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백의 의료인문학 칼럼]
죽음을 마주한 시선
[메디칼타임즈=고상백 교수 ]죽음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침묵이며, 가장 본질적인 두려움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 침묵 앞에 직접 마주 서는 일조차 드물다. 많은 사람들이 병원 병동의 커튼 너머에서, 혹은 연락을 받은 한참 뒤에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전해 듣는다. 임종의 자리는 의료화되고, 효율적으로 분리되어, 죽음은 점점 '목격되지 않는 사건'이 되어가고 있다. 고통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우리는 상실만을 남긴다. 의사는 이 침묵 앞에서 병명을 붙이고, 시간과 수치를 기록하며, 생의 마지막을 임상적으로 관리한다. 그러나 죽음은 언제나 의학의 언어로 다 담을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어떤 이들은 그 앞에서 머무는 다른 방식의 응답을 택했다. 예술가들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단지 애도의 대상으로 남겨두지 않았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고, 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침묵을 고통의 시선으로 붙들고, 그것을 그려야 했다. 페르디낭 호들러와 클로드 모네, 이 두 화가는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생명의 끝을, 그리고 죽음의 얼굴을 그렸다.그림. 페르디낭 호들러. 병상의 발렌틴. 1914 Ferdinand Hodler. Valentine Gode-Darel on her Sick Bed, 1914페르디낭 호들러(Ferdinand Hodler, 1853–1918)의 '죽어가는 발렌틴' 연작은 그가 남긴 가장 내밀하고 고통스러운 작품군 중 하나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죽음을 직시하였다. 이 연작은 호들러가 평생 사랑했던 연인 발렌틴의 죽음을 지켜보며, 그 과정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예술가로서의 집념과 인간으로서의 비통함이 겹쳐지는 드라마틱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녀가 암으로 쓰러졌던 1909년부터 1915년 사망에 이르기까지, 그는 병실 곁을 떠나지 않았다. 호들러는 발렌틴이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병상에 있는 그녀를 수십 점의 유화, 수채화, 드로잉으로 그렸다. 이들 작품은 병상의 초기 부터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 그리고 사후의 시신까지를 아우르며, 죽음에 이르는 얼굴과 몸의 변화를 날것 그대로 담았다. 이는 20세기 초 유럽 미술에서 보기 드문, 고통과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한 회화적 기록이자 하나의 시각적 애도 문서이다.이 연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형식과 태도다. 호들러는 죽어가는 그녀를 이상화하거나 감상적으로 포장하지 않았다. 점점 말라가는 몸, 함몰되는 뺨, 멀어지는 눈빛, 그리고 고통 속에 기운이 빠져가는 손의 움직임까지, 그는 관찰자이자 연인으로서의 깊은 슬픔과 예술가로서의 치열함을 함께 담아 내었다. 대표적인 작품인 '병상의 발렌틴'이나 '죽음 직전의 발렌틴'에서는 붓질 하나하나가 그녀의 생명과 함께 쇠약해지는 감각을 포착하려는 듯 긴박하면서도 절제되어 있다. 그림. 페르디낭 호들러. 발렌틴의 마지막 모습. 1915 Ferdinand Hodler. Valentine Gode-Darel on her Deathbed, 1915도상학적으로 이 연작은 전통적인 '죽음의 침상'의 모티프를 현대적 감수성으로 재해석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중세 후기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준비'와 '선한 죽음'에 대한 종교적 이미지들이 존재했지만, 호들러의 연작은 종교적 상징이나 천상의 위로 없이 오직 인간의 몸과 그 운명적 파멸만을 응시했다. 그의 그림 속에서 발렌틴은 홀로 침상에 누워 있으며, 주변에 성직자도 없고, 위로의 천사도 없다. 회개의 상징도, 영혼의 승천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육체가 점점 쇠락해 가는 과정을 냉철하고도 애절한 시선으로 담아내었다. 침상은 더 이상 신의 심판대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마지막 무대이며, 남겨진 자의 사랑과 비탄이 가장 조용하고 깊게 전달되는 장소이다. 그래서 이 연작은 절망보다는 오히려 죽음 앞의 진실과 감정의 깊이를 말없이 드러내며, 인간 삶의 마지막 순간에 예술이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죽어가는 발렌틴' 연작은 단순한 애도의 기록을 넘어, 예술가가 고통과 죽음을 어떻게 그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어떤 형식의 진실이 예술 안에 담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한 인간의 소멸을 따라가는 회화이자, 한 사랑의 마지막 장면이며, 인간 존재의 경계에 선 예술의 응답이기도 하다. 이처럼 호들러의 붓끝은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감정과 형상이 공명하는 침묵의 진실을 우리에게 건네고 있다.반면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자연의 빛과 순간을 포착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러나 그의 작품 중 가장 비극적이고 사적인 동시에, 인상주의라는 운동의 경계를 시험한 그림은 다름 아닌 '카미유의 죽음'이다. 이 작품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예술가로서의 직관과 책임감을 내려놓지 않은 모네의 고통스러운 응답이다.그림. 클로드 모네, 카미유의 죽음, 1879 Claude Monet. Camille on her Deathbed, 1879카미유는 모네의 부인이자, 여러 초기 걸작에서 모티프가 된 인물이다. '강변의 여인', '기모노를 입은 여인', '아르장퇴유 정원에서의 카미유와 아이' 등의 그림에서 그녀는 생기 넘치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러나 1879년, 두 번째 아이를 출산한 후 카미유는 자궁암으로 점점 쇠약해졌고, 모네는 그녀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숨을 거둔 직후, 싸늘해진 얼굴을 화폭에 담았다.'카미유의 죽음'에는 햇빛도, 자연도, 색채의 유희도 없다. 오히려 그림 전체는 싸늘한 회색빛과 파란색 음영이 지배하며, 죽음의 고요와 침잠을 담아내고 있다. 부드럽게 잠든 듯 보이지만 이미 생명의 빛이 꺼진 카미유의 얼굴 위로, 모네는 짧고 빠른 붓질을 사용하여 점점 사라져가는 생명감과 슬픔을 표현했다. 움푹 팬 뺨, 창백하게 질린 입술, 그리고 정면을 응시하지 않는 구도는 죽음이 남긴 이질성과 침묵을 더욱 강조한다.이 두 화가는 죽음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단순한 장면으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한 시선으로 정직하게 마주했다. 병상에 누운 연인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면서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생으로, 기억 속에 남겨질 존재로 떠오른다. 의학이 죽음을 병명과 시간으로 기록한다면, 예술은 죽음을 붓과 빛, 색채와 침묵으로 남긴다. 그 안에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 목격자의 죄책감, 그리고 인간 존재의 덧없음이 녹아 있다.호들러와 모네의 그림은 단지 사적인 애도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시대적 질문이다. 오늘날 병원은 점점 더 기술적이고 효율적으로 설계되며, 죽음은 커튼 뒤로 숨겨진다. 그러나 두 화가의 그림은 말한다. 누군가는 그 끝을 지켜보아야 하며, 누군가는 그 끝을 그려야 한다고. 그림이 침묵 속에 남겨진다는 것은, 우리가 그 침묵을 듣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