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의대 본과 4학년 박태웅

부모님께서는 예과 2학년 때부터 운전면허를 따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타고 있는 당신의 차를 넘겨줄 테니 어서 따라, 다른 집이면 감사하다며 허겁지겁 학원에 갈 노릇인데, 어찌 이리도 시큰둥하냐며 타박하셨다. 나는 항상 똑같이 되받았다.
기름값, 유지비, 관리비, 보험비를 학생이 안정적으로 낼 수 있느냐, 이건 조선에 코끼리를 보내는 꼴이다. 어머님께서 넘겨주려 한 차는 안타깝게도 폐차장에 직행했고, 나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지하철에 몸을 맡겼다.
딱히 불편함은 없었다. 서울 내에서는 자가용 차를 몰 이유가 없을 정도로 교통 인프라가 훌륭했고, 어쩌다 한 번씩 국내 여행을 떠날 때면 지역 내에서 택시를 타는 게 차라리 나았다. 이동할 때 자면 되니 피곤하지도 않지, 렌트 비용에 기름값 아끼지, 술 마실 때 걱정할 필요도 없지. 된통 사람들은 왜 직접 운전해서 여행 가려고 야단일까 싶었다. 꿋꿋이 네이버 지도와 KTX 앱을 달고 두 다리로 걸어 다녔다. 그렇게 27살이 됐다.
두 번째 압박이 찾아왔다. "입대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젠 정말 따야 하지 않겠니? 나이 들면 운전해야 할 일도 많을 텐데" 이번에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요, 평생 운전면허 없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 따고 들어갈게요. 약속" 그 말을 하고 2개월이 지났다. 입대가 다음 주인데, 도로 주행 연습은 시작도 안 한 상태. 눈 질끈 감고 잔소리 몇 번 들으면 훈련소일 텐데, 하루하루 흘려보내기도 아까워 죽을 노릇인데, 벌써 별의별 변명거리만 궁리하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슬펐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서, 6시간만 연습하면 딸 수 있는 운전면허조차 따기 싫어 도피하는 부질없는 사람이 되었다. 고작 14개월 만의 일이었다. 1년 넘게 반복된 도전과 좌절은 꽤 치명적이었다. 노력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는 과정은 먼 옛날의 일만 같았다. 나는 무언가를 시작하고 매듭지을 수 없는 사람이 됐다. 그렇게 글에 대한 스터디, 일본어 공부, 교지 활동, 그 무엇조차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입대만을 기다리며 일상을 보냈다.
운전면허도 마찬가지였다. 생각은 늘 비슷하게 흘러갔다. 곧 1년 반 쉬는데 굳이 새로운 도전을 할 필요는 없었다. 사서 고생할 바에 한 끼라도 더 맛있는 거 먹는 게 합리적이라고 느껴졌다. 열심히 노력했는데 떨어지면 정말 개쪽이었다. 쥐구멍에 들어가는 정도론 끝나지 않을 일이었다.
침대에 누워 두 시간 동안 멍하니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군대에 들어가 무기력의 관성에 잠기고 싶지 않았다. 경기도의 한 운전면허 학원에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6시간 치 수업을 모두 예약하고, 학원비를 입금했다. 왕복 3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학원에 찾아가 이틀간 수업을 듣고, 정말 오랜만에 필기도 하며 코스를 외웠다. 그렇게 입대가 겨우 3일 남은 목요일, 아슬아슬하게 운전면허를 땄다.
기뻤다. 온갖 호들갑을 떨며 친구들에게 운전면허를 땄다고 자랑했다. 그깟 운전면허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오랜만에 나의 힘으로 온전히 무언가를 이뤄내는 경험은 꽤 벅찼다. 그제야 깨달았다. 한번 느끼기 시작한 무력감은 어떻게 사람을 늪에 서서히 잠기게 하는지, 그리고 한번 경험한 성취감은 어떻게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지.
나는 그 이후로 놀라울 정도로 나아졌다. 친구들과 함께 밥 먹는 순간의 소중함을 다시 느꼈고, 어떤 주제에 대해 몇 시간이고 떠들 수 있는 즐거움을 다시 얻었다. 그렇게 입대가 하루도 채 안 남은 지금, 그렇게 미루고 미루던 운전면허 덕분에 스스로를 되찾을 수 있었다.
기약 없는 내일을 기다리는 삶은 무척이나 지치고 고통스러웠다.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학생들이 많았고, 작년을 담담하게 지낸 이들도 봄을 보내며 하나둘 무너져갔다. 마치 모래사막을 걷는 것처럼, 앞으로 발을 내딛어도 제자리에 돌아오는 듯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들에게 말을 전하고 싶다. 잠시 멈췄다 발을 내딛어도 괜찮다고. 우린 한 번의 좌절로 멈출 수 있지만, 한 번의 행복으로 또 나아갈 수 있다고.
운전면허 학원에서 강사가 건넨 한마디가 떠오른다. "거, 힘내라는 말은 못 해주는데 사탕이라도 입에 하나 넣어줄 테니까 천천히 먹으쇼" 썩 맛없던 그 싸구려 사탕은, 왠지 모르게 힘내라는 말 열 마디보다도 위로가 됐다. 부디 여러분에게도 싸구려 사탕 같은 순간이 찾아오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