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증원 정책이 철회됐지만, 갈등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의대생들의 복귀 선언에도 불구하고 사직 전공의와 교수진의 복귀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정원 확대 정책에 반대하며 교수직을 내려놓은 배장환 전 충북대병원 교수도 마찬가지.
그는 이 상황을 단순한 '정책 종료'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단언했다. 지금이야말로 의료계 전체가 무너질 수 있는 '진짜 위기'가 시작되는 시점이라는 것. 갈등을 빚어낸 정책은 사라졌지만 그 정책을 만들어낸 구조는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이다. 정책 백지화로 갈등은 멈췄지만, 뿌리는 그대로라는 판단이다.
정책에 근거를 끼워맞추는 하달식 결정 구조, 추계와 분석이 아니라 정치적 구호로 채워진 수급 논리. 이런 구조가 개선되지 않는 한, 아젠다만 바뀔 뿐 의료정책을 둘러싼 갈등은 재점화될 수밖에 없다. 배 전 교수에게 의정 갈등 사태의 해법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정책 사라졌지만, 구조는 남아…"언제든 갈등 재점화"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 정책을 사실상 철회하면서 지난해부터 격화돼 온 의정 갈등은 일단락된 듯 보인다. 문제는 그 갈등의 핵심은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의지만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의료 정책 결정 구조, 전문가 참여 없이 반복되는 '하달식 정책'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이를테면 '공공의대'와 같은 의대 증원의 또 다른 버전은 언제든 등장할 수 있다.
배 전 교수도 이번 사태가 남긴 핵심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첫걸음은 정부의 명확한 사과와 정책 전환 의지"라며 "본질적인 측면에서 단순한 수습 차원의 대책이 아닌, 전문가 중심의 정책 결정 구조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까지 정부가 위원회를 통해 형식적으로 전문가 의견을 듣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부와 시민단체, 환자단체의 이해가 일치하면서 전문가 의견이 주도권을 잃는 기형적 구조"라며 "이익단체는 의료의 지속 가능성보다는 단기적 이익에 초점을 맞추기 쉬우며, 이는 정책의 방향을 왜곡시킬 수 있다"고 했다.
표면적으로는 의견 수렴과 중지를 모으는 '거버넌스'가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부와 시민, 환자단체의 이해가 일치하면서 정책협의체나 논의체 등은 정책을 밀어붙이기 위한 '거수기 역할'에 그친다는 것.
보건복지부 역시 '보건의료인력 수급 추계 연구'라는 용역을 주기적으로 발주하고 있지만, 이는 정책 결정 이후 사후적 정당화를 위한 도구로 활용돼 왔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정부가 먼저 수를 정하고, 추계는 나중에 붙이는 구조라는 비판이다.
배 전 교수는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주요 국가들은 정교한 수급 모델과 전문가 중심 거버넌스 체계를 갖추고 있다"며 "이들의 공통점은 의료 인력 수급이 정권의 의지나 사회 여론에 따라 좌우되지 않고, 전문가 중심의 시스템 안에서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논의된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 후생성 산하의 의사 수급 연구회는 자문기구이지만 영향력이 높고, 환자단체나 시민단체는 참여하되 투표권은 부여되지 않는다"며 "반면 한국은 시민단체나 환자단체가 실질적 보팅 파워를 갖고 있어, 전문성보다 정치적 여론에 좌우되는 결정이 반복된다"고 꼬집었다.
이어 "법조계 정원 논의는 전·현직 판사, 검사, 변호사, 로스쿨 교수들이 위원회를 구성해 결정한다"며 "본인은 환자를 굉장히 위하는 사람이고, 보건의료는 환자를 향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의 의견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갈등 봉합? "한국 의료 데드라인 직면"
그는 특히 의료 인력의 연쇄적인 공백 사태를 예고했다. 지난해 신규 전임의와 펠로우의 충원이 사실상 중단됐고, 올해도 녹록치 않은 상황이다. 내년 이후부터는 신규 분과 전문의 배출이 급감할 수밖에 없고, 이는 곧 상급종합병원과 종합병원 전반의 인력 구조를 붕괴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배 전 교수는 "작년부터 신규 펠로우와 전임의 충원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는데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남아있는 의료 인력이 업무 과중으로 일을 그만두게 된다"며 이같은 인력 붕괴는 내년부터 본격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그는 "특히 종합병원은 이미 상급종합병원의 환자 부담을 일부 떠안고 있는데, 전문의 이직과 인력 부족이 겹치면 간신히 유지되던 구조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며 "겉보기엔 전공의 집단 사직 이후에도 병원이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의료 현장은 인력 부족을 'PA 간호사'로 메우는 방식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는 이 방식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당장은 유지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국 의사가 해야 할 일을 의사가 하지 못하는 구조는 국민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판단이다.
그는 "이같은 의료 질 저하는 갑작스럽지 않게 서서히 드러난다"며 "중증 질환을 가진 고령 환자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조용히 사망하는 초과 사망이 이미 시작됐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의료 시스템이 겉보기에 잘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을 경계해야 한다"며 "지금은 유리창이 깨질 때마다 막는 수준이지만, 의료 인력의 연쇄 공백은 기둥이 뽑히는 것과 같아 건물의 구조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사직 교수가 본 전공의 미복귀의 이유
사직의 주요 이유는 증원 정책 반대였다. 정책이 백지화 된 지금 교수직 복귀 가능성을 묻자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교육과 진료 양쪽에서 훈련받은 전문가로서 대학병원에 있는 것이 사회적 편익 측면에서도 효용이 높다고 보지만, 정부 정책에 아무런 견제장치가 없는 구조라면 복귀는 쉽지 않다는 입장이다.
배장환 전 교수는 "정부의 정책을 줄줄이 읊어대는 리더십, 의사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결정 시스템이 그대로라면, 본인 역시 전공의들과 같은 이유로 학교에 돌아갈 수 없다"며 "정권이 바뀌고 정책이 철회됐다고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이 상황을 끝이 아닌 새로운 출발점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권 초기라는 점에서 새 정부가 숨고르기를 하고 있을 뿐 언제든 다른 방식의 의료인력 확대 방안이 재추진될 수 있다는 것. 특히 이재명 정부가 공공의대 설립에 대해 의지를 피력해왔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공공의대 자체가 나쁜 정책은 아니지만 의대 증원처럼 이 또한 '하달식'으로 결정된다면, 갈등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논의 구조가 바뀌지 않은만큼 언제든 공공의대와 같은 정책 하달이 재현될 수 있어 복귀는 이른감이 있다는 것.
배 전 교수는 지금이 마지막 데드라인라고 말했다. 그는 "국민, 환자, 정부, 의료계도 이와 같은 한계 상황이 지속되면 승자없이 모두가 패배자가 될 것"이라며 새 정부의 책임 있는 자세와 진정성 있는 정책 전환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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