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정신 건강에 관한 단상
가톨릭관동대학교 본과 1학년 정지은

골프 연습장에 간 날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한 오후, 드라이빙 레인지 한쪽 구석에 젊은 여자 두 명이 가방에서 옷을 다섯 벌 넘게 꺼내 차례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자세를 바꿔가며 서로를 찍어주고, 그 자리에서 사진을 고르고 필터를 입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2일 차 느낌으로 가자. 리조트 골프 온 것처럼 보여야 해" "여기선 스윙 말고, 백스윙 직전이 더 예뻐" '#필드룩', '#힐링타임', '#골린이' 해시태그가 박힌 인스타그램 속 수많은 피드가 겹겹이 아른거렸다.
며칠 뒤, 퇴근 시간 무렵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앞 도로에서 차 한 대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옆 차의 중년 남성이 문을 열고 나와 앞차 운전자에게 소리쳤다. "왜 끼어들어? 당신이 나보다 잘났어?” 그는 창문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고, 앞차 운전자는 아무 말 없이 창문을 닫았다.
그날 밤, 며칠간 있었던 일들을 조용히 곱씹으며 나는 묘한 허탈감에 잠겼다. 누군가는 자기 자신이 아닌 모습을 애써 꾸미고, 또 누군가는 타인을 향해 지나치게 날을 세운다. 전혀 다른 장면이었지만, 그 안에는 묘한 공허와 닳아버린 피로가 스며 있었다.
요즘 나는 자주 이런 순간들을 목격한다. 모두가 다 조금씩 불안하고, 조금씩 무너져 있고, 동시에 이를 부정하며 애써 괜찮은 척하는 모습들. 타인의 성공에는 묘한 질투심을 느끼면서도, 자신은 로또에 당첨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현대인의 정신 상태는 마치 투명한 금이 간 유리처럼, 멀쩡해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와르르 깨져버릴 듯 위태롭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것일까. 더 나아가, 우리는 왜 이토록 '정신의 건강'에 무관심해졌을까?
마음도 병들 수 있다는 것
우리는 몸의 고장에는 민감하면서도 마음의 이상에는 유독 무심하다. 감기에 걸리면 약을 먹고, 피로가 쌓이면 주저 없이 병원을 찾는다. 하지만 마음이 무너질 때는 다르다. "그 정도는 누구나 겪는 일이지”,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 같은 말로 대충 덮어버린다. 정작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고통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냥 그런 날이라고 치부하며 지나가는 일이 많다.
하지만 마음도 병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의대 수업 시간, 우리는 수많은 질환의 기전을 배우고 치료법을 외운다. 그중 우울증은 단순한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뇌 속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이 무너지는 생물학적 질환이며, 불안장애는 공포 반응을 조절하는 편도체와 전전두엽의 기능 이상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배운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조차도 감정이 무거워질 때는 무력해지고는 한다.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는 날이면 먼저 자신을 다그치게 되는데, 나 역시 그렇다. "이 정도로 힘들면 안 되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난 게 없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고, 감정을 외면한 채 하루를 마무리한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저 말없이 쌓여 버린다.
건강한 정신이란 '괜찮지 않은 나'를 받아들이는 힘
세계보건기구(WHO)는 정신 건강을 "삶의 스트레스를 건설적으로 감당하고, 생산적으로 일하며,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상태”라 정의한다. 나는 여기에 한 줄을 덧붙이고 싶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상태'라고.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자신을 억누르지 않는다. 기쁨은 솔직하게 누리고, 불안이나 질투도 들여다보며 그 감정의 시작점을 되묻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질투가 일어날 때는 "왜 내가 저 사람을 시기하고 있지?”, 불안할 때는 "내가 무엇을 잃게 될까 봐 두려운 걸까?” 그렇게 솔직하게 묻고, 그렇게 천천히 해석해 간다.
그래서 요즘 나는 감정을 기록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마음속 깊은 감정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려 한다. 하루의 감정 곡선을 돌아보며 그 안에 쌓인 생각들을 적고는 한다.
처음엔 서툴고 막막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굳어 있던 마음이 조금씩 말랑해지는 걸 느낀다. 마음도 근육처럼 쓰지 않으면 굳기에, 감정을 들여다보고 부드럽게 다루는 연습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바꿔놓는다.
조금씩 아픈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
감기에 걸리는 일이 흔한 것처럼, 정신적으로 아픈 경험도 자연스럽다. 오히려 '나아져야 한다'라는 조급함이 더 깊은 피로를 부르기도 한다.
정신 건강의 회복은 완전히 괜찮아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오늘은 그냥 그런 날이었구나" 그렇게 말해줄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이 다시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삶은 완전하지 않기에, 우리는 더 자주 서로의 균열을 알아차리고, 무너지는 마음을 다정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 조금씩 아픈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애써 괜찮은 척하기보다, 내 마음의 작은 울림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