은 수도권으로 향한다. 이것은 예측이 아니라 이미 확인된 사실이며, 세계 여러 나라의 경험이 이를 거듭 증명하고 있다.일본은 2008년 이후 의과대학 입학정원을 꾸준히 늘려 현재 약 9,400명 수준에 이르렀으나,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 집중 현상은 완화되지 않았다. 특정 지역에서 일정 기간 근무할 것을 조건으로 입학정원을 배정하는 지역 테두리제를 도입했지만, 의무 기간 종료 후 도시로 이동하는 비율이 높아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국은 2018년 의과대학 정원을 25% 확대하겠다고 발표했으나, 교육 인프라가 따라가지 못해 계획대로 증원하지 못한 대학이 다수 발생했다. 현재도 전체 의사의 약 30%를 해외 출신 의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지방의 의사 부족은 여전히 심각하다. 호주는 2000년대 중반 정원을 대폭 확대한 결과 도시 지역에서는 의사 과잉의 조짐이 나타나는 반면, 원주민 거주 지역과 농촌의 의사 부족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캐나다는 다양한 인센티브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전문의 수련 후 지역 복귀율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며, 미국은 의대 정원을 늘려도 레지던시 자리가 동반 확충되지 않아 병목이 발생하고 농촌 지역의 의사 부족은 수십 년째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들 국가의 공통된 교훈은 단 하나이다. 의사 수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지역의료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지역 정착 유인 체계, 교육 인프라 확충, 수련 체계 개혁, 지역 사회 기반 강화가 함께 가지 않으면 늘어난 의사는 그저 대도시의 의사를 한 명 더 늘릴 뿐이라는 것이다.2025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의 조원준 전 정책수석이 전문 기자 간담회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현재 추진되고 있는 의료정책은 민주당식 의료정책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이 정책이 순수한 공익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의 산물임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일련의 과정에서 전문가 참여를 강조하면서도 원래 가지고 있던 시나리오대로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해석이다. 대통령은 의료정책에 관한 전문가가 아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의료 현장과 학계의 전문가들과 충분히 소통하고, 급하게 서두르지 않으며 신중하게 정책 결정을 내렸어야 했다. 의료인력 수급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대통령의 한마디로 방향이 정해지고 속도가 결정되는 방식으로 추진하는 것은, 전문성에 대한 경시이자 국가 정책 결정 과정의 심각한 왜곡이다. 정책의 세부 사항은 전문가와 관료의 영역이며, 이를 존중하는 것이 책임정치의 기본이다.정부가 결정한 이상 이 정책이 취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만약 이 정책이 실패할 경우—지역의료가 개선되지 않거나 오히려 악화되는 경우, 부실 교육으로 인한 의료사고가 증가하는 경우, 의료인력의 수도권 쏠림이 심화되는 경우—그 책임은 누가 지는가가 사전에 명확해야 한다. 책임정치와 책임행정의 원칙에 따라, 정책 결정에 참여한 모든 주체가 자신의 판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추계위와 보정심에 참여한 학자들에게도 묻는다. 정권의 눈치를 보며 소신을 접었는가, 아니면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며 원칙에 기반한 의견을 개진했는가. 당신들의 판단이 틀렸을 때, 그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국민을 기만하는 거버넌스로 설계된 정책은 반드시 실패한다. 형식만 갖춘 전문가 참여, 결론이 정해진 추계, 교육환경을 무시한 정원 확대, 10년의 공백에 대한 무대책, 지방 붕괴라는 구조적 원인에 대한 외면—이 모든 것이 겹쳐 정책은 실패를 향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부담은, 언제나 그렇듯,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전문가적 판단이며, 투명한 과정, 실질적 참여, 책임 있는 결정이라는 세 가지가 담보되지 않는 한, 어떤 정책도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2026-02-19 05:00:00이슈칼럼

'만성질환'에 갇힌 일차의료

[메디칼타임즈=김병철 대한이비인후과학회 부이사장]대한민국 의료전달체계의 허리를 지탱하는 일차의료 강화라는 대의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부가 추진 중인 '지역사회 일차의료 혁신시범사업(안)'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일선 현장의 특수성은 무시된 채 특정 진료과 중심의 모델을 모든 일차의료기관에 강제로 덧씌우려 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 이비인후과가 마주한 진료 현장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 깊은 탄식을 자아내게 합니다.이비인후과는 '상담'만이 아닌 '처치와 술기'의 현장이다이번 혁신안의 핵심은 기존 행위별 수가를 묶어 '월별 정액관리료'로 지급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혈압, 당뇨와 같이 약 처방과 상담이 주를 이루는 내과적 만성질환 관리에는 적합할지 모르나, 매 순간 손기술을 동원한 처치가 이뤄지는 이비인후과적 진료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합니다.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알레르기 비염 환자가 증상 악화로 내원했을 때, 이비인후과 의사는 단순히 약만 처방하지 않습니다. 비강 내 점막의 상태를 내시경으로 세밀히 관찰하고, 비강 세척이나 하비갑개 처치 등 즉각적인 술기를 통해 환자의 호흡을 개선합니다. 만약 화농성 중이염 환자라면 고막 절개나 이루 흡인같은 정교한 처치가 필수적입니다.이러한 '행위'들은 환자의 고통을 즉각적으로 경감시키는 핵심적인 의료 서비스입니다. 그런데 이를 단순히 '상담 관리료'라는 이름의 정액제 틀 안에 가두어버린다면, 복잡하고 정교한 처치를 수행할수록 의료진의 노동 가치는 저평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결국 현장에서 꼭 필요한 처치를 기피하게 만드는 기제로 작용하여,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질환의 역동성을 무시한 'HCC 위험도 분류'의 허점정부가 도입하려는 미국식 Medicare 위험보정 모델(HCC) 역시 이비인후과 진료의 역동성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이비인후과를 찾는 환자들은 계절적 요인이나 급성 악화에 따라 진료의 강도가 급격히 변합니다.단순 만성 질환자로 분류된 환자라 하더라도, 갑작스러운 돌발성 난청이나 심한 어지럼증(이석증 등)이 발생하면 즉각적이고 집중적인 검사와 처치가 투입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급성기적 변화와 이비인후과 특유의 고난도 처치 수요를 '정액제 기반의 환자군 분류'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질환의 경중을 숫자로만 재단하는 방식은 현장의 복잡다단한 진료 양상을 결코 담아낼 수 없습니다.주도권 없는 '거점 지원기관'과 행정 과부하의 늪거점 지원기관(2차 병원 등)이 다학제 팀을 통해 일차의료를 지원한다는 발상 또한 주객이 전도될 우려가 큽니다. 이비인후과 질환은 장비 의존도가 높고 숙련된 전문의의 판단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거점 기관이 환자 관리의 주도권을 쥐고 의원을 '하부 조직'처럼 관리하려 든다면, 일차의료기관의 자율성은 고사하고 진료의 연속성마저 끊어질 것입니다.여기에 야간·휴일 비대면 상담까지 강제화된다면, 가뜩이나 인력난과 행정 부담에 시달리는 소규모 의원들은 고사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 특히 법적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상태에서의 비대면 상담은 의료진에게 '희생'만을 강요하는 독소 조항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진정한 혁신은 현장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혁신은 현장의 동의와 참여가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일방적인 정책 추진을 멈추고 의료계와 진정성 있는 소통에 나서야 합니다.1. 행위별 수가제(FFS)의 근간 사수: 상담과 관리뿐만 아니라 이비인후과 특유의 처치와 술기 가치가 별도로 보상받는 '혼합 지불제'가 명문화되어야 합니다.2. 과정 중심의 평가 체계: 결과 수치 하나로 의사를 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위해 투입한 의료진의 노력과 과정을 인정해 주는 지표가 마련되어야 합니다.3. 법적 안전망 구축: 야간 상담이나 재택 의료 중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해 의료진을 보호할 구체적인 법적 장치가 선행되어야 합니다.우리 이비인후과 의사들은 지역사회에서 국민의 귀, 코, 목 건강을 지키는 최전방 파수꾼입니다. 현장의 온기를 잃어버린, 차가운 수치 중심의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정부가 진정으로 일차의료를 살리고자 한다면, 책상 위 데이터가 아니라 진료실에서 땀 흘리는 의사들의 목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이길 촉구합니다. 
2026-02-09 05:00:00이슈칼럼

정책공학자들의 교묘한 설계, 이중구속

1. 이중구속(Double Bind)과 조현병원래 '이중구속'은 정신의학에서 조현병(정신분열증)의 발생 원인을 설명할 때 쓰이는 이론이다.부모나 권위자가 자녀에게 상충하는 두 가지 메시지를 동시에 보내서, 아이가 어느 쪽을 선택해도 처벌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치명적인 심리적 덫을 말한다. 이 모순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아이는 결국 논리적 사고 체계가 붕괴되고 정신적으로 파괴된다.그런데 놀랍게도 대한민국 정책공학자들은 이 병리적 기제를 의료 시스템 설계의 핵심 원리로 사용하고 있다.2. 정책공학자의 시각: 시스템을 유지하는 '정교한 덫'정책공학자들에게 의사는 '치료하는 지성'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비용'이다. 그들은 시스템의 효율적 통제를 위해 다음과 같은 이중구속의 장치를 곳곳에 배치했다.장치 1: 사법적 '최선'과 행정적 '최저'의 충돌설계: 법원 판결은 '의학적 교과서'를 기준으로 의사에게 무한 책임을 묻게 하고, 심평원 심사는 '재정 지침'을 기준으로 최저 비용을 강요한다.이유: 어느 장단에 춤을 춰도 의사를 '잠재적 범죄자' 혹은 '부당 수익자'의 프레임에 가둘 수 있기 때문이다.이 불확실성이야말로 의사를 위축시키고 국가의 통제권을 강화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장치 2: 룰을 감춘 깜깜이 심사 (Black-box)설계: 심사 기준과 전산 필터링 로직을 '영업비밀'이라며 감춘다.이유: 룰이 투명하면 의사들이 그에 맞춰 진료를 최적화(Optimization)하고 이는 곧 지출 증가로 이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의사가 삭감이 두려워 스스로 몸을 사리게 만드는 '공포 마케팅'이 그들의 설계 목적이다.3. 전문가의 지성을 말살하는 '행정적 조현병'이 시스템은 참담하다. 이것은 단순한 행정 편의를 넘어선, 전문가 집단에 대한 '심리적 거세'다.정책공학자들은 의사가 개별 환자의 맥락을 읽는 전문적 지성을 발휘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저 삭감이라는 전기 충격에 반응하는 '파블로프의 개'이자, 주는 먹이(수가)와 가해지는 벌(삭감)에 길들여진 앵무새를 원할 뿐이다.언젠가 공단 직원이 내뱉은 "환자가 원하면 놔주고, 청구하고, 삭감 당하세요. 억울하면 법을 바꾸든가요"라는 말은 이 설계의 오만함과 잔인함을 증명한다.바꿀 수 없는 법을 핑계 삼아 의사의 영혼을 갈아 넣는 이 조현병적 환경에서, 의사는 소신을 삭감당하고 환자의 건강권은 숫자의 함정에 빠진다.결국 이것은 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정교한 폭력이며, 전문가를 지배하려는 저급한 갑질일 뿐이다.이중구속의 덫을 걷어내지 않는 한, 대한민국 의료에 '최선의 진료'란 허구에 불과하다.
2026-02-05 05:10:00이슈칼럼

지역의사제 입시 불공정 낳고 지역 의료는 외면하나

[메디칼타임즈=손문호 칼럼위원(정형외과) ] 최근 ‘지역의사제’ 도입 논의가 급물살을 타면서, 대치동 학원가를 중심으로 “지방 유학이 의대 진입의 지름길”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다. 정부는 ‘지역 의료 공백 해소’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의료 현장과 입시의 최전선에서 바라본 이 제도는 과연 지역 의료를 살리는 ‘심폐소생술’인가, 아니면 공정성을 해치고 의료 생태계를 교란하는 ‘독배’인가.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농어촌 전형’ 위에 또 하나, 불공정의 제도화가장 우려되는 지점은 제도의 설계가 자칫 특정 집단에게 과도한 특혜를 부여하는 ‘이중 사다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논의되는 지역의사제가 기존의 ‘농어촌 전형’ 등 사회통합전형과 중첩 지원이 가능해질 경우, 심각한 역차별이 발생한다. 이미 농어촌 전형이라는 별도의 트랙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자격을 갖춘 수험생이 ‘지역의사제 전형’까지 동시에 지원할 수 있다면 이는 명백한 ‘기회 중복’이다. 일반 수험생들은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반면, 일부는 정책적 혜택을 업고 두 개의 동아줄을 잡는 셈이다. ‘지역 의료를 살리겠다’는 명분이 입시의 공정성, 즉 헌법적 가치인 기회균등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면, 이 정책은 시작부터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10년 의무 복무? ‘정착’ 없는 ‘거쳐가는 정거장’ 될 뿐“대치동을 떠나 지방으로”라는 구호는 현실을 모르는 낭만적인 서사다. 지역의사제가 강제하는 10년의 기간(수련 기간 포함)은 의사가 되어가는 과정일 뿐, 지역에 뿌리내리는 ‘정착’을 담보하지 않는다. 의무 복무가 끝나는 순간, 대다수의 의료진은 자녀 교육, 생활 인프라, 그리고 더 나은 수익 구조가 보장된 수도권으로 회귀하거나, 비급여 인기과로 이탈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결국 지역의사제는 지역 병원을 잠시 거쳐가는 ‘수련 정거장’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크다. 지역 환자들이 원하는 것은 잠시 머물다 떠날 ‘한시적 의사’가 아니라, 내 병을 꾸준히 봐줄 ‘숙련된 전문의’다.‘인사 행정’ 아닌 근본적 ‘의료 정책’이 필요하다지방 의료가 무너진 원인은 의사 수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의사가 그곳에 남을 수 없게 만드는 구조적 환경 때문이다. ▲원가에도 못 미치는 필수의료 저수가 ▲불가항력적 의료사고에 대한 과도한 형사 처벌 ▲지방 병원의 열악한 인프라 등 핵심적인 문제는 방치한 채, 입시 제도를 비틀어 숫자만 채우려는 시도는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다. 이는 ‘의료 정책’이라기보다 기계적인 ‘인사 배치’에 가깝다. 정부는 입시판을 흔드는 미봉책을 멈추고 정공법(正攻法)을 택해야 한다. 지방 의료기관에 대한 과감한 재정 투자, 필수의료 의료진에 대한 확실한 사법적 보호 장치 마련, 그리고 지역 근무가 의사로서의 커리어와 경제적 보상 측면에서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도록 수가 체계를 개편해야 한다.공정하지 못한 입시 제도로 선발된 의사들이, 강제성에 묶여 근무하는 병원에서 환자와 깊은 신뢰를 쌓기는 어렵다. 지역의사제가 또 하나의 ‘입시 로또’ 논란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의료계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공정성을 훼손한 채 지역을 살릴 수는 없다.
2026-02-03 05:30:00이슈칼럼

통합돌봄법, 소는 누가 키울 것인가

[메디칼타임즈=서울시의사회 백재욱 부회장 ] 요즘 뉴스를 듣다 보면 귀에 유독 자주 걸리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통합돌봄법'입니다. 오는 2026년 3월 27일 본격적인 시행을 앞두고, 지자체마다 대비에 철저를 기하고 있다는 소식이 연일 들려옵니다.정확한 명칭은 「의료·요양 등 지역 돌봄의 통합지원에 관한 법률」입니다.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이나 환자가 병원이나 요양시설이 아닌 '자신이 살던 집과 지역사회'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의료, 요양, 돌봄 서비스를 통합 지원하는 것이 핵심이죠. 선진국에서 강조해온 'AIP(Ageing in Place)', 즉 살던 곳에서 품위 있게 늙어가는 삶을 법적으로 뒷받침하겠다는 취지입니다.1. 흩어진 서비스를 하나로, 패러다임의 전환그동안 의료(병원), 요양(장기요양), 돌봄(복지관) 서비스는 각각 분절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비스 간 연계가 어렵고, 굳이 입원하지 않아도 될 분들이 병원에 머무는 '사회적 입원' 문제도 심각했죠. 이제는 지자체가 '컨트롤 타워'가 되어 대상자를 발굴하고, 건강 상태에 맞춘 '케어 플랜'을 짜서 의료와 생활 지원을 묶어 제공하겠다고 합니다. '병원 중심'에서 '집 중심'으로 복지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거대한 변화입니다.2. 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막막함"뿐입니다정책의 청사진은 화려하지만, 당장 돌봄이 필요한 가족을 둔 분들의 현실은 어떨까요?"우리 아버님도 저 서비스를 받게 하고 싶은데, 어디로 연락해야 하나?"우선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전화를 겁니다. 장기요양서비스에 대한 긴 설명을 듣고 나면 "의사소견서를 첨부하라"는 안내가 돌아옵니다. 여기서부터 보호자의 한숨은 깊어집니다. 이미 거동이 불편해 댁에 누워 계신 지 2년, 그동안 대리 처방으로 겨우 버텨온 아버님을 소견서 한 장 받자고 어떻게 병원까지 모시고 갈 수 있을까요?사방팔방 전화를 돌리다 지쳐갈 때쯤, 겨우 방문진료 의원과 연락이 닿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차갑습니다. "소견서 작성을 위한 방문은 불가능하니, 어떻게든 모시고 나오세요." 이쯤 되면 잡고 있던 전화기를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3. 의료 현장의 괴리, "소를 키울 사람이 없습니다"반대로 통합돌봄의 또 다른 축인 의료계의 입장은 어떨까요? 지역의 의원을 운영하는 원장님은 법안의 취지에 공감해 '일차의료 방문진료 시범사업'에 참여하며 환자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가끔 걸려 오는 전화는 사업 취지와는 무관한 응급 상황 해결 요청뿐입니다.결국, 환자 가족은 "갈 곳이 없다"고 울분하고, 의료진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의료와 복지, 요양을 하나로 묶겠다는 취지는 좋으나 실제 현장에서 발로 뛰며 '소를 키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4. 말잔치보다 절실한 것은 '실천의 손길'올해 3월부터 사업이 본격화된다고 하지만, 여전히 현장에서는 알맹이 없는 정책과 MOU(업무협약)만 남발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양이 목에 걸 방울'의 성능을 평가하는 말잔치가 아니라, 그 방울을 실제로 걸고 책임질 사람의 손길입니다.서울시의사회는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지역 기반 재택의료지원센터를 중심으로 의료·요양·복지의 연계체계를 실질적으로 구축하고 있습니다.통합돌봄이 뉴스 속 정책이 아니라, 우리 집 안방과 동네 골목에서 체감되는 서비스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현장의 의사들이 직접 뛰며 실천의 방법을 제시하겠습니다.결국 통합돌봄의 성패는 "누가 소를 키우느냐"가 아니라, "함께 키우는 구조를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2026-02-02 05:00:00이슈칼럼

기득권의 현대판 음서제, 공정은 어디에?

[메디칼타임즈=공의모 김영재 사무총장 ] 음서제도. 부모가 귀족이면 자식까지 관직을 세습시킬 수 있는 고려시대 제도이다. 구시대의 악습이라고 생각했던 신분제가 대한민국 의료계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면 믿겠는가? 바로 헝가리 해외의대 유학이 '현대판 음서제도' 역할을 하고 있다.해외의대 유학은 헝가리를 필두로 우즈베키스탄, 몽골 등의 국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주로 기득권 의사들이 그들의 자식을 해외의대로 유학을 보낸다. 해외의대 졸업 후 국내 의사면허를 취득하기 위한 것이다. 국내 의대 입학이 불가능하니, 일반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금액을 지불해서라도 유학을 보낸다.'현대판 매관매직'이다. 돈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현지 대통령 취임 기념으로 유학생을 전원 합격시키고, 현지어를 못해 통역사를 구해 병원실습을 도는 것이 해외의대 유학의 현실이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여러차례 지적을 받을 정도로 해외의대의 입학 비리와 교육 부실 문제는 유명하다. 수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면허를 관장하는 보건복지부와 국시원은 해외의대 문제를 방치해 왔다.해외의대 문제의 심각성을 일찍이 인지한 공의모(공정한 사회를 바라는 의사들의 모임)는 2021년부터 해외의대 문제 해결을 위해 꾸준히 활동해왔으며, 최근 서울시로부터 공의모 활동의 공익성을 인정받았다. 서울시로부터 기부금품 모집을 공식적으로 허가 받은 것이다.  기부금품 모집 허가는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가진다. 정부기관이 공익성을 인정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헝가리의대 소송이 '직역의 이익' 목적이라 허가할 수 없다고 했지만 결국 공익성 입증에 성공했다. 소송은 승소 자체에 목적이 있기도 했지만, 해외의대 유학의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 역시 하나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현재 진행 중인 헝가리의대 소송 서류가 결정적인 근거가 되어 서울시로부터 공익성을 인정받았다. 판결이 나오기 전에도 의미있는 성과를 얻어낸 것이다.젊은 의사와 의대생들이 해외의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반면, 놀라울 만큼 조용히 방관하는 단체가 있다. 바로 대한의사협회다. 의협은 의대 증원에 관련해서는 누구보다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매년 200여 명씩 쏟아지는 해외의대생들에 대해서는 일관적으로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이유는 명확하다. 해외의대에 자식을 유학 보낸 기득권 의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전 의사협회 집행부에서는 우즈베키스탄 의대를 졸업한 의사가 이사회에 참여하고,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본인들의 이익을 위해, 의사협회는 공정함을 주장하는 공의모의 취지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2개월 전, 공의모가 항의방문하여 대한의사협회장에게 직접적으로 의견을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협회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최근 의료계 이슈 대응으로 바빴다고 하기엔,  공의모가 의협에 찾아간 지 5년이 넘었다.지난 달, 박나래의 주사이모 사건이 굉장히 화제가 되었다. 공의모는 비자격자의 무면허 의료행위의 위험성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공익적 목적으로 성명서를 발표했고, 대한민국 모든 언론에서 언급되며 전국민들에게 알려졌다. 마찬가지로, 공익을 위해 해외의대 문제를 전국민들에게 알리고 문제 해결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이다. 이번 서울시의 공익성 인정은 목표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공의모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국민 여러분들의 지원과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지금이다. ※공의모(공정한 사회를 바라는 의사들의 모임 약칭)는 젊은의사들로 이뤄진 단체로 의료계 내 공정성 문제를 중심으로 여러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본 칼럼은 필자의 개인적 견해로, 본 매체의 편집 방향과는 무관합니다.
2026-01-26 05:00:00이슈칼럼

내시경의 질은 독점이 아닌 구조에서

[메디칼타임즈=가정의학과의사회 김상진 이사 ] 내시경을 둘러싼 논의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질'과 '안전'이다. 이는 어느 한 직역의 전유물이 아니라, 의료에 종사하는 모두가 공유해야 할 가치다. 문제는 이 가치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있다. 질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 과연 배제를 통해 가능한지, 아니면 역할과 책임이 정리된 구조를 통해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이다.일차의료와 전문의의 역할은 대립이 아니라 분화의 문제다.일차의료 의사가 시행하는 내시경은 접근성과 연속성을 바탕으로, 환자의 병력과 생활습관을 고려하여 시행되는 선별검사라는 명확한 역할을 가진다. 필요 시 특정 전문의로의 신속한 의뢰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는 전문 진료로 향하는 관문이자 연결고리다. 반대로 특정 분과 전문의는 고난도 진단과 치료, 합병증 관리 등의 역할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이 구조에서 중요한 것은 우열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역할이 분명히 구분되고, 그 역할들이 서로를 보완하며 점검하는 체계가 작동하는가이다. 일차의료 내시경이 체계적인 교육과 질 관리, 명확한 의뢰 기준 속에서 이루어질 때, 이는 전문의 영역을 위협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전체 의료 체계의 안정성을 높이는 장치가 된다.자격은 열고, 교육은 닫는 구조의 한계그러나 현재 의료 정책 논의에서 제시되는 방향은 얼핏 보면 단순해 보인다. 자격은 다원화하되, 교육과 평가는 단일한 통로로 관리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시행은 허용하면서 교육을 제한하는 구조는 스스로 모순을 안고 있다. 내시경의 질은 '자격'만으로 담보될 수 있을까, 아니면 지속적인 교육과 평가를 통해 유지되는 것일까.교육의 통로가 제한될수록 현장에서는 불균일한 경험과 비공식적인 학습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정책이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교육과 역량 축적을 제도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일차의료 영역에서의 체계적인 질 관리와 역량 강화는 요원해질 수밖에 없으며, 이는 결국 환자에게 제공되는 내시경의 질 저하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정책의 역할은 배제가 아니라 설계다.정책은 특정 학문이나 직역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정책의 역할은 여러 진료 주체가 존재하는 현실을 전제로, 공통의 기준과 책임 구조 안에서 작동하도록 설계하는 데 있다. 누가 시행하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떤 기준 아래에서 책임질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가이다. 문을 닫아 관리하는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간단해 보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지속되기 어렵다.역사가 보여주는 구조의 중요성학문과 의학의 역사를 돌아보면, 발전의 속도가 늦어졌던 시기에는 종종 새로운 접근이나 다른 관점이 제도적 검증의 장에 충분히 올라서지 못했던 공통점이 발견된다. 갈릴오 갈릴레이의 지동설 논쟁 역시, 과학적 논증의 옳고 그름을 떠나 검증의 통로가 제한되어 있었던 시대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았다.의학에서도 마찬가지다. 19세기 산욕열 문제를 다루던 시기, 이그나츠 제멜바이스가 제시한 손 위생의 중요성은 이후 의학의 표준이 되었지만, 제도화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 과정은 새로운 관찰과 임상적 경험이 제도 속에서 어떻게 검증되고 받아들여지는지가 환자의 예후와 직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이 사례들이 말해주는 바는 단순하다. 질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여러 임상적 접근과 경험이 같은 기준 아래에서 평가되고 책임지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다.결국 중심에 있어야 할 것은 환자다.이 모든 논의의 중심에는 결국 환자가 있다.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소속의 의사가 내시경을 시행했는지가 아니라, 적절한 시기에 안전하게 검사를 받고, 충분한 설명을 들으며, 필요할 때 최선의 전문 진료로 연결되는가이다. 의료 체계가 직역 중심의 논쟁에 머무를수록 환자는 그 논의의 바깥에 놓이게 된다.의학의 역사는 우리에게 반복해서 말해 왔다. 하나의 방식만을 고수하는 체계보다, 여러 역할이 분명히 나뉘고 공통의 기준 아래에서 서로를 점검하는 구조가 더 오래 지속되었다는 사실이다. 일차의료 의사와 특정 분과 전문의가 각자의 자리에서 성장하며 서로를 돕고 견제하는 구조, 그리고 그 모든 판단의 기준을 환자에게 두는 것. 그것이 내시경을 둘러싼 논의가 도달해야 할 방향일 것이다.
2026-01-19 05:00:00이슈칼럼

추계 넘어 설계로 : 5년 후 위한 제언

[메디칼타임즈=고려의대 정재훈 교수(예방의학교실) ]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의료인력 수급추계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되었다. 정부 위원회에 참여하는 전문가로서, 그리고 데이터를 다루는 학자로서 지난 기간은 치열한 고민의 연속이었다. 이제 소모적인 논쟁은 뒤로하고, 냉정하게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5년 뒤, 혹은 그 이후 다시 마주할 추계가 단순한 숫자 싸움이 아닌, 한국 의료의 미래를 그리는 설계도가 되기 위해 우리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과제들을 짚어보고자 한다.1. 맞추는 것(Prediction)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Projection)이어야 한다흔히 추계를 미래를 정확히 알아맞히는 예측(Prediction)이나 예보(Forecast)로 오해하곤 한다. 하지만 10년, 20년 뒤의 미래를 정확히 맞추는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사인력 수급추계의 본질은 불확실한 미래를 다루는 전망(Projection)에 있다. 즉, 우리의 정책적 선택에 따라 미래가 어떻게 달라질지 시나리오를 보여주는 것이 핵심이다.이번 위원회에서 아쉬웠던 점은 장기 전망에 적합하지 않은 모형을 주된 방법론으로 논의했다는 것이다. 향후 추계에서는 결정론적 모형을 골격으로 삼아야 한다. 현재 추세가 지속된다면(Status Quo) 어떻게 될까?, 특정 정책이 개입되면 결과는 어떻게 변할까?라는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시나리오 기반 접근이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정책 결정자에게 명확한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다.2. 정교한 시나리오를 위한 데이터와 가정의 고도화추계의 품질은 데이터와 가정이 결정한다. ‘미래의 의사는 과거의 의사와 같은 양의 일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AI와 기술 발전으로 인한 생산성 향상, 그리고 워라밸을 중시하는 세대 변화로 인한 노동 투입 감소라는 상반된 변수들이 존재한다. 이번에는 시간 부족으로 이러한 변수들을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다.다음 추계가 시작될 때 허둥지둥 자료를 모아서는 늦다. 의사협회와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심사평가원의 방대한 데이터를 지금부터 표준화하고 정제해 두어야 한다. 또한, 의사의 은퇴 연령, 진료량 변화, 기술 발전 속도 등 핵심 변수들에 대한 기초 연구가 선행되어야만 설득력 있는 가정을 수립할 수 있다.3. 숫자의 해석: 최댓값이 아닌 최적 추정치에 주목해야과정의 투명한 공개는 중요하지만, 확정되지 않은 숫자가 주는 혼란도 경계해야 한다. 대중과 언론은 종종 여러 시나리오 중 가장 자극적인 최댓값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정책은 가장 발생 가능성이 높고 합리적인 최적 추정치를 기반으로 수립되어야 한다.앞으로의 논의에서는 극단적인 시나리오가 주는 공포보다는, 전문가들이 합의한 가장 현실적인 수치와 그 이면의 맥락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리스크 커뮤니케이션 전략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4. 근본적인 질문: 지속 가능한 의료 시스템은 무엇인가마지막으로 전문가의 계산을 넘어 우리 사회가 답해야 할 본질적인 질문이 있다. 추계는 결국 ‘우리가 어떤 의료 환경을 원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종속변수이기 때문이다.세계 최고 수준의 외래 이용 횟수와 낮은 문턱을 자랑하는 현재의 의료 이용 행태는 과연 정상인가? 그리고 이것은 인구 구조가 급변하는 미래에도 유지 가능한가? 과잉된 의료 이용을 조절하여 미래 세대의 부담을 줄일 것인지, 아니면 비용 급증을 감수하더라도 현재의 편의성을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결단이 선행되어야 한다.수식과 모델링은 그 결단에 따른 결과를 보여줄 뿐이다. 다음 추계가 시작되기 전까지, 우리는 이 불편하지만 필수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5년 뒤의 추계를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닌 미래를 위한 이정표로 만드는 길이다.
2026-01-12 05:00:00이슈칼럼

통계적 기만, 의료인력 추계의 민낯

[메디칼타임즈=경남의사회 마상혁 공공의료위원장 ] 최근 의료인력 수급추계위원회(이하 추계위)가 내놓은 '2040년 의사 1만 1136명 부족'이라는 성적표는 대한민국 보건의료 정책 거버넌스의 파산을 알리는 조종(弔鐘)이나 다름없다. 전문가들이 참여했다는 형식적 명분 뒤에 숨어, 이미 정해진 증원 숫자를 향해 달려간 이번 과정은 '과학적 근거'라는 수사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오용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국가 백년대계를 결정하는 중차대한 정책이 졸속과 기만으로 점철된 것은 의사이기 이전에 정책 전문가로서 참담함을 금치 못할 일이다.가장 먼저 지적해야 할 점은 절차적 정당성의 완전한 상실이다. 추계위는 미래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 턱없이 촉박한 일정에 쫓겼다. 15차례의 회의는 심도 있는 논의의 장이 아니라 정부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전문가 단체들이 위원으로 참여했으나, 이들이 현장의 복잡한 변수들을 피력하고 이를 추계 모델에 반영하는 실질적인 피드백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식 발표 전, 확정되지 않은 수치를 언론에 흘려 여론을 선점하려 한 행태는 정책의 투명성을 스스로 훼손한 행정 편의주의의 극치다. 이는 전문가를 정책의 동반자가 아닌 ‘들러리’로 세워 국민을 기만한 명백한 거버넌스의 실종이다.기술적 측면으로 들어가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이번 추계의 주력 모델로 활용된 ARIMA(자기회귀누적이동평균) 모형은 과거의 패턴이 미래에도 반복된다는 가정하에 단기 예측에 최적화된 도구다. 20년 뒤의 장기 수요를 ARIMA로 도출하는 것은 기상청의 일주일 예보 모델로 20년 뒤의 기후 변화를 맞히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학술적 난센스다. 보건의료 환경의 구조적 변화와 AI 도입에 따른 생산성 변화, 정책적 개입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모델을 국가 정책의 근거로 삼는 것은 방법론적 파산 선고나 다름없다. 내부 위원들 사이에서조차 “학부생 보고서 수준”이라는 비판이 쏟아진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이러한 행태는 과거 윤석열 정부 초기,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하 보사연)의 편향된 보고서를 근거로 증원을 밀어붙였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당시 감사원 감사에서도 지적되었듯, 특정 수치를 만들기 위해 데이터를 재산출하고 가공했던 보사연은 이번에도 과학적 중립성보다는 권력의 입맛에 맞는 결과물을 내놓는 데 급급했다. 이제 보사연은 국책연구기관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심각하게 자문해야 한다. 객관성이 결여된 연구 결과는 정책적 조언이 아니라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독소가 될 뿐이다.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장기적인 숫자 놀음에 매몰되어 당장 눈앞의 단기적 정책 보완은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40년의 수급 불균형보다 무서운 것은 현재 진행 중인 필수의료의 붕괴와 지역의료의 공동화다. 정부의 계획대로 대규모 증원을 강행한다면, 그들을 가르칠 교수 요원 확보와 천문학적인 예산 확보는 어떻게 할 것인가? 교육 인프라의 한계를 무시한 숫자의 밀어붙이기는 의학 교육의 질적 파탄을 초래하고, 결국 국민 건강권에 대한 심각한 위해로 돌아올 것이다.지금이라도 정부는 '숫자'라는 신기루에서 깨어나야 한다. 과학의 가면을 쓴 정치적 폭거를 멈추고, 의료계와 실질적인 신뢰 회복을 위한 거버넌스 재구축에 나서야 한다. 불확실한 모델에 근거한 졸속 발표를 철회하고, 장기 전망과 단기 처방이 조화를 이루는 정교한 정책 설계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번 추계는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을 붕괴시킨 '통계적 기만'의 역사적 증거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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