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순간부터 인공지능 없이 글 쓰는 법을 잊어버렸다.
동아리 톡방에 공지를 올리기 전에도, 교수님께 이메일을 쓰기 전에도, 밤새 작성한 보고서를 제출하기 전에도 인공지능의 검수를 받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제미나이나 챗GPT의 "이 정도면 매끄럽고 완성도 높은 글입니다"라는 승인이 없으면 솔직히 내 글에 선뜻 자신이 서지 않는다.
얼마 전, 예전에 작가를 꿈꾸며 노트북 구석에 끄적여두었던 소설 구상을 꺼내어 보았다. "몸이 아픈 사람에게 장기를 기증하듯,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 기억을 기증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던 이야기다. 문득 호기심이 생겨 AI에게 동일한 글감을 주고 "가장 흡입력 있고 더 읽고 싶어지는 소설의 첫 시작을 200자 내외로 써달라"고 요청했다.
다음은 두 개의 원고다.
A. 기억기증자를 찾습니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싶었던 기억, 누군가 손을 내밀어 주기를 바랐던 기억,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던 기억, 내 속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던 기억,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리고 싶었던 기억을 찾습니다.
진한 기억, 옅어진 기억, 따뜻한 기억, 차가운 기억, 달콤한 기억, 어떤 맛의 기억이든 괜찮습니다.
기증하시는 기억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겠습니다. 기억 기증을 원하시는 분께서는 아래 번호로 연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B. 스무 살의 겨울, 나는 내게 가장 눈부셨던 바다의 기억을 잘라내어 팔았다. 다음 날 거짓말처럼 파도 소리가 귓가에서 사라졌고, 대신 내 통장엔 석 달 치 월세가 찍혔다.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가장 소중한 걸 버릴 수 있냐고. 하지만 절망에 짓눌린 누군가에겐 내 흘러간 행복이 살아갈 단 하나의 숨구멍이 된다. 오늘 밤, 또 한 번 내 유년의 온기를 사러 올 손님을 기다린다.
"기억을 삽니다.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내 오늘을 견딜 수 있게"
둘 중 어느 것이 사람이 쓴 글이고, 어느 것이 AI가 쓴 글일까? 블라인드 테스트처럼 던져지는 이런 질문은 요즘 기술 행사나 강연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다.
사실 답은 간단하다. A는 내가 예전에 직접 고민하며 썼던 원고이고, B는 AI가 출력해낸 문장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정답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래서 둘 중 무엇이 더 좋은가?'에 대한 판단이다. 글을 생성해내는 건 AI의 영역이라 쳐도,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가치 판단을 내리는 건 여전히 인간의 몫이어야 하지 않을까?
나 역시 평소 습관처럼 AI에게 두 문단을 보여주고 "100점 만점으로 객관적으로 평가해줘"라고 부탁해 보았다. AI는 망설임 없이 A에게 72점, B에게 94점을 주었다. B의 서사가 더 감성적이고 몰입감이 높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B를 읽는 내내 찜찜함을 지울 수 없었다. 특유의 전형적이고 매끄러운 AI식 문체도 어색했지만, 무엇보다 서사의 개연성에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AI에게 다시 물었다.
"근데 B에서 주인공은 바다의 기억을 '팔았다'고 했는데 왜 귓가에서 파도 소리가 사라지는지, 그리고 기억을 파는 입장인데 왜 제일 마지막에 남을 향해 '기억을 삽니다'라고 말하는지 논리적으로 잘 이해가 안 돼"
그러자 AI는 기다렸다는 듯 태도를 바꾸며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더니, 점수를 다시 수정해 내놓았다.
A: 85점 / B: 58점
이 피드백이 정당한지 여부를 떠나서, 한 순간에 평가를 번복하는 AI의 변덕스러움을 보며 약간의 서운함을 느꼈다. AI는 너무나 쉽게 내 질문의 뉘앙스에 길들여지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의견'을 맞춰버린다. 문제는 내가 이런 AI의 판단에 계속 의존하다 보면, 결국 '내가 무엇을 좋다고 느끼는지'에 대한 감각과 취향 자체가 흐릿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AI가 나보다 훨씬 빠르게 문장을 다듬고, 그럴듯한 아이디어를 내놓으며, 매끄러운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인 것 같다. 이 글이 정말 내 마음을 울리는지, 이 아이디어가 진짜 살아있는 가치가 있는지 알아보는 눈까지 AI에게 내어주고 싶지는 않다.
정제되지 않은 투박함, 정답에서 살짝 비껴간 엉뚱한 상상력, 그리고 막막한 백지 앞에서 밤새 고민한 끝에 빚어낸 나만의 문장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마음.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을 '취향'이자 '가치관'이라 부른다.
생성하는 능력보다 무서운 것은 판단하는 능력, 즉 취향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가치관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고집을 부려보기도 하고, 때로는 잘못된 생각에 좌절하거나 타인의 의견에 흔들려보는 치열한 과정을 거치며 단단해진다. 그 고민의 시간 속에서 비로소 "나는 이것이 좋다", "이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만의 기준이 생긴다.
AI가 아무리 완벽하고 화려한 문장을 작성해 준다 한들, 그것이 내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면 "별로"라고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 나만의 감각으로 가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독자적인 '취향'을 지켜내는 것.
인공지능을 쓰지 말자는 거창한 주장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앞으로도 끊임없이 AI에게 아이디어를 묻고 문장을 다듬어 달라고 부탁할 테니까. 다만 AI가 만들어낸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이것이 정말 좋은지, 내 마음에 울림을 주는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가치관만큼은 내려놓고 싶지 않다. AI가 대신 써줄 수 없는 것은 결국 '무엇이 좋은지'를 알아채는 나만의 눈, 그 취향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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