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전함으로 133척에 맞서기 위해 나섰던 명량해전에서 병사들에게 전했던 말이다.
5천만 국민중에 불과 13만에 불과한 의사들이 결전에 나설때 되뇔만한 격언 중 이보다 더 적절한 문구가 있을까.
우리나라의 역사속에 의사들은 늘 기득권의 상징이었고 그만큼 의사들의 주장에 국민들은 냉담했다. 정부 또한 이러한 속성을 적절히 이용했고 이는 곧 의사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의료계를 강타한 비급여의 전면 급여화도 그러했다. 정권 초기 대통령이 직접 꺼내놓은 이른바 문재인 케어는 의사들에게 직격탄으로 날아왔고 의사들은 분노했다.
하지만 의사들이 주장하는 문제점들은 기득권의 프레임속에 묻혔다. 각 직역과 지역에서 문재인 케어의 부당성을 외쳤지만 이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국민들은 이를 의사들의 밥그릇 싸움으로 치부했고 의사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언론도 없었다. 의사들의 주장은 철저히 외면당했고 그들은 밥그릇을 뺏긴 기득권으로 치부당했다.
이를 획기적으로 뒤바꿔 놓은 사건은 바로 12월 10일 전국 의사 총 궐기대회다. 굳은 날씨와 일부의 냉랭한 시각속에서도 자리를 지킨 3만명의 의사들의 외침은 정부를 움직였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비급여의 전면 급여화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의사들의 지속적인 목소리에도 움직이지 않던 보건복지부가 배수진을 친 의사들의 처절한 목소리에 결국 귀를 기울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각오의 결과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필사즉생으로 펼친 배수진에 구멍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건복지부가 협의체 구성을 공식화한 이래 의료계의 배수진은 이미 무너진지 오래다.
협의체가 구성되기 전부터 협상단 구성을 두고 비상대책위원회 내부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고 병원계는 독자 노선을 선언하며 배수진에서 이탈을 선언했다.
여기에 배수진의 선봉장에 서있던 한 장수는 총사의 리더쉽을 지적하며 돌연 사직을 선언했고 총사는 이 장수의 비판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배수진으로 얻어낸 담판의 기회를 활용하기도 전에 이미 각 장수들이 서로를 비판하고 이탈하며 자중지란을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손자병법을 보면 최고의 묘수를 이치대란 이정대화(以治待亂 以靜待譁). 즉 자중지란으로 규정한다. 별다른 공성없이도 적이 스스로 어지러워지며 무너지는 것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그동안 의료계는 제대로된 협상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스스로 무너지는 결과를 맞이해왔다. 각종 의료악법과 정책에도 의료계는 각 직역별, 종별로 의견이 나눠지며 자중지란을 일으켰고 이는 곧 상대에게 묘수의 실마리를 던져줬다.
이번에도 역시나 이러한 고질병이 또 다시 도지는 모양새다. 3만명의 의사들이 모였던 궐기대회가 끝난지 불과 10여일만에 의료계는 배수진을 포기한 채 서로의 살길을 찾아 나서며 분열되고 있다.
적군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병법도 쓰지 않은 채 손쉽게 각개격파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은 셈이다.
배수진의 강력함은 물을 등지고 살길을 찾아 뭉쳐 나아가는데 있다. 담판을 위한 협탁은 잠시의 휴전을 보장할 뿐 배수진의 생로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나부터 살겠다는, 내 공부터 챙기겠다는 장수들의 욕심은 배수진에 구멍을 내고 배수진의 구멍은 공멸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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