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사람에게 닿고 싶다.
의과대학 입학 4년 차에 내가 내린 결론이자, 창업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이유였다. 환자 한 명 한 명과 마주하는 일도 분명 의미 있지만, 진료실 너머 사회 전체에 파장을 일으키고 싶은 갈망이 있었다.
의료를 통해 더 넓게, 더 깊숙이 세상에 스며들고 싶다는 생각이 점차 커져 갈 때, 반짝이는 단어들을 찾았다. AI, 디지털 헬스케어, 빅데이터 — 기술이 의료와 만났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은 무궁무진했고, 상상하자니 가슴이 뛰었다.
물론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 반짝이는 것들 대부분이 사실은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것들이라는 걸. 가까워진 듯하면 멀어지고, 붙잡으려 하면 막상 거기에 없는 상황이 부지기수라는 걸. 하지만 그땐 알지 못했기에, 그 잠재력에 매료된 나는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에 발을 들이며 관심사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회사도 다니고, 직접 프로덕트도 기획하고 제작해 보며 부딪혔다. 그러다 올해 초, 부진한 기업들이 사업을 철수하듯, 나 역시 헬스케어 도메인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오늘 칼럼에서는 그런 내 중단과 방향 전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당연한 서비스가 만든 역설
한국 의료 시스템의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이 분야를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한 지 몇 개월이 지나서였다. 한국에서 의료는 '당연한' 서비스다. 우리나라에서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하루가 24시간이다'만큼이나 자명한 명제다. 전 국민이 누리는 원활한 의료 접근성은 분명 자랑스러운 성과이고, 현대 국가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사회 안전망이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은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에서 난제이자 큰 제약으로 작동하고 있다.
OECD 의료 이용률 최상위권과 치료 중심의 의료 시스템. 이는 미래 의료의 기치로 손꼽히는 4P(Preventive, Predictive, Personalized, Participatory) 중 첫 번째 P인 예방(Preventive) 의료와 대치되는 우리나라의 의료 이용 행태를 보여준다. 이렇듯 구조적 한계와 치료 중심의 사고방식이 깊이 뿌리내린 환경에서는, 예방 중심의 서비스 모델이 성공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B2C 디지털 헬스케어 서비스가 '예방과 관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분명한 제약이다.
게다가 낮은 진료비와 높은 의료 접근성은 사용자 설득의 난도를 배가시킨다. 치료에 비해 예방과 관리는 장기간에 걸쳐 비용을 투자해야 하며, 그 효과를 가시적으로 확인하거나 체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혈당 관리, 저속 노화 등 특정 키워드로 건강관리에 대한 관심이 증대한 것은 반가운 변화지만, 이를 위해 장기적으로 비용을 지출하는 것에 대한 소비자 저항은 여전히 크다.
공급자와 수요자 사이의 이해 불일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서비스 자체의 설득력 부족에 있었다. 대부분의 디지털 헬스케어 제품은 내게 공통적인 생각을 들게 했다. '사용하면 분명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굳이 돈을 지불하고 싶지는 않다.' 심지어 무료로 제공된다 해도, 지속적으로 사용할 만큼 매력적이거나 효과적인 서비스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특히 의료인이 주도하는 프로젝트에서 이러한 문제가 더욱 두드러진다. 공급자 중심적 사고가 시장 검증 과정을 생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의료인은 자신의 임상 경험과 통찰을 바탕으로 제품을 기획하고 곧바로 제작에 착수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의 '꼭 필요할 것이다'라는 뜨거운 확신은, 사용자 입장의 '필요하니 비용을 지불해야지' 하는 차가운 판단과 쉽게 일치하지 않는다. 둘 사이엔 보통 생각보다 훨씬 큰 간극이 존재한다. 이러한 불일치는 자생 가능한 시장성을 보장하지 못하고, 기술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하는 제품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는다.
새로운 길
이런 어려운 문제 조건에도 불구하고, 분명 이 미션을 해결해 낼 사람은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 난제를 타개할 만한 기발한 아이디어가 내게는 없었고, 산업에 대한 흥미도 전과 같지 않았다. 결국 나는 지금 당장은 이 분야가 나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나의 길이 벽에 부딪혔다면 곧장 다른 길로. 그렇게 나는 의료 밖의 다른 서비스 분야를 탐색하게 되었다.
IT 창업 동아리에 들어간 건 그 과정의 첫걸음이었다. 거기서 나는 내가 별로 관심 없다고 착각했던 것들과 마주했다. 생산성 도구, 플랫폼, 커머스, 인슈어테크 등 IT 산업의 다른 영역들을 살펴보니, 디지털 헬스케어와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무엇보다 명쾌했다. 사회재적 성격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서비스 도메인에서는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시장 논리가 훨씬 깔끔하게 작동했다.
그 점이 매력으로 다가와, 현재는 여러 분야의 서비스를 접하고 즐겁게 흡수하고 있다. 의료 말고도 이렇게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재미가 있고, 사람들의 일상에 녹아 있는 다양한 영역의 산업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는 일이 내게는 꽤나 흥미진진하다.
초심자가 되어 얻은 성장의 기회
'의대생'이라는 간판만으로 실체 없는 도메인 전문성이 어필되었던 이전과 달리, 홈그라운드를 벗어난 나는 이제 아무것도 모르는 초심자의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좋다. 아니, 이쪽이 더 좋다.
이전까지 나는, 많은 의대생들이 흔히 빠지는 '도메인 전문성을 갖췄다는 착각'에서 자유롭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생각 자체가 착각이었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서비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근거 없는 자신감과 낙관주의에 기대어 곧바로 기능 기획에 들어갔다. '이건 분명히 필요할 거야'라는 주관적 판단과, 내 입맛에 맞는 자료들을 근거 삼아 확신을 쌓았다. 방향과 결론을 미리 정해두고, 그에 맞는 이유를 끼워 맞춘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정말로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인가?'라는 질문을 출발점으로 삼고, 내 아이디어가 실제로 시장에서 검증 가능한 구조인지부터 차근차근 따져 본다. 그것은 이 분야가 무엇보다 고객 경험을 중시하고 강조하는 덕분이다.
이 과정을 지나며 자꾸 떠오르는 문장이 하나 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본래는 날카롭고 파괴적인 메시지를 가진 문장이지만, 나는 그것을 조금 다르게 읽어 본다. 나를 다시 써내려가기 위한 파괴. 재조립을 위한 해체. 그를 위해 나는 익숙한 것들을 의도적으로 흔들고, 경계를 파괴해 본다. 편안했던 소속감, 너무 익숙한 길, 의심해 본 적 없는 지식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일찍 정해놓은 미래의 대본 같은 것들에 맞서서.
연고 없는 길을 가는 건 여전히 낯설고, 불확실성을 선택하는 일은 언제나 두렵다. 하지만 그 두려움 속에는 어떤 선명한 짜릿함이 있다. 진짜 성장은 언제나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법이고, 안전한 곳에만 머무는 삶은 결코 나를 더 크게 만들 수 없으니까. 사뭇 비장하게 외쳐 본다. Bye bye, my comfort z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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