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살아가는 게 두렵습니다"

발행날짜: 2017-05-01 05:01:59
  • 현장진료실 밖으로 나온 의사들 울분 "차라리 자격증 반납하겠다"

|현장|전국 산부인과 의사 긴급 궐기대회

"저는 두 아이를 가진 부모의 입장에서 태아 사망에 대해 너무나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진료했고, 한 시간 반 동안 쉬게 해준 것은 의사로서의 판단이었습니다. 환자를 위한 판단이 좋지 못한 결과로 이어져 당황스럽고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판사님의 선처를 바랍니다."

의사 부주의로 자궁 내 태아 사망을 일으켰다며 실형을 선고받은 산부인과 의사가 법정에서 한 최후의 진술이다.

법원은 이 산부인과 의사에 대해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를 적용, 8개월의 금고형을 내렸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불가항력적 의료사고에도 형사책임을 져야 한다는 법원 판단에 분노했고 거리로 나왔다.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다며 위기의식을 느낀 다른 진료과 동료 의사들도 전국에서 진료실 밖으로 뛰어나와 힘을 보탰다.

직선제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지난 29일 서울역 광장에서 '긴급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전국에서 모인 의사들은 500석의 의자를 채우고도 자리가 모자라 바닥에 앉아 현실을 규탄했다. 의사 커플부터 유모차를 끌고 나온 의사 부부까지 '더이상 갈 곳 없네 벼랑 끝 산부인과. 사라지는 분만실 갈 곳 잃은 임산부', '진통 중 태아사망 의사 구속 웬 말이냐, 산모 의사 안심하는 출산환경 보장하라' 등이 적혀 있는 녹색띠를 둘렀다.

'불가항력 의료사고 형사입건 웬 말인가? 무과실 국가배상 소신진료 보장하라'로 쓰인 빨간 플래카드도 들었다.

기동훈 회장
검은 정장을 입고 단상에 오른 대한전공의협의회 기동훈 회장은 "조의를 표하는 마음으로 검은 옷을 입고 왔다"며 "안타깝게 생을 마친 아이에게 조의를 표하고, 대한민국 분만과 의료에 조의를 표한다"고 참담한 심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대한의사협회 좌훈정 전 감사는 연대사를 통해 "산부인과는 산모뿐만 아니라 태아까지 두 목숨을 살린다"며 "이 세상에 그 어떤 의사라도 환자를 앞에 두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의사는 없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이번 사건에 대한 비난은 법원뿐만 아니라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으로도 향했다. 법원이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감정 결과를 증거로 인용한 게 원인이 됐다.

좌 전 감사는 "법원의 판단에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월권과 오판이 크게 작용했다"며 "의료분쟁 시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공정한 해결을 해야 할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형사 및 민사 재판 증거로 활용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 재원을 산부인과 의사와 정부가 함께 분담하고 있는 현실은 국회의원조차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전현희 의원이 격려사를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전현희 의원은 "18대 국회에서 의료분쟁조정법 안에 불가항력적 분만사고 국가 보상 규정이 들어갔었는데 본회의에서 통과되지 못했다"며 "그게 마무리됐다면 오늘의 비극적인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운을 뗐다.

이어 "불가항력 의료사고면 의사 과실이 없는데 책임을 분담하게 하는 것은 법체계에 맞지 않다.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었다"며 "관철이 안돼 송구스럽다"고 털어놨다.

바른정당 박인숙 의원도 "19대 국회에 들어와 가장 먼저 들어온 산부인과 민원이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재원 문제였다"며 "아직도 해결이 안 됐다. 일본에서는 무조건 정부에서 분담하는데 우리나라는 의사에게 부담시키는 것은 진짜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건 돈이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이 너무 상하는 일이다"라며 "벌금을 미리 내고 운전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악법이다"고 비판했다.

대한의사협회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않고 대안을 찾겠다고 했다.

추무진 회장은 "의료사고특례법을 기필코 마련하도록 노력하고 전국 의사들의 서명을 받아 재판부에 탄원서를 제출하겠다"고 강조했다.

또 "의료 사고를 내기 위해 진료하는 의사는 어디에도 없다. 의사들이 소신을 갖고 최선의 진료를 할 수 있도록 국가적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며 "대책반을 구성해 불가항력 의료사고에 대한 여론 조성에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깃발 행진부터 연극까지 다양한 퍼포먼스 눈길

직선제 산부인과의사회 주도로 진행된 궐기대회는 다양한 퍼포먼스도 준비했다.

직선제 산부인과의사회 심규민 보험이사, 강병희 보험위원, 오준환 보험이사, 김기돈 사업이사, 김금석 보험이사는 각각 '분만환경 파괴하는 사법부는 각성하라!' 등의 문구가 쓰인 깃발을 들고 서울역 광장을 걸었다.

자궁 내 태아사망으로 구금형을 받기까지의 사건을 의사들이 직접 극으로 만들어 표현하기도 했다.

산부인과 의사들의 전문의 자격증을 팩스로 받아 직선제 산부인과의사회 최영렬 부회장이 김동석 회장에게 반납하기도 했다.

최 부회장은 "산부인과 의사들이 분만실을 지킬 힘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며 "산부인과 의사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두렵다.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동료 산부인과 의사들이 팩스로 보내준 전문의 자격증을 모았다"며 "우리에게 부여해준 전문의 자격증을 반납하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산부인과 의사들이 바라는 것은 '소신진료'를 할 수 있는 환경이다.

이들은 궐기대회 말미 결의문을 통해 ▲의사 진료행위에 대한 형사입건을 자제하는 의료사고특례법 제정 ▲무과실 국가배상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형사 과실 감정 즉각 중단 ▲의사에게는 보람된 분만실, 산보와 태아에게는 안전한 분만실 제도 즉각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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