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디칼타임즈=최선 기자] 이번 의대 증원 추진을 둘러싸고 극심한 의-정 갈등의 재현이 될 것이란 우려가 있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증원 규모가 당초 의료계가 배수진을 치고 '레드라인'으로 말하던 감당 가능한 수치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데다가 증원된 인력이 모두 지역의사제로 할당돼 정부와 의료계 모두 실리와 명분을 챙겼기 때문이다.
증원 인원 전원을 지역의사제로 선발해 10년간 지방 권역에서 근무하도록 강제한 조치는 이번 갈등을 해결한 결정적인 장치로 평가받는다. 기존의 일반 전형 위주 증원 방식은 배출된 인력이 결국 수도권과 비급여 인기 과목으로 쏠릴 수밖에 없는 구조지만 이번 방식은 증원된 인력이 일정 기간 지방 의료 현장에 머물도록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기존 개원가나 수도권 의료 시장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대로만 보면 해피엔딩이다. 문제는 본질적으로 보면 전 정부에서 벌어졌던 '답을 정해 놓고 하달식'으로 내려오는 구조적 틀은 바뀌지 않았다는 데 있다. 블러핑 카드를 던지듯 나온 추계의 폭은 여론의 반응에 따라 널뛰기를 했고 추계의 과정도 치밀하지 못했다. 아직도 의료계와 정부가 대등한 파트너라는 인식을 가지고 협의 하에 증원 규모를 결정하는 거버넌스의 확립은 아직 멀었다는 뜻이다.
이런 구조적 불안정성은 왜 하필 한국에서만 의대 증원 규모를 둘러싸고 극심한 의-정 대립각이 반복되냐는 물음과도 맞닿아 있다. 실제로 KMA의료정책연구원이 발간한 '주요국 보건의료인력 수급 계획 및 결정 과정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이러한 차이는 인력을 추계하는 방식과 결정하는 거버넌스 구조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한국의 의사 인력 정책은 주로 정부가 주도한다. 수급 추계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의료계나 교육계 등 이해관계자의 실질적인 참여가 제한적이며, 고작 5개월에 불과했던 의료인력 수급 추계위원회의 결론 도출 시간 역시 답을 정해 놓고 형식적 절차를 끼워넣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반면 네덜란드는 정부로부터 독립된 전문가 자문기구인 '의료인력역량위원회(ACMMP)'가 실질적인 정원 규모를 결정한다. 이 위원회에는 의사, 교육기관, 보험자 대표가 동수로 참여하며 다수결이 아닌 합의를 원칙으로 한다.
일본 역시 후생노동성 산하의 '의사수급분과회'라는 전문가 자문기구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정부가 사전에 수치를 제시하지 않고 전문가들이 자율적으로 논의하며, 그 결과가 사실상 정부 정책의 초안으로 기능한다. 단순 인원수뿐 아니라 지역별 의료 계획과 필요 병상 수, 의사의 근무 시간 변화 등을 세밀하게 반영해 추계의 현실성을 높인다.
영국은 NHS England 인력분석팀이 10~15년 단위의 장기 수요 예측 모델링을 수행하며, 이를 'NHS 장기인력계획'과 같은 공식 보고서로 공표, 의대 정원 확대 결정 시 재무부 승인을 거쳐 필요한 예산이 즉각 확보되며, 교육-재정-배치가 일원적으로 관리돼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된다.
해외의 추계 과정은 짧게는 3년에서, 5년 단위로 정례적으로 추계하거나 길게는 20년 앞을 내다보는 장기적인 추계 체계를 가동한다. 결국 해외 선진국들은 의사가 몇 명 필요한가라는 수치에만 매몰되지 않고, 어떠한 절차를 통해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모를 도출할 것인가라는 거버넌스의 문제에 집중한다.
증원 규모 결정 이후의 극한 대립이 없는 소강상태는 일종의 운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전공의와 의대생들뿐 아니라 일반 의사들도 2년 가까이 이어진 대치 상황에서 쌓인 피로감이 내부의 투쟁 동력을 약화시킨 측면이 있다.
법적 근거에 기반한 상설 협의체 운영, 추계 모델의 투명한 공개, 그리고 정원 결정과 재정 지원의 긴밀한 연계라는 정책의 안정화 장치가 없는 한 갈등은 언제든 재점화될 수 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라고 묻어두기엔 아직 원론적이고 본질인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이 불안 요소다. 따라서 이번 합의는 종착지가 아닌 정거장이다. 즉 소강 국면은 제도의 승리가 아니라 피로 누적이 만든 휴전 상태. 정부가 승리했다고 자축하기엔 아직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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