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공대에 미친 중국, 의대에 미친 한국'이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제목만큼이나 도발적이었고, 그 반향만큼이나 많은 질문을 던졌다.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을 떠나, 이 프로그램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의대 진학을 선호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미 수많은 인재가 의대로 쏠렸고, 그 경향은 좀처럼 꺾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경향을 되돌리기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면 답은 가까이에 있다. 바로 의사가 연구하는 것이다.
특별한 일은 아니다. 연구에 왕도는 없고, 의사도 그 길을 묵묵히 걸을 뿐이다. 다만, 연구를 한다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터널을 홀로 걷는 것과 같다. 제아무리 단단히 준비하고 입구에 들어서도 터널 반대편은 아득히 멀다.
일단 들어섰다면 뛰어가든 기어가든, 주저앉아 울다 다시 일어서든 계속 가야 한다. 내가 기대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잘못 들어선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워도 여전히 가야 한다. 돌아가기에는 이미 멀리 와버렸으니까.
물론, 의사가 연구를 할 때 갖는 이점도 있다. 길고 긴 터널 끝에 활짝 웃고 있을 환자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 진짜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학자는 기술을 보지만, 의사는 환자를 보고, 공학을 하는 의사는 둘 다 본다.
불편해하는 환자들의 어두운 밑그림에 약이나 수술 대신 연구라는 붓으로 희망을 덧칠할 수 있다. 환하게 빛나고 있을 터널 끝을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걸을 수 있다. 환자를 위해, 사회를 위해, 그리고 흔들리며 걷는 나를 위해.
연구하는 의사가 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터널 입구로 들어서기도 전부터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의예과 2년, 의학과 4년, 그리고 의사면허 취득이라는 허들을 넘어야 겨우 환자를 마주할 자격을 부여받는다.
그때부터 쌓아가는 환자와 함께한 이야기들이 임상경험이라는 이름의 소중한 자산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터널 반대편 끝에서 마주할 그들의 밝은 얼굴을 그려볼 수 있다. 아직 연구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의사과학자 선배들이 존경스럽다. 여럿이 걷는 길은 가볍지만, 홀로 걷는 길은 무겁다. 고된 시간을 지나 충분한 임상경험을 쌓아왔음에도 어두운 터널 앞에서 다시 시작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막막한 길을, 그것도 남들은 선택하지 않는 그 외로운 길로 들어선 그들을 떠올리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나는 언제쯤 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
호기롭게 시작한 길이었지만, 현실은 냉혹했고 마음은 크게 요동쳤다. 부모님의 걱정, 선배들의 충고, 친구들의 시선. 진심이라는 이름으로 건네진 조언들이 내면을 파도처럼 뒤흔들었지만, 연약한 나는 갈등 속에서도 발걸음을 옮겼다.
역설적으로, 비틀거렸기에 마음은 단단해졌고 결국 출발선에 다시 섰다. 터널 저편에서 웃고 있을 환자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이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어서.
그러나 다짐만으로는 부족했다. 동기들과 다른 속도로 걷는다는 사실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길이라는 현실이 어깨를 무겁게 했다. 생활과 미래를 저울질하는 계산기 속 숫자는 끊임없이 바뀌었고, 불안은 틈새마다 스며들었다. 그런데, 터널 속에서 문득 깨달았다. 이 길이 나 혼자 선택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등 뒤에서 희망이 반짝였다.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발자국을 좇는 내가 있듯, 미숙한 나를 쫓는 후배들이 있었다. 그들의 반짝이는 이야기를 들으며 한 번 더 다짐을 되새긴다. 그리고 외로운 발걸음 위에도 다시 빛이 내려앉는다. 한 걸음 더 내디딜 힘이 생긴다.
그리고 또 다른 희망이 눈앞에 다가왔다. 바로, 수년 전부터 시작된 '융합형 의사과학자 육성사업'이다. 임상이 아닌 다른 자연 과학 및 공학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고자 하는 의사들을 대상으로 정부에서 지원하는 사업이다.
의대생 시절부터 전공의, 박사과정, 박사 후 연구원 과정까지 단계별로 지원받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넉넉한 연구비뿐만 아니라 인건비까지 지원된다. 길고 험한 터널을 지나는 동안 배고프지 말라고, 목마르지 말라고 빵과 물을 건네는 사회의 손길이다.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됐다. 내가 선택한 이 길이, 결국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길과 만나고 있다는 것을. 나아가야 할 길이 막힌 것 같다면, 아예 다른 길을 찾거나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 가지 않은 길에 답이 있을 수 있다. 의대 편중이라는 사회 문제의 해답이 바로 의사들이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는 것에 있을 수 있다.
터널은 여전히 어둡고, 여전히 길다. 하지만 이제 혼자 걷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나와 같은 마음으로 걷고 있는 동료들이 있고, 우리를 응원하는 사회가 있다. 무엇보다 이 길은 환자를 위한 길이자, 우리 사회가 균형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래서 말하고 싶다.
'너, 내 동료가 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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