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진료 불신, 의사·환자 '라포르' 복원하자

안창욱
발행날짜: 2007-07-06 07:25:29
  • 경희대병원 허주엽 교수, 1시간 면담은 기본.."경청하라"

[창간 4주년 특별기획=소통을 말한다]

의료법 개정안이 발표되면서 정부와 의료계가 다시 충돌했다. 정부가 관련단체와 충분히 협의해 개정안을 마련했다고 여론몰이를 하자 의료계는 대규모 집회로 맞섰다. 분업후 의정 갈등이 지속되고 있으며, 국민들은 의료계에 등을 돌리고 있다. 의료현안이 터질 때마다 정부, 국민으로부터 고립되는 의료계. 의사집단과 사회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는 무엇일까. 또 무엇을 버리고, 새겨야할 지 집중모색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험난한 도전 직면한 의료계
②장롱면허자가 바라본 의사
③의사가 된 샐러리맨과 환자
④'라포르' 가로막는 3분진료
허 교수가 장모 할아버지에게 담배를 끊어라고 집요하게 권유하는 모습
6월 27일 오후 1시 30분 경희대 부속병원장이면서 만성골반통센터 소장인 산부인과 허주엽 교수의 외래진료실.

이날은 허 교수가 만성골반통환자만 대상으로 진료하는 날이다.

외래가 시작되자 김모(65) 할머니가 재진을 받으러 진료실에 들어왔다.

김 할머니는 허 교수가 골반통 내진을 시작하면서 “요즘 스트레스 받는 일 있으신가보죠”라고 묻자 대뜸 “영감이 심장도 안 좋으면서 자꾸 담배를 피운다”고 짜증을 냈다.

그러자 허 교수는 내진을 마친 후 진료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편 장모 할아버지를 직접 불러다 할머니 옆자리에 앉혔다. [사진 위]

허 교수는 할아버지에게 “심장치료를 받으면서도 담배를 피니까 할머니가 더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고 한마디 던졌다.

김 할머니는 “요즘에는 다리도 저리다”며 허 교수를 거들었다.

다소 무안해진 할아버지는 “아들이 둘인데 다 결혼을 안 하고 있다”면서 “큰 아들은 마흔이 넘었는데 맞선을 보라고 하면 바쁘다고 자꾸 피하기만 하니까 집사람이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남편 때문에 골반통이 가시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은 아들 문제가 스트레스의 원인이었던 셈이다.

허 교수가 빠듯한 진료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 굳이 보호자를 면담한 이유도 할머니의 정확한 병인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허 교수는 “만성골반통을 유발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환자, 보호자와 충분히 면담해야 밝혀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제 할머니에게 처방을 내리면 진료가 끝나겠구나 생각했지만 빗나갔다.

허 교수는 김 할머니의 골반통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남편의 협조가 필요하다며 할아버지에게 6개월만이라도 담배를 끊어보라고 권유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넘어가려 했지만 허 교수는 집요하게 금연을 주문했고, 보다 못한 할머니는 “저러니 뭐가 되겠느냐”며 핀잔을 줬다.

할아버지는 허 교수가 20여분간 끈질기게 설득하자 “확답은 못하겠지만 힘껏 담배를 끊어보겠다”며 백기를 들었다.

허 교수는 “할머니의 병은 속상해서 오는 병”이라면서 “6개월만 서로 짜증을 내지 말고 마음을 잘 다스리면 나을 수 있고, 그러면 며느리도 볼 수 있다. 내가 기도해 주겠다”며 할머니 손을 꼭 잡아줬다.

그러는 사이 진료시간은 훌쩍 한 시간을 넘겼다.

허 교수가 만성골반통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만성골반통은 신체적으로 동통의 원인이 발견되지 않으면서 통상적인 치료에 실패하고, 하복부 통증이 6개월 이상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만성골반통의 원인은 자궁내막증과 같은 신체적인 원인과 스트레스 등의 정신적인 요인이 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허 교수는 여성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율신경인 자궁 근육이 수축하면서 통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데 주목하고 있다.

이 때문에 허 교수는 이날도 소문대로 시어머니와의 갈등, 남편과의 불화, 자식 문제 등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환자들의 불만, 불평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경청했다.

의사가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닌데 그런 자잘한 푸념까지 들어주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에게는 골반통의 원인을 찾기 위해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허 교수는 96년부터 이런 방식으로 만성골반통환자를 진료해 왔다고 한다. 초진환자의 경우 보통 1~2시간, 길게는 5시간까지도 면담한 적도 있다.

자연히 하루에 볼 수 있는 외래환자는 10명도 채 안되고, 오후 8시나 돼야 진료가 끝나는 게 부지기수다.

이렇게 진료하면 환자 입장에서는 대만족이겠지만 병원 입장에서는 어떨까?

허 교수는 지난 2000년 골반통클리닉을 개설하려고 했지만 병원의 반대로 좌절됐다고 한다.

3분진료를 해도 겨우 수지를 맞출 판인데 1시간 진료를 하겠다고 하니 달가울 리 없었을 것이다.

병원장인 그에게 다른 의사들이 모두 이렇게 진료하면 어떠냐고 묻자 “그럼 병원이 망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그 역시 환자들을 위해 최선의 진료를 하고 있지만 현 의료수가에 대해서는 불만이 적지 않았다.

허 교수는 “미국의 대형병원들은 하루에 고작 4~5명의 외래환자만 봐도 유지가 되는데 우리나라는 미국 수가의 1/20 밖에 되지 않으니 3분진료를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꼬집었다.

왜곡된 수가로 인해 의료기관도, 환자도 피해를 보고 있고, 의사에 대한 신뢰도 동반 추락하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환자가 증상을 설명하면 바로 정확한 진단을 내려야 명의로 인정받는 게 우리 시스템”이라면서 “이렇게 해서 진단명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근본 병인을 찾는데 소홀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진료시간이 부족하다보니 정확한 병인을 모른 채 항생제를 처방하거나 수술을 한 결과 또다른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간과하지 않았다.

이런 우리나라의 의료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료기관과 환자간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의사들이 ‘라포르’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그는 “의사는 충분히 많은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하고, 환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줘야 한다”고 못 박았다.

또 그는 “의사는 환자에게 관심이 있으며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그러려면 환자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면서 “뭔가 물어보는데 무시하면 라포르가 깨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3분진료를 해야 하는 여건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1주일에 수술 2~3건 줄이면서까지 1시간 진료를 고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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