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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의사가 응시하지 않는 자리

고상백 교수
발행날짜: 2025-08-11 05:00:00

[고상백의 의료인문학 칼럼]

의학은 인간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에서 다루는 영역이다. 그러나 동시에 의학은 고통을 체계화하고 추상화하며, 제도 속에 내재화 시키기도 한다. 진단이라는 이름으로 고통은 분류되고 측정되며, 진료라는 행위로 전환된다. 그 과정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간의 신체는 치료의 대상 또는 통계 수치로 환원된다. 근대 이후 의학은 과학적 정밀성을 바탕으로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지만, 바로 그 기술의 정교함이 역설적으로 인간 존재의 고통을 지워버리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내고 있다.

외젠 들라크루아, 토마스 쿠튀르가 각각 다른 시대에 그려낸 의료 풍자화들을 중심으로, 고통의 비가시성, 의학의 탈인간화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 작품은 단순한 희화화가 아니라, 의료와 권력, 인간 존재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시각적으로 제기하는 도상학적 기록이다.

들라크루아의 작품 진료(La Consultation)는 19세기 초반의 진료 장면을 다룬 풍자화이다. 화면 왼편 커튼 뒤에 침대에 누운 환자는 매우 연약하고 투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치 존재가 사라지는 듯한 이 표현은 고통에 짓눌린 인간의 실체이자, 의학의 시선에서 소외된 존재로 상징하고 있다.

그림. 외젠 들라크루아. 진료, 19세기Eugene Delacroix, The Consultation, 19th Century.

반면, 환자를 진찰하는 의사들은 굵고 진한 선, 과장된 몸짓과 표정으로 묘사되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들은 환자를 중심으로 모여 있지만, 실제로는 환자 상태보다도 자신들의 논의에 몰두하고 있다. 화가는 의사들이 개별 인격이 사라진 기계적 관료, 혹은 비인간적인 지식의 화신처럼 그려져 있다. 특히 그림 앞쪽 의자 뒤에 앉은 한 인물은 괴이한 자세로 환자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육신은 이미 해골로 변해 있다. 이는 환자의 생명을 돌보는 공간이 아니라, 죽음이 미리 선고된 공간, 고통이 사회적으로 무감각화된 공간임을 나타내고 있다.

도상학적으로, 들라크루아는 환자의 몸을 빛과 선의 밀도로 지우는 동시에, 의사들의 존재감을 극대화함으로써 환자가 철저히 배제된 진료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다. 환자는 자신의 고통을 말할 수 없고, 의사들은 이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진료의 무게중심은 환자의 육체가 아닌 의사들의 말, 그들의 사회적 지위, 지식의 상징성에 쏠려 있다. 들라크루아는 이러한 구도를 통해 "병을 진단하면서도 인간은 보지 못하는" 의학의 허상을 풍자적으로 해부하고 있다.

들라크루아의 작품이 의료권력과 환자 사이의 거리를 지적했다면, 토마스 쿠튀르의 피에로의 병이라는 작품은 그것을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는 무대 위로 끌어올렸다. 이 그림은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와 관련하여 그린 일곱 작품 중 하나로 대표적인 인물인 피에로, 하를레퀸, 그리고 의사를 등장시켜, 진료의 장면을 희화화하면서도 날카로운 사회 비판을 담아내었다.

침대에 누운 피에로는 과음과 과식으로 인해 병든 상태이다. 그의 주변에는 술병과 음식 찌꺼기들이 널려 있으며, 이들은 병의 원인이 명백하다는 점을 시각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의사는 그 단서들을 무시한 채 피에로의 맥박을 짚고 있다. 그는 상황을 통찰하기보다, 자신의 방식대로 환자의 몸을 진단하고 있다. 이러한 장면은 지식이 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림. 토마스 쿠튀르. 피에로의 병, 1859-60Thomas Couture. The illness of Pierrot, 1859-60

그림 후면 벽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다. "배움은 의사로 하여금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게 만들고, 모두가 아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이 구절은 과학적 권위가 현실 감각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지적한다. 병의 원인은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의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하녀의 표정은 이를 암시한다. 그녀는 말을 하지 않지만, 이미 상황의 본질을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그녀의 직관은 의사의 학식보다도 현실에 가까이 있다.

쿠튀르의 그림은 단순한 풍자가 아니다. 그는 의료의 무지가 고통의 본질을 가리는 방식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의학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지만, 공감 없이는 통찰할 수 없다. 피에로의 병 이라는 그림은 바로 그 공감의 결핍을 시각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이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려졌지만, 모두가 한 가지 공통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고통을 응시하지 않는 의료, 그리고 인간을 대상화하는 체계이다. 이러한 시각은 단순히 의료 시스템에 대한 풍자라기보다는, 권위와 체계 속에서 고통이 어떻게 '보이지 않게' 되는지를 말하고 있다. 고통은 측정되고 분석될 수 있지만, 그 고통을 느끼는 인간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있다. 결국 이 그림들이 비판하는 것은 단순한 진료 행위가 아니라,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와 얼마나 달라졌을까. 현대의 의료 시스템은 디지털헬스와 알고리즘, 표준진료지침 등에 따라 더 고도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 속에서도 고통의 본질은 여전히 질문으로 남는다. 전자차트를 보느라 환자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의사, 인공지능이 내리는 진단 앞에서 설명되지 않는 통증, 환자의 말이 수치화되지 못해 무시되는 현장들. 이는 과거의 회화들이 보여준 ‘고통의 비가시성’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의학은 객관성을 추구하는 과학이지만, 고통은 언제나 주관적인 경험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학은 두 세계의 경계에서 고통을 듣고, 느끼며,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은 다시 침묵 속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를 체계와 숫자가 대신하게 될 것이다.

들라크루아, 쿠튀르의 작품은 단순한 풍자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환자의 고통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병의 이름만을 보고 있는가?"

그들은 고통을 침묵시키는 시스템을 풍자하는 동시에, 그 침묵을 뚫고 나오는 시선과 목소리를 요청하고 있다. 이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역할이며 동시에 의학의 책임일 것이다.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이 곧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이며, 의학은 결국 이 시선으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 고통은 언제나 거기 있었고, 이제는 그 고통에 진정으로 응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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