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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떼돈을 벌 거야!"(마지막편)

정세용
발행날짜: 2014-08-02 05:20:00

연세대 의대 본과 4학년 정세용 씨

케냐 정부는 코끼리 사냥은 물론이거니와, 상아 거래조차도 불법으로 규정해 놓았다. 어떻게든 코끼리의 멸종을 막아보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지만, 코끼리의 상아와 가죽은 밀렵꾼들에게 포기할 수 없는 먹잇감이었다. 반면 짐바브웨에서는 코끼리 사냥과 상아 거래가 합법적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코끼리의 개체 수는 꾸준히 유지되거나 증가하고 있다. 왜 그럴까? 짐바브웨 사람들은 높은 국민성을 가진 환경 친화적 민족이기 때문에, 혹은 환경운동가들이 진행하는 캠페인이 케냐의 스와힐리어로는 번역 되지 않았기 때문인가?

진짜 이유는 그보다 간단하다. 짐바브웨 정부는 코끼리를 사유 재산화시켰다. 각 촌락은 그들의 공유지에서 코끼리를 기르고, 때로는 사냥 및 사진 촬영을 위한 대가를 받음으로써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다. 덕분에 짐바브웨 국민들은 코끼리의 개체 수 관리에 엄청난 신경을 쓸 뿐만 아니라, 불법 밀렵꾼이 나타나면 자기들이 앞장서서 총으로 쏴 죽인다.

물론, 이런 제도의 차이를 모르고 케냐와 짐바브웨의 코끼리 개체 수 변화만 본다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이야, 짐바브웨 국민들은 코끼리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랑스러운 민족이구나!”

양심? 윤리? 현재 대세는 게임 이론!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보아야 세상이 아름다운가’의 문제라면 양심이나 윤리 등을 이야기 해야겠지만,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보아야 세상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서 본다면, 그 해답은 ‘게임 이론’이 될 것이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실제 주인공으로도 유명한) 존 내쉬가 ‘게임 이론’을 바탕으로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지 불과 10여년 만에, 로버트 오먼과 토머스 셀링도 같은 주제로 2005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고, 이제 이 ‘게임 이론’은 경제, 경영 뿐 아니라 정치, 사회, 심리학, 생물학 분야의 패러다임에 중심이 되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게임 이론’의 기본 개념은 간단하다. ‘상대방(상호작용 하는 대상)’과 ‘규칙’이 존재하는 모든 상황이 ‘게임’이고, 그 ‘게임’에서 모든 플레이어의 행동은 오로지 자신의 이해득실이 최선이 되는 선택을 한 결과일 뿐이다. 상대방과의 협력이 이득이라 예측된다면 협력을 하고 ‘친구’라 부르고, 상대방과의 갈등이 이득이라 예측된다면 갈등을 하고 ‘적’이라 부른다. 인간이 선한 행동을 하는 것조차도, ‘게임 이론’은 이해득실을 바탕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몇 가지 ‘게임 이론’의 해석을 살펴보자.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도둑질’은 한 사람(주인)의 소유물이 다른 사람(도둑)에게 이전되는 현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도둑질을 사회악이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둑질이 허용된다면 주인은 방범 시스템 구축과 경찰력 유지에 돈을 쓸 것이고 도둑은 이를 뚫기 위해 돈을 쓸 것인데, 그 돈들은 다른 생산적인 일에 쓰일 수 있는 사회적 낭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한편, 1945년 실제로 일본에 투하되었던 핵폭탄이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1945년에는 미국만이 핵폭탄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나라가 핵폭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게임 이론’의 해석이다. 도둑질의 죄책감이나, 반전 운동 및 인류애, 그러한 내용은 ‘게임 이론’에 없다. 다소 차갑고 잔인한 이론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게임 이론’이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는 실제로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한 예측들이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케냐와 짐바브웨의 코끼리 문제도, 필자가 한국의 의료 상황을 보며 느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케냐의 코끼리 수가 감소하는 것을 케냐 국민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도, 짐바브웨의 투철한 코끼리 보호 정신을 ‘제도’에 대한 이해 없이 그저 칭찬하고 보는 것도 옳지 못하다. 애초에 케냐 국민에게는 불법 밀렵으로 돈을 버느냐, 양심을 가지고 코끼리를 지키느냐라는 선택지 밖에 주어지지 않은 게임이었다. 반면, 짐바브웨 국민에게는 돈도 벌고 코끼리도 지킬 수 있는 매력적인 선택지가 있었던 게임이었지 않은가.

보건복지부는 ‘한국의 의료 상황에서 3분 진료나 과잉 진료 없이도 병원을 유지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가? 대형 병원이 전공의에게 무리한 근무를 시키고 3대 비급여가 병원 경영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병원만의 문제인가? 최신 지견을 통한 약제나 수술 방법의 선택은 아직 급여 기준에 없다는 이유로 삭감되는 상황에서, 의사가 최선 진료, 소신 진료를 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이런 제도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이, 그저 히포크라테스와 슈바이처를 앞세워 한국 의사들은 싸가지가 없고 돈에 눈이 먼 말종들이라고 욕하는 것이, 그게 정말 의미가 있는 행동이냔 말이다. 그건 코끼리 개체 수 감소의 책임을 케냐 국민에게 돌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짐바브웨처럼 생각해 보자. 신이 아닌 이상 의사가 최선을 다해도 환자의 상태가 나빠지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고, 동시에 의사는 이렇게 실수 없이 최선을 다했던 상황에서도 환자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의사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간 이는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고, 의료 사고로 간주되어 의사에게 책임이 돌아간다. 덕분에 의사는 이제 환자에게 미안하다는 말 조차 쉽게 하지 못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의사들의 꾸준한 내부 운동의 결과로, 여러 주에서 “I am sorry.”라고 말하는 것이 과실 인정의 증거로 사용되지 않도록 법으로 제정되었다. 이 ‘제도의 차이’는 의사가 자신의 미안한 감정을 솔직히 말할 수 있게 하였고, 이로 인해 환자는 분노를 누그러뜨리며 불필요한 의료 소송을 많이 줄였고, 결국 이는 국가 전체적으로 의료비 상승을 막아주는 데까지 이어졌다.

여기서 다시 질문, 미국 의사는 한국 의사에 비해 자신의 잘못을 더 잘 인정할 줄 아는 양심적인 집단인가?

윤리 강조 체계 대신 권리 주장 체계를

“난 떼돈을 벌 거야!”라는 지난 세편의 글을 요약하면 이렇다. 의사가 진료를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가 있었고, 의사들도 환자들에게 충분히 좋은 모습으로 비춰지지 못했다. “난 떼돈을 벌 거야!”라는 말도 못할 정도로 의사들의 권리 주장이 터부시되던 문화 속에서, 의료 체계의 구조적 문제와 의사들의 윤리적 문제는 악순환을 반복하여 의료 제도의 왜곡만 점점 심해져 왔다.

문제는 이 악순환을 ‘어떻게’ 끊을 것인가. 아니, 어떻게 끊을 것인가는 차처하고라도, ‘어디부터’ 끊을 것인가? 이에 대해서, 기존까지의 ‘윤리 강조 체계’처럼 의사들의 윤리적 문제를 먼저 고치기보다는, 의료 체계의 구조적 문제를 먼저 고쳐야 하고, 이를 위해 의사들의 ‘권리 주장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모든 의사가 윤리적이고 양심적이라면 당연히 얼마나 좋겠는가. 의사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소신 진료를 하고, 환자는 의사의 거짓말이나 비용 문제 등에서 벗어나 치료를 받은 후 친절한 의사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그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일지. 그런데 우리가 그런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걸 어쩌겠는가. ‘윤리 강조 체계’가 싫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현실 속에서, 특히 ‘한국 의료’라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윤리 강조 체계’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권리 주장 체계’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의료 행위 역시 ‘게임 이론’ 속의 ‘게임’의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의료 행위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절대 아니라, 의료 행위 역시 ‘상호작용 하는 대상’이 있고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위에서 말한 ‘게임 이론’의 정의에 따라서 말이다. 의사는 환자, 보건 복지부, 심사 평가원 등과 상호 작용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그 관계가 협력이 유리한 상황일 것이냐, 갈등이 유리한 상황일 것이냔 말이다.

물론 많은 경우에서 편법을 사용할 때 개인의 이해득실이 최선이 되곤 한다. 하지만 한국 의료에서는 3분 진료나 과잉 진료를 할 때 더 큰 이득이 생기는 것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병원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이전의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래서 ‘저수가’와 ‘원가 이하의 저수가’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상황을 만들어 놓고는 “3분 진료나 과잉 진료 하면 나쁜 의사”라고 말하며 땅에 침 한 번 퉤 뱉는다고 해결이 되겠는가 말이다.

대표적인 예로 2012년 포괄 수가제 도입 당시를 보자. 기존까지의 행위별 수가제에서 의사는 자신이 시행한 모든 의료 행위에 대해 수가를 받았고, 대신 의사가 ‘불필요한 의료 행위’를 통해 더 큰 이익을 추구하지 않도록 심사 평가원이 감시를 하고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정부는 포괄 수가제를 도입하며, 같은 질병에 대해서는 의료 행위의 수나 종류와 무관하게 같은 가격을 받도록 했고, 이것이 의사들의 ‘불필요한 의료 행위’를 줄임으로써 의료비 감소를 유도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의사-환자 관계에서, 의사를 ‘갈등’이 유리한 게임에 빠지게 하는 방법 아니겠는가. 의사는 최소한의 의료 행위만을 하며 돈을 아끼려 들 것이고, 실제로 외국의 일부 대형 병원에서는 각 봉직의가 이러한 방식으로 돈을 아낄 때마다 인센티브를 받고 있다. 그러면 이 과정에서 불충분한 의료 행위에 의해 환자의 건강에 해가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심사 평가원은 과소 진료에 대해 감시를 하겠다고 하지만, 아니 애초에 행위별 수가제에서 과잉 진료를 감시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면서, 포괄 수가제에서 과소 진료를 감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대체 무슨 논리인가.

한 술 더 떠서, 정부는 의사들이 돈을 벌기 위해 과소 진료를 하려는 생각 자체가 불경스럽다며 의사들을 몰아갔다. 당연히 의사가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법이란 것이 그런 논리를 바탕으로 제정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고, 애초에 과소 진료인지 적정 진료인지를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이런 논란이 생기는 것 아닌가. 한국 의사들을 ‘게임 이론’의 예외 집단으로 지정하고, 노벨상 위원회에 전화라도 넣어서 존 내쉬의 수상을 취소해 달라고 요구해야 될 판이다.

이런 구조적 모순을 의사들의 윤리 문제 해결로 바로잡을 수 없기 때문에, 의사들의 권리 주장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위에서 예를 든 미국의 “I am Sorry.” 법안을 생각해 보자. 미국 의사들이 처음에 그 주장을 하며 얼마나 심한 비난을 받았겠는가. 그들이 어떠한 명분을 내세웠든 간에, 그들은 환자의 나쁜 결과에 대해 잘못을 인정해 놓고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이익 집단으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그 법안이 실제로는 환자에게도 국가 의료 체계 전체적으로도, 신의 한 수가 되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난 떼돈을 벌 거야!”라는 말만 해도 눈치를 봐야 하는 한국에서라면, 어떤 권리 주장인들 펴볼 수나 있겠는가. 이제 한국에서는 ‘아동 청소년 성 보호에 관한 법률 (아청법)’ 덕분에 여성 환자에게는 청진기를 대기도 꺼려지고, ‘의료인 폭행 가중 처벌법’의 제정은 환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과한 처사라며 계속 미뤄지고 있다. 이 지경에 이른 의료 환경에서 의사에게 무슨 최선의 진료를 기대하는가. 의사가 ‘진료’ 자체는 ‘쪼끔’ 못해도, 이들 법 덕분에 진료실에서 아동과 청소년의 성이 아주 잘 보호되었고 환자의 위상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드높아졌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길었던 ‘떼돈’ 시리즈를 마치며

지난 해 10월, 원격 의료와 영리 자회사 논란이 시작될 때쯤부터 이 ‘의사들의 권리 주장’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관련된 자료도 찾아보고, 철학이나 경제학 쪽의 책도 찾아보고, 술자리에서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도 해 보고, 그러다가 한 친구와는 의견 차이가 심해 싸워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메디컬 타임즈의 기사 작성 제의를 받고 그 반 년 간의 고민을 한 번 담아보고 싶었고, 우선 ‘의사들의 권리 주장’과 관련해서, 의사들이 가장 말하기를 꺼려하고 터부시하는 말을 제목으로 정하려고 했었다. 그렇게 시작된 글이, 바로 이 “난 떼돈을 벌 거야!” 였다.

물론 필자가 말하는 이 ‘권리 주장 체계’가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권리 주장 체계’를 통해 정말로 의사와 환자, 그리고 국가 모두에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게 가능할 지도 확실하지 않고, 가능하다고 해도 그 과정에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들 수도 있고 말이다. 또한 현재에도 의사들에 대한 규제가 적지 않은데, 괜히 의사들에게 더 많은 규제를 안겨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의 분명한 생각은, ‘윤리 강조 체계’에는 한계가 있고, 계속 이런 식으로 가서는 악순환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임 이론’의 대표적인 예시인 ‘죄수의 딜레마’나 ‘공유지의 비극’ 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항상 나타나는 것이며, 개인의 의식 수준이나 윤리, 양심 등과는 무관한 이야기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이해득실이 최선이 되는 선택을 할 뿐이며, 그 최선의 선택이 ‘협력’이 되지 않게 하는 한, 갈등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누가 행인의 옷을 벗겼나. 아무리 강한 바람이 몰아쳐도, 행인이 옷을 벗기 싫으면 절대 벗길 수가 없다. 하지만 해를 조금만 쬐어주면 행인은 얼마든지 옷을 벗고 싶어 할 것이고, 그렇게 행인도 해도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 의사 개인의 인성 뿐 아니라, 의사가 최선의 진료를 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좋은 ‘의사-환자’ 관계의 시작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한다, “난 떼돈을 벌 거야!” 라고. 이번 시리즈에서 제목과 본문을 포함하여 벌써 28번째 이 문장을 외치고 있고, 또 항상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필자도 이 말을 할 때마다 늘 조심스러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네가 잘 나기만 해서 의사되는 줄 아냐.”, “인생이라는 게 남을 도와가며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을.” 등의 이야기들. 하지만 필자는 그러한 이야기들도 맞는 말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이야기들이 필자의 주장과 공존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며, 오히려 공존할 때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 믿는 사람이고, 그래서 이제 스물아홉 번째로 외치려 한다.

"난 떼돈을 벌 거야!"

참고문헌 김영세 '게임의 기술'(웅진지식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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