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상실습 시작을 앞두고 이사를 했다.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 꼬박 5년을 안암골에서만 살다 거의 처음으로 서울 서남부권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잠을 자는 장소만 구로로 바뀌었을 뿐, 내 머리는 아직 내 자리를 학교 앞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이사한 지 한 달여가 넘었지만, 아직도 습관적으로 서울역에서는 시청 방향 열차를 타고, 6호선으로 환승하는 합정에서는 자꾸 망원역으로 발길이 간다. 김유신은 말 목이라도 자를 수 있었다지만 난 지도 앱을 켜고 걸으면서도 매일 길을 실수하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
실습 첫 주가 끝나고 동기들과 안암에서 간단하게 맥주 한 잔을 했다. 처음 해보는 임상실습이라 온몸에 들어갔던 긴장이 그제서야 풀렸는지 평소 잘 먹지도 않는 맥주가 술술 들어갔다. 그러다 자연스레 친구가 내게 막차 시간을 물어왔다.
맞다. 여긴 이제 더 이상 내 집이 아니고, 난 이제 안암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셔도 되는 몸이 아니었다. 심야할증 택시비로 5만 원을 낼 게 아니라면 2호선 막차가 끝나기 전, 어떻게든 돌아가야 했다. 얼굴이 발개진 채로 비틀거리는 사람들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넘은 게 얼마만 인지.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내 자리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것 같다. 왜, 그 책상 중간에 줄을 찍 그어두고 '여기는 내 구역이니까 넘어오면 안 돼' 하는 초등학생, 그게 나였다. 내 필통, 내 책상서랍, 내 자리, 내 사물함… 내 구역은 전부 나에 맞춰 커스텀하고 누가 침범하기라도 하면 표정에 티는 안 내려고 노력했지만, 뒤에서는 닿은 자리들을 쓸고 닦으며 침입자의 흔적을 지우려 애썼다.
그런 내게 병원 학생방은 마치 남의 집에 온 것만 같은 불편함을 준다. 정해진 자리가 없고, 적당히 눈치껏 빈자리에서 EMR에 접속해 할 일을 하는 공간이라니. 켜자마자 자동 로그인되어 용도별로 분류된 3개의 크롬 프로필이 나를 반기는 내 노트북과 달리, 이제 내 눈앞에는 수많은 게스트 프로필과 정돈되지 않은 문서함이 놓여 있다. 내 기기가 아닌 위치에서 로그인하거나, 작업을 한 경우 그 로그인 흔적과 문서 등을 모두 깔끔하게 지우고 나와야 속이 시원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약간…아주 약간 고문이다.
실습할 때 매일같이 들고 다녀야지 하고 야심차게 구매한 1L짜리 스탠리 텀블러도 회진이며 의국이며 계속 이동하는 입장에서는 사치고, 노트북조차도 이따금씩 팔에 끼고 직원식당 배식을 받을 때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학생방이 어색하다가도, 이럴 때면 또 병원에서 유일하게 '내 자리'라고 할 만한 사물함이 그리워진다. 사실 그나마 마음 붙일 공간인 자취방마저도 6개월 뒤에는 이사해야 하기에 내 마음대로 꾸미고픈 마음을 꾹꾹 누르고 있다.
어쩌면 내가 불편한 건 책상이 아니라, 내가 속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사라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따금씩 자기소개를 할 때 마땅히 할 말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껏 의대에서는 흔히 동아리 이름을 빌려 날 소개하곤 했다. 굳이 나의 특성에 대해 중언부언하지 않아도 댄스 동아리와 교지편집부 소속이라 말하면 상대방이 동아리의 성격이나 속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대중하여 나를 어떤 사람이라 가늠하는 게 꽤나 편리했다.
오늘 오랜만에 자기소개를 해보란 요청을 받았는데, 으레 그렇듯 '춤추고 글 쓰는 것 좋아합니다'라고 말하다 춤을 마지막으로 춘 게 1년이 넘었으며, 더 이상 교지에 글을 기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난 더 이상 댄스동아리 부원이나, 편집부 편집장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럼 나는 이제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빠르게 자리를 만들고 싶어 조급한 마음이 든다. 가깝게는 PHIS 시스템 아이디를 저장할 수 있는 PC와 텀블러를 놓을 수 있는 자리가 있는 레지던트 선생님이 부럽고(투정인 것을 잘 안다), 더 나아가서는 그냥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부럽다.
고민에 대한 해답은 찾지 못한 채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신기하게도, 그 부유하는 느낌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여전히 학생방 컴퓨터는 어지럽게 놓여 있지만 이젠 어떤 컴퓨터를 써야 가장 빠르게 구동이 되고, 프린터와 사물함 사이를 오가는 동선이 가장 효율적인지를 안다. 텀블러는 약간 아쉽게 되었지만, 그때그때 버릴 수 있는 500ml 생수병을 아침마다 들고 집을 나선다. 생각해보니 마침 설거지하기 귀찮기도 했다.
회진 돌 때는 종이로 뽑은 차트에 열심히 말씀을 받아적고 이따금씩 짬이 날 때 타이핑해 정리하곤 한다. 조금 더 내 자신을 깊게 소개하는 자기소개는 여전히 고민되지만, 그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나를 간결하고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PK 1조 강지민입니다'라는 문장이 생겼다.
'다 울었니? 이제 그럼 할 일을 하자'는 오은영 선생님의 유명한 밈이 있다. 필자가 굉장히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다.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내내 불평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냥 그때그때 주어지는 일을 하다보면 시간은 흐르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듯 나도 그럭저럭 익숙해져 간다. 때로는 확실히 뿌리내린 내가 그리운 날도 있겠지만 글쎄, 개구리밥처럼 온몸이 물에 둥둥 떠 있는 것도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다. 조금 더 유연함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뭐.
아직도 내 영역을 확실히 갖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 욕심은 몇 년 뒤로 살짝 미뤄두고 오늘도 오늘의 일정을 소화한다. 그렇게, 자리가 없는 것도 하나의 자리가 아닐까, 생각하는 요즈음이다.

- 최신순
- 추천순
댓글운영규칙ex) medi****** 아이디 앞 네자리 표기 이외 * 처리
댓글 삭제기준 다음의 경우 사전 통보없이 삭제하고 아이디 이용정지 또는 영구 가입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1. 저작권・인격권 등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
2. 상용프로그램의 등록과 게재, 배포를 안내하는 게시물
3. 타인 또는 제3자의 저작권 및 기타 권리를 침해한 내용을 담은 게시물
4. 욕설 및 비방, 음란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