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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안 된 특사경 권력, 누가 책임지나

[메디칼타임즈=경남의사회 마상혁 공공의료위원장] 건강보험공단이 특별사법경찰관(특사경) 제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부정수급과 허위청구를 근절하겠다는 명분은 그럴듯하고, 건강보험 재정 누수가 심각하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책의 명분보다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제도가 정말 필요한지를 따져보았는가 하는 것이며, 설령 필요하다 해도 지금 우리 공직 사회는 사법권을 올바르게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특사경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논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건보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이미 강력한 선제적 차단 수단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청구 데이터 전수 분석, DRG 이상 패턴 탐지, 현지조사권, 환수처분권, 요양기관 지정취소 연계권이 그것입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연간 수십억 건의 청구를 전산 심사합니다. AI 기반 이상청구 탐지 시스템 고도화, 청구 코드 조작 패턴 데이터베이스 구축, 의·약학 전문가 검토단 확대는 수사권 부여보다 비용 대비 효과가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범죄 탐지를 위해 수사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범죄를 탐지하고 있는데 처벌 수단을 자기 손에 쥐려는 것이 공단특사경의 본질입니다. 이것은 수사기관이 아닌 징수기관이 원하는 구조입니다. 수사권은 범죄 예방이 아닌 범죄 이후 처벌 수단입니다. 예방·탐지 시스템을 먼저 갖추지 않고 처벌 수단을 먼저 도입하는 것은 정책 순서의 역전입니다.급여 청구 문제는 본질적으로 행정법적 사안입니다. 형법의 최후수단성(ultima ratio) 원칙상 행정조사→행정처분→환수의 경로로 해결해야 하며, 형사화는 어디까지나 예외여야 합니다. 의료기관의 급여 청구 문제는 기존에도 행정조사와 행정처분으로 해결해 왔습니다. 공단특사경이 도입되면 단순한 청구 기준 해석 오류나 경미한 실수도 손쉽게 형사사건으로 비화될 수 있습니다. 이는 형사법의 최후수단성 원칙에 정면으로 반하며, 의료현장 전반을 잠재적 형사문제화시키는 구조적 위험성을 내포합니다. 대법원 역시 명문 규정 없이 유사 업무라는 이유만으로 특사경 권한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판시한 바 있습니다(대법원 2025도11546). 직무범위와 주체를 명확히 특정하지 않으면 권한 남용 또는 무권한 수사 논란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습니다.더 근본적인 문제는 구조적 이해충돌입니다. 공단은 건강보험 재정을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재정 누수를 줄여야 한다는 조직적 유인이 매우 강합니다. 그런 기관이 동시에 수사권을 갖는다면, 단속 성과가 곧 재정 성과로 이어지는 구조에서 과잉수사와 무리한 처벌 압력은 예고된 수순입니다. 공단은 현재도 급여 지급, 비용 심사, 환수 처분 등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수사권이 추가되면 조사·처분·수사 기능을 하나의 기관이 동시에 행사하게 되며, 재정 건전성이라는 목표가 수사 과정에 개입하여 수사 공정성에 근본적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수사·기소 분리 및 검사 지휘권 약화라는 형사사법 구조 변화와 결합될 경우 공단특사경은 사실상 독립적 수사기관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중수청 설치로 수사가 검사 지휘 없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고, 공소청 설치로 기소가 수사 관여 없이 사후 판단하는 구조에서, 특사경에 대한 기소 억제 기능은 실질적으로 약화됩니다. 의사의 형사 리스크는 구조적으로 증가하고, 의료사고 형사특례가 있어도 실질적 보호 효과는 약화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공단특사경이 도입되면 경찰·특사경·심평원 현지조사가 동일 사건에 중복으로 이루어지는 3중 수사 구조가 현실화됩니다. 의료기관은 과도한 방어 비용과 인력 소모에 시달리게 되고, 공소청은 특사경 수사 관여 통제 기능을 상실하여 불기소·보완 재검토 기능이 약화되며, 수사기관과 공소청 간 책임 경계가 불분명해집니다. 무엇보다 수사 가능성이 상존하는 환경에서 고위험 환자 기피와 고난도 시술 회피가 확산되고, 외과·응급의학·산부인과 등 필수의료 분야가 집중 타격을 받아 의료 공백이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국민 생명과 직결된 필수의료입니다.방치되어 온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의료생협(생활협동조합 형태 의료기관) 문제가 대표적입니다. 명의 대여, 조합원 자격 위장, 비의료인 실질 운영, 보험청구 허위화가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음에도 현행 규제 체계에서 사실상 방치되어 왔습니다. 공단이 진정으로 재정 누수를 차단하려 한다면, 특사경이라는 새로운 권한 창설이 아니라 이미 문제가 드러난 의료생협에 대한 현지조사와 행정처분 강화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새 수단을 요구하기 전에 기존 수단을 제대로 쓰지 않는 이유를 먼저 설명해야 합니다.현장의 현실은 또한 냉혹합니다.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법경찰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민원인이 관련 법령과 고시를 출력해 감독관에게 설명해야 하는 주객전도 상황이 벌어집니다. 단기 교육 수료만으로 자격을 부여하고 2~3년마다 부서를 옮기는 순환보직 문화 속에서 전문성이 쌓일 리 없습니다. 사법권을 가진 순간 일부 공무원들은 민원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전제하고 접근합니다. 압박식 심문, 고압적 언사, 위협에 가까운 분위기 조성이 이루어지고, 정작 민원인에게 진술 거부권조차 제대로 고지되지 않는 사례가 보고됩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역시 허가권이라는 막강한 행정 권력을 이미 쥐고 있음에도 기업 측이 법령 근거 조항을 설명하며 심사관을 사실상 교육하는 구조가 반복됩니다. 전문성 없는 권력이 탄생하면, 동일한 행위가 어떤 담당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범죄가 되기도 하고 아무 문제가 없기도 한 자의적 법 집행이 일상화됩니다. 압수 대상이 진료기록, 처방내역, CCTV, 메신저 기록까지 확대될 경우 환자의 민감한 개인정보가 대량 노출될 위험이 있으며, 이는 의료법상 진료 비밀 보호 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향은 분명합니다. 단순 수료 방식의 교육을 법조인·전문가가 참여하는 엄격한 자격시험으로 전환하고, 합격하지 못하면 사법권을 부여하지 않는 원칙을 세워야 합니다. 특사경 직위를 순환보직 대상에서 제외하고 최소 5년 이상 해당 분야 경력자에 한해 자격을 부여해야 합니다. 권한 행사에 대한 사후 감독을 기관 내부 자체 조사에 맡겨서는 안 되며, 독립 외부 기관이 정기적으로 감독하고 결과를 공개해야 합니다. 조사 전 과정을 영상 녹화하고 민원인에게 권리를 서면으로 고지하는 것을 법적 의무로 규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조건이 갖춰지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공단과 심사평가원의 데이터 기반 탐지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방치되어 온 의료생협 불법 구조를 정리하며, 현지조사권과 환수처분권을 제대로 행사하는 것이 그것입니다.마지막으로 정치적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공단특사경 문제는 이미 국회에서 수차례 논의된 사안입니다. 그때마다 결론은 같았습니다. 보험자인 공단에 사법권을 부여하는 것은 권한의 범위를 넘는다는 판단이었고, 이는 여야가 합의한 내용입니다. 법제사법위원회를 반복적으로 통과하지 못한 것은 단순한 절차적 지연이 아닙니다. 입법부가 숙의를 거쳐 내린 판단이며, 삼권분립의 관점에서 사법권의 민간 준공공기관 위임에 대한 헌법적 우려가 반영된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단이 특사경 도입을 반복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국회의 판단을 존중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여야가 모두 우려하는 사안을 행정부 주도로 관철시키겠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민을 위한 제도라면 국민의 대표 기관인 국회의 반복된 판단을 겸허히 수용해야 합니다. 국회가 틀렸다고 주장하려면, 그 판단을 뒤집을 만한 새로운 근거를 국민 앞에 먼저 제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런 근거는 제시된 바 없습니다.결국 이 질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여야가 합의하여 거듭 제동을 건 제도를 지금 이 시점에 다시 밀어붙이는 것이 과연 국민을 위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재정 누수 차단이라는 명분 뒤에 공단 조직의 권한 확대라는 목적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합니다. 국민의 이익과 기관의 이익이 일치하지 않을 때, 정책은 반드시 국민의 편에 서야 합니다. 그것이 공공기관 존재의 근거이며, 지금 공단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책임입니다.행정 문제는 행정으로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며, 형사는 최후의 수단이어야 합니다. 순서가 틀렸습니다. 권한은 준비된 자에게만, 그리고 다른 수단이 모두 소진된 이후에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법치주의의 기본이며, 지금 이 논의에서 가장 먼저 되새겨야 할 원칙입니다.
2026-06-01 05:00:00이슈칼럼

만성 불면증, 전문 치료가 필요한 '뇌의 경고'

[메디칼타임즈=서울보라매병원 신경과 구대림 교수]한국인은 점점 잠을 못 자고 있다. 실제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보건의료빅데이터에 따르면 국내 불면증 환자 수는 2020년 65만여 명에서 2024년 76만여 명으로 5년 사이 약 16% 증가했다. 특히 여성 환자는 남성 환자보다 1.5배 이상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환자 수 증가보다 더 주목해야 할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불면증을 여전히 '치료가 필요한 질환'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 시행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89%가 최근 한 달 이내에 다양한 수면 문제를 경험했지만, 실제 치료 경험이 있는 사람은 6%에 불과했고 약 70%는 치료 자체를 고려해 본적이 없다고 답했다. 이는 불면증이 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흔하기 때문에 오히려 질환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수면 문제를 스트레스, 일시적인 컨디션 저하 혹은 성격적인 예민함 정도로 여기며 참고 버틴다. 그러나 반복되거나 만성화된 불면은 단순한 피로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수면의학에서는 이를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 축(Hypothalamic-Pituitary-Adrenal axis)의 과활성화, 자율신경계 불균형, 수면 항상성 조절 기전의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관여하는 신경생물학적 이상 상태로 이해하고 있다.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단순히 수면 시간이 부족한 것을 넘어 집중력 및 기억력 저하, 정서 조절 능력 감소, 만성 피로, 무기력 등의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더 나아가 우울장애 및 불안장애의 위험도 유의하게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만성 불면증은 밤에만 나타나는 증상이 아니라 낮 시간의 기능과 정신 건강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질환이며, 전문적인 치료 개입이 필요한 임상적 상태라고 볼 수 있다.현재 만성 불면증의 1차 치료로는 인지행동치료(Cognitive Behavioral Therapy for Insomnia, CBT-I)가 권고된다. CBT-I는 수면에 대한 비합리적 신념과 과도한 불안을 교정하고, 수면 제한 요법과 자극 조절 기법 등을 통해 무너진 수면-각성 주기를 다시 정상화하는 구조화된 치료 프로그램이다.다만, 실제 임상에서는 환자의 증상 정도와 생활 환경에 따라 약물치료를 병행하거나 단독으로 적용하는 경우도 많다. 기존에 많이 사용돼 온 졸피뎀 등의 GABA 수용체 작용제 계열 수면제는 뇌 전반의 활동을 억제해 수면을 유도하는 기전으로, 빠르게 잠들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일부 환자에서는 다음 날 잔여 진정 효과, 인지 기능 저하, 내성 및 의존성 문제가 보고돼 왔다.최근에는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새로운 치료 접근으로 이중 오렉신 수용체 길항제(Dual Orexin Receptor Antagonist, DORA)가 주목받고 있다. 오렉신은 시상하부에서 분비돼 각성 유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신경펩타이드로, DORA는 오렉신의 수용체 결합을 선택적으로 차단함으로써 과도한 각성 신호를 낮추고 자연스러운 수면 전환을 유도한다.  GABA 계열 수면제처럼 뇌 전반을 억제하는 방식이 아니므로, 잔여 진정 효과, 반동성 불면, 의존성 등의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평가되며,  현재 해외 주요 임상 현장에서 활용이 확대되고 있다.수면 문제가 주 3회 이상, 3개월 이상 지속되거나, 낮 시간 동안 피로감·집중력 저하·정서 불안정 등의 기능 저하가 동반된다면 이는 단순한 생활 습관 문제가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만성 불면증으로 평가해야 한다.우리는 하루의 3분의 1을 잠으로 보낸다. 그런데도 수면 문제 만큼은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잠은 의지로 해결하는 영역이 아니라, 뇌 기능과 건강 전반을 유지하기 위한 생물학적 시스템이다. 반복되는 불면은 뇌가 보내는 중요한 경고 신호일 수 있으며, 이를 제대로 진단하고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결국 삶의 질과 건강을 지키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중요한 방법이다.
2026-05-27 05:30:00이슈칼럼

1조짜리 지역필수의료법, 제 값 하려면

대한의료정책학교 장재영 교육연구처장[메디칼타임즈=대한의료정책학교 장재영 교육연구처장] 하루가 멀다 하고 지역의 열악한 의료 인프라를 꼬집는 소식들이 들려온다. 그 해법 중 하나로 「필수의료 강화 지원 및 지역 간 의료격차 해소를 위한 특별법」, 이른바 지역필수의료법이 내년부터 시행된다. 이 법은 담배 개별소비세의 55% 등을 재원으로 무려 연간 1조 원 이상의 특별 회계 설치를 포함한다.지역보건법, 공공보건의료에 관한 법률 등 유사한 내용을 다루는 법안이 있음에도 새로운 특별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의미가 작지 않다. 이는 시민사회와 정치권에서 흔히 '지필공(지역, 필수, 공공)' 영역에 대한 적극적인 국가 개입을 주문한 것이기 때문이다.이 재원이 현장에 제대로 쓰인다면, 지역에서 묵묵히 일하는 의료진에게 정당한 보상이 돌아가고 환자에게도 더 나은 의료 접근성이 보장될 수 있다. 전공의의 입장에서 추후 몸담아야 할 지역의 의료환경을 떠올리며 법안을 찬찬히 읽어보았다.단순한 파견 근무의 확대는 의료진의 참여를 위축시킬 수 있다법 제10조와 제14조에는 필수의료 인력의 파견 및 지원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왕성히 활동 중인 타지역 의사를 해당 지역으로 유입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고, 많은 부분은 지역거점의료기관 (공공의료기관 혹은 대학병원)의 의료진이 파견되는 형태가 될 것이다. 이때의 원칙은 '파견은 일시적 방편이며, 그 지원은 충분하게'가 되어야 한다.국내외 연구는 지역 내 교육/수련 경험이 지역 잔류의 핵심 요인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재의 전공의나 젊은 전문의들은 의과대학 교육 및 수련 과정 중 실제 지역사회 의료와 충분히 접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파견 근무가 전문적 성장의 기회가 아니라 부족한 인력을 임시로 메우는 방식으로 운영된다면, 참여 의지를 높이기보다 오히려 기피를 낳을 수밖에 없다.의과대학 교육에서 지역사회 접촉을 늘리는 것이 장기 과제라면, 이미 통과된 지역의사제와 국립의전원을 통해 의무복무해야 하는 인원들이 실제 남을 수 있는 경로를 만드는 것은 중기 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파견 수련은 그 전까지의 단기적인 해결책으로 접근해야 하며, 파견수당 및 체류비 지원, 하나의 커리어패스로서 인정되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필수의료 진료권의 탄생, 하지만 환자가 오지 않는 권역에는 발전도 없다지역필수의료법에서 말하는 '필수의료 진료권'은 1998년 폐지된 의료보험 진료권과는 다르다. 환자의 이동을 제한하려는 장치라기보다, 행정 단위로 진료권을 설정해 권역 내 의료기관 간 연결성과 책임성을 높이려는 개념에 가깝다. 그러나 진료권을 설정하는 것만으로 환자 흐름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해당 권역 안으로 환자가 유입되고, 또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진료받을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정책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2024년 기준 서울 소재 의료기관에서 진료받은 환자 중 타지역 환자는 41.5%에 이른다. 환자가 없는 곳에는 의료진도 모이기 어렵고, 의료진이 없는 곳에서는 교육과 연구도 축적되기 어렵다. 이에 정부는 진료의뢰·회송 시범사업과 최근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시범사업을 통해 지역으로의 환자 분산과 의료전달체계 회복을 시도하고 있다.이와 연계하여 새로운 재원은 지역거점병원의 인프라 구축뿐 아니라, 환자가 지역 안에서 치료를 이어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에도 쓰여야 한다. 필수의료 분야의 회송환자 관리료를 신설하고, 환자가 지역에서 필요한 보건의료 자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바우처를 지급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지방정부의 역량 및 역할 확대도 함께 되어야 한다지역필수의료법은 국가 차원의 종합계획뿐 아니라 시도별 시행 계획을 두고, 지역에는 필수의료위원회를 신설해 정책 수립과 조정 과정에 지자체의 참여를 제도화하는 구조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을 실질적으로 수행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정책 역량이 필요함은 자명하다. 하지만 지방정부가 그 여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다.정웅기 외(2024)의 경기도공공보건의료지원단 보고서는 경기도처럼 규모가 큰 지자체에서조차 보건의료 분야의 지방정부 전문성이 취약하고, 지역보건의료심의위원회 등 기존 상설 기구가 형식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적한다.따라서 지역의 자체 정책 수행능력을 키우기 위해 특별회계 사업 항목에 지자체 내 보건의료 정책 전담인력 확충, 지역 의료이용 데이터 분석 지원, 지방정부와 지방의회의 보건의료 정책역량 강화 프로그램 등이 명시될 필요가 있다. 지역필수의료법의 숨은 전제는 실행력 있는 지방정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지역필수의료법은 출발점에 서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재원이 단순한 인력 파견, 장비 보강, 병원 지원에 머물지 않고 지역에 지속 가능한 의료역량으로 남도록 설계하는 일이다. 의료진이 일할 수 있고, 환자가 믿고 머물 수 있으며, 지방정부가 스스로 조정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것. 그것이 지역필수의료법이 진짜 성과로 이어지는 길일 것이다.
2026-05-26 05:00:00이슈칼럼

의료혁신, 원인 분석 없는 처방은 사상누각

[메디칼타임즈=경남의사회 마상혁 공공의료위원장] 정부가 의료혁신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현장의 문제를 짚고 개선 방향을 찾겠다는 취지다.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반영하겠다는 다짐도 덧붙였다. 듣기에 그럴듯하다. 그러나 한 가지 근본적인 물음이 먼저 제기돼야 한다. 지금의 의료 현장은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진단 없는 처방은 없다. 의료 현장에서 가장 기초적인 원칙이다. 그런데 정작 의료정책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혁신위는 현재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점을 찾겠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정책적 실패가 지금의 현실을 만들었는지, 누가 그 결정을 내렸고 어떤 과정이 왜곡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은 보이지 않는다.현재 의료 현장의 위기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재앙이 아니다. 수십 년간 누적된 정책 실패의 산물이다. 저수가 구조, 필수의료 붕괴, 지역 의료 공백, 전공의 기피 현상 — 이 모든 것은 보건복지부가 입안하고 집행한 정책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국회는 이를 제대로 감시하지 못했다. 책임의 소재가 분명함에도 혁신위 어디에도 이 구조적 책임을 묻는 의제는 없다. 원인 제공자가 반성 없이 해법을 설계하는 구도, 이것이 지금 의료혁신위원회의 민낯이다.더 심각한 문제는 전문성의 희석이다. 의료정책은 고도로 전문화된 영역이다. 수가 체계, 의료 인력 수급, 지역 배치, 필수의료 구조 — 이 문제들은 수십 년의 임상 경험과 정책 연구가 결합되어야 비로소 실효성 있는 답이 나온다.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중요하다. 의료 수요자의 경험과 요구는 반드시 정책에 반영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문가의 설계 안에서 수렴되어야 할 입력값이지, 전문가의 판단과 동등한 결정 권한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의학에 비유하자면 이렇다. 환자의 증상 호소는 진단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치료 방침은 의사가 결정한다. 시민이 아무리 많은 수로 '수술 말고 약으로 낫게 해달라'고 요구해도, 전문가가 수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면 그 판단이 앞서야 한다. 여론과 전문성을 동등하게 놓는 순간, 정책은 올바른 방향보다 인기 있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이미 우리는 이 실패를 경험한 바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서부경남 공공의료원 설립을 둘러싸고 공론화 위원회가 꾸려졌다. 숙의 민주주의의 외양을 갖췄다. 그러나 과정을 지켜본 이들은 안다. 논의는 처음부터 결론이 정해진 채 진행되었다. 반대 의견은 형식적으로 수렴되었을 뿐, 정책의 방향은 흔들리지 않았다. 공론화는 정당성을 포장하는 도구였고, 위원회는 들러리였다.지금의 의료혁신위원회가 그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구성 방식, 의제 설정권, 결론 수렴 구조 — 어느 것 하나 투명하게 공개된 것이 없다. 과거와 다른 점이 무엇인지 정부는 답해야 한다.진정한 의료혁신은 불편한 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누가 이 위기를 만들었는가. 어떤 결정이 잘못되었는가. 그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물음에 정직하게 답하지 않는 혁신은 혁신이 아니다. 현재의 고통 위에 새로운 실패를 쌓아 올리는 일이다.사상누각은 모래 위에 세운 누각을 말한다. 원인 분석 없는 의료혁신, 책임 소재를 외면한 정책 설계, 전문성을 희석시키는 공론화 —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작동하는 한, 의료혁신위원회가 내놓을 결론은 처음부터 흔들리는 기초 위에 올라선 구조물일 뿐이다.
2026-05-18 05:00:00이슈칼럼

방산 산업 성공 앞에 K-의료기기 백년대계를 묻다

내외적으로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도 국민 건강과 국가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의료기기 산업계에 올해 '제19회 의료기기의 날'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지난해 4월 '의료기기법' 개정을 통해 5월 29일이 법정기념일로 공식 지정된 이후 두 번째로 맞이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는 의료기기산업이 단순한 제조업을 넘어 국민 생명을 지키는 국가 전략 산업으로서 그 위상이 제도적으로 정립되고 있음을 보여준다.화려한 지표와 초라한 현장의 역설그러나 우리 의료기기산업의 실상은 화려한 지표와 초라한 현장의 역설 속에 놓여 있다. 2024년 기준 생산액 11조 4,267억 원, 수출액 7조 1,700억 원을 기록하며 세계 시장 12위권으로 도약했으나, 국내 보건의료의 중추인 상급종합병원 내 국산 장비 점유율은 단 11.3%에 불과하다.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가 6조 원대 시장을 형성하며 성장을 견인하고 있음에도 연구개발(R&D) 성과가 임상 채택과 대형 시장 확대로 연결되는 구조는 여전히 민낯으로 남아 있다.이런 현상은 단순히 기술력이 부족하거나 의료진의 선택 문제로 치부될 수 없다. 의료기기는 일반 공산품과 달리 의사의 사용 경험과 장기간 축적된 임상 근거, 보험 체계 등이 결합해야만 선택받을 수 있는 특수한 시장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산업은 우수한 제조 역량을 갖췄음에도 R&D 성과가 실제 구매와 수출 확대로 이어지는 전주기적 연결 고리가 끊겨 있다. 바로 이 지점이 지금 우리가 직면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며, 기술이 아닌 구조의 문제이다.정부 지원의 한계와 전환의 시점그간 정부 지원은 이 단절을 극복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지원 사업은 소액으로 분산돼 있고 부처 간 장벽으로 인해 분절적이다. 국산 의료기기 사용 활성화 예산은 전략 산업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만큼 규모가 작으며 실증과 보급 지원 역시 제각각 흩어져 있다. 규제 개선도 점진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나 개별 제품의 인허가라는 미시적 관점에 머물러 있다. 반면 디지털의료제품법 시행과 AI 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산업과 제도를 동시에 재편할 수 있는 창을 열어주고 있다. 지금은 단순한 제도 보완의 시기가 아니라 산업 구조 자체를 재설계해야 하는 전환의 시점이다.방산 성공 모델, 의료기기에 맞게 재설계해야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정표는 한국 방위산업의 성공 사례다. 과거 내수용 무기 체계에 머물렀던 방산은 정부의 장기 투자, 국산 우선 획득 제도, 부품 국산화, 그리고 범정부 차원의 수출 지원 체계를 통해 세계적인 전략산업으로 탈바꿈했다. 방산은 국가가 최초의 수요자가 돼 성능을 보증하고 이를 바탕으로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전주기 모델을 구축했다. 다만 방산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은 위험하다. 방산의 수요자는 국가이지만 의료기기의 수요자는 환자, 의사, 병원, 보험자, 규제 기관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핵심은 동일한 방식이 아니라, 국가가 산업 전환의 가장 어려운 구간을 책임지는 구조를 의료기기 특성에 맞게 재설계하는 데 있다.이미 주요국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은 혁신 의료기기 지정과 보험 적용을 연계하고 데이터 인프라를 결합하는 구조를 구축하고 있으며, 유럽연합은 의료데이터 활용 체계와 AI 규제를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일본 또한 전담 심사체계와 의료 DX를 통해 산업과 의료 현장을 연결하고 있다. 이들 사례가 보여주는 공통점은 분명하다. 규제, 데이터, 보험, 연구개발이 하나의 정책 체계로 통합돼 있다는 점이다.전주기 지원 체계 구축, 백년대계의 출발점이제 우리도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새로운 전략의 핵심은 국가가 단순한 규제자가 아니라 최초 수요 창출자이자 증거 인프라 조성자로 역할을 확장하는 것이다. 총리실 산하 국가전략의료기기위원회를 중심으로 부처 공동사무국을 운영하고, 정책·예산·조달을 하나로 묶는 통합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동시에 병원·기업·연구기관을 연결하는 임상실증 네트워크와 국가 의료데이터 연합망을 통해 산업 전반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특히 디지털 전환기에 발맞춰 데이터·AI 융합을 핵심 경쟁력으로 삼아야 한다. 단순한 데이터 접근을 넘어 연합학습이 가능한 구조, 표준화된 데이터 관리, AI 성능을 지속적으로 검증하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 아울러 공공병원이 국산 전략 품목의 최초 구매자가 돼 임상 근거를 축적하고 이를 민간 시장과 수출로 연결하는 혁신구매 및 조건부 수가 체계가 필요하다. 수출 전략 역시 단품 중심에서 벗어나 교육, 유지보수, 데이터 분석이 결합된 패키지형 진출로 전환해야 한다.이런 전환은 단계적으로 추진돼야 한다. 향후 1~5년은 법·제도 정비와 데이터·실증 인프라 구축에 집중하고, 5~10년은 공공구매와 수출 확대를 통해 산업 규모를 키우며, 이후에는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는 구조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향후 10년간 공공투자 18조 원을 포함한 총 40조 원 규모의 전략적 투자가 필요하다. 이는 단순한 지원이 아니라 산업 구조를 바꾸기 위한 최소한의 국가적 선택이다.국가 전략산업으로의 전환은 경제적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감염병 위기나 공급망 불안 속에서 필수 의료를 자국 기술로 유지할 수 있는 역량은 국가 보건 안보와 직결된다. 동시에 의료 AI와 디지털 기술은 고령화 사회의 의료 서비스 문제를 해결할 핵심 수단이기도 하다. 이제는 국가가 시장을 설계하고 산업을 연결하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정부는 의료기기·데이터·AI 융합산업을 백년대계 국가전략으로 선포하고 입법과 예산으로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 11.3%라는 국산 채택률의 장벽을 넘어서는 길은 오직 전주기 지원 체계 구축에 달려 있다.우리는 지금 첨단의료기기산업의 새로운 전환점 앞에 서 있다. 기술 혁신 그 자체를 넘어, 그 성과가 임상 현장과 국민의 삶에 실질적으로 연결되고 다시 산업의 성장과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 지금 이 시대의 과제다. 제19회 의료기기의 날이 대한민국 의료기기산업의 가치와 가능성을 다시 확인하고, 세계 시장을 향한 도전을 더욱 치밀하고 단단하게 이어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원주의료기기산업진흥원은 산업계와 함께 우리 의료기기가 국민의 건강을 지키고 세계 시장에서 신뢰받는 경쟁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맡은 역할을 성실하고 흔들림 없이 다해 나갈 것이다. 의료기기산업 발전을 위해 애쓰는 모든 종사자 여러분의 건승과 발전을 기원한다.
2026-05-15 05:10:00이슈칼럼

[손문호 칼럼]학생은 줄고 환자는 늘어난다

[메디칼타임즈=박상준 기자]학령인구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교육교부금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내국세의 일정 비율이 자동으로 배분되는 구조 속에서 교육재정은 이미 70조 원을 넘어섰고, 추가경정예산까지 반영될 경우 80조 원을 넘길 가능성도 거론된다. 학생 수는 줄어드는데 교육 예산은 늘어나는 이 역설적인 구조는 이제 단순한 재정 논쟁을 넘어, 국가 재정의 방향 자체를 다시 묻는 단계에 이르렀다.지금 대한민국은 명백히 인구 구조의 전환기를 지나고 있다. 학생은 줄어들고, 환자는 늘어나고 있다. 고령화는 가속화되고 있으며, 의료와 돌봄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은 과거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자동적으로 교육 분야에 집중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과 괴리된 재정 시스템의 문제다.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교육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정의해 왔다는 점이다. 초중고 학생의 건강관리와 생활습관은 평생 건강을 좌우한다. 비만, 당뇨, 정신건강 문제, 생식건강 문제는 성인이 되어서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학령기에서 시작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교육은 교실 안의 문제로, 건강은 의료의 영역으로 분리해 왔다. 이 이분법적 사고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청소년의 건강은 교육의 일부가 아니라 교육 그 자체다. 건강하지 않은 학생에게 학습은 지속될 수 없고, 건강하지 않은 사회에서 교육의 성과 역시 유지될 수 없다. 특히 여학생의 생식건강, 청소년기의 정신건강, 생활습관 형성은 단순한 보건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 교육 과제다.한편 필수의료는 이미 붕괴의 경계에 서 있다. 산부인과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으며, 소아청소년과는 유지조차 어려운 구조에 놓여 있다. 아이를 낳을 병원이 없고, 아이를 진료할 의사가 없는 상황에서 교육만 강화하겠다는 정책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 출생 자체가 무너지는 사회에서 교육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제는 재정의 질문을 바꿔야 한다. 교육교부금을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재정을 어떻게 재배치할 것인가의 문제다. 학령인구 감소로 인해 상대적으로 여유가 생기는 교육재정의 일부를 필수의료와 생애주기 건강관리로 전환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특히 산부인과 분만 인프라 유지, 소아청소년과 필수진료 지원, 학교 기반 건강관리 시스템 구축, 청소년 정신건강 및 생식건강 관리 등은 더 이상 의료 영역에만 맡겨둘 수 없는 국가적 과제다. 이는 교육과 의료를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개념을 건강까지 확장하는 방향으로 재정 구조를 재설계하는 문제다.현재의 교육교부금 구조는 학생 수와 무관하게 예산이 증가하는 자동배분 시스템이다. 반면 필수의료는 환자가 늘어도 유지가 어려운 취약한 구조에 놓여 있다. 이러한 불균형을 방치하는 것은 단순한 비효율을 넘어 국가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문제다.결국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학생 수가 줄어드는 시대에 교육재정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미래세대의 건강과 국가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재정을 재배치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교육은 교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건강에서 시작된다. 이제는 교육교부금 시대를 넘어, 필수의료 재정 시대로 전환해야 할 때다.
2026-05-11 05:00:00이슈칼럼

필수의료 기피, 의사는 공공재인가?

서울시의사회 김나영 부회장2024년 2월, 과학적 근거가 없는 의대 2000명 증원의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함께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의 질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낮은 수가를 유지해온, 세계가 부러워하던 의료강국이었다. 그러나 의정사태 이후 교수들은 병원을 지키느라 연구를 중단해야 했고, 많은 우수한 교수들이 대학을 떠났다. 향후 회복이 쉽지 않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2024년 보건복지부 박민수 차관이 브리핑 중 "여성 의사 비율의 증가, 남성 의사와 여성 의사의 근로시간 차이, 이런 것까지 가정에 모두 집어넣어서 분석을 하고 있다"고 발언한 일은 충격적이었다. 의대 증원을 정당화하기 위해 여의사의 증가를 문제처럼 언급한 이 여성차별적 발언은 의료계, 특히 여성 의사들에게 깊은 모욕이었다.의정사태를 겪으며 내가 가장 놀랐던 말은 '의사는 공공재'라는 표현이었다. 그것은 의사를 공익적 역할을 수행하는 전문직으로 존중하는 말이 아니라, 필요하면 국가가 언제든 동원할 수 있는 관리 대상으로 보는 시선에 가까웠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인데도 내 의사와 상관없이 그만둘 수 없다는 어감은 참기 어려웠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다.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지만 자연과학 그 자체보다 환자를 진료하고, 연구하는 의학자의 길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험이 잦고 경쟁이 치열한 의대를 졸업하고, 응급실, 흉부외과, 외과, 내과, 소아외과 등 소위 힘들다는 인턴 과정을 나는 오히려 재미있게 마쳤다. 당직을 서며 잠도 못 자고 100시간이 넘는 강도 높은 수련을 견디면서도 즐겁다고 느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의사가 되어간다는 사실이 좋았기 때문이다. 특히 아픈 환자를 돕는 일은 내게 분명한 보람이었다. 그래서 이후 내과를 선택했다. 전인적 치료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필수적인 분야였기 때문이다.소화기내과 전공의와 전임의 과정을 마친 후 대학 취직은 쉽지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내시경 시술로 위암도 치료할 수 있고 출혈도 멎게 할 수 있는 소화기내과가 좋았다. 지금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흉부외과와 산부인과의 전공의 미달 사태가 외과로, 다시 소아과와 내과로 번지는 동안 안과, 피부과, 재활의학과, 성형외과, 마취통증의학과가 선호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다. 보람이 큰 필수과가 기피의 대상이 된 데에는 결국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고생에 비해 보상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 다른 하나는 의료사고에 대한 부담이 지나치게 크다는 점일 것이다. 그동안 보람을 많이 느껴온 나에게는 후자가 더 필수의료를 외면하는 현 사태에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필수의료과인 내과, 특히 소화기내과에도 의료사고는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내시경 시술 후 천공이다. 2020년에는 대장경 검사를 위해 장정결제를 투여한 뒤 장 천공이 발생해 환자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소화기내과 교수가 구속되어 감옥에 간 이 사건은 의료계 전체에 깊은 충격을 주었다. 사건은 결국 해결되었지만, 대신 당직 중 오더를 냈던 전공의가 피해를 본 것으로 알고 있다. 인턴과 전공의 시절부터 형사 구속의 공포에 노출되는 현실은 필수의료 기피를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나 역시 2008년 10월 큰 상처를 남긴 의료사고를 겪었다. 다행히 환자가 사망하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은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최종 진단은 복막에 발생한 밴드결찰에 의한 소장폐색이었다. 수술 전까지 한 달 동안 폐색이 생겼다가 풀리기를 반복해 초기 진단이 쉽지 않았고, 이후 다시 폐색이 발생해 수술을 받았으며, 퇴원 후에도 유착으로 재수술을 하는 등 상황 계속 꼬였다. 환자는 결국 처음 진료 과정에 참여한 인턴, 내과 교수, 외과 교수를 의료진 오진으로 형사와 민사로 고소했고, 나는 2009년 1월 2일 경찰 출두 통보를 받았다.여러 단계로 꼬인 상황을 정리해 진술서를 쓰는 일만도 고통스러웠다. 다섯 번, 여섯 번을 수정해 제출했고, 2월 5일에는 경찰서에서 환자와 대질심문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경찰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런 문제로 환자가 그렇게 쉽게 의사를 고소할 수 있느냐고. 경찰은 웃으면서 우리나라에 신문고 제도가 있지 않았느냐고 답했다. 이후 일이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출두 요청을 받았을 때는 내가 유죄가 되면 의사면허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2009년 5월 4일 토요일 오후, 집으로 '기소중지판결'이라는 등기가 도착했을 때 나는 거의 주저앉을 뻔했다. 무죄가 아니라는 뜻인가 싶어서였다. 이후 3개월이 지나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과정을 지나고 나서야 왜 환자들이 형사와 민사를 동시에 제기하는지, 왜 의사들이 민사소송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지 절감했다. 나와 함께 고소를 당했던 인턴은 이후 박사과정을 밟으며 훌륭한 신진의학상을 받았고, 미국에서 연구한 뒤 다시 임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들었다. 그 의학자가 우리나라에서 계속 활동했다면 보건의료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인턴, 전공의, 전임의 시절 겪는 의료사고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진로를 바꾸고, 필수의료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깊은 정신적 상처다.의협 대의원회 2025년도 하반기 워크숍에서 발표된 '의료사고 관련 민·형사 소송 현황에 관한 비교법적 고찰'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1년에 입건되는 의사의 수는 약 735명이다. 이 가운데 약 40명 정도가 형사판결을 받고, 실제 처벌받는 의사는 연간 20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한편 의료과오로 인한 민사소송 1심 선고 건수는 2020년 이후 해마다 700~900건 수준이며, 약 50% 내외에서 환자 측 청구가 인용된다. 여기에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처리 건수까지 연평균 2000건 안팎이라는 점을 더하면, 의료진은 매년 3000건 가까운 민사 분쟁에 휘말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답은 분명하다. 필수의료를 살리려면 필수의료과에 종사하는 의사들에게 중대한 과실이나 고의가 아닌 이상 민형사상 책임을 면제하고, 피해자는 공적 제도를 통해 보상받는 체계를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의사를 공공재처럼 통제하는 발상이 아니다. 필수의료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제도적 신뢰와 보호가 아닐까 싶다. 
2026-05-11 05:00:00이슈칼럼

초고령 사회 방문진료는 새로운 기회

백재욱 의무부회장바야흐로 지역사회 통합돌봄(커뮤니티케어)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서울시의사회는 서울특별시와 협력하여 '일차의료방문지원센터'를 성공적으로 개소하였고, 이를 마중물 삼아 일차의료 중심의 방문진료 저변 확대를 꿈꾸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초고령 사회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재택의료는 우리 개원가가 반드시 선점해야 할 최우선 화두입니다.현장에서 진료실을 지키시는 동료 선후배님들께서 방문진료의 필요성에 십분 공감하시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현실을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진료실을 비우는 것에 대한 기회비용과 두려움, 수가의 한계, 환자 발굴부터 동의서 작성과 청구에 이르는 복잡한 행정력, 그리고 인력의 부재까지. 그 현실적인 벽이 결코 낮지 않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우리 일차의료방문지원센터는 막연한 '명분'만을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철저하게 회원 여러분께 '실리와 편의성'을 제공하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센터는 다음의 세 가지 핵심 주안점을 실현해 나갈 것입니다.첫째, 진입 장벽의 최소화입니다. 방문진료의 전면적인 도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외래 진료의 공백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주 1~2회 오전이나 오후의 유휴 시간, 점심시간 등 특정 시간대만을 활용한 부분적 참여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모델을 만들겠습니다.둘째, 행정 부담의 완전한 분리입니다. 환자 발굴, 일정 조율, 서류 작업 등 진료 외적인 행정 소요는 모두 센터가 감당하겠습니다. 지원센터가 완벽한 허브 역할을 수행하여 원장님들의 행정 부담을 제로(0)에 가깝게 덜어드리고, 오직 '진료'에만 집중하실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겠습니다.셋째, 동선 최적화와 지역 밀착형 매칭입니다. 진료실 밖에서 이동하는 시간은 곧 원장님들의 기회비용입니다. 센터는 권역별로 환자와 참여 의원의 좌표를 분석하여, 이동 거리를 최소화하는 스마트 매칭 시스템을 도입할 것입니다. 동네의 가까운 환자를 우선 배정하여 이동에 따른 피로도를 획기적으로 낮추겠습니다.나아가 센터는 원장님들이 체감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현장 대안을 제시합니다.무엇보다 간호사와 사회복지사를 아우르는 '팀 접근(Team-based) 모델'을 안착시키겠습니다. 의사 혼자 모든 짐을 지고 방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위해 현재 의사회와 센터 주도로 현장형 통합돌봄 인력 양성을 위한 6주간의 전문 커리큘럼이 가동되고 있습니다. 철저히 훈련된 케어매니저들이 사전에 방문하여 환자 상태를 스크리닝하고 환경을 세팅한 뒤에 원장님이 방문하실 수 있도록, 믿고 맡길 수 있는 인력 풀(Pool)을 의원들과 공유하겠습니다.또한, 모든 회원이 매일 방문진료에 나설 수는 없기에 '공동 참여형 순환 당직제' 및 '거점 의원제' 시범 운영을 추진하겠습니다. 뜻이 맞는 지역 의원 3~4곳이 그룹을 이뤄 요일별로 방문진료를 전담하는 순환형 모델을 구축한다면, 개별 의원의 부담은 최소화하면서도 환자에게는 끊김 없는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커뮤니티케어와 재택의료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요구입니다. 우리가 지금 일차의료 방문진료의 튼튼한 뼈대를 세우지 않는다면, 이 중요한 의료 전달 체계의 주도권은 결국 다른 직역이나 거대 자본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우리가 일차의료방문지원센터를 굳건히 키워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센터가 환자를 찾고, 일정을 조율하며, 스마트하게 동선을 맞추겠습니다. 센터가 단단하게 깔아놓은 레일 위에서, 회원 여러분께서는 일주일에 단 반나절, 혹은 단 한 명의 환자라도 좋으니 의사 본연의 역할로 힘을 보태어 주십시오.진료실 문을 나서는 결단이 지역사회의 깊은 존경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의료 모델의 주도권을 우리 개원가가 당당히 쥘 수 있도록 센터가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2026-05-04 05:00:00이슈칼럼

의과는 '시스템' 한방은 '개별 판단'

의료의 본질은 치료에 있지 않다. 진정한 의료는 '언제 치료를 멈추고 환자를 보내야 하는가'를 아는 데서 완성된다. 환자를 끝까지 붙잡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 더 이상 자신의 영역이 아닐 때 정확히 넘기는 것이 의료의 수준이다. 현대 의학은 이 판단을 개인의 감각에 맡기지 않는다. 진료의뢰서, 협진, 상급병원 전원이라는 구조를 통해 환자를 이동시키며, 일정 수준 이상의 위험 신호가 발생하면 자동적으로 다음 단계의 의료로 연결된다. 이 과정은 선택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의과 의료는 결국 '환자를 보내는 구조' 위에서 작동한다.그러나 현재의 한방 의료는 이러한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전원은 제도화된 시스템이 아니라 개별 의료인의 판단에 맡겨져 있으며, 언제 다른 의료기관으로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차이는 단순한 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환자의 생존을 좌우하는 구조적 격차다. 의료의 또 다른 본질은 '검증된 경험'이다. 의과 의료에서 의사는 면허 취득 이후 곧바로 독립 진료에 들어가지 않는다. 대부분 전공의 과정을 통해 수년간 환자를 경험하며 진단과 치료의 기준을 체화한다. 이 과정은 의료 오류를 줄이기 위한 사회적 안전장치이며, 의료를 개인의 기술이 아닌 표준화된 시스템으로 만드는 핵심 장치다. 그러나 한방 의료에서는 이러한 구조가 보편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수련 과정이 존재하더라도 필수 경로가 아니며, 상당수는 졸업과 동시에 독립 진료에 진입한다. 이는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임상 판단이 환자에게 직접 적용될 수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문제는 이 두 가지 구조적으로 전원 시스템의 부재와 수련 구조의 미비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전환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검증되지 않은 판단이 반복될 경우, 진단 지연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그 지연은 환자에게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최근 한 환자가 장기간 치료를 받는 동안 암 진단이 지연되어 말기 상태에 이른 사건은 이 구조적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법원은 일부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인과관계 입증의 한계를 이유로 대부분의 손해배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환자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고, 시스템은 아무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 의료의 현실이다.환자는 시스템이 아니라 판단에 맡겨져 있고 판단이 실패하더라도 책임은 제한되며 그 구조는 반복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은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자동차보험 경상환자 치료를 제한하기 위한 '8주 룰'조차 수년간의 논의와 데이터 검토를 거쳤음에도 특정 집단의 반대에 의해 원점으로 되돌려졌다. 이는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 결정 구조의 붕괴를 의미한다. 이 구조가 지속되면 결과는 분명하다. 저위험·고수익 진료는 확대되고, 고위험·필수의료는 붕괴된다. 의료는 치료가 아니라 리스크 회피의 산업으로 변질된다.이제 국회는 선택해야 한다. 전원 없는 의료를 그대로 둘 것인가, 수련 없는 진료를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환자 안전을 중심으로 의료 구조를 재설계할 것인가.해답은 명확하다.지속되거나 악화되는 증상에 대해서는 검사 및 전원을 의무화해야 하며, 이를 이행하지 않은 경우에는 인과관계 입증 책임을 완화해야 한다. 또한 의료인의 독립 진료 이전에 일정 수준 이상의 임상 수련을 의무화하는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자동차보험 등 보험 영역에서는 장기 치료에 대해 자동 심사와 전원 연계를 제도화하여 의료 이용의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 무엇보다 정책 결정 과정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며, 특정 이해관계에 의해 쉽게 뒤집히는 구조를 더 이상 용인해서는 안 된다.의료는 기술이 아니라 구조다. 그리고 구조가 없는 의료는 환자를 보호할 수 없다. 지금 대한민국 의료는 묻고 있다. 환자를 시스템으로 보호할 것인가 아니면 판단에 맡긴 채 방치할 것인가.그 선택의 책임은 국회에 있다.
2026-04-27 05:00:00이슈칼럼

숫자는 정확해도 과학은 겸손하지 않았다

[메디칼타임즈=경남의사회 마상혁 공공의료위원장] -질병청 인플루엔자 연례보고서를 읽고지난 4월 17일, 질병관리청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국가 인플루엔자 연례보고서'를 처음으로 공동 발간했다. 두 거대 공공기관이 가진 방대한 빅데이터를 결합해 인플루엔자 유행과 백신 효과를 분석한 첫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는 분명하다. 지난 절기 인플루엔자 유행이 2016년 이후 가장 컸다는 점, 입원환자의 절반 이상이 65세 이상 고령자였다는 점, 그리고 백신이 고령층의 중증과 사망을 상당 부분 막아냈다는 점은 국민이 반드시 알아야 할 정보다.그러나 보고서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의학자의 눈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이 여럿 눈에 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과는 의미 있으나 전달 방식은 과학적 겸손함을 잃었다. 그리고 이 겸손함의 부재야말로, 역설적으로 백신에 대한 국민 불신을 키우는 가장 큰 원인이다.첫째, 연구 방법이 공개되지 않았다. 보고서는 "연구 설계와 연령대에 따라 중증 예방효과 63.7~74.6%, 사망 예방효과 38.1~81.1%"라는 구체적 수치를 제시했다. 그러나 그 수치가 어떤 연구 설계(test-negative design인지, 코호트 분석인지, case-control인지)로 산출되었는지, 교란변수는 어떻게 보정했는지, 관찰 기간은 어떻게 설정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보도자료 어디에도 없다. 과학에서 '결과'와 '방법'은 분리될 수 없다. 방법이 빠진 결과는 주장일 뿐, 근거가 아니다.둘째, 동료평가(peer review) 여부가 명시되지 않았다. 국가 기관이 발표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과학적 타당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공기관의 발표일수록 독립된 전문가 집단의 검토를 거쳤는지, 어느 학술지에 투고·게재될 예정인지를 밝혀야 국민 신뢰가 쌓인다. 그 절차가 없거나 있어도 표시되지 않는다면, 이는 '정부가 말하니 믿으라'는 권위주의적 과학 커뮤니케이션에 가깝다.셋째, 빅데이터 분석의 본질적 한계가 적시되지 않았다. 건강보험 청구자료와 예방접종 등록자료를 연계한 후향적 빅데이터 분석은 강력한 도구이지만, 결코 완벽하지 않다. 접종군과 미접종군 사이에는 건강 상태, 의료 이용 행태, 사회경제적 지위 등에서 체계적 차이가 존재한다(이른바 'healthy vaccinee bias'). 청구자료의 진단코드는 임상 확진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고, 사망 원인 분류도 불명확한 경우가 많다. 이런 한계를 인정하지 않은 채 효과 수치만 단정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홍보다.넷째, 연령별 세분 분석이 부족하다. 인플루엔자는 연령에 따라 임상 양상, 합병증 위험, 면역 반응이 완전히 다른 질환이다. 소아, 학령기, 청장년, 65~74세, 75세 이상, 85세 이상은 각기 다른 집단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보고서는 "고령층 중증·사망 예방효과 50~80%"라는 광범위한 구간만 제시한다. 이 구간은 너무 넓어서 어떤 정책 판단에도 쓰기 어렵다. 75세 이상 초고령층에서 감염 예방효과가 10%대에 머무른다면, 그것을 숨기는 것보다 솔직히 알리고 대안(고용량 백신, 보조제 첨가 백신 도입 등)을 논의하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다.다섯째, 가장 문제적인 지점은 '14만 3868건의 입원·외래 감소, 3506건의 사망 감소'라는 숫자다. 이 숫자는 관찰된 수치가 아니라 백신효과 추정치를 인구에 적용해 역산한 모델링 결과다. 앞서 지적했듯 효과 추정치 자체가 38.1%에서 81.1%까지 두 배 넘게 흔들리는데, 거기서 산출된 '예방된 사망 3506명'이라는 한 자리 단위 숫자가 어떻게 가능한가. 과학적으로 성실한 표기는 '약 2000~6000명의 사망을 예방한 것으로 추정된다'와 같이 불확실성 구간을 함께 제시하는 것이다. 한 명 단위까지 찍어 발표하는 순간, 시민들은 직관적으로 안다. "저건 계산이 아니라 선언이다."결과가 의심스러워서가 아니다. 결과를 전달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확정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의심의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팬데믹 이후 공중보건 기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린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과학은 '우리가 아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모르는 것'을 정직하게 말할 때 힘을 얻는다.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우선, 연례보고서는 보도자료가 아니라 과학 문서여야 한다. 연구 설계, 포함·제외 기준, 통계 모형, 한계점, 이해상충, 자금 출처를 명시한 본문 보고서를 누리집에 함께 공개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익명화된 분석 데이터와 코드를 연구자 커뮤니티에 공개해 재현성을 확보해야 한다.둘째, 모든 효과 추정치에 95% 신뢰구간과 불확실성 범위를 병기해야 한다. '3506건 사망 감소'가 아니라 '중앙값 3500건, 95% 신뢰구간 1800~6200건'으로 써야 한다. 이는 불신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치의 신뢰도를 높이는 일이다.셋째, 연령·기저질환별 세분 분석을 표준화해야 한다. 특히 75세 이상, 면역저하자, 만성질환 동반자 집단의 효과를 별도로 제시해야, 고용량 백신 도입이나 2회 접종 전략 같은 실질적 정책 논의가 가능하다.넷째, 독립된 외부 전문가 자문단의 동료평가를 거치고, 그 결과를 함께 공개해야 한다. 대한감염학회, 대한예방의학회, 대한소아감염학회 등 관련 학회와의 공식 검토 절차를 연례화할 필요가 있다.다섯째, 국민 대상 요약본과 전문가용 본문 보고서를 분리 발간해야 한다. 국민에게는 쉽고 정직하게, 전문가에게는 방법과 한계를 상세히. 이 두 층위를 혼동한 현재의 방식이 혼란을 키우고 있다.인플루엔자 백신은 고위험군을 지키는 가장 비용 효과적인 공중보건 수단 중 하나다. 그 가치를 지키는 길은, 효과를 부풀리는 것이 아니라 효과와 한계를 동시에, 겸손하게, 투명하게 말하는 것이다. 국민은 완벽한 백신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정직한 정부를 원한다. 첫 연례보고서 발간은 분명 진일보다. 다만 다음 보고서부터는, 숫자의 정확함보다 과학의 겸손함이 더 돋보이기를 바란다.
2026-04-20 05:00:00이슈칼럼

효과 입증 CTEPH 치료제, 정책 결단 필요

"수술을 했는데도 얼마 전부터 다시 숨이 차기 시작했어요…방법이 없을까요? 너무 답답합니다."얼마 전 진료실에서 만난 만성 혈전색전성 폐고혈압 환자의 말이다. 이런 질문에 시원하게 답변할 수 없을 때가 의사로서 미안하고 막막한 심정이다. 만성 혈전색전성 폐고혈압(이하, CTEPH)은 폐동맥 안에 남아 있던 혈전이 섬유화되며 혈관을 서서히 막아가는 희귀 난치성 질환이다. 발병률은 인구 100만 명당 약 5명. 통계만으로 보면 가볍게 느껴질 수 있는 수치지만, 치료 시기를 놓치면 호흡곤란, 어지러움 등으로 일상적인 활동조차 버거워지고, 수술이 불가능한 중증 환자의 5년 생존율은 약 30%에 불과하다. 진료실에서 느끼는 '환자들의 삶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CTEPH의 근본적 치료는 섬유화된 혈전을 외과적으로 제거하는 폐동맥내막절제술(PEA)이다. 그러나 교과서적인 치료가 현실에서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환자의 약 40%는 병변의 위치나 동반 질환으로 인해 처음부터 수술 적응증에 해당하지 않는다. 어렵게 수술을 받더라도 약 10~35%의 환자에서 폐고혈압이 지속되거나 재발한다. 수술이라는 선택지조차 허락되지 않은 환자들, 수술 이후에도 여전히 숨 가쁜 환자들을 진료현장에서 반복해서 만나고 있다. 희귀질환이라는 특성은 환자들에게 또 하나의 장벽이 된다. 질환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고, 진단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며, 치료에 대한 선택지는 제한적이다. 필자가 근무하는 부산대병원이 15년째 폐고혈압 클리닉을 운영하며 매년 5월 환자의 날을 마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올해도 5월 7일 '숨쉬는 오늘, 나누는 이야기'라는 주제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폐동맥 고혈압을 포함한 폐고혈압 환자와 보호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 환자들이 서로의 경험과 어려움을 나누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소중한 자리로 자리 잡았다. 필자에게 진료를 받는 CTEPH 환자들 역시 이 자리에 참석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전할 예정이다. 함께 숨쉴 수 있는 희망을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만으로는 환자들이 마주한 현실을 바꾸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환자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실제로 병의 경과를 바꿀 수 있는 치료제에 대한 접근성이다. 공감만으로는 숨 가쁨을 멈출 수 없고, 제도적 뒷받침 없이 희귀질환 치료를 위한 정책의 구조적 한계를 넘기 어렵다. 수술이나 시술이 불가능하거나, 수술 후에도 폐고혈압이 남아 있는 CTEPH 환자에게 사용할 수 있는 치료제가 없는 건 아니다. 현재 국내에서 허가된 유일한 CTEPH치료제 '아뎀파스'는 2014년 폐동맥 고혈압과 CTEPH 모두에서 허가 받았으며, 폐동맥 고혈압에는 지난해부터 급여가 인정됐다. 하지만 CTEPH에는 여전히 급여가 인정되지 않는다. CHEST-1 임상연구에서 아뎀파스는 16주 치료 후 6분 보행거리를 평균 39m 개선시켰으며, 위약군에서는 오히려 평균 6m 감소했다. 폐혈관저항(PVR)과 심부전 지표인 NT-proBNP 수치에서도 유의미한 개선이 확인됐다. 이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FDA와 EMA의 승인을 받았고, ESC와 ERS 가이드라인에서도 Class I 등급으로 권고되고 있다. 전 세계 진료 현장에서 10년 이상 사용되며 효과와 안전성이 축적된 치료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진료 현장에서는 여전히 '그림의 떡'이다. 보험 급여가 적용되지 않아 환자가 전액 본인 부담으로 약값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 일본, 유럽 주요 국가에서는 건강보험을 통해 치료 접근성을 보장하고 있지만, 국내 환자들은 경제적 이유로 치료를 포기하거나 미루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결국 치료가 가능한 환자마저도 '급여'라는 큰 장벽에 막혀 돌아서게 된다. 여기에 더해 국내에는 CTEPH에 대한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 코드조차 없어, 질환에 대한 통계적 파악과 제도적 관리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CTEPH는 사실상 희귀질환 관리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CTEPH 환자들이 더 큰 소외감을 느끼는 이유다.CTEPH 환자들은 충분한 임상 근거와 해외에서 오랜 사용 경험이 있는 치료제가 존재함에도 치료받지 못한 채로 오늘도 숨 가쁜 일상을 간신히 살아내고 있다. 모든 질환이 그렇듯, CTEPH 역시 진단 시점에서 얼마나 빨리 충분하게 환자의 상태를 개선해 주느냐가 예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제는 정부가 '한 시라도 빠르게' 정책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 '희귀질환 환자들이 제도 밖에 머무르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을 환자와 가족, 그리고 의료진은 기억하고 있다. 대한폐고혈압학회는 아뎀파스의 급여화와 KCD 코드 신설을 포함해 CTEPH 환자의 치료 환경 개선을 위한 논의를 계속해 나갈 것이다. 정책이 한 걸음만 더 환자 쪽으로 다가온다면, '희귀하다'는 이유로 눈앞에 있는 숨쉴 수 있는 희망을 놓치는 환자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매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진료실에 들어서는 환자를 직접 마주하는 의사로서, 그 변화를 간절히 기대한다.
2026-04-16 10:01:32이슈칼럼

'중대한 과실'이라는 이름의 함정

[메디칼타임즈=손문호 위원]의사에게 진료와 수술은 단순한 기술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매 순간 예측할 수 없는 변수와 마주하며 환자의 생명을 지켜야 하는 '작은 전쟁'에 가깝다. 환자의 상태는 교과서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동일한 질환이라도 개인의 생리적 반응은 끊임없이 달라진다. 결국 최종 판단은 현장에 있는 의사의 경험과 직관, 그리고 책임에 의해 내려질 수밖에 없다.이러한 의료의 본질을 고려할 때, 최근 논의되는 '중대한 과실'과 '중한 과실'의 법적 구분은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의료행위는 본질적으로 연속적이고 확률적인 판단의 결과물인데, 이를 사후적으로 이분화하여 책임의 정도를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가 현실과 괴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 기준이 명확한 수치가 아닌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동일한 의료행위조차도 상황과 판단 주체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할 위험이 존재한다.문제는 이러한 불명확성이 필수의료 현장에 미치는 영향이다. 의사는 최선의 치료를 선택하기보다, 사후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 '안전한 선택'을 우선하게 된다. 이는 곧 방어진료의 구조적 고착화로 이어진다. 고위험 환자나 예측이 어려운 상황을 기피하는 경향이 강화되며, 결국 가장 도움이 절실한 환자일수록 적절한 치료 기회를 잃게 된다.방어진료는 단순히 의료비 증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필수의료의 붕괴로 이어지는 신호다. 응급, 외상, 중증질환과 같이 본래 높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영역에서 의사의 참여가 줄어들고, 의료는 점점 '안전한 영역'으로만 이동하게 된다. 그 결과 의료 시스템 전체는 취약해지고,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영역이 가장 먼저 흔들리게 된다.전쟁에서 동일한 행위가 '살인'이 되기도 하고 '사살'이 되기도 하듯, 의료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과실'이 되기도 하고 '불가항력'이 되기도 한다. 그 차이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이를 해석하고 규정하는 기준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 기준이 불명확하고 사후적으로 작동할수록, 현장의 판단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따라서 의료에서의 과실 판단은 결과 중심의 단편적 평가를 넘어, 당시의 의료 환경과 의학적 합리성, 그리고 의사의 의사결정 과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방향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특히 형사책임의 과도한 확대는 필수의료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는 만큼, 합리적 범위 내에서의 민사적 보상 체계와 위험 분산 구조로의 전환이 필요하다.의료는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을 다루는 영역이다. 그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정책의 역할이다. '중대한 과실'이라는 이름으로 불확실성을 처벌하려는 순간, 의료는 위축되고 환자는 보호받지 못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규제가 아니라, 현장의 판단이 존중받을 수 있는 제도적 균형이다.
2026-04-14 05:30:00이슈칼럼

의사회 회비의 가치

서울특별시의사회의 재무를 맡은 지 9년차에 접어들었다. 제34대와 제35대 집행부에서 재무이사를 역임한 후, 제36대 집행부에서는 재무부회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서울특별시의사회의 회무에 헌신해 왔다.짧지 않은 그 시간 동안 우리 의사회의 재무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으나, 한 가지 두드러진 점이 있다면 회원들이 내는 회비 납부율이 감소 추세에 있다는 점이다. 일부 회원들은 회비를 납부하면 나에게 어떤 혜택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기도 한다.재무 부회장인 나의 답변은 개인의 영역과 직역집단의 영역에서 그 혜택이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모든 직역 단체는 회비 납부를 의무로 한다. 개인과 집단이 공통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회는 개인과 집단의 이익이 다를 수 없기에 이런 맥락에서 회비 납부율의 감소는 아쉬운 부분이다.우리 의사회는 의사 면허신고 및 연수 교육, 각종 위원회 운영 그리고 실사 및 의료사고 발생 시 의료기관 현지 방문 및 애로사항을 파악하는 실사상담위원회와 회원고충즉각대응팀을 운영하고 있다.또한 회원 및 회원 가족의 경조사에 지원을 하고 있으며, 종합민원실, 인사노무관리 자료, 의사면허 신고 확인 등 홈페이지를 통한 각종 온라인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회비 미납 회원의 경우, 연수 교육 참여 시 등록비를 차등화하고, 온라인 면허 신고 제한, 위원회 위촉 제한, 선거권 미부여, 홈페이지 접속을 제한하는 등 회비 납부율 제고를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타 직역에 비하면 상당히 완화된 수준이다.예를 들어, 변호사협회는 회비 미납의 경우 과태료를 부과하고 심지어 회비지급명령 신청 등 법적 강제까지 불사하며 단체의 기강을 세우고 있다. 치과의사협회는 미납 회원이 보수 교육을 신청할 때, 점수 1점당 5만 원의 간접비를 추가 부과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우리 의사회는 제도적 보완에도 힘쓰고 있다. 특히 지난 2025년 11월, 서울시 4개 의약단체(의사·치과의사·한의사·약사회)와 전현희 국회의원이 협력하여 의미 있는 법안을 발의했다. 의료인이나 약사가 기관을 개설할 때 해당 지역 의약단체에 개설 내역 제출을 의무화하는 것이 골자로, 이 법안이 통과되면 지역 의사회의 체계적인 관리와 회비 납부율 제고에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나날이 어려워지는 의료 환경 속에서 회원들이 납부한 소중한 회비는 회원 모두의 기본적인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정부의 불합리한 정책에 맞서는 법률 대응 비용이며, 회원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의료 분쟁의 방어막이자 우리의 권익을 대변할 전문가 그룹을 육성하는 투자이기도 하다. 즉, 회비는 의사 개인은 물론 의사회 전체 공동의 가치를 부여하고 살찌우기 위한 것이며, 개인이 부담하는 사적 비용이 아니라 직역 전체를 지키는 보험에 해당한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여의식이다.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는 비전문가 집단인 국회와 정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의사들의 전문적 식견과 윤리적이고 숭고한 의지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중요한 의료 제도나 의학적 사안에 대한 의사 개인의 의견을 수렴하고 전달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의사회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이다.우리의 미래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산만하고 무기력한 각자 도생하는 집단의 미래는 밝지 않다. 선명한 하나의 목소리를 가진 존재감 있는 직역으로서 의사회는 그 사회적 위상을 지켜내야 한다. 이 갈림길에서 우리 의료계의 내일을 결정짓는 것은 의사회 회원 모두의 적극적인 참여와 결속에 달려 있다.  
2026-04-13 05:00:00이슈칼럼
[박선영 대표의 병원ESG 칼럼]

나프타 수급 불안이 남긴 숙제⑦

[메디칼타임즈=스테리케어 박선영 대표] 오늘 정부는 중동 지역의 긴장 고조로 인한 나프타 수급 차질에 대비해 수술복, 수술포 등 필수 의료용품 원료를 우선 공급한다는 대책을 발표했다. 국민 생명과 직결된 의료 현장의 공백을 막기 위한 정부의 신속하고 기민한 대응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역설적으로 우리 의료 현장이 외부 환경 변화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대외 변수에 흔들리지 않는 의료 현장을 위하여일회용 수술복과 수술포는 현대 의료의 효율성을 높여주었지만, 석유 화합물인 나프타를 원료로 한다는 점에서 국제 유가와 수급 불안정이라는 대외 변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부의 우선 공급 정책은 당장의 급한 불을 끄는 효과적인 처방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원료 수급 상황에 따라 의료 현장의 불안감이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조금 더 근본적이고 보완적인 대안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외부에서 원료를 들여와 한 번 쓰고 버리는 구조를 넘어, 이미 보유한 자원을 순환시켜 사용하는 시스템으로의 전환이다.재사용 시스템, 정부 정책의 든든한 보완재나는 재사용 수술 가운과 수술포가 정부의 자원 관리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실질적인 보완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75회 이상 재사용이 가능한 고성능 가운은 일회용품 75벌이 수행할 역할을 단 한 벌로 대신한다. 이는 원재료 수급 파동이 닥쳤을 때 병원이 자체적으로 견뎌낼 수 있는 '자생력'을 의미한다.해외의 선진 의료 체계가 팬데믹이나 물류 대란 속에서도 재사용 자산을 활용해 의료 공백을 최소화했던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재사용 시스템을 갖춘 병원은 정부의 자원 배분 우선순위에만 의존하지 않고도, 위기 상황에서 스스로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회복 탄력성(Resilience)을 갖게 된다.'자원 순환형 의료'로 나아가는 길정부가 오늘 발표한 규제 완화와 우선 공급 대책은 민생 안정을 위한 필수적인 조치다. 여기에 더해, 장기적으로는 의료용품의 '자원 자립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적 시야를 넓힌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재사용 의료용품의 도입을 장려하고 관련 인프라를 지원하는 것은, 단순한 환경 보호를 넘어 국가적 자원 위기 상황에서 의료 현장을 보호하는 이중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글로벌 공급망 위기 속에서, 우리 의료 현장이 보다 단단해지기를 바란다. 이번 나프타 수급 이슈가 일회용품 중심의 소비 구조를 넘어,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자원 순환형 의료 시스템'으로 나아가는 소중한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의료의 본질인 '환자 안전'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안정적인 자원 공급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2026-04-10 08:03:10이슈칼럼

통합돌봄 시대, 의사와 주간보호센터

진료실에서 만나는 환자와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환자의 모습은 종종 다르다. 그리고 진료실에서 세운 계획은 생활 속에서 다르게 작동하곤 한다.혈압은 조절되어야 하고, 약은 규칙적으로 복용해야 하며, 운동과 식이 조절이 필요하다는 점은 충분히 설명된다. 하지만 환자의 일상에서는 그 계획이 그대로 유지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이 문제를 단순히 '순응도'의 문제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오히려 의료가 다루는 영역과 환자가 실제로 살아가는 영역 사이에 구조적인 단절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령 환자를 진료할수록 이 단절은 더욱 뚜렷해진다. 여러 만성질환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고, 신체 기능은 점차 저하되며, 일상생활 수행 능력 역시 함께 떨어진다.이때 환자의 예후를 결정짓는 것은 더 이상 '처방의 적절성'만이 아니다. 생활 속에서 그 처방이 실제로 구현되는지, 그리고 기능 저하를 얼마나 늦출 수 있는지가 핵심이 된다.최근 정책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통합돌봄'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환자가 병원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살고 있는 곳에서 의료와 돌봄이 함께 작동하도록 구조를 바꾸겠다는 시도다.그러나 이 흐름 속에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이 구조 안에서 의사는 어디까지 관여해야 하는가?"지금까지의 의료는 비교적 명확했다. 환자가 병원을 방문하면 진단하고, 치료하고, 필요시 추적 관찰을 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통합돌봄 환경에서는 환자의 상태가 병원 밖에서 대부분 결정된다. 의료가 개입하는 시간보다, 그렇지 않은 시간이 훨씬 길다.이 지점에서 우리는 특정 시설 하나가 아니라, 환자의 '생활 공간 전체'를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주간보호센터는 그중 하나의 축이다. 환자가 낮 시간 동안 머물며 반복적인 관찰과 개입이 가능한 공간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환자의 삶은 주간보호센터에 머무는 시간보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길다.따라서 방문요양, 재가요양과 같은 영역까지 함께 보지 않으면 환자의 실제 생활은 여전히 의료의 바깥에 남게 된다. 중요한 것은 개별 서비스의 종류가 아니라 이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여부다.현재의 시스템에서는 의료기관, 주간보호센터, 방문요양기관이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 사이의 연결은 충분히 설계되어 있지 않다.그 결과 현장에서는 돌봄 영역이 의료적 판단을 일부 대신하거나, 의료는 환자의 실제 생활을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처방을 반복하는 일이 발생한다.통합돌봄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이 분절을 단순한 '협력'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관리 체계로 재구성해야 한다.예를 들어, 외래 또는 방문진료에서 환자의 기능 상태와 위험요인을 평가하고, 주간보호센터에서는 낮 시간 동안의 활동과 재활을 담당하며, 방문요양과 재가요양은 가정 내에서의 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보조하는 구조다.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화와 신호가 다시 의료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러한 순환이 만들어질 때 비로소 '생활 속 관리'가 작동하게 된다.이 구조를 누가 설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만약 의료가 이 과정에 충분히 관여하지 않는다면, 돌봄을 중심으로 한 구조가 먼저 형성되고 의료는 필요할 때 호출되는 형태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그렇기 때문에 지금 시점에서 의사가 주간보호센터뿐 아니라 방문요양, 재가요양까지 함께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변화 속에서 의료가 중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진료실 밖의 구조를 이해하고, 필요하다면 그 설계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통합돌봄에서 의사들이 해야 하고, 할수 있는 영역이라 생각한다.그 변화 속에서 의사가 어떤 위치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의료가 환자의 삶을 다시 중심에서 다룰 수 있을지, 아니면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게 될지가 결정될 것이다.
2026-04-06 05:00:00이슈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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