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절개, 그 소소하고 위대한 나만의 '처음'

박성우
발행날짜: 2016-02-04 11: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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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절개

'처음'이라는 의미는 환희와 소소한 웃음을 머금게 한다. 하지만 정작 스스로가 처음에 큰 의미를 느끼는 일은 흔치 않다.

대학 입학과 의사로 가는 나의 첫걸음은 흙투성이 경쟁이었지만 아름다웠다. '첫' 해부학 실습을 통해 느꼈던 '이제 나도 정말 의대생이구나!' 하는 마음. 임상 실습을 돌기 위해 받은 내 이름 석 자가 적힌 '첫' 하얀 가운의 아름다움. 가운을 입고 긴장하며 대면하는 나의 '첫' 환자와의 만남. 졸업을 하고 의사 면허를 얻고 졸업식장에서 하는 '첫'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진지함. 이 모든 과정이 의사라는 직업을 택한 모두가 공통으로 겪는 것이다. 그래서 해가 바뀌면 선배들이 추억했던 순간을 나와 동기들이 똑같이 기렸다.

서젼을 꿈꾸어 왔던 내가 처음 들어갔던 수술방의 서늘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수술 가운을 입어보고 수술 참관을 하고 보조했었던 때에는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자랑도 했다. 그런데 보령 병원에서 정형외과 인턴으로 일하던 지극히 평범한 날, '처음'이 나에게 찾아왔다.

서젼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첫 절개에 큰 의미를 둔다. 첫 절개는 수술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이다. 내원한 환자가 검사와 함께 진단받고 심사숙고하여 수술을 결정한다. 수술 날짜를 정하고 입원하면 전날부터 금식하고 수술동의서와 마취 동의서를 받는다.

이로써 수술 전날 준비가 끝난다. 수술 당일, 환자는 병실에서 수술방으로 이송되고 수술대에 눕는다. 반복되는 환자 확인을 마치고 마취 후 소독 방포를 덮는 드렙Drape 과정을 마무리한다. 이제 환자 몸에 첫 수술 메스가 닿는 순간이 준비되는 것이다.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집도의가 알리면 마취과에서는 수술 시작 확인을 하고 수술 시계 카운트가 시작된다. 그제야 첫 절개에 들어간다.

어느 날은 골절로 인해 고정해놓은 철심을 제거하는 수술이 있었다. '고정용 금속 제거술Implant Removal Operation'이라 불리는 수술이었다. 예전 수술의 절개 위치를 찾아 절개하고 박아놓은 철심과 나사를 제거하는 간단한 수술이었다. 수술 시간도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준비를 마치고 어시스턴트 위치에 서 있는데 정형외과 과장님께서 "박 선생님이 한 번 해보지" 하고 메스를 맡겼다. 수술 시작 전에는 일말의 언질도 없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 수술 보조를 서면서 한 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해서인지 자연스레 메스를 집고 '첫 절개'를 했다.

과장님이 어시스턴트의 위치에서 봐주셨고 천천히, 그리고 과감하게 환자의 발목에 박혀 있던 철심 부위까지 절개하여 내려갔다. 적절히 지혈하면서 뼈에 고정된 철심을 제거했다. 이후에는 과장님이 맡아 수술 부위를 확인하고 봉합해 수술을 마칠 수 있었다.

메스를 잡았던 순간에는 인생의 첫절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짧았던 찰나였지만 실수 없이 잘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흥분했다. 수술을 마치고 과장님께 이렇게 수련의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병동으로 돌아와 밀린 일과와 회진을 마친 다음 저녁식사를 할 때야 떠올렸다. '그 순간이 나의 첫 절개였구나.' 여느 의학 드라마처럼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극적으로 진행되는 순간도, 전날부터 긴장하고 고대하며 기다렸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의 한순간이었다.

삶은 드라마처럼 극적인 사건들로 진행되지 않는다. 일상은 서로에게 치이고 흘러가는 감정들로 인해 오히려 아름다운 것이다. 오늘 '처음'의 입회자는 나와 보령 병원 정형외과 과장님, 그리고 스크럽 간호사 셋이었다. 보령 병원의 조용한 수술방에서 진행되었지만 지나고 나니 아름답게 느껴진다.

"더운 날 물냉면 시원하게 먹고 차가운 계곡에 발 담그고 싶다"라든지, "풀밭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라든지,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 조용한 카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싶다" 등의 소소한 행복을 바라는 것처럼 앞으로 찾아올 처음의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

내가 태어나던 첫 순간은 어땠을까. 첫 걸음마를 떼었을 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제 나의 '처음'은 기억조차 없지만 오늘처럼 소소하고도 평범한, 그러나 위대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2011년 5월 12일, 나는 나만의 '처음'을 기리기로 했다.

<23편에서 계속>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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