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비밀번호 변경안내 주기적인 비밀번호 변경으로 개인정보를 지켜주세요.
안전한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3개월마다 비밀번호를 변경해주세요.
※ 비밀번호는 마이페이지에서도 변경 가능합니다.
30일간 보이지 않기
  • 오피니언.
  • 젊은의사칼럼

임상의학의 문법에서 친절함을 읽다

계명의대 1학년 정민재
발행날짜: 2026-06-22 05:00:00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1학년 정민재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고 느끼는 건 우리가 체감하는 시간이 여태껏 살아온 시간의 총량에 대한 비율로 결정되기 때문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올해의 절반이 유독 빠르게 흘러간 건 그만큼 내 삶의 시간이 누적되었기 때문인지, 1~2주마다 반복되는 시험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시험을 두 번만 쳐도 한달이 사라지니, 시간이 그야말로 녹아 없어지는 기분이다.

분명 시험 직전이라고 한 시도 쉬지 않고 공부를 하는 건 아닌데도, 시험이란 건 온 신경을 빨아들이는 효과가 있어서 다른 어떤 것에도 시간을 쏟지 못하게 한다. 그 탓에 시험을 보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면 설거지나 빨래부터 시작해서 이런 '글쓰기'처럼 그동안 외면해온 일들이 나를 잔뜩 기다리고 있곤 한다. 본과에 올라와 임상 과목들을 배우며 느낀 소회를 이제서야 글로 남기는 것에 대한 이유이자, 변명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 학교는 독특하게도 예과 2학년부터 본과생과 똑같은 블록제 시간표로 생리학, 생화학, 면역학, 조직학 등 모든 기초의학 과목들을 배우는데, 이 때문에 고등학생처럼 한 강의실에 모여 계속 수업을 듣는 방식이나, 1-2주 간격으로 반복되는 시험이 딱히 새롭지는 않았다.

올해 가장 새로웠던 건 아무래도 임상 과목에 접어들며 공부하는 내용의 성격이나 목적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늘 보던 교수님만 보면서 이 교수님은 어떤 스타일이고, 저 교수님은 문제를 어떻게 내고, 하는 이야기를 하던 예과 때와 달리 이제는 얼굴을 모두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교수님들이 각자 자신의 전문 분야를 짧게 강의하고 나가시곤 한다.

긴급하게 의료인을 호출하는 응급상황에서 "미토콘드리아는, 우리 몸의 에너지를 생성해요!"라고 엉뚱하게 소리치는, 의학도지만 임상 지식은 전무한 의과대학 예과생의 모습을 담은 외국 릴스에 공감하며 웃던 기억이 있는데, 마침내 일상에서 혹은 병원에서 진짜 들어볼 만한 질환들과 치료법들을 배운다는 점이 새롭기는 하다.

그럼에도 내게 가장 새로웠던 건 임상 현장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언어'였다. 다른 지역에 가면 귀를 파고드는 그 지역만의 말투, 즉 사투리가 주는 낯선 감각처럼, 외부인의 입장에서 본 임상의학의 언어는 그만큼 이질적이었다.

임상 공부에 익숙해진 본과 선배님들이나, 이미 현장에 있는 의사 선배님들에게는 너무 당연하고 뻔한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원래 사투리라는 게 당사자들에게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이 외부인에게는 신선하기에 늘 흥미로운 대화 주제가 되지 않는가.

임상 의학의 첫 번째 문법은 단연 '가이드라인'이다. 본과에 진입한 초기, 임상 교수님들이 복잡한 알고리즘이 가득한 지침을 수업 자료로 들이밀었을 때는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다. 우선 빼곡하게 들어찬 글씨에 '저걸 언제 다 공부하지'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고, 무엇보다 임상 현장을 대변하는 가이드라인이 사람의 판단이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로 기계적으로 짜여 있는 것이 묘한 이질감을 자아냈다.

변화무쌍한 임상 현장을 이런 정형화된 서식과 단조로운 획들로 모두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공부하다 보니, 이 '가이드라인' 이라는 게 곧 임상의학 공부의 본질인 듯하다. 우리가 의과대학에서 치열하게 배우는 임상 지식은 결국 '1차 의료인'을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다. 호흡기에 대한 각론을 열심히 설명하시다가도 '이런 증상이 있을 때 호전되지 않으면 어떤 질환을 의심하고 3차 병원으로 보낼 수 있는 정도의 지식은 있어야 한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이 사실이 새삼 와닿곤 한다.

여타 학문이 기초 개념을 발판 삼아 새로운 응용과 혁신을 추구한다면, 일차 진료 현장을 지키기 위한 의학 공부는 창의성보다는 오히려 '표준화된' 사고를 요구한다. 내과의사의 진료 능력은 어느정도 임상 경험의 양에 비례할 것이다. 그러나 풍부한 경험이 쌓이기 전의 신규 의사라고 해서 진료실에서 터무니없는 진단을 내려서는 안되는 노릇이다.

가이드라인은 바로 이 지점에서 힘을 발휘한다. 누구에게 진료를 받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최소 수준 이상의 안전하고 정확한 진료 결과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가이드라인의 모든 항목에는 '근거 수준'과 '권고 등급'이 복잡하게 적혀 있었다. 근거 수준이 수많은 논문과 연구를 바탕으로 특정 치료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확신하는 지표라면, 권고 등급은 이 치료를 시행했을 때 환자가 얻을 이득이 위해보다 크다는 것을 보증하는 척도다.

나는 이 기계적인 알고리즘에서 역설적이게도 의학의 친절함을 읽을 수 있었다. 초보 의사가 현장에서 마주할 실수를 방지하는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면서도, 동시에 환자의 상황에 따른 판단의 자율성을 완전히 닫아두지 않는다. 새내기 의사가 자신만의 임상적 기준과 직관을 확립할 때까지, 앞서간 선배들이 미리 닦아놓은 길을 안내해 주는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점은 임상 의학이 구사하는 특유의 '말투'다. 시험문제를 해설하시는 교수님도, 의사국가시험 대비 문제집에서도 유독 "이러이러한 약제의 사용을 고려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처치가 중요한 치료가 되겠습니다"라며 '-겠습니다'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한다. 일상생활에서는 잘 쓰이지 않고, 고작해야 일기예보의 기상캐스터 멘트에서나 들을 법한 어조가 글로 적혀 있는 것이 처음에는 상당히 낯설었다.

언어는 사소한 표현 하나에도 미묘한 정서와 문화를 담아낸다. 이런 표현을 흔히 사용하게 된 배경에는 분명 임상 환경의 특성이 녹아 있을 것이다. 혹자에게는 무엇 하나 명쾌하게 말해주지 않는 이런 태도가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실제로도 이런 유보적인 태도는 의료 현장에서 자칫하면 오롯이 떠안게 될지 모르는 책임 소지나 법적 분쟁을 피하기 위해 방어적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 뿐일까?

우리말에서 선어말어미 '-겠-' 은 미래의 일이나 주체의 의지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문맥에 따라 '추측' 내지는 '가능성'의 의미를 내포한다. 임상 의학은 분명 과학의 산물이지만, 'A는 B이다'라는 명쾌한 명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데이터를 바탕으로 불확실한 상황을 예측하여 최선의 선택을 내리는 과정이다.

앞서 말한 가이드라인 또한 절대적이지 않다. 이는 독립적 판단의 여지가 있다는 뜻일 뿐 아니라, 가이드라인 자체도 시대와 연구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 이 때문에 수업시간에도 교수님들이 구버전과 최근 버전의 가이드라인을 동시에 가르치시기도 하고, '여러분이 국시를 칠 때쯤엔 또 기준이 바뀔 수 있으니 꼭 다시 확인해보라'고 당부하시기도 한다.

어제의 정답이 오늘의 오답이 되기도 하는 세계. 새로운 연구 결과에 따라 기존 치료법의 유효성이 뒤집히고, 전에 없던 새로운 치료가 나오기도 하며, 효과가 입증된 치료법이라도 사람마다 반응이 제각각인 곳. 이렇게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임상 현장에서 자신의 소신과 책임감으로 환자를 이끌어가야 하는 의사의 무거운 과제가 이 사소한 말투 속에 묻어난다.

나아가, 이런 조심스러운 표현이 치료의 당사자인 환자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심리적 공간을 열어주는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결국 이 말투는 현실적인 두려움의 발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영역 앞에서의 겸손함이자, 환자를 향한 배려를 품고 있는 의학의 문법인 것이다.

모든 기술과 학문이 궁극적으로는 인류를 위한 것이겠지만, 의학은 특히나 인간의 삶과 존재 자체를 향한다. 그래서 의학은 친절'해야 하는' 다소 독특한 학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사소한 표현법에 지나지 않지만, 의학의 세계에 갓 첫발을 내디딘 새내기의 눈에 비친 임상 의학의 언어는 이렇게나 친절하고도 사려 깊은 구석이 있었다. 빼곡한 글씨도, 복잡한 도식도, 결국 사람을 향해 흐르고 있다는 것이 임상의학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댓글
새로고침
  • 최신순
  • 추천순
댓글운영규칙
댓글운영규칙
댓글은 로그인 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으며 전체 아이디가 노출되지 않습니다.
ex) medi****** 아이디 앞 네자리 표기 이외 * 처리
댓글 삭제기준 다음의 경우 사전 통보없이 삭제하고 아이디 이용정지 또는 영구 가입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1. 저작권・인격권 등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
2. 상용프로그램의 등록과 게재, 배포를 안내하는 게시물
3. 타인 또는 제3자의 저작권 및 기타 권리를 침해한 내용을 담은 게시물
4. 욕설 및 비방, 음란성 댓글
더보기
이메일 무단수집 거부
메디칼타임즈 홈페이지에 게시된 이메일 주소가 전자우편 수집 프로그램이나
그 밖의 기술적 방법을 이용하여 무단으로 수집되는 것을 거부하며,
이를 위반할 시에는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형사 처벌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