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다시 켜질 조명을 기다리며

건국의대 3학년 김채연
발행날짜: 2025-05-26 05:00:00
  •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본과 3학년 김채연
    투비닥터 홍보팀

영화 <마리아>(2024)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페라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 봤을 가수가 있다. 한국인이라면 물론 위대한 가수 조수미를 가장 먼저 떠올리겠지만, 그 이전에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디바로 일컬어지는 마리아 칼라스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영화 <마리아>(2024)에서는 안젤리나 졸리가 마리아 칼라스로 분해 전설적인 프리마돈나의 말년을 연기한다. 그러나 예술의 정점을 찍은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렇듯, 그녀 또한 상당히 우울한 말년을 보냈다.

영화에서 '마리아'는 전설로 불리는 '라 칼라스'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애를 쓴다. 그녀는 피부근육염(dermatomyositis)이라는 면역 질환에 시달리며 피부와 목이 마치 '보라색 개구리처럼' 부어오르는 끔찍한 병을 안고 무대에 서야 했다.

이 병은 끊임없이 마리아의 목소리를 침범하고 그녀를 도저히 무대에 설 수 없게 하며 공연 직전에 공연을 취소하는 무책임한 예술가로 만들었으며, 결국에는 모두가 기억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형편없이 망치고 말았다. 전성기 시절의 목소리를 되찾으려 남몰래 극장에서 아리아를 부르는 마리아를 두고, 반주자는 말한다. "당신 목소리에서 희망이 보여요."

물론 용기를 북돋아주려 한 말이었겠지만 전 세계를 통틀어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가히 신적인 목소리의 소유자였던 마리아에게 고작 희망이 엿보일 뿐이라는 평가는 형편없이 자존심을 구겨대는 문장이었을 것이다. 50대의 마리아 칼라스는 전성기가 지난 가수였다. 기량이 예전 같지 않음을 기자와 반주자보다도 그녀 스스로가 가장 먼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우리에게 전성기란 언제였을까?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본과 생활을 시작한 의학전문대학원 학생으로서 종종 나이를 실감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본과의 산더미 같은 공부량 앞에서 밤을 새고 난 다음, 한숨 자고 일어나면 멀쩡했던 이십 대 초와는 달리 이틀 내리 밤샘의 후폭풍에 시달리거나, 수백 장짜리 슬라이드를 외우면서 확실히 예전보다 암기력이 떨어졌음을 느꼈노라고 동기들과 웃으며 자조하는 때가 그렇다.

그래도 정신없이 공부만 하던 본과 1, 2학년 때는 그 정도 짧은 찰나들에 지나지 않았는데, 휴학을 하고 비슷한 나이대의 주변 친구들을 둘러보니 그 속도의 차이가 더욱 명징하게 다가왔다. 대부분은 안정적인 직장이 있고 누군가는 가정을 꾸리기도 한다. 수입을 모으고 재산을 불리고 노후를 대비하는 동갑내기 사회인들 앞에서 나는 아직도 한 치 앞도 모르는 불분명한 휴학생(이 신분조차 한동안 명확하지 않았다!)에 불과했다.

그런 의미에서 작년 한 해는 인터미션 같은 시간이었다. 인생의 전성기를 화려한 조명의 무대로 비유한다면, 막과 막 사이에 불을 끄고 숨을 돌리는 인터미션도 물론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무대극과의 가장 큰 차이를 꼽으라면, 불이 언제 다시 켜질지, 켜진다면 무대의 조명일지 퇴장을 알리는 객석의 조명인지를 모른다는 불안이라 할 수 있겠다.

이십 분 내외라고 정해진 무대극의 막간과는 달리, 길이도 형태도 불분명한 막간을 지내며 '이미 남들보다 늦었다'며 떠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고 나 또한 그중 하나였다. 다시 불이 들어올까? 마리아를 습격한 병마처럼 갑작스럽게 꺼진 조명이 영원한 어둠으로 남아버리는 건 아닐까? 이대로 내 인생의 전성기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는 얄팍한 희망에만 기대야 하는 미래만 남아 있다면?

영화에서 마리아 칼라스는 노래를 하러 몇 번이고 반주자가 있는 극장을 찾아간다. 밖에서 엿듣던 파파라치에게 '끔찍한 노래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무례한 질문을 받기도 한다. 그녀는 다시 무대에 오를 생각은 없다고 말하지만, 누구보다 간절하게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미 불이 꺼진 극장에서 또다시 조명이 켜지고 빛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까지 그녀는 필사적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몇 년 늦긴 했다지만 아직은 젊은 날이 한참 남았으니 물론 그녀와는 같지 않다. 그럼에도 예고 없이 찾아온 인터미션 앞에서 의연하게만 버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기나긴 '휴식'을 불안과 우울로 하루하루를 소모할 수도 있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료하게 흘려보내는 것도 시간을 견디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누구도 예상할 수 없이 갑작스레 눌린 일시정지 버튼이 언젠가 또다시 눌릴 때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를 예습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이미 흘려보낸 시간들을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현재보다 나은, 혹은 나았던 것처럼 보이는 과거에 지나간 전성기라는 이름을 붙이고 불이 꺼진 객석에서 하염없이 끌어안고 기다리게 될지도. 하지만 뒤를 돌아보느라 앞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 그보다는 이 갑작스럽고 안온한 시간을 충분히 흡수해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르는 다음 막을 만끽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데 쓰는 편이 훨씬 긍정적일 테다.

지금껏 바쁘게 달려왔던 시간 속에서 문득 잊고 살았던 '나'를 또다시 알아가며, 어떤 태도와 표정으로 삶을 꾸려 나가야 할지 고민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꾸준히 할 수 있는 취미를 찾고, 학교 공부가 아닌 또 다른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이야기를 하며 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나는 찾아가는 중이다.

그리하여 현재를 보내는 방법을 깨닫고 나면 이 다음으로 찾아올 미래도 조금 더 단단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갑자기 찾아온 휴식처럼 갑자기 찾아올 분주한 삶도 여유 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나를 만들기 위해.

영화의 마지막에서 마리아는 파리의 자기 방에서 통유리창의 빛을 받으며 아리아를 부른다. 그 천사 같은 목소리에 파리 시민들이 하나둘씩 모여 넋이 나간 듯 그녀의 노래를 감상하는 광경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쓰러져 숨을 거둔다. 생의 마지막 노래로 그녀는 그녀의 관객을 만족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니, 그녀가 찾아 헤매던 '라 칼라스'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전성기는 끝나지 않는다. 지나간 것 같아도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다. 그러므로 언제나 차분하게 다음에 올라갈 막을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선물처럼 다시 켜질 조명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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