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가을날 산부인과를 돌 때였다. 교수님들이 모두 학회를 가셔서 오전에 모두 끝나버린 일정에 바로 공부할 거리를 챙겨서 카페로 향했다. 근데 웬걸 가려던 카페가 임시 휴무였다. 숙달된 P인 나는 당황하지 않고 플랜B를 실행했는데 그건 바로 옆에 있는 샌드위치 집에서 무화과 리코타 샌드위치를 사서 호수 공원에 가는 것이었다.
물론 다른 카페를 가서 공부를 하는 플랜 A-1,2,3,4가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날씨가 너무 좋았다고 변명을 한다. 내가 하나 강력하게 확신하는 것은, 눈앞에 온 거짓말 같은 날씨는 절대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때 즉시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부천에 산 지 2년이 되어간다. 나는 어떤 동네나 내가 매트리스를 깔고 눕는 곳이라면 곧잘 좋아하고 뿌리를 내리는데, 이번에 지낸 도시는 그중에서도 애착을 갖기 쉬웠다. 특히 부천의 가을은 더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조바심을 갖게 만든다. 나는 기회만 되면 병원 지하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하고 노트북을 챙겨 공원 한복판 정자에서 공부를 하면서 한점이라도 더 가을을 보고 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자전거를 십분 정도 타고 도착한 호수 공원은 작지만 정리가 잘 되어있어서 걷거나 자전거 타기 매우 좋다. 적당히 볕이 드는 자리를 선택해서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한다. 사실 작년까지 무화과에 취미가 없었는데 이번 여름 오키나와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산 무화과로 아침을 해 먹은 이후로 한국에서도 계속 무화과를 찾아다녔다. 치아바타에 리코타, 무화과와 루꼴라만 들어간 간단한 샌드위치인데 꽤 비싸고, 매우 맛있다. 샌드위치 위로 햇빛이 흔들린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이 빛을 뭐라고 했는데… 뭐라고 했더라.
손을 털고 조금 걷기 시작한다. 혹시나 해서 책도 챙겨왔다 <고상하고 천박하게>라는 이훤 작가와 가수 김사월의 주고받은 편지 형식의 책이다. 읽다가 인기척이 느껴져 앞을 보니 양볼이 붉은 아기가 나에게 낙엽을 건넨다. 그 사랑스러운 선물을 책 사이에 끼우기 전에 햇빛에 한번 비춰본다.
샛노란 벚나무 낙엽을 덮고 있는 미세한 갈색 반점들, 그 사이를 지나가는 미세한 잎맥,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가늘고 얇은 경계로 갈라지고 그 틈을 햇빛이 채우면서 빛나고 있었다. 무언가를 이렇게 관찰한 적이 너무 오래전 같았다.
가끔 애인과 구글맵으로 세계지도를 보면서 가끔 어디로 여행 가지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데, 최근에는 생각보다 세상이 너무 좁다는 느낌이 들어서 어이없이 우울해진 적이 있었다. 이 세상의 경험들을 다 묶은 책을 다 읽어버리면, 그 이후에는 어떡하지? 그런 걱정이었다. 그러나 필요 없는 걱정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매년 똑같이 돌아오는 가을을, 이번에 지나가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이렇게 먹고 마시고 즐기고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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