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적 한계로 가로막혀 있었던 미지의 영역이 베일을 벗을까.
손가락에 끼우는 방식의 반지형 혈압계가 상용화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한 세계 최초의 24시간 혈압 측정 임상시험이 시동을 걸었다.
당뇨병에선 지난 2~3개월의 평균 혈당 조절 상태를 보여주는 당화혈색소 측정이 '상식'이 됐지만 고혈압만큼은 여전히 진료실 혈압이나 가정 혈압과 같은 일시적인 지표에 기반하는 것이 현실.
야간 측정치를 반영, 혈압을 관리할 때 임상적 효용이 있다면 이는 기존 관리 패턴은 물론 진료의 패러다임까지 바꾸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
연구는 단순히 새로운 혈압 측정 기기를 검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전국 20곳의 개원의가 참여하는 공동 임상 네트워크를 구축해 대학병원 중심이었던 기존 임상 연구의 틀을 바꾸는 시도이기도 하다.
임상을 주도하고 있는 이해영 서울대병원 순환기내과 교수(대한심부전학회 정책이사)를 만나 연구 진행 배경과 연구 설계, 목표 등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진료실 밖 혈압 보기 "혈압의 당화혈색소 시대 열 것"
야간 혈압은 의학계의 '공동(空洞)'으로 꼽힌다. 전 세계 연구를 샅샅이 살펴봐도 야간 혈압을 독립 변수로 다룬 연구는 희귀할 뿐더러, 대규모로 진행된 건 연구 자체가 없다.
그동안 진료 패러다임은 주간 진료 중심이었기 때문에 의사나 연구자 모두 야간 혈압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간과해 왔던 것. 기술적 한계도 걸림돌이었다.
이 교수는 "그동안 고혈압 진료는 병원에서 잠깐 측정한 혈압에 의존했지만, 이건 환자의 하루 혈압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며 "이제는 24시간 평균 혈압, 즉 '혈압의 당화혈색소 시대'를 여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야간 혈압을 정확히 측정하려면 환자가 자는 동안에도 반복적인 혈압 측정이 가능한 24시간 활동혈압측정(ABPM)이 필요하지만, 팔에 커프를 감고 자야하는 불편감 및 고가의 기기값으로 인해 대규모 연구가 어려웠다.
이해영 교수는 "새로 개발된 반지형 혈압계는 손가락에 착용만 하면 하루 종일 혈압을 측정할 수 있고, 수가도 낮아 본인 부담금이 5천 원 정도에 불과하다"며 "이제는 기술적·경제적 제약이 사라졌고, 남은 건 실제 진료 현장에서 효용성을 입증하는 일뿐"이라고 말했다.
그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연구는 대규모로 설계됐다. 24시간 혈압을 주기적으로 측정, 이를 기반으로 진료한 그룹과 진료실 혈압을 기준으로 진료한 그룹으로 나눠 총 4천 명을 등록한다. 각 그룹 2천 명씩, 환자 모집에만 2년이 걸릴 예정이다.
이해영 교수는 "이후 4년간 추적 관찰을 통해 심혈관 질환 발생률을 비교한다"며 "단기 연구로는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없어 이 정도 기간은 살펴 봐야 혈압 조절 패턴과 심장질환 발생 간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연구의 1차 목표는 24시간 혈압 관리군이 기존 진료군보다 심장질환 발생률이 낮은지 확인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를 통해 '하루 평균 혈압'을 진료의 새로운 지표로 제시하겠다는 구상이다.
이 교수는 "주간 135, 야간 125, 24시간 평균 130mmHg 이하라는 세 기준을 모두 충족한 그룹이 어떤 임상적 이점을 보이는지가 핵심"이라며 "결과에 따라 고혈압 관리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야간 혈압까지 포함한 24시간 혈압을 반지형 기기로 측정하고, 이를 근거로 진료 효과를 검증하는 RCT는 지금까지 전례가 없다"며 "유럽에서 비슷한 의료기기 허가가 한 건 있지만, 학문적 연구로는 한국이 처음"이라고 했다.
임상연구는 서울대병원에서 IRB(임상연구윤리위원회) 승인을 마쳤고, 20곳의 병원급 의료기관들도 자체 IRB 절차를 진행 중에 있다.
■"개원의 참여, 한국형 임상연구 생태계 실험 모델"
국내 처음으로 개원의가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RCT라는 점도 주목받는 요소. 전국 20곳의 개원의가 참여하며, 각 의원 원장은 서울대병원 연구원으로 등록해 객원 연구자로 활동한다.
이 교수는 "중증 위주의 대학병원 중심의 진료 체계로는 신규 고혈압 환자를 충분히 확보하기 어렵다"며 "이번 프로젝트는 실제 환자 진료의 최전선인 개원의들이 참여하는 구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모델은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활성화돼 있지만,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되는 것"이라며 "성공적으로 정착된다면 개원가-대학병원 협력 기반의 새로운 임상 연구 생태계가 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 연구는 단순히 혈압을 잴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형 임상 연구 생태계의 '실험 모델'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개원의가 참여하는 연구 네트워크가 실제로 작동하고, 이를 통해 대규모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면 이후 당뇨병, 이상지질혈증 등 만성질환 관리에도 확장될 수 있다.
이 교수는 "지금까지 대학병원은 연구 중심, 개원가는 진료 중심으로 분리돼 있었다"며 "이번 프로젝트는 그 경계를 허물고, 실제 환자가 방문하는 1차 의료기관에서도 고품질 임상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규모, 장기간의 임상이라는 점에서 환자 참여율도 변수로 떠오른다.
이해영 교수는 "국내에선 임상시험이라고 하면 아직도 실험대상이라는 인식이 있어 거부감이 큰 편"이라며 "이번 연구는 기존 진료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혈압을 자동으로 재는 것뿐이라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3개월 평균 혈당을 보는 당화혈색소처럼, 당연히 고혈압 환자가 누려야 할 평균의 혈압을 보고자 하는 시도이고 일상적으로 반지를 착용만 하면 되기 때문에 불편감도 없다"며 "이 지표를 통해 진짜 위험한 환자를 더 빨리 찾아내고, 불필요한 치료를 줄이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는 "효용성이 입증되면 반지형 혈압계는 10년 전 전자혈압계가 수은혈압계를 대체했던 것처럼 표준 측정기로 자리 잡게 될 수도 있을 것"이리며 "이는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라 진료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참여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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