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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레이, 아랍 헬스 2022·AEEDC 2022 참가

메디칼타임즈=이인복 기자제노레이(대표 박병욱)는 중동 최대 종합 의료기기 전시회인 아랍 헬스(Arab Health) 2022와 중동 최대 치과 의료기기 전시회인 AEEDC 2022에 참가한다고 26일 밝혔다.제노레이는 아랍 헬스에서  유방진단장비 헤스티아(HESTIA)와 구강내 엑스선 촬영장치 디바스(DVAS)를 세계 시장에 선보일 예정이다.헤스티아는 다양한 각도에서 유방을 촬영한뒤 컴퓨터가 재구성해 3차원 이미지를 구현하는 단층영상합성기능(Tomosynthesis)을 탑재해 기존 제품보다 더욱 정확한 유방 진단이 가능하다. 치과용 장비인 디바스는 환자의 구강 일부를 촬영하는 장비로 의자나 벽에 부착하여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이번 전시회에서 제노레이는 신제품들과 더불어 제노레이를 대표하는 이동형 엑스선 투시촬영장치인 OSCAR 15와 치과용 CT인 PAPAYA 3D Premium도 함께 전시한다.아랍 헬스에 이어 제노레이가 참가하는 AEEDC는 중동 최대 치과 의료기기 전시회로 오는 2월 1일부터 3일까지 3일간 진행된다. 이 자리에서 제노레이는 PAPAYA 3D Premium, DVAS, 그리고 휴대용 장비인 PORT-X 시리즈를 전면에 내세울 계획이다.제노레이 관계자는 "헤스티아와 디바스 등 신제품에 대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며 "올해 두 제품이 세계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해 회사의 매출 성장에 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2022-01-26 12:29:40의료기기·AI

동·서양을 연결하는 터키로…소아시아 신앙의 중심 에페소스(2)

메디칼타임즈=양기화소아시아 신앙의 중심 에페소스(2) 한낮의 따가운 햇볕을 피하기 위하여 한 뼘의 그늘을 찾는 일에 관심이 더 간다. 그러다보니 보아야 할 것에 가까이 가는 일이 소홀해진다. 가이드를 따라가는 구경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볼거리를 전체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마치 네비게이션을 따라가면 쉽게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지만,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기억에 남지 않는 것과 같다. 로마 목욕탕(상), 신성한 길(하). 우리는 에페소스의 북쪽으로 입장하였는데, 도리아식이던 북문은 폐허로 남았다고 한다. 에페소스 유적에 들어서면서 세 개의 아치만 남은 무너진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로마 목욕탕이다. 로마 목욕탕을 지나 국립 아고라가 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인 돌덩이들이 늘어 서 있고, 그 사이에 흩어져 있는 나무그늘에 의지하여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다. 야외음악당인 오데이온(Odeion)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에페소스 구경을 시작했다. 국립 아고라와 오데이온 사이에는 ‘신성한 길(Hiera hodos)이 나 있다. 길 양쪽으로 이오니아식 기둥이 늘어서 있다. 지금은 1단이나 2단만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대단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아르테미스축제 때 아르테미스 신상을 모시고 행진을 한 길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밖에서 본 오데이온(상), 안에서 본 오데이온(하). 2세기 무렵 에페소스의 부유한 시민 푸불리우스 베디우스 안토니우스(Publius Vedius Antonius)와 그의 아내 플라비아 파이아나(Flavia paiana)가 지은 오데이온에서는 각종 공연이나 귀족들의 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1500명이 동시에 입장할 수 있는 오데이온의 무대는 2층으로 되어 있었고, 기둥으로 장식되었다. 오케스트라석보다 1m 정도 밖에 높지 않은 지휘대(podium)는 좁았는데, 무대에서 지휘대로 통하는 3개의 문이 있었다. 오데이온은 상황에 따라서 나무로 된 지붕으로 덮을 수 있었다. 프리타네이온(상), 유적조사팀으로 추정되는 이들(하). 오데이온을 지나 서 있는 두 개의 기둥은 최고위직 사람들의 집합소 프리타네이온(Prytaneion)의 유적이다. 프리타네이온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지었던 것인데, 이곳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순수하고 성스러운 불을 모셨다고 한다. 흩어진 돌더미 사이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은 혹시 유적복원을 위하여 조사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신성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에는 기둥들이 이어지지만 왼쪽으로는 축대가 시작되는 내리막길로 연결된다. 축대가 끝난 곳에는 길 양쪽으로 조각이 새겨진 돌이 있다는데, 앞서가는 일행을 뒤쫓아 가는데 정신이 팔려 놓쳤다. 한쪽에는 여행자를 보호하는 신 ‘헤르메스’가 어린 양과 같이 있는 모습과 그의 상징, 발이 세 개 달린 솥을 휘감고 있는 뱀을 새겼다. 다른 쪽에는 아폴론이 숫양과 함께 있는 모습과 지구의 배꼽인 바위 그리고 발이 세 개인 솥을 새겼다. 두 개의 돌은 구역을 가르는 표시였다. 우리가 지나온 구역은 고위관리들이 업무를 보는 프리타네이온, 회의장소인 오데이온, 도시의 영웅을 모시는 사당, 신성한 불을 지키는 헤스티아 신전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한마디로 에페소스를 움직이는 중요한 장소였던 것이다. 에페소스 사람들은 이 구역을 ‘행정지구’라고 불렀다. 멤미우스 기념비. 이곳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흩어진 돌더미 사이로 조각상이 몇 개 붙어 있는 건물의 잔해를 볼 수 있다. 로마 공화정 말기 독재관을 지낸 술라의 손자 멤미우스(Memmius)에게 바친 기념비이다. 헬레니즘양식으로 된 이 기념비는 기원전 1세기 중엽에 세워졌다. 참고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Lucius Cornelius Sulla Felix; 기원전 138 - 78)는 6개월로 되어 있던 독재관의 임기를 없앴다. 공화정 로마에서 개인이 처음으로 절대 권력을 차지한 사례로, 뒷날 카이사르가 이를 본받아 공화정이 무너지고 제정으로 이행하게 되는 길을 터놓은 셈이다.(1) 헤라클레스문(좌), 니케여신상(우). 멤미우스 기념비를 지나면 두 개의 돌기둥이 길을 가로막는다. 기둥에 헤라클레스가 새겨져 있어 ‘헤라클레스문’이라고 부르는데, 기둥 아래에 세 개의 계단을 설치하여 말이나 수레가 지나갈 수 없도록 하였다. 일종의 하마비(下馬碑)인 셈이다. 헤라클레스문에 못 미쳐 왼쪽, 그러니까 멤미우스 기념비 건너편에 있는 널찍한 폐허는 도미티아누스광장이고, 헤라클레스문을 장식했던 승리의 여신 니케의 대리석판이 있다. 가이드가 헤라클레스문과 니케여신상을 중점적으로 설명하고는 지나치는 바람에 이 부근에 몰려 있는 칼키디움이나 에페소스에 물을 공급하는 수로를 건설한 섹스틸리오스 폴리오를 기리는 기념비, 도미티아누스 신전과 저수조 등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트라이아누스 저수조. 헤라클레스문을 조금 내려가면 트라이아누스(Traianus) 저수조가 있다. 기원전 2세기 무렵 세워진 이 저수조는 2층으로 된 건물이었는데 많은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고 한다. 에페소스의 곳곳에 저수시설을 만든 것은 로마시대에 대중문화로 자리 잡고 있던 목욕탕에서 사용할 물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으리라. 로마 사람들은 그 옛날 이미 개인위생을 철저하게 하고, 상하수도 체계를 분리함으로써 전염병의 확산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북문 가까이에서 만난 로마목욕탕을 비롯하여 에페소스에는 여러 개의 목욕탕이 있었다. 하드리아누스신전 뒤쪽에 붙어 있는 스콜라스티키아 목욕탕은 남녀공용으로, 시간을 달리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탈의실을 비롯하여 온탕, 냉탕, 열탕, 증기탕 등 요즈음 우리나라의 목욕탕에 가면 볼 수 있는 모든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 목욕탕에는 일종의 수세식 화장실도 있었는데 벽을 따라 좌변기가 늘어서 있고, 좌변기 밑에는 도랑이 있어 물이 흘러가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 신전. 하드리아누스황제에게 봉헌된 신전은 셀수스 박물관과 함께 에페소스에 남아 있는 건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터키의 20리라 지폐에 인쇄되어 있을 정도이다. 푸불리우스 퀸틸리우스(Publius Quintilius)에 의하여 117년부터 119년 사이에 건축된 원래의 신전은 4세기 무렵 지진으로 무너졌고, 지금 남아 있는 신전은 그 이후에 다시 세운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신전이라기보다는 기념비에 가까운 것으로 하드리아누스황제, 아르테미스여신 그리고 에페소스의 시민들에게 봉헌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2) 신전은 문간방(pronaos)과 작은 주실로 구성되었다. 문간방에는 코린토 양식의 기둥으로 받쳐진 두 개의 아치가 세워져 있다. 첫 번째 아치에는 도시의 수호여신 티케(Tyche)의 흉상이 가운데 새겨졌고, 두 번째 아치에는 아칸서스 잎으로 둘러싸인 메두사의 반신상이 새겨졌다. 사실 이 건물이 아르테미스여신에게 봉헌되었다고 하면 첫 번째 아치에 아르테미스 여신을 새겼어야 할 것이다. 가이드는 이 상이 아르테미스여신상이라고 설명했는데, 아마도 티케라는 이름 자체가 도시의 수호여신을 말하는 것이라면 틀린 것도 아닐 것 같다. 메두사를 새긴 이유를 악귀와 불행을 쫓아주는 부적의 의미였다는 설명도 있지만, 우리 가이드는 미의 여신의 안내를 받아 신전에 입장하면서 뻣뻣하게 고개를 들 수 없도록 하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문간방의 아치 옆으로는 부조가 새겨진 네 개의 패널이 있다. 처음 세 개의 패널은 신화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에페수스를 건설한 안드로니코스가 맷돼지를 뒤쫒는 장면,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 등 그리스 사람인과 아마존의 여전사 사이의 전투가 새겨졌다. 3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4세기 무렵 재건축될 때 여기에 자리한 것이다. 네 번째 패널은 4세기 무렵 제작된 것으로 이교를 금한 테오도시우스황제와 가족들이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여신을 비롯하여, 아테타, 아폴로, 안드로클로스, 헤라클레스 등 그리스신들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새겼다. 이런 이유로 테오도시우스황제가 이 신전을 재건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참고자료 (1) 나무위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2) Temple of Hadrian, Ephesus. http://www.sacred-destinations.com/turkey/ephesus-temple-of-hadrian
2015-11-23 05:10:00오피니언

아내와 함께 가는 해외여행[40]

메디칼타임즈=양기화스페인 미술애호가들의 자존심, 프라도 미술관(2) 프라도가 대표작들을 소장하고 있는 벨라스케스와 고야는 많은 점에서 대비가 된다. 스페인의 황금시대였던 17세기를 살았던 벨라스케스와 달리 고야가 활동했던 18세기 후반의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식민지배를 받는 등 사회적으로 어수선했다. 세비야출신으로 천재적 재능을 일찍 꽃피운 벨라스케스가 24살에 궁정화가로 발탁되어 펠리페4세의 총애를 받으며 작품활동을 했던 것과는 달리, 아라곤의 푸엔데토도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고야는 인정받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수없는 좌절과 실패를 겪어야 했다. 사라고사에서 프란시스코 바예우라는 스승을 만나 화가 수업을 받고 이탈리아 여행을 상품으로 주는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 그림을 여러 번 보냈지만, 선정되지 못하고 결국은 자비로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다. 요즈음으로 치면 자비로 이탈리아 그림연수를 다녀온 셈이다. 프라도 미술관 서쪽에 서 있는 고야의 동상. 20대 후반에서야 태피스트리용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궁정에 들어간 고야는 당시의 지식인이나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초상화가로서 입지를 굳혀나갔다. 그의 초상화는 인물의 특징이나 성품을 잘 드러낸다는 평판을 얻었고 결국에는 왕실의 초상화가가 되었다. 1808년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을 침략하여 호세 보나파트르가 스페인 왕이 되었을 때도 고야는 왕실화가였는데 프랑스의 자유주의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814년 독립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페르난도7세가 다시 왕위에 올랐을 때 고야는 운 좋게도 궁정화가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고야는 카를로스 3세, 카를로스 4세, 프랑스의 호세 보나파트르, 그리고 페르난도7세에 이르기까지 4명의 왕을 겪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고야의 말년은 그리 행복하지는 못했다. 1819년 마드리드 외곽에 산 집을 ‘귀머거리의 집’이라고 불렀는데, 46살이 되던 해 심하게 앓은 열병으로 청력을 잃었던 그가 친프랑스파로 간주되어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 고립되어있던 시기였다. 그는 ‘귀머거리의 집’의 회칠한 벽에 직접 유화물감을 칠해 모두 열네 점의 그림을 남겼는데, 검은색을 주조로 하였기 때문에 ‘검은 그림’이라고 부른다. 적장의 목을 자르는 '유딧', 불길한 느낌을 주는 '마녀의 연회', 양발을 땅에 묻은 채 죽을 때까지 싸우는 '곤봉으로 서로 때리는 사람들',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인간의 생사를 희롱하는 '운명의 마녀들', 지금 당장이라도 모래 속에 파묻혀 버릴 것 같은 모습의 '개', 그리고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등이 있다. 기존의 회화문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 이 그림들은 ‘귀머거리의 집’이 철거되면서 소유주가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하려 했지만 거절당하면서 프라도로 오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 무렵 고야가 그린 그림들은 주문을 받지 않고 그린 것들로 스스로의 의지와 예술적 영감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그린 것들로 현대미술과 맥이 통하는 점이라고 한다. ‘검은 그림’ 연작 가운데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가 관람객들의 시선을 끈다. 로마신화의 농경의 신 사투르누스는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와 동일하다.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하늘의 남신인 우라노스와 땅의 여신인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12명의 티탄족 가운데 막내이며 지도자인 남신이다. 우라노스는 자식들을 지옥인 타르타로스에 감금하였는데, 결국은 크로노스가 어머니 가이아와 함께 연대하여 우라노스를 몰아내고 세상의 왕이 된다. 하지만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크로노스에게 자신의 자식에게 폐위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크로노스는 아내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의 5명의 자녀를 낳는 족족 삼켰는데, 제우스를 낳게 된 레아는 가이아의 도움을 받아 제우스를 구하게 된다. 결국 제우스가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이미 삼킨 형제들을 구한다는 것이 신화의 내용이다.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좌:고야 作) (클릭시 관련 페이지 이동)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우:루벤스 作) (클릭시 관련 페이지 이동) 그런데 프라도 미술관에는 루벤스의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도 있어 두 작품을 비교해볼 수 있다. 루벤스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투르누스는 검은 구름에 올라탄 백발의 노인이다. 왼손으로 안은 아이의 가슴에 막 입을 대고 놀란 아이는 몸을 제키면서 바둥대는 모습이다. 사투르누스의 전신이 안정되어 있는 모습과 아이의 신체가 손상되어 있지 않은 탓인지 그렇게 끔찍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반면에 고야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투르누스는 아이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머리부터 게걸스럽게 씹어 삼키고 있다. 없어진 아이의 머리, 손가락 사이를 흐르는 피는 아이의 생명이 이미 끊어진 것을 암시한다. 이렇게 아이를 먹어치웠다면 나중에 제우스가 사투르누스를 토하게 만들었대도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싶다. 나카노 교코는 '무서운 그림'에서 두 그림의 차이를 사투르누스의 눈에서 볼 수 있다고 했다. 루벤스의 사투르누스는 ‘지적이고 노회하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비정함과 냉혹한 계산이 번득이는 지배자의 눈’을 가졌는데 반하여 고야의 사투르누스는 ‘축생도에 떨어진 자의 눈을 가지고 있어, 얼굴과 몸이 녹아 허물어지듯 머릿속, 정신까지도 무너져 버렸음이 튀어나온 눈에서 느껴진다.’라고 적었다. 고야에 이어 프라도 미술관의 하이라이트라고 하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펠리페4세의 가족)'를 보았다. 책에서만 보던 그림을 실물로 보는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스페인 미술관 산책'은 무려 9쪽을 할애하여 파격적으로 이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고 눙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수많은 화가, 시인, 소설가들에게 이야깃거리를 주었기 때문이란다. 피카소만해도 이 그림을 리메이크한 작품을 수도 없이 그렸는데,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최경화작가는 '시녀들(펠리페4세의 가족)'을 볼 때, 우선 5미터 정도 떨어져서 등장인물들을 꼼꼼히 살펴볼 것을 권한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졸고 있는 개를 빼놓고는 왠지 모르게 굳어 있는 듯이 보인다. 마치 ‘얼음 땡’에 걸린 것처럼 말이다. 조형진 가이드는 고야의 초기 작품까지 설명을 하고는 개인적으로 더 보고 싶은 작품을 볼 수 있도록 약 45분간의 자유시간을 주었다. 톨레도에서 예기치 않은 사고 때문에 지체한 것도 있었겠지만, 보고 싶은 작품은 많았고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처음 간 미술관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 보니 보고 싶은 작품이 어디에 걸려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시간여유가 있다면 처음부터 차근차근 보면 되겠지만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 골라서 보아야 한다. 다행히 프라도 미술관에서 준비해놓고 있는 우리말로 된 ‘미술관 안내’ 팜플릿을 보면서 거의 뛰다시피 했다. 폴 퀸네트가 말하듯 마치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 조깅을 하거나 루브르박물관 안을 롤러브레이드를 타고 달리듯 했다. “우리는 자식들에게 속독을 가르친다. 아이들이 셰익스피어 작품을 한나절에 다 읽기를 바란다. 대문호의 작품을 그렇게 읽는 것은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 조깅하는 것이나 루브르 박물관 안을 롤러브레이드를 타고 달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난 해 성탄절에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운보 김기창 화백의 작품점 ‘오, 홀리 나잇!(O, Holy Night!)’에서 예수의 일생에 관한 30점의 연작을 관람했던 기억 때문에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에 대한 이야기로 프라도 미술관 이야기를 정리한다. ‘수태고지’는 ‘그리스도의 책형’, ‘성모자’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유럽회화와 조각 작품들의 주제라고 한다. 누가복음서에 나오는 수태고지란 대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그대는 하느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는 위대하게 되고 더 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고하는 장면을 말한다. 수태고지를 그리는 데는 몇 가지 약속이 있다고 한다. 필수적인 세 가지 요소는 대천사 가브리엘,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성령의 비둘기이다. 그밖에 성모의 무구함을 상징하는 백합, 성모가 예루살렘의 신전에서 사제의 의복을 짰다는 전설을 뒷받침하는 실감개, 또는 털실을 담은 바구니, 펼쳐진 책장 등이 있다. 수태고지의 모습에는 세 단계가 있는데, 천사의 방문에 놀란 마리아, 수태하리라는 말을 듣고는 당혹스럽고 두려워하는 마리아, 그리고 마침내 수태한 사실을 수긍하는 마리아이다. 많은 화가들이 「수태고지」를 그렸지만,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는 정밀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한다.
2015-05-12 05:30:27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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