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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사구팽된 민간 인프라…실손 전산화의 그늘

발행날짜: 2026-05-18 05:00:00 업데이트: 2026-05-18 08:58:53

의료산업2팀 김승직 기자

[메디칼타임즈=김승직 기자] 정부가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에 힘을 싣고 있지만, 정작 제도화 이전부터 시장을 개척해 온 민간 인프라는 고사 위기에 처했다. 혁신과 상생을 외치는 정부의 구호와 달리, 현장에선 정부 주도 단일 플랫폼이 민간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국내 최초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서비스를 상용화한 지앤넷은 최근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 2020년 서비스 출시 이후 누적 청구 건수 2000만 건을 돌파하며 민간 시장을 선도해 왔지만, 정부 주도의 전산화 플랫폼인 실손24가 본격 운영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기존에 위탁청구 계약을 맺고 있던 민간 보험사들이 잇따라 계약 연장을 중단하거나 해지를 요청하고 나선 탓이다.

가장 큰 문제는 보험사들이 수수료가 없는 데이터 청구 방식조차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험사들은 실손24 구축과 유지보수에 대규모 자금을 출자했다는 이유로 민간 서비스와의 연동을 외면하고 있다.

이로 인해 지앤넷은 고객 불편을 막기 위해 의료기관의 전자의무기록(EMR) 데이터를 다시 종이 이미지로 변환해 팩스로 청구를 대행하는 실정이다.

디지털 전산화를 추진하는 시대에 오히려 매월 수천만 원의 팩스 통신비를 부담하며 과거의 방식으로 회귀하는 구조적 모순이 발생한 것. 이는 결국 인력 감축과 같은 구조조정으로 이어졌으며, 일부 제휴 채널은 유료 서비스 전환을 검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같은 위기는 정부의 급격한 정책 기조 변화와 공공기관 중심의 행정 편의주의에서 비롯됐다. 금융당국은 당초 민간 시장의 성과를 인정하고 공존을 도모하겠다고 밝혔으나, 최근 공식 자료에서는 민간 방식에 대한 언급을 사실상 배제했다.

일부 보험사는 의료기관에 민간 방식의 보안 취약성을 주장하며 실손24 참여만을 독려하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관 주도의 단일 체계를 굳히려는 움직임 속에서 민간 사업자가 설 자리는 사라졌다.

물론 공공 중계기관을 통한 일률적인 데이터 관리와 보안 강화의 필요성은 인정된다. 국민의 민감한 의료 정보를 다루는 만큼 통제된 시스템 안에서 안전성을 확보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오랜 기간 위험을 감수하며 2만 4000여 개 의료기관과 연동 인프라를 구축해 온 민간의 혁신을 일시에 지워버리는 방식이 적절한진 의문이다.

실제 올해 1분기 지앤넷 청구 건수는 192만 건으로 높은 효율성을 증명하고 있다. 이달 기준 실손24의 누적 청구량 241만 건보다 높은 사용량을 보이는 것.

민간 인프라의 배제는 결국 산업 후퇴와 소비자 선택권 축소로 이어진다. 규제의 불확실성과 독점적 정책 운영은 인슈테크 스타트업의 투자 의지를 꺾고 시장을 경직시키는 요인이 된다. 쌓아두기만 하는 데이터가 가치가 없듯, 이미 활성화된 민간의 전산망을 사장시키는 것 역시 국가적 자산의 낭비다.

전산화는 기술적 효율성과 국민 편익을 위한 과제이지, 관 주도의 독점을 정당화하는 가림막이 돼선 안 된다. 정부의 요란한 구호가 공허하게 들리지 않으려면, 기존 민간 자산을 활용한 민관 합동 거버넌스 구축 등 실질적인 상생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현장의 혁신을 옥죄는 행정이 아닌, 상생 안전장치 위에서 기술이 작동하는 합리적인 제도 정비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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