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디칼타임즈=임수민 기자] 화학 물질 기반의 전통 합성 의약품 시장이 정체기에 접어들면서, 글로벌 바이오 시장의 시선이 차세대 치료 수단인 '모달리티(Modality)'로 향하고 있다.
이제는 단순히 질병의 증상을 완화하는 것을 넘어, 원인 물질을 정밀 타격하거나 유전자를 교정하는 기술이 신약 개발의 흐름을 주도하는 모양새다. 암세포만 골라 공격하는 항체-약물 접합체(ADC)나 세포를 개조해 질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세포·유전자 치료제(CGT) 등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지난 4월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미국암연구학회(AACR)와 서울 바이오 코리아(BIO KOREA), 그리고 최근 개막한 세계 최대 암학회인 미국임상종양학회(ASCO)까지 올 상반기 주요 국제 무대의 중심에는 늘 모달리티가 있었다.
단순한 기술 수출을 넘어 글로벌 표준을 선점하기 위한 플랫폼 기술의 가치가 커진 지금, 올 상반기 무대를 통해 확인된 국내 바이오 업계의 모달리티 대전환 현황과 이를 주도하는 핵심 기업들을 짚어봤다.
■ K-바이오, ADC·이중항체 앞세워 모달리티 주도권 쥔다
최근 국제 무대에서 가장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트렌드는 ADC(항체-약물 접합체)와 이중항체다.
과거 국내 기업들의 발표가 초기 가능성 제시에 그쳤다면, 올해 AACR과 ASCO에서는 상용화 단계에 직면한 정밀 임상 데이터가 대거 쏟아지며 화이자, 머크, 아스트라제네카 등 글로벌 거물들의 기술소싱(BD) 담당자들을 장외 미팅룸으로 불러 모았다.
이 트렌드를 주도하는 핵심 바이오텍은 리가켐바이오와 에이비엘바이오, 오름테라퓨틱스 등이다.
리가켐바이오는 이번 국제 행사들에서 독자적인 차세대 ADC 파이프라인(LCB14-2524 등)의 연구 결과와 후속 임상 유효성 데이터를 대거 공개하며 기술의 완성도를 증명했다.
실제로 리가켐바이오의 경우, 글로벌 빅파마와 체결한 수조 원 규모의 ADC 후보물질 기술수출 계약들이 올해 본격적인 글로벌 임상 진입으로 이어지며 플랫폼 기술의 가치를 증명해내고 있다.
빅파마들이 단순히 국내 바이오텍의 물질 하나를 사는 것을 넘어, 검증된 '플랫폼 원천 기술' 자체를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에이비엘바이오 역시 기존 치료제 대비 부작용은 낮추고 면역 세포 활성 효능은 극대화한 이중항체 기반 파이프라인을 선보이며 글로벌 모달리티 전환의 중심에 서 있음을 각인시켰다.
특히 오름테라퓨틱스는 독자적인 이중정밀 표적 단백질 분해 접근법(TPD² 기술)을 ADC에 접합한 신개념 DAC(항체-단백질분해제 접합체) 후보물질 'ORM-1153'의 비인간 영장류 전임상 데이터를 AACR에서 최초 공개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여기에 바이오시밀러 강자인 셀트리온과 삼성바이오로직스 역시 ADC 전용 생산 공장 가동 및 펀드를 통한 지분 투자 등 공격적인 파이프라인 확보 선언을 이어가며 화력을 보태고 있다.
이처럼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잇따라 러브콜을 받는 것은 타깃 암세포만 골라 치명타를 입히는 링커(Linker)와 페이로드(약물) 설계 능력에서 세계적 수준의 정교함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이들 기업의 임상 데이터가 축적될수록 글로벌 빅파마와의 추가적인 대형 딜(Deal)이나 공동 연구 기회가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고형암 한계 극복 도전…글로벌 무대서 가능성 입증한 CGT·TPD
세포를 개조하거나 유전자를 교정해 희귀 질환과 질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CGT(세포·유전자 치료제)와 체내 세포 시스템을 이용해 질병 원인 단백질을 원천 분해하는 TPD(표적 단백질 분해) 역시 강력한 주류 트렌드로 부상했다.
특히 혈액암에 국한됐던 기존 치료제들의 한계를 넘어, 미개척지이자 전체 암 시장의 90%를 차지하는 '고형암'을 정밀 타격하기 위한 국내 바이오텍들의 독창적인 플랫폼 기술이 이번 국제 무대에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
이 분야에서는 HLB(자회사 베리스모 테라퓨틱스)와 앱클론, 유틸렉스 등과 같은 전문 바이오텍들이 학술적·산업적 성과를 동시에 입증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HLB는 미국암연구학회(AACR)에서 KIR-CAR 플랫폼 기반의 고형암 대상 CAR-T 치료제 'SynKIR-110'의 임상 1상 중간 결과를 구두 발표로 전격 공개했다. 종양 미세환경(TME)에 의해 T세포가 억제되는 고형암의 고질적인 한계를 자연살해(NK) 세포의 수용체 구조를 접합한 메커니즘으로 극복해내며 현장 전문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앱클론과 역시 고형암 타깃의 세포 가공 및 면역 조절 기술에서 진전된 데이터를 선보였다. 앱클론은 독자적 항체 유도 플랫폼(NEST)을 통해 도출한 CAR-T 파이프라인의 고형암 사멸 유효성을 증명했다.
실제로 업계에 따르면 바이오 코리아와 ASCO 등에서 진행된 비즈니스 파트너링 중 상당수가 이러한 차세대 모달리티 플랫폼 관련 거래 협의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바이오사 관계자는 "올해 국제 무대에서 확인된 변화는 글로벌 빅파마들이 한국의 기술을 단순한 일회성 신약 후보 물질이 아닌, 확장성 있는 플랫폼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라며 "다양한 파이프라인에 적용 가능한 원천 기술의 데이터가 축적되면서 글로벌 기업들과의 파트너십 형태도 다변화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이어 "과거에는 임상 후기 단계의 물질을 통째로 넘기는 기술 수출이 주를 이뤘다면, 이제는 초기 공동 연구나 특정 링커·유전자 가공 기술만 따로 떼어 거래하는 등 계약 구조가 정교해지고 있다"며 "결국 글로벌 시장에서 장기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타깃 질환별로 유연하게 변형 가능한 원천 플랫폼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핵심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전통-신생 기업의 공조…체질 개선 가속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차세대 모달리티 확보가 시급해진 전통 제약사들은 유망 바이오텍과의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을 통한 체질 개선의 길을 택하고 있다.
바이오텍이 전방에서 독창적인 혁신 기술을 이끌면, 자금력과 대규모 임상 노하우를 갖춘 전통 제약사들이 후방에서 이를 전폭 지원하며 생태계를 고도화하는 방식이다.

자본력을 갖춘 대형 제약사 입장에서도 초기 단계부터 막대한 비용을 들여 자체 모달리티를 개발하기보다, 이미 검증된 바이오텍의 플랫폼을 도입하는 것이 타임라인을 단축하는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유한양행, 한미약품 등 국내 대표 제약사들은 독창적인 기술을 가진 바이오텍의 지분을 인수하거나 공동 연구개발(R&D) 계약을 맺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유한양행은 일찍이 이중항체 전문 바이오텍 에이비엘바이오와 손잡고 대형 기술수출 성과를 낸 성공 방정식을 바탕으로, 최근에는 ADC 파이프라인 확보를 위해 유망 바이오텍들과의 다각도 공동 R&D 릴레이를 이어가고 있다.
한미약품은 독자적인 플랫폼 기술인 '랩스커버리'의 뒤를 이을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북경한미와의 이중항체 플랫폼(펜탐바디) 고도화는 물론, 외부 ADC 플랫폼 기술을 빠르게 수혈하는 투트랙 전략에 전사적 역량을 집중하는 모양새다.
더불어 이러한 공조 체계는 전통 제약사들이 자체 신약 개발을 넘어, 고도화된 위탁개발생산(CDMO) 인프라를 활용해 외부 바이오텍의 상업화를 돕는 '플랫폼 허브' 역할로 확장되는 추세다.
동아쏘시오그룹의 경우, 바이오의약품 CDMO 전문 계열사인 에스티팜을 통해 올 상반기 국제 무대에서 핵심 화두로 꼽힌 mRNA 및 고도화된 올리고뉴클레오타이드 생산 인프라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는 막대한 비용 탓에 자체 시설을 갖추기 어려운 신생 바이오텍들에게 고도화된 공정 개발 역량과 글로벌 규제 기준에 맞춘 상업용 생산 기지를 제공함으로써, K-바이오 생태계의 전반적인 스케일업(Scale-up·대량 생산 공정)을 이끄는 상생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전통적인 합성 의약품의 특허 만료가 도래하는 상황에서, 제약사 자체 역량만으로 ADC나 CGT 같은 최첨단 모달리티를 기초 연구부터 시작하는 것은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 리스크가 크다"며 "결국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독창적인 플랫폼을 가진 바이오텍과의 협업이 불가피한 생존 방정식이 된 셈"이라고 밝혔다.
이어 "바이오텍의 유연한 기술 설계도에 전통 제약사의 자본과 임상 노하우가 결합하면서, 국내 산업 생태계 전반의 모달리티 대전환 흐름은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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