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차의료의 위기와 극복방안

이재호
발행날짜: 2004-05-10 08:56:43
  • 대한가정의학회 이재호 정책이사

대한민국 의료체계는 해방 후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아 자유방임형 의료체계 속에서 민간 주도로 성장해 왔다. 따라서 민간부문의 속성상 건강증진과 질병예방을 주요 업무로 하는 1차 보건의료보다는 치료서비스 위주의 대형병원들이 경쟁적으로 발달해왔다. 의료인력 양성도 정부의 방임 속에서 시장기전에 의해 대형병원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 위주로 양성이 이루어져 단과전문의들의 과잉 배출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지역사회에서는 단과전문의, 일반의, 그리고 1986년부터 배출되기 시작한 가정의들이 나름대로의 방식에 의해 경쟁적으로 1차 진료를 행하는 양상을 보여 왔다.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보건의료 현안문제들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은 공공부문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취약하고, 일차의료(primary care)의 기반이 매우 부실하다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수많은 보건의료 병리현상이 바로 이 속에서 잉태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차의료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세계적인 석학인 존스 홉킨스 보건대학원의 Starfield 교수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첫째, 일차의료의 내용은 의료체계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므로 일차의료 강화를 위해서는 정부의 정책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며, 둘째, 일차의료의 기반이 약한 나라들은 보건의료비가 많이 들면서 그 결과가 나쁘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인데, 일차의료 기반이 선진국 중에서 매우 취약한 의료체계를 갖고 있으면서, 국내총생산(GDP)에서 보건의료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다른 OECD 선진국들의 두 배에 가까우며(13-15%), 건강지표들로 표현되는 미국 국민 건강수준은 선진국 중에서 매우 낮은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국이 첨단과학과 의학에 있어서 세계 최고 수준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시장기전에 내맡겨진 미국의 의료체계는 고비용 저효율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의료체계는 미국보다 일차의료기반이 더욱 취약하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일차의료 주변 환경이 지극히 ‘반(anti) 일차의료적’이다. 일차의료기관이 해결할 수 있는 질병도 2차, 3차 기관이 담당하고 있고, 일차의료의사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질병도 단과전문의, 세부전문의가 담당하고 있다. 간단한 진찰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고가의 진단, 치료장비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상태가 오래 지속된 결과 환자의 의료이용 관행과 의식에도 변화를 주어 1차를 우회하여 2,3차 기관을 찾아가고 ‘전문의’ 또는 ‘명의’를 찾기 위해 여러 의료기관을 돌아다니며 중복 진료하는 ‘의사 장보기’ 현상이 심각하다.

국민 1인당 1년간 의사방문 빈도에 있어서 우리나라는 평균 13회로, OECD 주요 선진국들이 6회 정도인 것에 비하면 두 배 이상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건의료를 이용할 때 사용하는 일정한 ‘사고방식’이 현실 속에서 실체화된 결과이며, 매우 치료중심적이고, 전문화 지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기본적으로 단과전문의들에게서 비롯한 것인데 지금은 전체 국민에게 널리 퍼져 있다. 정책입안자와 언론에도 영향을 주고, 심지어는 시만-소비자단체들에도 이러한 가치판단의 준거들이 널리 퍼져 있다. 이 사고방식은 일차의료에 매우 부정적이고 적대적이다.

최근 의료계의 일각과 공무원들 중에는 ‘일차의료’의 개념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차의료’란 최초로 접촉하는 진료(first contact care)뿐만 아니라 포괄적, 지속적, 통합적인 진료를 관장하면서 자문과 의뢰 기능을 담당하는(주치의 역할을 담당하는) primary care를 의미하며 지역사회에서는 1차보건의료(primary health care) 팀의 leader로 기능하는 의료라는 개념인데, 이러한 개념을 최초접촉진료(또는 gate keeper role)만을 강조하는 ‘1차 진료’(primary medical care)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대두되는 ‘임상수련의무화 방안’은 이러한 오해 속에서 의료인력 양성을 시장의 기전에 맡기자는 사람들에 의해서 제기 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 방안이 제도화된다면 우리나라 일차의료는 더욱 혼란에 빠질 것이며, 이로 인하여 초래되는 의료체계의 비효율성은 조만간 국민의료비를 가파르게 상승시킬 것이 자명하다.

일차의료 기반이 강한 나라들에서는 의료의 효율성과 형평성을 기하기 위해 정부가 정책적인 조정과 개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가 일차의료를 위해 시행한 정책은 실효성이 적은 몇 개에 불과하다. 김영삼-김대중 정부의 보건정책에는 일차의료 강화를 위한 획기적인 계획이 들어 있었지만, 정부의 추진의지 미흡과 의료계 내에서의 반발에 부딪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현 정부의 보건의료 공약에는 ‘일차의료 강화’에 관한 부분이 빠져 있으며, 복지부가 ‘일차의료’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다. 최근 의료계의 일각에서는 “병원에서 수요가 별로 없는 가정의학 전공의 정원을 늘린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주치의제도와 같은 제도는 실효성이 없다”는 등의 반 일차의료적 주장을 하고 있어서 일차의료를 더욱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

급격한 고령화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나라에서 의료체계의 부실은 국민의료비의 앙등으로 이어져 경제발전의 발목을 잡을 것이 분명하다. 의료체계의 기초가 일차의료임을 감안하면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의료체계 개혁의 중심에 일차의료 개혁이 위치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나라 일차의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극복방안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로, 일차의료의 개념과 가치, 그 중요성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의료계 내에서 뿐만 아니라 공무원 및 보건학자들 중 일차의료에 대해 편견을 가진 모든 이에게 해당된다.

둘째로, <일차의료 강화를 위한 특별법>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민간차원의 자발적인 노력으로는 그 효과가 미미하고 한계가 분명하므로, 일차의료 전공의의 비율, 일차의료 전공의 수련병원에 대한 인센티브, 일차의료강화를 위한 보험체계 정비 등을 기본 내용으로 하는 법률이 필요하다.

셋째로, 공공의료에 대한 선입견이나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정부의 공공의료 강화정책이 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진지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특히 공공부문의 일차의료라고 할 수 있는 도시형 보건지소 공약이 바르게 실행될 수 있도록 일차의료의사들의 건설적 비판과 참여가 필요하다.

이러한 방안들은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우리나라에서 급증하는 보건의료비를 억제하면서 국민건강 증진에 효과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또한 시장기전 속에서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일차의료의사가 안정적 지위를 확보하는 방안이 될 것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효율적인 보건의료체계의 전제가 될 것이다.

오피니언 기사

댓글

댓글운영규칙
댓글을 입력해 주세요.
더보기
약관을 동의해주세요.
닫기
댓글운영규칙
댓글은 로그인 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으며 전체 아이디가 노출되지 않습니다.
ex) medi****** 아이디 앞 네자리 표기 이외 * 처리
댓글 삭제기준 다음의 경우 사전 통보없이 삭제하고 아이디 이용정지 또는 영구 가입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1. 저작권・인격권 등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
2. 상용프로그램의 등록과 게재, 배포를 안내하는 게시물
3. 타인 또는 제3자의 저작권 및 기타 권리를 침해한 내용을 담은 게시물
4. 욕설 및 비방, 음란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