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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하는 말하기의 어려움

고려의대 2학년 강지민
발행날짜: 2026-05-18 05:00:00

고려대학교 의대 본과 2학년 강지민

최근 한 모임에서, '참을 수 없을 만큼 부정적인 감정이 차오를때, 이 화를 어떻게 다스리는가?'가 화두에 오른 적이 있다. 돌아가며 한 명씩 이야기를 했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해결법으로 챗지피티와 제미나이를 꼽았다. 기사로나 유튜브로나 AI를 상담사로 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접해 알고는 있었지만, 필자는 그런 목적으로 사용해본 적이 없기에 이 대중화의 흐름이 조금 낯설었다.

곧이어 대화는 그래서 여러 AI 툴 중 무엇이 더 공감을 잘 해주느냐로 넘어갔고, 제미나이가 더 합리적인 말씨로 공감해주는 것 같다는 쪽으로 결론지어졌다. 짧은 대화였지만, 모임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내내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0과 1로 구성된 코드의 나열이, 어떨 때는 사람보다 더 빠르고 훌륭하게,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다니…

사실, 공감은 한 인간으로서 필자에게 오랜 고민이다. 꾸준히 T의 비중이 90% 넘게 나오는 사람으로, 자랑은 아니지만.. '너는 왜 그렇게 공감을 못 해줘?'라는 말을, 심지어 애정하는 사람들로부터 여러 번 들어봤다. 그래도 최소한 사회성 있는 T가 되고 싶어 딴에는 최선을 다해 듣고 반응하지만 여전히 이따금씩 기계같다, 혹은 영혼이 없다는 말을 듣곤 한다. 그래서인지 공감은 내게 감정보다도 일종의 '기술'처럼 느껴진다.

의사 국가고시 실기시험의 요소 중 하나인 CPX를 준비하다보면 자연스레 PPI(Patient-Physician Interactions)라는 용어를 접하게 된다. 기본적인 문진과 신체진찰, 진단은 기본이고 사이사이 PPI를 빼곡히 채워넣는 게 고득점의 전략으로 꼽힌다. 한 마디로, 환자의 입장을 배려하고 이들의 힘듦에 공감해주라는 거다.

지난해 처음으로 CPX를 했던 때가 기억난다. 건강 걱정이 많은 환자에게 양성 종양이 있는 검사 소견을 전달하는 상황이었다. 나름대로는 환자를 안심시키려는 의도로, 크게 문제되는 사항이 없다는 것을 약간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었다.

하지만 표준화 환자분께서는 본인은 심각한데 내가 조금 가볍게 이야기해서 실제 환자였으면 기분이 상했을 수 있다는 피드백을 주셨다. 교수님께서도 '지민이는 다른 건 다 괜찮은데, 공감을 좀 더 해주면 좋겠네~'라 말씀하셨다. 그때 느꼈다. 나는 정보는 정확히 전달했지만, 상대는 공감을 받지 못했다고 느꼈다는 것을.

올해도 어려움은 계속되고 있다. 요즘에는 2주마다 1-2건의 CPX를 하는데, 매번 PPI에 신경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강 세 번에 한 번 꼴로 공감 관련 지적을 받는다. 나는 힘들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더 목소리를 차분하게 내고, 끄덕이는 정도만 하는 편이다.

사실은 '많이 힘드셨겠어요' 같은 말을 꺼내는 거 자체가 조금 어렵다. 내가 그 시간을 살아본 것도 아닌데, 괜히 타인의 감정을 나서서 단정짓는 무례를 범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공감이라기보다, 상대의 감정을 적당히 축약해 돌려주는 태도로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런 말 한마디가 꼭 필요하다는 피드백을 받는다. 환자 입장에서는 명시적으로 짚어주는 말이 있어야 비로소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구나'하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분께는 너무 들뜨지 않고 차분하게 추스릴 시간을 주어 좋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같은 태도를 두고도 누구에게는 부족하고, 누구에게는 충분한 셈이다.

이런 지적을 연달아 받다 보면 마음 한 켠에선 정답이 없는 문제를 일률적으로 평가하는 게 맞나, 하는 삐딱한 생각도 샘솟곤 한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왜 공감을 어려워하는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는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함부로 이해한 척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의 불안이나 고통 앞에 설 때마다, 말하기 전에 멈칫하게 된다.

임상실습 과정에서 많은 외래를 참관하고, 회진을 따라다니며 교수님들의 진료를 어깨너머로 엿보고 있다. 모두에게 희망적인 소식을 전해줄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진단하는 입장에서는 '나쁜 소식 전하기'를 할 경우가 더 많다. 아직 일반인과 의료진 사이에 있는 입장에서, 이따금씩 의료진의 담담함과 환자의 낙담 사이의 간극을 느낄 때가 있다.

의료진은 너무 많은 심각한 환자를 본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혹은 임상 현장에서 severe하다라고 생각하는 정도와 실제 환자가 체감하는 '심각함'의 정도는 다르다. 실제 아프지 않은 게 아닌데, 실제로 병이 없는 게 아닌데도 더 위중한 환자를 계속해서 접하다 보면, 상대적으로 가벼운 상태의 환자는 정말로 '가벼운' 환자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

하지만 환자의 입장에서는 다르다. 그 사람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기준점이다.

실습하는 내내 내가 환자였던 기억, 특히 지지난해 다리가 부러져 입원했을 때의 기억을 자꾸 떠올리려 노력한다. 그 병원에서 아마 나는 가장 어리고 건강하며, 빠르게 퇴원할 환자였을 것이다. 의료진의 입장에서는 비교적 단순한 케이스였을지 모르지만, 그때의 나는 밤새 수술 후 통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수액걸이를 끌고 다니기에 활동 범위가 제한되는 것조차 큰 불편이었다. 아침마다 잠깐 들르는 의사 선생님과 오후에 있는 부모님과 친구들의 병문안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던 '환자 1'로서의 시간이었다.

그때의 나는 분명 '가벼운 환자'였지만, 동시에 나의 작은 세계 안에서는 '가장 아픈 사람'이었다.

돌이켜보면, 공감이 어려웠던 이유가 약간 더 명확해지는 것 같다. 나는 늘 상대의 상황을 '얼마나 심각한가'라는 기준으로 판단해왔고, 그 기준은 대부분 내 쪽에 있었다. 하지만 환자는 다른 기준 위에 서 있다. 같은 통증이라도, 같은 상황이라도 서로 다른 좌표에서 해석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공감은 단순히 적절한 말을 덧붙이는 문제가 아니라, 그 좌표축 자체를 옮기는 일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나는 '아이고, 힘드셨겠어요' 한 마디가 어렵다. 괜히 또다시 '지나가는 한 마디로 생각하면 어쩌지?', '너무 가볍거나 밝게 들리면 어떡하지?', '안 하느니만 못하면 어쩌지?'와 같은 싶은 걱정이 앞선다. 당장 내일 아침 CPX를 앞두고 있는 입장에서 벌써 머리가 복잡해지고, 별다른 고민 없이도 자연스럽게 센스 있는 한 마디를 곁들이는 동기들의 영상을 볼 때면 부러워서 질투가 나기도 한다. 아마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예전과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공감은 어떤 감정을 더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기준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의 자리에서 다시 바라보는 과정에 가깝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과정이 생각보다 훨씬 의식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래서 요즘은 공감을 '잘해야 하는 것'이라기보다, 계속해서 연습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여전히 서툴고 자주 빗나가지만, 적어도 왜 어려운지, 어디에서 어긋나는지는 이전보다 조금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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