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디칼타임즈=문성호 기자]"과거엔 중국 데이터를 로컬용이라 치부했지만, 이젠 학회장에서 '차이니스 스탠다드 오브 케어(Chinese Standard of Care)'라는 말이 자연스러워졌다."
"이제 우리 환자들이 중국의 치료 환경을 부러워해야 하는 때가 된 것 같다."
글로벌 학술대회 현장에서 'K-임상'의 위상은 과거와 같지 않다. 임상시험 PI(Principal Investigator)로 인정받는 주요 국내 대학병원 교수들의 입에선 글로벌 산업의 변화 속에서 한국의 상황을 두고 탄식이 터져 나오고 있다. 안으로는 1년 넘게 이어진 의료대란으로 임상 생태계가 흔들리고 있는 사이, 밖으로는 중국이 양적 팽창을 넘어 질적 표준까지 주도하며 'K-임상'의 입지를 대체하는 것을 넘어 글로벌 표준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ASCO·ESMO 메인 세션 '중국판'…데이터가 증명하는 굴기
실제로 글로벌 신약 개발 트렌드를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항암 분야 학술대회를 보면 단숨에 확인이 가능하다.
ASCO(미국암학회)나 ESMO(유럽종양학회) 등 주요 학회의 메인 세션(Oral Session)은 이미 중국 연구자들의 데이터로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다. 주요 다양한 질환 영역에서 글로벌 가이드라인에 변화를 일으킬 만한 임상시험 결과가 집중되면서 학술대회 주최 측 입장에서도 중국은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임상의 메카가 됐다.
데이터는 이러한 현실을 냉혹하게 보여준다.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KoNECT)이 지난해 발표한 '글로벌 제약사 후원 임상시험 현황'에 따르면, 중국의 점유율은 2017년 3.70%에서 2024년 14.59%로 수직 상승했다. 7년 사이 몸집을 4배나 불린 중국은 이제 전 세계 임상의 약 15%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됐다.
여기에 '초기 임상의 강자'로 군림하던 한국의 빈자리를 노리는 호주의 기세도 무섭다. 2017년 2.87%(10위)에 불과했던 호주의 점유율은 2024년 4.24%를 기록하며 단숨에 세계 3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중국이 양적·질적 표준을 장악하는 사이, 호주는 파격적인 규제 완화를 앞세워 한국이 자랑하던 초기 임상 물량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 한국은 의료대란 등을 거치며 2023년 세계 4위(4.04%) 임상시험 국가에서 2024년 6위(3.46%)로 후퇴했다.
특히 해당 데이터의 경우 임상현장 의료진의 연구자 주도 임상이 아닌, 제약사들이 비용을 대고 주도하는 '산업계 후원(Industry Sponsored)'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글로벌 제약사의 임상연구 비용이 미국과 중국, 호주로 집중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상급종합병원 교수는 "다국적 제약사 본사에서 강의 요청이 올 때 보면 이제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 '퍼스트 프라이리티(First Priority)'다"라며 "우리 위상은 이제 브라질과 비슷해진 수준"이라고 냉정하게 진단했다.
그는 "그동안 한국 임상이 가졌던 가장 큰 경쟁력은 중국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었다. 중국 시장이 워낙 크다 보니 한국의 약가가 중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특히 항암제 분야에서 그 파급력이 엄청났다"며 "글로벌 제약사들이 우리를 배려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는데, 이제 그 연결고리마저 끊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서울병원 박연희 교수(혈액종양내과)는 "중국은 이미 '차이니스 스탠다드 오브 케어(Chinese Standard of Care)'를 말한다"며 "자국에서 약 두 개만으로 표준 치료가 다 되고, 최근 5~6년 사이 R&D와 AI 기술을 결합해 눈부시게 성장했다. 이제 학회장에서 그들이 대답하는 수준을 보면 정말 훌륭하다"고 말했다.
박연희 교수는 "특히 ADC 분야는 이제 '오리지널리 프럼 차이나(Originally from China)'라고 봐야 한다"며 "이제 같은 아시아권으로 묶어 보기도 어려워졌다"고 평가했다.
교수도 환자도 임상기회 놓치나
반면, 한때 '속도'와 '열정'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던 국내 임상 현장은 위기에 내몰린 상황이다. 1년 넘게 지속됐던 의료대란으로 전공의와 전임의가 사라진 대학병원은 이제 임상시험은커녕 환자 진료조차 유지하기 벅찬 '한계 상황'에 봉착했다.
임상시험의 실무를 지탱하던 주니어 스탭들의 부재는 교수들의 업무 부담으로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더구나 최근 들어 주요 대학병원들이 수도권에 신규 병원 건립과 개원을 추진, 의료진 인력 부족현상까지 심화되며 교수 인력난까지 가중되고 있다.
이로 인해 국내 초대형병원으로 분류될 수 있는 병원들마저 임상현장에서 펠로우로 불리는 주니어 스텝 부재는 비일비재한 상황이 된지 오래다. 외래 진료를 병행하며 임상 연구까지 챙겨야 하는 교수들은 이 때문인지 이러한 의료진의 역할은 본인들의 세대까지만 유지 될 것으로 여긴다.

서울의 한 상급종합병원 혈액내과 교수는 "의료대란을 거치며 인력적인 문제도 대두됐지만, 이는 직접적인 문제는 아니다. 전반적으로 임상시험에 투입되는 비용도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면서 비싸졌다"며 "우리나라의 임상시험의 최대 장점이 환자 인롤(Enroll) 등 빠르게 진행된다는 측면이었는데 이 점마저 이제 상쇄된 것 같다"고 진단했다.
그는 "글로벌 본사가 공식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이제는 한국의 수익성이나 급여 환경이 녹록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며 "임상 연구도 제약사 입장에서는 하나의 '기회'인데, 연구는 한국에서 실컷 하고 정작 약은 안 써주는(급여가 안 되는) 상황이 반복되니, 차라리 시장이 더 큰 곳에 기회를 몰아주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토로했다.
문제는 이 같은 내부 붕괴는 글로벌 제약사들의 '코리아 패싱'을 가속화하고 있는 상황과 맞물리고 있다는 점이다. 데이터에서도 나타나듯 호주가 점유율 4.24%를 기록하며 세계 3위로 급부상하는 사이, 한국은 다국가 임상 물량에 사실상 상한선(Cap)이 씌워지며 소외되고 있다.
임상현장에서는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결국 환자들의 신약 치료기회마저 줄어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다른 경기도의 한 상급종합병원 종양내과 교수는 "특정 제약사 한 곳의 문제가 아니다. 여러 다국적 제약사의 방향성이 공통적으로 한국에 배정하는 임상 연구 캐파(Capacity)를 줄이는 쪽으로 가고 있다"며 "연구는 결과의 퀄리티만 좋으면 그만이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제는 임상 참여 기회조차 철저히 수익성과 연계해 계산기 두드려가며 줄이고 있다는 게 정말 놀랍고도 무서운 지점"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글로벌 본사는 '한국 환자들이 많이 등록됐고, 그 데이터 덕분에 임상이 성공(Positive)했으니 당연히 급여도 빨리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며 "그런데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결국 한국 데이터로 약을 만들어놓고 정작 한국 환자들은 급여의 벽에 막혀 약을 못 쓰는 모순이 발생하니, 본사에서도 한국에 대한 투자를 재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 최신순
- 추천순
댓글운영규칙ex) medi****** 아이디 앞 네자리 표기 이외 * 처리
댓글 삭제기준 다음의 경우 사전 통보없이 삭제하고 아이디 이용정지 또는 영구 가입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1. 저작권・인격권 등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
2. 상용프로그램의 등록과 게재, 배포를 안내하는 게시물
3. 타인 또는 제3자의 저작권 및 기타 권리를 침해한 내용을 담은 게시물
4. 욕설 및 비방, 음란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