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디칼타임즈=최선 기자] 은평성모병원 8층 병동 102호실. 병실 문이 열리자 담당 간호사가 스마트폰 하나를 들고 환자 침상 앞으로 다가섰다.
"안녕하세요. 환자분 담당 간호사 조은지입니다. 혈압 측정하겠습니다." 간호사가 환자 이름과 등록번호가 찍힌 팔찌 QR코드를 카메라로 찍었다. 이후 혈압 측정 값을 읽어 내려갔다. "김은평님(가명) BP 80, 맥박 76, 호흡 20, 체온 36.5 저장."
몇 초 뒤 스마트폰 화면에는 방금 말한 내용이 텍스트로 정리돼 있었다. 별도의 키보드 입력도, 간호사실로 돌아가 컴퓨터 앞에 앉을 필요도 없었다. 환자 곁에서 말한 내용이 곧바로 전자간호기록으로 저장됐다.
은평성모병원이 2023년 도입한 '보바일 ENR(Vobile ENR)'의 모습이다. 세계 최초로 음성과 모바일, 전자간호기록을 결합한 AI 기반 음성인식 플랫폼으로, 간호사가 환자 옆에서 실시간으로 간호 기록을 작성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간호기록 방식은 오랜 시간 변화해왔다. 종이 차트에 손으로 기록하던 시대를 지나 전자의무기록(EMR)이 도입되면서 컴퓨터 입력 방식으로 전환됐다. 하지만 기록 자체는 여전히 간호사가 환자를 떠나 PC 앞으로 이동해야 하는 구조였다.

병동 간호사는 "예전에는 종이 차트에 수기로 작성했고 이후에는 PC에 타이핑해서 기록했다"며 "지금은 환자 옆에서 바로 음성으로 기록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임상 현장에서는 뚜렷한 변화가 감지됐다. 은평성모병원은 현재 간호기록의 약 85~90%를 보바일 ENR을 통해 처리한다. 실제로 지켜본 결과 간호사의 손은 거의 스마트폰 화면을 누르지 않았다. 식사 기록 과정이 대표적이다.
"식이 선택. Day. 끼니는 점심. 확인." 음성 명령어가 실행되자 기록 화면이 자동으로 전환됐다. "식사 얼마나 드셨어요?" "다 먹었습니다." "밥 100, 국 100, 반찬 50. 물은 얼마나 드셨어요?" "한 컵 먹었습니다." "물 120. 저장."
메뉴 이동부터 입력, 저장까지 음성으로 진행됐다. 과거라면 여러 화면을 터치하거나 별도 입력창을 열어야 했던 작업이다. 간호사가 든 스마트폰 화면에서도 음성으로 말한 내용이 100, 100, 50, 120과 같이 정확하게 입력돼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간호 메모 기능이었다.
"김은평님 내일 퇴원이신데 필요한 서류 있으신가요?" "진단서가 필요합니다." 환자의 답변이 끝나자 간호사는 자연스럽게 말했다. "16층 101호 김은평님 내일 퇴원 시 진단서 발급 필요하다고 함. 저장."
별도의 메모지를 찾거나 나중에 기억을 더듬어 입력할 필요가 없이 대화를 기록한 순간 해당 내용이 진단서 발급 준비와 같은 행정 절차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단순히 기록 시간을 줄이는 것만이 아니다. 환자 안전 강화 측면에서도 효과를 보이고 있다.
간호행정교육팀 김수빈 간호사는 "기존에는 PDA를 이용해 터치나 타이핑으로 기록했는데 처음에는 환자 앞에서 음성으로 기록하는 것이 어색했다"며 "하지만 실제 사용해 보니 입력부터 저장까지 5초 정도면 끝나기 때문에 편의성을 체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수혈, 항암제 투여, 채혈 등 환자 안전과 직결되는 업무에서 변화가 컸다. 김 간호사는 "사고가 발생하면 환자에게 큰 위해를 줄 수 있는 업무들인데 보바일 ENR을 거치면서 안전장치가 하나 더 생긴 느낌이 들어 안심하고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과거 활력징후를 측정한 뒤 종이에 적어두거나 기억한 후 PC에서 다시 입력하는 경우 정보 누락이나 오기입 위험이 있었다. 반면 보바일 ENR은 환자 팔찌와 업무용 바코드를 함께 확인하게 해 다른 환자의 바코드나 잘못된 수혈·채혈 라벨을 인식하면 즉시 경고음을 울린다.
정보보호팀 이성식 팀장은 "과거 이중확인 업무는 간호사 두 명이 직접 확인해 약 5분이 걸렸지만 보바일 ENR을 활용하면 1~2분 내로 단축할 수 있다"며 "태그 기반 확인 방식으로 오류 가능성도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보바일 ENR은 간호부뿐 아니라 진단검사학과의 채혈 업무에도 활용되고 있다. 현재 수혈·항암·이중확인 업무의 약 99%, 활력징후 기록과 채혈 업무의 80% 이상이 보바일 ENR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김 간호사는 "가장 큰 변화는 환자 확인 단계가 강화된 것"이라며 "수혈이나 항암제 투여처럼 환자에게 치명적인 위해를 줄 수 있는 업무에서 오류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AI 기반 음성 기록 시스템은 업무 효율 향상뿐 아니라 환자 안전을 높이는 새로운 도구로 자리 잡고 있었다.
■ 30분 걸리던 응급 판단 5분으로…응급실 풍경도 변화
분당서울대병원 응급실. 뇌졸중 의심 환자가 도착하자 의료진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환자는 곧바로 CT 검사실로 향했다. 과거 같으면 이제부터가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촬영된 영상을 뇌졸중 전문의가 확인해야 했고, 전문의가 병원에 없으면 사진을 찍어 메신저로 보내 자문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CT 촬영이 끝난 뒤 불과 몇 분. 의료진의 화면에는 "대혈관 폐색 여부", "뇌출혈 여부", "이미 손상된 뇌 조직의 범위"가 정량화된 결과로 표시됐다. 응급실 의료진은 이 결과를 바탕으로 환자가 혈관 재개통 치료 대상인지 빠르게 판단할 수 있다.
분당서울대병원 김준엽 신경과 교수는 현재 국내 의료AI 기업 제이엘케이(JLK)의 뇌졸중 진단 AI를 사용하고 있다. 해당 소프트웨어는 CT와 MRI 영상을 분석해 뇌출혈 여부와 대혈관 폐색 여부, 뇌경색 진행 범위 등을 자동으로 분석한다.
김 교수는 "급성 뇌졸중 환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큰 혈관이 막혀 있는지, 그리고 아직 살릴 수 있는 뇌세포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신속하게 판단하는 것"이라며 "재개통 치료를 얼마나 빨리 시작하느냐가 환자 예후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실제 뇌졸중 치료에서는 '시간' 자체가 치료 성적을 좌우한다. 환자가 응급실에 도착한 뒤 1시간 이내에 혈관 재개통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CT나 MRI 촬영 직후 환자 상태를 신속히 평가해야 한다.

AI가 없던 시절에는 이런 판단을 주로 수년 이상 경험을 쌓은 뇌졸중 전문의가 맡았다. 영상 속 미세한 변화를 보고 혈관이 막혔는지, 손상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해석해야 했다. 그러나 AI가 도입되면서 풍경이 바뀌었다.
김 교수는 "검사 후 보통 5분 안에 결과가 나온다"며 "대혈관 폐색 여부와 살릴 수 있는 뇌조직 범위를 정량화해 보여주기 때문에 뇌졸중 전문의가 없는 상황에서도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빠르게 치료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변화가 큰 곳은 상급종합병원보다 오히려 지역 종합병원 응급실이다. 대형병원은 상대적으로 뇌졸중 전문의를 확보하기 쉽지만, 지역 병원은 24시간 전문의를 상주시켜야 하는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 과거에는 응급실 의사가 촬영 영상을 휴대전화로 찍어 전문의에게 보내고 "혈관이 막힌 것이 맞느냐"는 자문을 구하는 일이 흔했다.
"사진을 보내고, 상대방이 메시지를 읽었는지 확인하고, 전화를 걸어 설명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길게는 30분 정도 지연되기도 했죠."
30분은 뇌졸중 환자에게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뇌세포는 혈류 공급이 중단된 순간부터 분 단위로 손상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병원 내 협진 방식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같은 CT 영상을 두고도 의사마다 해석이 달라질 수 있었다. 응급의학과, 신경과, 신경외과가 같은 사진을 보면서 의견을 주고받아야 했다. 반면 AI는 동일한 데이터에 동일한 결과를 제시한다.
김 교수는 "한 장의 사진은 보는 사람마다 판단이 달라질 수 있지만 AI가 제시하는 값은 모두가 동일하게 확인할 수 있다"며 "그 결과를 바탕으로 논의하기 때문에 해석 차이로 인한 논란이 줄어들고 의사소통도 훨씬 빨라졌다"고 말했다.
응급실에서 CT 영상을 휴대전화로 찍어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던 시대가 이제는 검사 5분 뒤 AI가 정량화된 결과를 제시하는 시대로 바뀐 것.
■판독의 우선순위 생겼다…고위험군에 먼저 연락

은평성모병원 영상의학과 판독실. 수십 명의 건강검진 수검자 영상이 모니터 화면에 나열돼 있다. 과거 같으면 의료진은 예약 순서대로 영상을 열어 하나씩 판독을 했지만 지금은 가장 먼저 보는 환자가 따로 있다. 모니터 한쪽에 표시된 숫자 때문이다.
유방촬영 영상 옆에 표시된 이 숫자는 AI가 분석한 유방암 위험도 점수다. 숫자가 높을수록 암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의료진은 이제 접수 순서가 아니라 이 점수를 기준으로 판독 우선순위를 정한다.
은평성모병원 정승은 영상의학과 교수(대한영상의학회 회장)는 "과거에는 예약 환자를 순서대로 판독했다면 지금은 AI가 제시하는 스코어링을 먼저 확인한다"며 "위험도가 높은 환자를 우선적으로 판독하고 빠르게 후속 검사를 안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은평성모병원이 도입한 루닛 인사이트는 유방촬영술(맘모그래피) 영상을 분석해 암 의심 부위를 표시하고 위험도를 수치화해 보여주는 의료 AI다. 실제 판독실에서 확인한 화면에는 병변이 의심되는 영역이 붉은색으로 표시돼 있었다. AI가 해당 부위를 강조하고 위험도 점수를 함께 제시하는 방식이다.
정 교수는 화면을 가리키며 "AI가 이상 부위를 감지하면 이렇게 병변 위치를 표시하고 위험도를 숫자로 보여준다"며 "의료진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AI가 바꾼 것은 판독 정확도만이 아니다. 환자 대응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 건강검진은 일반 외래 진료와 달리 당장 응급 처치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판독이 다소 늦어져도 큰 문제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검진자 가운데 실제 암 가능성이 높은 환자가 섞여 있는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 교수는 "건강검진 수검자 가운데 스코어링 점수가 높은 환자는 결과를 우선적으로 확인해 병원에 빨리 다시 방문하도록 안내한다"며 "이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전문의는 AI가 없어도 판독할 수 있지만, AI가 있으면 보다 효율적으로 환자를 관리할 수 있다"며 "특히 비전문의가 영상을 볼 경우에는 더욱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AI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최근에는 영상 판독 결과를 바탕으로 소견서 초안까지 작성하는 생성형 AI가 등장했다.

정 교수는 현재 PACS 연동을 기다리고 있는 생성형 AI 기반 판독문 작성 솔루션도 소개했다. 이 AI는 단순히 병변 위치를 표시하는 수준을 넘어 영상 소견을 문장 형태로 정리해 판독문 초안을 작성한다.
과거에는 정상 소견 환자라도 의료진이 일일이 판독문을 작성해야 했다. 환자가 많을수록 행정 업무 부담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정 교수는 "정상 환자든 이상 소견 환자든 결국 판독문은 모두 작성해야 한다"며 "AI가 초안을 만들어 주면 전문의는 검토와 수정에 집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정상 소견 환자에서는 할애할 시간을 줄여 업무 효율성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복잡한 증례는 당연히 전문의가 자세히 검토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상 소견이나 비교적 단순한 경우에는 AI가 상당 부분 업무를 줄여줄 수 있습니다."
실제 판독실에서 만난 진단 AI는 의사를 대신해 암을 진단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대신 수백 건의 검진 영상 가운데 가장 위험한 환자를 먼저 찾아내고, 의료진이 놓칠 수 있는 영역을 한 번 더 짚어주며, 판독문 초안까지 작성하는 조력자에 가까웠다.
3년 전 의료계는 AI가 의사를 대체할 수 있을지를 두고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병실과 응급실, 판독실에서 확인한 현실은 달랐다. AI는 의사의 자리를 뺏는 대신 의료진이 환자 곁에 더 오래 머물고, 더 빨리 판단하고, 더 중요한 환자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방향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현장에서 AI 역할은 '대체자'가 아니라 의료진의 시간을 환자에게 돌려주는 '보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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