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코로나19, 또 하나의 러시안 룰렛

김대하
발행날짜: 2020-02-17 05:45:50
  • 대한의사협회 김대하 홍보이사 겸 의무이사
    대한의사협회 김대하 홍보이사 겸 의무이사

의협 김대하 홍보이사 겸 의무이사
러시안 룰렛은 6발의 장탄수를 가지는 권총에 한 개의 총알만 넣고 실린더를 돌린 다음 참가자들이 돌아가며 자신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는 복불복 결투다. 횟수가 반복되면 결국 누군가는 총알이 발사되어 죽게 된다.

임상에서 진료를 하다보면 의사의 능력이나 노력과는 무관하게 말 그대로 '운이 없어서' 곤경에 처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예를 들어, 어떤 의사도 진단하기 어려운 희귀한 케이스가 나타난다거나 애당초 고위험 상태인 환자의 진료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다하여 의사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들이 그것이다.

2018년 11월 11일, 의사들이 대한문 앞에 모였다. '횡격막 탈장 사건'으로 기억되는 의사 3명의 법정 구속에 대한 반발이었다. 소아의 횡격막 탈장은 1년에 몇 건 있지 않을 정도로 흔하지 않은데다가 당시 상황만으로 의사의 책임을 물어 법정에서 구속까지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 의사들의 분노가 끓어올랐다.

대한의사협회 홍보이사로서 행사를 기획하면서 의사들이 처한 억울한 상황을 어떻게 알리는 것이 효과적일지를 고민하다가 러시안 룰렛을 떠올렸다. 과목이나 직역을 떠나 많은 의사들이 공분하는 밑바탕에는 "내가 저 세 명 대신 그 자리에 있었다면 피할 수 있었을까?", 즉 이러한 사회의 분위기와 제도 아래에서는 의사라면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공포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료현장을 누군가는 반드시 죽게 되는 러시안 룰렛에 비유한 이 날의 퍼포먼스가 끝나자 장내에는 숙연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의도가 잘 전달된 것 같아 만족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기획을 해야만 하는 현실에 씁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최근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2019) 감염증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진원지인 중국에서는 확진자가 6만명에 육박하고 있으며 하루 100명 이상 사망이 보고되고 있다. 다행히 국내 확진자 수는 아직까지 많지 않고 환자들의 임상 경과 역시 비교적 양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가운데에는 지역사회 감염으로 의심되는 사례들이 있으며 이에 따라 세계보건기구(WHO)는 우리나라를 지역사회 감염이 있는 국가로 분류한 상황이다. 또, 유행이 일어나고 있는 중국으로부터의 입국 제한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증상 전파 가능성에 대한 경고가 이어지고 있으므로 본격적인 지역사회 감염에 대한 주의가 요구된다.

코로나19 감염증 확산을 막기 위한 의료계의 움직임은 분주하다. 미지의 위협을 최소화하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럼에도 의원, 병원, 상급종합병원 모두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의심환자가 내원하거나 확진자가 발생했을 때, 불가항력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손실에 대해 아직까지 구체적인 지원, 보상방안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의원급 의료기관에 의심환자가 내원했다고 가정해 보자. 미리 준비한대로 신속하게 조치를 취하고 환자를 당국에 인계 후에 적절한 소독 및 환기를 하고 나면 원칙적으로는 진료를 재개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조치를 취하는 데에 수 시간이 걸리므로 사실상 그날 하루는 진료가 중단될 수밖에 없다.

또 인계한 환자가 여러 정황상 코로나19 감염이 강력히 의심된다면 이에 노출된 의료진은 환자의 검사 결과가 음성으로 확인될 때까지 진료를 자제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만약 환자가 확진이 되면 의료진 역시 격리 대상이 되므로 사실상 휴업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결국, 아무리 잘 대응하더라도 환자가 의료기관을 경유하는 순간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령 운이 좋아 나는 피하더라도 근처의 누군가는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러시안 룰렛인 셈이다.

이는 병원급 이상의 의료기관도 마찬가지다. 비록 선별진료가 가능하더라도 실제 의심환자 한 사람을 진료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과 인력이 투입될 수밖에 없다. 현장에서는 '레벨 D'라고 부르는 방호복을 입고 벗는 것만도 힘이 든다고 말할 정도다.

거기다가 1회용으로 사용 후 폐기해야 하는 각종 진료용품들과 수시로 이루어지는 소독과 환기 조치 등 의료기관 입장에서는 감당해야 할 것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선별진료에 투입되는 의료진의 피로감 역시 문제다. 만에 하나라도 병원급에서 폐쇄 조치가 필요할 때는 이로 인한 손실은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결국 크고 작은 의료기관에서 코로나19에 의한 러시안 룰렛은 반복되고 있다. 누군가는 오늘 하루 별 일 없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릴 때, 누군가는 장탄식을 내뱉고 있을지 모른다. 물론 의료 현장에서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상황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벌어질 수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그러한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정책적 뒷받침이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현장에서 바이러스와 맞서는 것이 의료기관의 몫이라면 그들이 안심하고 싸움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정부의 몫이다.

정부가 하루라도 빨리 환자를 만난 의사와 의료기관이 탄식하지 않도록, 오히려 감염병에 맞선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현실적인 지원과 보상 방안을 제시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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