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있지만 못 쓴다" 제도의 벽에 부딪친 의료 인공지능

의료 AI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지만, 이를 실제 임상 현장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은 여전히 미비하다.데이터 표준화부터 수가 체계, 병원-기업 간 협력 구조, 선진입 제도의 실효성까지, 하나하나가 산업의 발목을 잡고 있는 실정이다. 기술은 있는데, 써보기가 어렵고, 써도 뚜렷한 보상이 없는 현실에서 의료계의 피로감도 누적되고 있다.의료 AI가 단순한 보조 기술이 아닌, 의료 패러다임을 바꾸는 도구가 되기 위해 무엇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살펴본다.■ 의료 AI 실효성 논란…"디지털 피로만 키우는 기술 될 수도"서울성모병원 최준일 영상의학과 교수는 "현재까지 개발된 AI 중 일상 업무에서 꼭 쓰고 싶을만큼 유용한 기술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최준일 교수는 "도움이 많이 된다고 알려진 분야인 논문 작성이나 연구 보조 등 역시 CHAT-GPT 등 생성형 AI가 초보자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전문가 수준에는 효과가 미미하다는 연구 결과들이 많다"고 비판했다.서울성모병원 최준일 영상의학과 교수는 "일상 업무에서 꼭 쓰고 싶을만큼 유용한 AI 기술이 없다"고 밝혔다. 이어 "실제 연구에서는 AI를 쓰는 과정 자체가 디지털 피로와 번아웃을 유발할 수 있다는 데이터도 있다. AI 사용이 오히려 의료진의 스트레스를 높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혜원의료재단 세종병원 박진식 이사장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로 '데이터 표준화'의 벽을 꼽았다.박진식 이사장은 "현재 영상 의료 분야는 글로벌 표준인 다이콤(DICOM) 규격을 통해 데이터가 통일돼  AI 솔루션의 개발 및 적용이 비교적 원활하다"며 "국내 대부분 병원이 이 표준을 채택하고 있어 영상 기반 AI 기술은 활발하게 연구 및 상용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이어 "반면, 의무기록(EMR)이나 검사 결과, 임상 수치 데이터 등 비영상 의료 데이터는 아직까지 표준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라며 "병원마다 자체적인 기준과 형식으로 데이터를 저장하고 있어, 하나의 AI 솔루션을 여러 병원에 적용하려면 각각의 데이터 형식에 맞춘 별도의 표준화 작업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개발자 입장에서는 데이터 규격화를 위해 막대한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야 하며, 실용화까지의 과정이 지나치게 복잡해지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박진식 이사장은 "해외에서는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적 접근이 이미 활발하다"며 "대표적으로 미국은 표준안을 마련해 의료 데이터 교류 방식을 통일하고, 해당 표준을 따르지 않는 병원정보시스템은 시장에서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이어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표준조차 확립되지 않았다"며 "관련 논의와 시범 사업은 진행되고 있으나,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의료 AI 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나서서 데이터 표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강제력을 갖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데이터 표준화와 더불어 병원과 AI 개발 업체 간의 협력 체계 미비 또한 의료 AI 확산의 주요 장애 요인으로 지적된다.일산백병원 신성환 진단검사의학과 교수는 "자신이 소속된 병원의 데이터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지만, 다른 병원과 협업을 시도하려 할 경우 각종 행정 절차와 승인 과정이 지나치게 복잡하다"고 토로했다.그는 "심지어 개인적으로 인맥이 있는 병원과 협업을 추진할 때조차도 IRB(기관생명윤리위원회) 승인, DUA(데이터 사용 계약) 체결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해서 연구자 입장에서도 쉽게 시도하기 어렵다"고 밝했다.이어 "하물며 의료 데이터를 활용하고 싶어 하는 민간 기업이나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진입장벽이 훨씬 더 높다"며 "데이터는 병원에 있고, 기술은 업체에 있기 때문에 이를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서울성모병원 최준일 교수 또한 "우리나라는 단일보험시스템으로 큰 의료 데이터를 갖고 있지만, 표준화가 되지 않았고 접근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며 "데이터를 익명화하고 표준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좀 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나라 의료 AI 사업을 키우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의료 전문가들은 데이터 표준화와 더불어 병원과 AI 개발 업체 간의 협력 체계 미비 등을 문제점으로 꼽았다.■ 선진입제도, 수익만 남고 혁신은 빠져…"퇴출 기준 시급"정부가 의료 AI 및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의 활성화를 위해 도입한 '선진입, 후평가' 제도가 유능한 기업들의 사기를 꺾는다는 지적도 나왔다.초기 취지는 좋았지만, 정작 중요한 '퇴출 기준'이 부재해, 현장에서 사용되기만 하면 성과 검증 없이도 비급여 형태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박진식 이사장은 "진입은 쉽게 열어줬지만, 일정 기간 내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지, 이를 입증하지 못했을 경우 어떻게 퇴출시킬 것인지에 대한 제도적 장치가 너무 느슨하다"며 "결국 기술력보다는 영업에 강한 기업, 단기 수익을 노리는 업체들이 득세하고 있다"고 지적했다.이어 "이러한 구조는 장기적으로는 기술 혁신보다 수익 모델에 집중하는 기업들을 양산하고, 실제로 혁신 기술을 개발하려는 기업들은 '기술로는 안 된다'는 자괴감을 느끼고 사업 방향을 바꾸게 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고 비판했다.의료전문가들은 활발한 기술 발전을 위해 선진입 제도 폐지가 아닌 명확한 퇴출 기전 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박진식 이사장은 "선진입 제도를 폐지하는 방향보다는 진입 이후 일정 기간 내에 반드시 효과를 증명할 수 있도록 지표를 명확히 해야 한다"며 "기준 미달일 경우에는 과감히 퇴출시킬 수 있는 선명한 제도적 프레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최준일 영상의학과 교수 또한 "퇴출 없는 선진입 제도는 열심히 기술 혁신을 추진하는 기업들이 보상받는 구조가 아닌 수익을 쫓는 기업들에 더 힘을 실어주는 것"이라며 "선진입 자체가 우선 도입 후 임상현장에서 사용하면서 효과를 판단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후속대책이 반드시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최준일 교수는 "AI 도입 재원을 산업부나 국가 R&D 재정으로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료AI 확산 가로막는 '수가 장벽'…국가 재정 투자 목소리AI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에 맞는 수가 인정 및 재정 부담 등 역시 고려해봐야 할 문제다.최준일 영상의학과 교수는 의료AI 확산과 관련해 비용적 문제를 환자 개인 부담이나 건강보험이 아닌 국가적 재정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는 "현재 대부분의 AI 소프트웨어는 진단의 정확성을 다소 향상시키는 수준으로 병원 입장에서 추가 비용을 들여 도입할 유인이 크지 않다"며 "이러한 여건 속에서 건강보험 등재는 극히 낮은 수가로 제한되고, 그 외에는 대부분 비급여 형태로 환자에게 비용이 전가되는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했다.이어 "AI가 정말 개인 환자에게 그만큼의 돈을 낼 가치가 있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실질적으로는 환자 부담만 키우는 채용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고 지적했다.최 교수는 "AI 도입 목적이 단순한 의료 보조가 아닌 산업 육성과 미래 성장동력 확보에 있다면, 그 재원 또한 건강보험이나 개인 환자 부담이 아니라, 국가의 전략적 투자나 별도의 산업 펀딩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어 "산업 성장을 위한다면 재정 부담은 복지부가 아닌 산업부나 국가 R&D 재정으로 풀어야 한다"고 밝혔다.신성환 진단검사의학과 교수는 "의료 AI 수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기존에 없던 새로운 기능을 추가해 수가를 청구하는 방식과, 의료진의 업무 효율이나 생산성을 높여주는 도구로서 AI를 활용하는 경우"라며 "후자의 경우엔 별도 수가 없이 병원이 자율적으로 도입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고 설명했다.그는 "전문가들은 AI 도입을 촉진하려면 생산성 향상에 대한 인센티브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며 "예컨대, 현재는 일정 진료량을 넘기면 수가가 깎이는 규정이 있지만, AI를 활용해 효율이 높아졌다면 그만큼 더 진료하고도 정당한 수익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이어 "결국 생산성이 눈에 띄게 개선된다면 병원은 스스로 AI를 선택하게 될 것"이라며 "정부는 이러한 흐름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연한 제도 설계와 인센티브 구조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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