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는 사랑이란 감정에 박하다. 웬만한 농도의 감정은 사랑이라 명명하지 않는다. 이런 까칠함을 뚫고 필자의 곁을 차지하고 있는 이름들이 몇 있다. 그 가운데 유독 선명한 것이 '글'이다.
필자의 삶에서 글은, 사랑하지 않았다면 용서할 수 없는 사건들의 주요한 원인 제공자였다. 어릴 적 등하교길의 짧은 시간도 활자 금단을 참지 못했던 필자는, 걸음마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도 글을 담으려다 결국 안경을 맞추게 되었고, 하루는 야단을 맞고 속상한 마음에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다가 어머니가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게 만들기도 했다.
글과 관련된 것은 뭐든 좋았다. 활자 사이로 시선을 미끄러트리는 것을 여전히 좋아하고, 노트에 한땀한땀 글자를 새기는 것도 즐거웠다. 피아노 건반을 어루만지듯 키보드 위에서 문장을 빚어내는 시간 또한 사랑했다. 브라우저 북마크의 첫 자리는 언제나 국어사전이 차지했고, 생각과 감정을 담을 '적확한 단어'를 찾는 일은 그 자체로 유희였다. 그러니 글을 정체성의 일부로 인식하게 된 건 어쩌면 필자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나이에서 n을 뺀 시간만큼 글을 오래 사랑하다 보니 관계에 균열을 만들 사건이 찾아왔다. 의대생 단체에서 편집장을 맡게 된 것이다. 글을 매개로 세상과 공적으로 관계 맺은 이 첫 경험은, 모순적으로 글과의 거리감을 낳았다. 개인의 회고와 서술을 넘어 기획과 편집이라는 층위에서 맞닥뜨린 새로운 고민들이 치열하게 타올랐고, 그 열기가 필자를 고요한 활자의 세계에서 끌어냈다.
1. 읽히지 않는 글은 의미가 없다.
매거진 편집장 시절, 필자 앞에는 저조한 구독률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에 관해 필자는, 그간 산발적인 주제로 진행되던 인터뷰들에 하나의 주제 의식을 부여할 수 있도록 기획 단계부터 공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메시지 하에 개별 스토리를 응축시켜야 할까. 독자는 어떤 주제에 흥미를 느낄까." 평범한 대안에서 출발한 질문은 점차 혁신성을 띄었다. "우리는 왜 종이라는 아날로그 매체와 롱폼을 고수하고 있을까? 관습의 유지인가 독자의 요구인가?" 생존을 위한 변화 앞에서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글은 타인에게 닿아 의미의 재생산을 거칠 때, 비로소 창조의 목적을 달성한다. 따라서 쓰는 행위를 넘어, '읽힐 글'에 대한 인식을 기획 단계부터 가져야 한다. 글감, 매체와 형식, 나아가 홍보에 대한 고민까지. 어미의 역할이 출산으로 끝나지 않듯, 창작자 역시 글이 사회와 관계 맺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후 발길을 옮긴 필자는 서비스 분야에서 운명처럼 같은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단순히 '있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진짜 필요한 서비스는 무엇인지. 그리고 창조에서 멈추지 않고 그것이 실제로 고객에 닿게 하는 전략은 무엇인지. 필자는 지금 전혀 다른 분야에서 동일한 질문을 붙잡고 있다.
2. 글은 최종 종착지가 아니다.
의정사태가 시작되고, 그와 관련한 책을 낸 뒤에도 필자는 같은 주제를 더듬었다. 그러나 문장을 쓸수록 이상할 만큼 답답했다. 필자의 손끝에서 태어나는 문장이 그랬다.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필자는 포괄적인, 그래서 무엇도 움켜쥐지 못한 문장들로 흰 바탕을 낭비하고 있었다. "자정해야 한다." "뿌리부터 고쳐야 한다." - 이 당연한 말들이 사람들 마음에 울림을 남기지 못한다고 느꼈다. 공허한 메아리처럼 허공에 흩어질 뿐이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몰라서 변하지 않는 걸까.
얼마나 많은 문장을 낙수시켜야 바위가 쪼개질 수 있을까.
그때 처음으로, 글이 정말 세상을 바꾸는 '효과적인' 방식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현실의 복잡성은 활자가 담기엔 너무 입체적이다. 논쟁적인 주제를 다루는 글일수록 정답을 제시하려 하지만, 사회는 정답이 아니라 균형을 향해 나아간다. 설령 그 균형이 어긋남과 타협 위에 세워진 모순이라 해도, 사회는 옳고 그름의 판단 없이 그 평형을 좇는다. 그렇기에 아무리 정돈된 문장이라도 닿지 못하는 자리가 있다. 문장을 겹겹이 쌓아도, 서술할 수 없는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코드블루'가 전국으로 퍼지고 많은 이들이 잘 읽었다는 감상평을 전했지만, 상황은 우리가 기대한 만큼 변하지 않았다. 개인적 효능감은 높았으나 사회적 변화는 없었다. 무력했다. 그때 필자는 글이 닿지 못하는 그 바깥을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필자는 행동을 기획하고 몸을 직접 움직였다. 대표자와 학생 사이의 단절을 메우고, 서로의 신념이 겨눠지는 장면을 막으려 했다. 결과적으로 성과는 미미했지만, 한 가지는 알게 됐다. 나는 이제 글을 쓰는 사람이보다, 직접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글은 문제의 실마리를 더듬는 도구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 해답은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멈춰 서 글을 쓰는 대신 글이 가리키는 현실에 직접 부딪혀보기로 했다. 글은 나를 이곳까지 데려온 첫 언어였지만, 더 이상 내가 머물러야 할 종착지는 아니었다.
글은 내가 사랑한 첫 추상이다. 글을 통해 나는 이제까지 목격한 세상과 아직 목격하지 못한 세상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었다. 활자의 세계는 평온했고, 완벽했다. 그러나 헤세가 말했듯,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나에게 그 껍질은 글이었다. 글은 한동안 나를 감싸 안아 세상을 안전하게 배우게 했지만, 결국 나는 그 다정한 포옹을 뿌리쳐야 했다.
글은 더 이상 나의 전부가 아니다.
세상으로 나아갈수록 내 안에서 글의 자리는 조금씩 좁아지고, 그 자리를 다른 세계의 일들이 채워간다. 그러나 글이 남긴 흔적은 여전히 선명하다. 사유의 습관, 언어의 온도, 타인을 이해하려는 감각. 그 뼈대를 가지고 나는 새로운 사회에 부딪힌다.
돌아보면, 글을 떠나는 일은 애초에 글이 내게 남기려던 마지막 가르침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밟고 나아가도록 내어주는 일, 종국에는 자신을 찢고 나가는 것조차 응원하는 일. 어쩌면 그것은 글의 한계가 아니라, 글이 품은 가장 넓은 사랑의 형태일지 모른다.
이제 나는 그 안온한 품을 떠나 독립을 시도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 사랑의 방식을 품은 채 세상과 관계 맺는다. 그런 의미에서 글, 그는 나의 완벽한 첫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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