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뭇거릴 수 없는 사람

조선의대 2학년 박요한
발행날짜: 2026-06-01 05:00:00
  • 조선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2학년 박요한

'땡땡땡'

의과대학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특별한 경험이 있다. 바로 '땡시'다. 종이 울리면 수십 명의 학생이 일제히 자리를 바꾸고, '몇 초' 안에 눈앞의 구조물을 보고 답을 적어야 한다. 이제껏 수많은 시험을 치러봤지만, 이 시험의 감각은 유난히 낯설었다. 몇 초 안에 답을 쓰지 못하면, 그것을 모르는 것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알고 있는데도 늦게 떠오르면 소용이 없었다. 특히 표본 상태가 좋지 않은 날이면 더 그랬다. 핀 끝에 걸린 구조물이 artery인지 nerve인지조차 선뜻 가늠이 되지 않았다. 몇 초는 금세 지나갔고, 나는 끝내 확신 없는 답을 적은 채 다음 자리로 밀려나야 했다. 나중에 그 답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께름칙함은 꽤 오래 남았다.

사실 억울했다. 애꿎은 시험 형식만 탓하고 싶었다. 틀렸다는 사실보다도, 알고도 늦으면 모르는 사람 취급을 받는 그 방식이 더 억울했다. 왜 꼭 이런 방식이어야 하는 걸까. 선배에게 불평 아닌 불평을 털어놓았을 때 돌아온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땡시는 빠르게 판단하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 의사의 직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시험이라는 말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옳은 판단을 하지 못하면,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환자의 상태는 실제로 위험해질 수 있다는 말.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땡시는 단순히 까다로운 시험 형식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좋은 의사란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 질문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의사는 많이 아는 사람이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필요한 순간에 머뭇거리지 않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걸까.

돌이켜보면 나는 원래도 머뭇거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틀렸다고 해도 내가 맞다고 느끼면 그냥 주저 없이 했다. 수업을 빼기도 했고, 군대를 미루기도 했고, 예과 시절에는 마음껏 놀기도 했다. 그 선택들이 늘 좋은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 삶에서는 내가 납득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데 익숙했다.

속으로 늘 비슷한 말을 되뇌며, '망하면 내가 책임지면 되지.'라고 말이다. 나는 오랫동안 그런 태도를 용기라고, 혹은 내 선택을 끝까지 관철하는 의지라고 믿었다. 남들이 정한 길보다 내가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택하는 것. 적어도 내게는 그것이 더 솔직하고 올바른 삶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의대에 와서는 나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되었다. 선생님의 말을 잘 듣고, 주어진 기준을 성실하게 따르며, 실수를 줄이기 위해 반복하는 사람들. 대개 그런 학생들이 성적도 좋았다. 나는 오랫동안 그런 상을 지양해 왔기에, 그들을 볼 때마다 문득 궁금해졌다. 좋은 의사는 정말 나보다 그들에게 더 가까운 사람일까. 말 잘 듣고, 안 틀리려고 애쓰는 사람이 결국 더 적합한 것은 아닐까.

한동안은 그 질문 앞에서 선뜻 답을 내리지 못했다. 틀리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은 분명 학생으로서 강해 보였고, 나는 그런 강함과는 다른 방향으로 살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의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순응도, 단순한 배짱도 아니라는 것을.

그 사실을 처음 또렷하게 느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앞서 말한 해부학 땡시에서였다. 핀 끝에 걸린 가느다란 구조물이 recurrent laryngeal nerve인지, 그 곁을 지나는 작은 동맥 가지인지 몇 초 안에 가늠해야 하는 순간. 표본 위에서는 그저 비슷한 한 줄기였지만, 그 몇 초는 내게 단순한 식별 이상의 감각으로 남았다. 얼핏 비슷해 보이는 것들 사이의 작은 차이가 결코 작은 결과로만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어렴풋이 배웠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실제 의료에서 중요한 것은 늘 거창한 정답을 맞히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비슷해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끝내 다른 것을 알아보는 일, 너무 사소해 보이는 차이를 사소하게 넘기지 않는 일에 더 가까울 것이다. 늦게 알아본 차이는 지연이 되고, 잘못 붙인 이름은 오진이 된다. 그래서 의사에게 필요한 정확성은 많이 아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작은 차이를 끝내 책임 있게 가려내는 데까지 가야 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빠르게 선택하는 쪽에 익숙했다. 그러나 그 빠름은 대개 '내가 맞다고 믿는 것'을 따르는 속도였다. 내가 틀리면 그 대가는 대부분 내가 치르면 되니까. 수업을 빼면 따라잡아야 하는 것도 나였고, 군대를 미루면 꼬인 시간표를 감당해야 하는 것도 나였다.

내가 책임지고 끝낼 수 있는 삶에서는, 내 확신을 밀어붙이는 것이 하나의 태도가 될 수 있었다. 내 삶에서는 오래도록 '망하면 내가 책임지면 되지'라는 말이 통했다. 그런데 의사가 된다는 것은, 처음으로 그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세계 앞에 서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의사는 내게 더 낯선 종류의 책임으로 다가왔다. 내 판단의 결과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감당하게 될 수도 있다. 내 착오와 망설임, 혹은 성급한 확신의 결과가 누군가의 불안과 고통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 사실 앞에서 자기 확신은 더 이상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가 된다. 어쩌면 의사가 되어 간다는 것은, 자기 확신으로 살아온 사람이 그것을 책임으로 바꾸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의 나는 머뭇거리지 않는 것을 용기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틀렸다고 해도 내가 맞다고 믿는 쪽으로 가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의사에게 필요한 머뭇거리지 않음은 그런 종류의 배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끝까지 점검하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판단을 미루지 않는 태도에 더 가깝다.

빨라야 해서가 아니라, '빠르면서도 틀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땡시가 유독 내게 오래 남았던 이유는, 그 시험이 단순히 내 지식을 묻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어온 삶의 방식까지 함께 흔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좋은 의사는 말 잘 듣는 사람과 고집 센 사람 사이 어딘가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안 틀리려 애쓰는 성실함을 가지되, 동시에 결정적인 순간에는 책임 있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 순응만으로도, 배짱만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사람. 나는 아직 어떤 사람이 좋은 의사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적어도, 내 판단이 가진 무게를 실감하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끝내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시간의 소중함을 알지만 조급함에 휘둘리지 않고, 책임을 알지만 두려움에 멈추지 않는 사람. 언젠가 다시 어떤 '몇 초' 앞에 서게 되더라도, 그 순간을 함부로 넘기지 않는 사람. 어쩌면 내가 되고 싶은 의사는, 결국 그런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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