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와 유럽문명의 완충지, 발칸[2] 2016-03-10 11:58:58
오스트리아를 주마간산하다(2) 사실 발칸여행을 떠나기 전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시작하는 상품들을 놓고 고민을 많이 했다. 특히 빈의 경우는 슬로베니아로 가는 길이 가장 짧고 오스트리아제국과 오스만제국의 관계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만지작거렸던 상품이었다. 결국 베네치아를 구경하고 밀라노에서 비행기를 타는 경로를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빈으로 돌아와 크루아상을 곁들여 비엔나커피를 마시는 일정에서 여유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를 지나면서 빈 이야기를 빠트릴 수가 없겠다. 흔히 크루아상(croissant)이 프랑스빵으로 알려진 것은 1839년 말 오스트리아의 포병 장교였던 아우구스트 창(August Zang)이 파리에 개업한 빈풍의 빵집(Boulangerie Viennoise)에서 만들면서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설에 따르면 크루아상은 헝가리에서 만들어진 빵으로 1683년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로 전해졌고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가지고 갔다고 전한다. 하지만 13세기에 오스트리아에서는 이미 킵펠(Kipferl)이라는 초승달 모양의 빵을 먹고 있었다. 크루아상의 유래에 관한 속설 가운데 이슬람과의 전투와 관련된 것도 있다. 732년 프랑크왕국이 우마이야의 공세를 격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과 1683년 오스트리아가 오스만제국의 침략을 격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이는 크루아상을 금지하기 위한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만든 것이라는 설명이다.(1) 오스만제국이 빈을 공격할 때 한밤중에 터널을 뚫는 소리를 들은 제빵사의 신고로 터널을 파던 오스만군을 격퇴할 수 있었고, 왕실에서 이에 대한 보답으로 오스만의 상징인 초승달 모양의 빵을 만들게 했다는 이야기는 마치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들린다. 당시 오스만군의 땅굴전술은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의 장편소설 <안개 낀 대륙의 아틀라스>에서 자세히 알 수 있다. 오스만군에는 땅굴 파는 전문가로 구성된 부대가 있었고, 상대진영에서도 이 전술에 대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스만군은 땅굴을 팔 때 발생하는 소음을 감추기 위하여 지상군이 포탄을 발사하였다는 것이다.(2) 역시 속설을 사실인양 믿어서는 안 되겠다.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험준한 고개를 오르기엔 힘이 부쳤는지 도로는 곳곳에서 산허리를 뚫고 지나간다. 곳에 따라서는 산봉우리에 하얀 눈이 앉아있다, 어디쯤엔 산꼭대기의 상록수는 상고대를 만들고 있다. 산등성이를 지키는 나무들 가운데 성미 급한 녀석들은 벌써 노랗고 붉게 물들어 있어 모자이크를 만들고 있다, 누군가 발칸을 종교와 인종의 모자이크라고 비유한 발칸을 보러가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오스트리아알프스에는 가을과 함께 겨울이 이미 와 있었다. 아내는 프라하에서 여행을 시작한대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는데 기대치 않은 절경을 즐길 수 있어 참 다행이라고 했다. 잘츠부르크 부근을 지나 슬로베니아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는 동안 가을로 물들어가는 오스트리아의 아름다운 산하를 보면서 많이 부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세기 인류가 저지른 가장 야만적인 짓들이 바로 이토록 아름다운 땅 오스트리아에서 잉태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생각이 달리 할 수밖에 없다. 이종헌 기자가 <낭만의 길 야만의 길, 발칸 동유럽 역사기행>에서 설명한 것을 조금 인용한다. “알프스의 그림 같은 경치와 중세유럽의 고즈넉한 낭만이 가득한 땅.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흐르는 곳. 그림 같은 인스부르크와 잘츠부르크가 있고 모차르트, 요한 스트라우스가 태어난 곳.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 숨이 멎을 것 같은 빼어난 경관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 이런 동화 같은 땅, 낭만적인 땅이 인류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전쟁인 제1&8228;2차 세계대전을 모두 잉태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3)” 제 1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왕가가 일으킨 것이고, 제2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히틀러가 일으켰고, 오스트리아도 동참했으며, 심지어는 또 다른 학살자 스탈린이 오스트리아에서 혁명을 꿈꾸고 있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학살에 오스트리아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동참했는가 하는가에 관하여 에릭 캔들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나치가 통치하는 모든 도시들 가운데 빈은 크리스탈나흐트에 가장 저열했다. 유대인들은 모욕과 잔인한 폭행을 당했고, 사업장에서 쫓겨나고 당분간 자택에서 퇴거당했다. 그리고 그들의 사업장과 집은 탐욕스러운 이웃에게 숟가락까지 약탈당했다(4).”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수정의 밤)는 1938년 11월 9일에서 10일로 넘어가는 밤에 나치 독일이 유대인과 유대인 재산에 폭력을 휘두른 사건이 발생한 것을 두고 말하는데, ‘깨진 유리의 밤’이라고도 한다. 11월 7일 파리에서 폴란드계 유대인 학생 헤르헬 그린슈판이 독일인 외교관 에른스트 폼 라트를 저격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 나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히틀러와 의논을 거쳐 ‘자발적인 시위’처럼 보이게 꾸민 격렬한 보복을 감행할 것을 ‘돌격대원’들에게 촉구했다. 뮌헨으로부터 받은 지시에 따라 독일과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유대인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져 91명이 죽고 수백 명이 중상을 입었다. 약 7,500개의 유대인 상점이 약탈당했으며 유대교 예배당 177채가 불에 타 파괴되었다. 경찰은 개입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5).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사냥꾼으로 활동한 지몬 비젠탈(Simon Wiesenthal)이 “빈에 비하면 베를린의 크리스탈나흐트는 즐거운 크리스마스 축제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반유대적 행동은 상상을 초월했던 모양이다. 린츠를 출발해서 3시간 무렵까지 하늘을 두텁게 덮었던 구름이 조금 걷히면서 파란 하늘이 슬며시 얼굴을 내민다.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호수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려나 보다. 그런데 길지 않은 터널을 막 빠져나가자 파란 하늘에 구름만 몇 점 둥실 떠간다. 오 마이 갓. 발칸에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비 그늘 효과’가 벌써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위키백과에 따르면 “비 그늘은 산맥이 습한 바닷바람을 가로막고 있어 비가 내리지 않는 지역을 가리키는 단어다. 바람이 산비탈을 타고 위로 올라가면서 해안의 평지와 산경사면에는 비가 내린다. 따라서 산을 넘어온 바람은 건조하므로 산너머 지역에는 비가 적게 내리는 비그늘이 생긴다.(6)” 발칸반도는 비그늘효과로 유럽의 통상적인 대륙성기후와는 달리 매우 건조하다. 몬테네그로의 콜라신은 강수량 104인치, 마케도니아의 스코페는 겨우 18인치밖에 되지 않는다. 반면 달마치아해안에서 그리스 서부로 이어지는 좁은 해안지역은 풍부한 강수량을 자랑한다. 드디어 오스트리아에서 슬로베니아로 넘어가는 카라반켄 터널(Karawanks Tunnel)에 도착했다. 길이 7864m인 터널을 10분 정도 걸려 지나면 슬로베니아다.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 사이를 가르는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카라반켄산에 뚫은 이 터널은 1970년대에 계획을 수립할 때는 2개의 차선으로 된 터널을 두 개 뚫는 것으로 계획하였지만, 차량통행이 예상보다 많지 않아 한 개의 터널만 개통하였기 때문에 때로는 차가 밀리기도 한다(7). 참고자료 (1) Wikipedia. Croissant. (2)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 지음. 안개 낀 대륙의 아틀라스 91-109쪽, 문학동네, 2007년. (3) 이종헌 지음. 낭만의 길 야만의 길, 발칸 동유럽 역사기행 288쪽, 소울메이트, 2012년 (4) 에릭 캔델 지음. 기억을 찾아서, 알에이치코리아, 2014년 (5) 다음 백과사전. 크리스탈나흐트. (6) 위키백과. 비그늘. (7) Wikipedia. Karawanks Tunnel.
아시아와 유럽문명의 완충지, 발칸[1] 2016-03-07 05:05:31
오스트리아를 주마간산하다(1) 시차 때문인지 4시 반에 눈을 떴지만 어제의 강행군 탓에 몸은 천근만근이다. 화장실에 다녀온 아내는 다시 잠을 청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잠이 달아난 나는 트위터를 뒤져본다. 와이파이가 잘 터지는 덕이다. 어제 밤늦게 숙소에 든 탓인지 오늘 아침 일정은 678로 간다. 6시 기상, 7시 식사, 8시 출발한다는 말이다. 가지고 온 옷 가운데 제일 두꺼운 옷을 입기로 했다. 이번 여행경로 가운데 가장 북쪽이라서 추운 하루가 될 수도 있다. 버스에 오르니 아침 기온이 7도이다. 밤사이에 비가 더 내린 듯 공기가 상쾌하다. 어제는 몰랐지만 호텔은 호숫가에 있었다. 인구 857만(2015년 기준)의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중앙, 알프스산맥에 걸쳐 있는 내륙국가로 북쪽으로는 독일과 체코, 동쪽으로는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 그리고 서쪽으로는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과 국경을 이루고 있다. 9개의 연방 주로 이루어졌고, 수도는 동쪽 끝에 위치한 빈이다. 대표적인 선사시대 유적으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이 꼽힐 정도로 오스트리아의 역사는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독일과 함께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갈라진 것이 역사의 시작이다. 즉, 샤를마뉴 대제 시절 설립된 행정관구 오스트마르크(Ostmark)가 오스트리아의 기원이다. 오스트리아 지역에서 세를 키운 합스부르크왕가가 15세기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하게 되면서 오스트리아왕국은 부르봉왕가의 프랑스왕국과 함께 유럽을 지배하게 된다. 신성로마제국은 18세기 중반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가 끊겨 부침을 겪다가 나폴레옹에게 패하면서 1806년 해체되었다. 이어진 오스트리아제국 역시 나폴레옹 이후 전개된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제국 내 다양한 민족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해체의 위기를 맞게 된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성립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듯 했다. 하지만 1914년 6월 28일 발생한 사라예보사건을 계기로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한 것이 발단이 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동맹국으로 참전했다가 패전하면서 대부분의 영토를 주변국가에 할양하게 되었다. 1918년 11월 11일 제국은 해체되었고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들어섰다.(1) 버스가 출발하면서 가이드가 린츠(Linz)을 소개한다. 린츠는 오스트리아 북부의 오버외스터라이히 주의 주도이며 193,814명(2014년 기준)이 살고 있는 오스트리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체코국경으로부터 30km 남쪽에 있으며 도나우강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태양계 행성의 운동법칙을 만든 수학자 요하네스 케플러와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가 린츠에서 살았으며, 아돌프 히틀러가 린츠 근처의 브라우나우암인에서 태어나 린츠에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나치는 린츠에 대규모 건축을 계획했고, 산업화를 진행했다.(2) 린츠는 제철소가 유명한데, 철광석은 나지 않지만 도나우강을 통하여 독일에서 수입하는 철광석을 가공하여 수출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오스트리아 특히 린츠와의 인연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포항제철을 지을 때 일본에서 설비를 들여왔지만, 포항제철의 성장을 우려한 일본이 기술제공을 꺼렸다고 한다. 이때 오스트리아 린츠에 있는 푀스트알피네(Voestalpine)의 기술지원을 받게 되는데, 초대 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카여사가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다는 인연으로 가능했다는 것이다. 일본이 포항제철이 오늘날 세계최고의 철강회사로 성장할 것을 잘 예측했지만, 협력을 통한 상생을 모색하지 못하는 좁은 시야를 보였던 것과는 달리 오스트리아의 푀스트알피네는 더 넓은 시야를 가졌던 것 같다. 린츠시내를 빠져나간 버스는 이내 고속도로를 타고 슬로베니아로 향한다. 오스트리아 알프스를 따라 내려온 산록에는 구획이 잘된 초지가 펼쳐지고, 가끔은 노란 꽃이 만발한 유채밭이 애교처럼 섞여있다. 어려서 읽은 동화의 주인공 하이디가 어디선가 금방 나타날 것 같다. 손에 잡힐 듯한 산허리에는 이른 아침의 골안개인지 구름인지가 스멀스멀 흘러내린다. 줄리엣 비노쉬가 주연한 영화 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이 영화에서 줄리엣 비노쉬는 ‘말로야 스네이크’라는 제목의 연극에 시기를 달리하여 두 차례 출연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는 젊었을 때의 상대역을 맡으면서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말로야 스네이크’는 스위스의 실스마리아에 있는 말로야 계곡에서 볼 수 있는 구름 현상을 말한다. 고개를 넘어온 구름이 뱀처럼 흘러 순식간에 계곡을 뒤덮는 모습을 나타낸 이름이다. 이곳의 구름은 예측이 어렵고 잔혹한 뱀의 속성처럼 언제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이 불가하고 은밀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3) 버스가 잘츠부르크 근처 휴게소에 섰다. 장거리운행 버스(Long Distance Coach)의 운전자에 대한 EU의 규제조치 때문이다. 휴게소 아래에 있는 호수는 한 폭의 그림이다. 건너편으로는 호수를 시립하듯 서 있는 산들의 허리에 목도리를 걸친 듯 구름이 걸쳐있고, 잔잔한 호수에는 요트들이 점점이 떠있다. 휴게소로 들어가 커피라도 한 잔 마셔야 하겠지만, 휴게소 안보다는 주변풍경이 더 눈길을 끈다. 그리고 보니 호숫가에 서 있는 나무들이 알록달록 단풍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들러보지도 못한 잘츠부르크(Salzburg)는 인구 146,631명으로 오스트리아에서 4번째로 크고, 음악도시로 알려져 있다. 위대한 지휘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가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현대의 뛰어난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역시 이곳에서 태어났다. 과학자로는 도플러효과를 발견한 크리스티안 도플러(Christian Doppler)가 이곳 태생이다. 700년 경, 이 도시는 암염채굴을 통하여 만든 소금이 주요 산물이었다. ‘Salz’는 독일어로 소금을 뜻하므로 잘츠부르크라는 이름은 ‘소금의 도시’라는 의미이다.(4) 오스트리아에 음악을 유학하고 있는 700여명의 한국유학생들 가운데 많은 수가 잘츠부르크에서 학업에 전념하고 있을 것이다. 유학생중 일부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1999년 주오스트리아 대사 재직할 당시 창단한 한-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활약하고 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를 지나면서 빈 이야기를 빠트릴 수가 없겠다. 흔히 크루아상(croissant)이 프랑스빵으로 알려진 것은 1839년 말 오스트리아의 포병 장교였던 아우구스트 창(August Zang)이 파리에 개업한 빈풍의 빵집(Boulangerie Viennoise)에서 만들면서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설에 따르면 헝가리에서 만들어진 빵으로 1683년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로 전해졌고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가지고 갔다고 전한다. 하지만 13세기에 오스트리아에서는 이미 킵펠(Kipferl)이라는 초생달 모양의 빵을 먹고 있었다. 크루아상의 유래에 관한 속설 가운데 이슬람과의 전투와 관련된 것도 있다. 732년 프랑크왕국이 우마이야의 공세를 격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과 1683년 오스트리아가 오스만제국의 침략을 격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이는 크루아상을 금지하기 위한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만든 것이라는 설명이다.(5) 오스만제국이 빈을 공격할 때 한밤중에 터널을 뚫는 소리를 들은 제빵사의 신고로 터널을 파던 오스만군을 격퇴할 수 있었고, 왕실에서 이에 대한 보답으로 오스만의 상징인 초승달 모양의 빵을 만들게 했다는 이야기는 마치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들린다. 당시 오스만군의 땅굴전술은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의 장편소설 에서 자세히 적고 있다. 땅굴 파는 전문가로 구성된 부대가 있었고, 상대진영에서도 이 전술에 대책을 가지고 있었고, 오스만군은 이를 감추기 위하여 땅굴을 팔 때 발생하는 소음을 감추기 위하여 지상군이 포탄을 발사하였다는 것이다.(6) 역시 속설을 사실인양 믿어서는 안되겠다. 참고자료 (1) 위키백과. 오스트리아. (2) Wikipedia. Linz. (3) 오종희. [영화 읽기: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뱀의 몸짓. 웹진 2015.01.29 (4) Wikipedia. Salzburg. (5) Wikipedia. Croissant. (6)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 지음. 안개 낀 대륙의 아틀라스 91-109쪽, 문학동네, 2007년.
아시아와 유럽문명의 완충지, 발칸[0] 2016-03-03 05:05:38
출발 아내와 함께 가는 세번째 해외여행지로 발칸을 골랐다. 이베리아반도와 아나톨리아반도를 돌아보면서 유럽문명과 아시아문명이 부딪혀 만들어낸 것들을 보고 느끼는 여행의 연장이다. 그것도 터키를 다녀온 지 불과 한 달 만에 발칸에 가는 이유는 오스만의 이슬람문명과 오스트리아의 기독교문명의 충돌현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쇠도 달구어졌을 때 두드리라는 우리네 옛말처럼 말이다. 충분한 고민 없이 다소 감각적으로 결정한 바가 없지 않다. 발칸반도의 여행상품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를 기본으로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가 들어가거나, 혹은 동유럽 국가들을 연계한 다양한 상품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항공편에 따라서도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이탈리아 등 다양한 경로를 따라가기 때문에 그야말로 잘 비교해보고 결정을 해야 한다. 무슨 마음이 들었던지 결정을 하고보니 크로아티아 중심의 여행이 되고 말아서, 언젠가는 또 다른 경로를 따라가는 발칸여행에 나서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단은 이 지역에 남아 있는 고대 유적을 자세하게 살펴볼 요량으로 크로아티아지역을 중점적으로 돌아보는 상품을 골랐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로 들어가서 오스트리아를 지나 슬로베니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잠시 일별하고, 크로아티아를 샅샅이 돌아본 다음에 베네치아를 거쳐 밀라노에서 귀국비행기를 타는 일정이다. 유럽대륙의 동남부에 위치한 발칸반도는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에 걸쳐 있는 발칸산맥을 이르는 터키어에서유래했다. 터키어 발칸(Balkan)은 ‘거칠고 숲이 많은 산악지대’를 의미하지만, 지금은 사어(死語)가 되어 발칸반도만을 의미한다. 근세까지도 고전교육을 받은 유럽 사람들은 발칸산맥을 ‘오래된 산맥’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헤무스(Haemus)라고 불렀다. 발칸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불과 200여 년 전이다. 그전까지 오스만사람들은 로마인의 땅이라는 의미로 루멜리아라고 불렀고, 유럽 사람들은 마케도니아, 다키아 등 옛날 이름으로 부르거나 ‘유럽의 터키’라고 불렀다. 경계가 모호하지만 일반적으로 발칸반도는 도나우강, 사바강, 쿠파 강을 잇는 선의 이남지역을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전부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대부분이 포함된다. 터키,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이탈리아의 일부도 포함되기는 하지만 발칸국가라고는 부르지 않는다.(1) 중세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은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근세에는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8세기 말에도 발칸지역의 대부분은 오스만제국이 지배하였지만, 오스트리아는 슬로베니아를 영유하고 있었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달마티아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몬테네그로와 라구사공화국 같이 작은 나라가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19세기 들어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 등이 독립하면서 오스만제국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세르비아는 1,2차 발칸전쟁을 통해 신흥강국의 발돋움하였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발칸 반도 내의 슬라브 민족을 통일하여 강력한 국가를 수립하려는 야심을 키웠다. 결국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 사건이 빌미가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후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적 완충지역이었던 발칸반도가 ‘유럽의 화약고’라고 부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겪고도 해결되지 못한 민족간의 갈등이 원인이 된 유고슬라비아 내전 이후에는 ‘서로 적대하는 작은 세력으로 분열시키다’라는 의미의 ‘발칸화하다(balkanize)’ 혹은 ‘발칸화(balkanization)’라는 단어를 낳게 되었다.(2) 발칸반도의 불행은 7세기부터 최소한 17세기 말까지 유럽의 영토와 정신을 복잡한 투쟁 속으로 몰아넣은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몰이해로 생겨난 깊은 간극 탓이라고 발칸사의 권위자인 마크 마조워교수는 말한다. 그가 “무슬림국가들이 비이슬람교도를 백성으로 받아들인 것과는 달리 기독교 국가들은 무슬림을 추방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위협으로 간주하기까지 했다(3).”라고 한 것을 보면 기독교국가들의 책임이 더 커 보인다. 사실상 오스만제국은 기층민을 수탈하던 토착지배계급을 싹쓸이해주었을 뿐 아니라 종교적 자치권도 인정해주었다. 그리하여 오스만 수도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은 “투르크 정부가 아닌 다른 어떤 정부의 지배도 원치 않는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지방 관리들로 하여금 가난한 농민을 억압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농민들이 매년 내는 것으로 알고 있는 세금 외 별도의 세금을 요구하여 그들을 괴롭히지도 말아야 한다.”라고 규정하여, 농민들을 보호하고 지방관리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던 오스만제국이 운용한 독특한 관료제도의 덕이라고 하겠다. 집을 나서 공항으로 향하는데, 출근시간을 조금 넘긴 탓인지 버스가 금세 올림픽대로에 접어든다. 한여름 푸르렀던 대로변 나무들이 푸른빛을 잃고 노랗고 붉은빛이 뚜렷하다. 계절이 바뀌는 모습이다. 아내는 우리 산하가 제일 아름다울 때인데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쉽단다. 사실 우리 산하는 사계절 아름답다. 한강이 온통 뽀얀 강안개로 덮여있다. 여의도를 지나니 안개가 더욱 짙어진다. 어쩌면 마조워교수가 비유한 것처럼 ‘특별히 시간의 안개 속으로 실종되어 버리려는 경향’을 가진 발칸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서 일까? 마감시간 무렵에 탑승을 한다. 답답한 공간에 일찍부터 몸을 가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한항공과 코드셰어를 하는 체코항공의 비행기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좌석이 2-4-2로 배치되어 있어 창가 쪽 자리를 배정받았다. 오늘 비행예정시간은 11시간이다. 활주로를 떠난 비행기가 서해바다 위로 날아오르는데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눈부시다. 어린이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린다. 피곤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20여년 전에 저 나이의 작은 아이를 데리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던 생각을 해서라도 참는다. 이제는 대륙을 건너가는 비행기를 타는 일이 힘에 부친다. 특히 열차나 버스와는 달리 비행기에서는 쉽게 잠들지 못하는 것도 원인이 되는 것 같다. 책을 읽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눈도 아프고 집중도가 떨어진다. 사이사이에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다. 드디어 비행기가 고도를 낮춘다. 현지 시각으로 5시 무렵이니 곧 해가 질 터이다. 하지만 구름 위에 있는 탓인지 운평선(雲平線) 위에 붉은 빛이 조금 남아있다. 비행기가 구름 속으로 파고들면 사라질 모습이다. 비행기가 착륙해서 게이트로 이동하는데 활주로에 쏟아지는 빗줄기가 예사롭지 않다. 거의 양동이로 퍼붓는 수준이다. 발칸의 우기가 시작되나 보다. 여행 내 빗속을 다녀야 하나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든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 도착했다.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2악장 ‘블타바’의 선율이 기내를 가득 채운다. 독일어로 ‘몰다우’라고도 하는 블타바강이 유장하게 흐르는 모습이 절로 연상된다. 입국수속을 하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버스를 수배해서 타고 출발한 것은 7시가 넘어서였다. 국경을 지나 오스트리아의 린츠(linz)에 있는 숙소까지 4시간을 이동하는 강행군이다. 도착시간이 한국시간으로 따지면 이미 자정을 넘긴 셈이니 밤을 도와 이동하는 셈이다. 체코슬로비키아에서 오스트리아로 가는 국도는 우리나라 시골길처럼 왕복 2차선도로에다 신호동이 곳곳에 있어 가다서다를 반복한다. 비까지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가끔 급제동을 걸거나 무언가를 피하듯 핸들을 잡아채는 바람에 깜짝 놀라곤 한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도로 사정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하는데, 오스트리아에 들어서서도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좁은 길을 이리저리 돌아 버스가 선 곳은 오스트리아의 국경도시 린츠의 좁은 골목에 있는 스타이겐베르거호텔이다. 벌써 밤1시가 넘었다. 참고자료 (1) 위키백과. 발칸반도. (2) 나무위키. 발칸반도. (3) 마크 마조워 지음. 발칸의 역사 24쪽, 을유문화사, 2014년
동서양을 연결하는 터키로…떠나는 모든 길은 아름답다 2015-12-28 05:13:35
떠나는 모든 길은 아름답다 그랜드 바자르 구경을 마지막으로 7박9일 터키여행의 공식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아나톨리아반도의 절반을 도는 살인적(?)인 일정을 무사히 소화해냈다는 뿌듯함과 터키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문화유산의 일부만을, 그것도 눈도장 찍듯 보고 말았다는 아쉬운 느낌이 진하게 남았다. 그래도 이번 여행은 그동안 막연하던 터키에 대하여 눈을 뜨는 기회가 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보고 싶은 곳을 골라볼 수 있는 자유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함께 여행한 일행들은 단체여행에 최적화되어 있었던 것도 좋은 여행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동행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한편 다른 일행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무리하지 않을 정도로 배려하는 세심함이 돋보였다. 오히려 가이드가 약속시간에 늦게 나타나기도 했지만, 전체 일정에서 약속시간에 늦은 일행은 없었다. 환상의 여행팀이었다. 카피라이터 김재호는 "여행은 장소의 여행임과 동시에 사람의 여행이다"라고 했다. 그 사람의 범주에는 여행지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 여행지에 사는 사람, 여행지에서 만난 여행자, 그리고 여행을 함께 하는 사람까지도… 단체여행에서는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하게 된다. 단체여행에서 만난 인연이 발전하여 또 다른 여행을 함께 하는 등 관계를 이어가는 분들도 있다. 그런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함께 여행을 하는 잠시의 인연으로 끝나는 경우에도 나의 삶에 영향을 남기는 것 같다. 단체여행의 특성상 터키 사람들의 속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게 접촉할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자유여행으로 터키를 다녀온 사람들은 대부분 터키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70세가 되던 해에 살던 집을 처분하고 세계를 여행하는 '집 없는 삶'(Home Free Life)을 즐기는 린 마틴과 팀 마틴 역시 터키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요약했다. "미국인들은 터키라고 하면 고대 유적과 청록색 바다와 아름다운 직물과 향신료와 첨탑과 궁전 정도를 떠올리지만, 사실 터키의 진정한 보물은 터키 사람이었다. 터키사람들은 다정하고 영리하며 사귐성이 좋고 재미가 있었다.(1)" 마틴 부부처럼 살아보는 것도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는 듯하다. 그래도 집 떠나면 X고생이라고 하는 말처럼 내 집에서 편하게 지내는 것이 제일 좋다. 물론 삶에 변화를 주기 위하여 잠시 집을 떠나 세상 구경을 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마지막 날 비가 내리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었지만, 행운은 끝까지 우리편 이었다. 그랜드 바자르에서 나와 공항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만 창밖 풍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졌다. 버스 유리창으로 흘러내리는 비 때문에 굴절되는 바깥 풍경이 마치 거친 파도에 흔들리는 배와 같다. 도로 위에 거센 물길이 생길 정도로 엄청난 비였다. 하지만 일정에 남은 여유시간을 이용하여 면세점에 들어갈 때는 거짓말처럼 비가 멎었다. 면세점은 공식 일정에 없는 시간 때우기로 들른 것이라서 크게 기대를 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규모가 작은 탓에 신상보다는 오래된 모델을 할인해서 파는 전략을 구사하는 듯했다. 하지만 물건도 인연이 닿는 주인을 만난다고 이곳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한 일행도 있었다. 물건을 산 사람이나 판 사람 모두 기대하지 않았던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다. 모든 여행은 집에 돌아와 문에 열쇠를 넣는 순간에 끝나는 것이다. 따라서 집에 돌아올 때까지 긴장을 풀면 안 된다. 해외여행에서는 특히 귀국비행기를 타는 마지막 과정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가이드는 공항에 여유 있게 도착할 수 있도록 일정을 짠다. 빠듯한 일정 때문에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야말로 비상사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번 터키여행에서는 마지막 날 일정을 너무 여유 있게 잡았던 것 같다. 9시 2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우리가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4시반경이었나? 탑승수속 창구가 6시에 연다고 해서 저녁을 먼저 먹기로 했다. 탑승수속을 하는 과정에서 창구직원과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귀국비행기에서 아내와 나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앉게 된 것이다. 따로 또 같이 여행을 하는 셈인데 비행기 안에서 움직일 때는 모두 편하기는 하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같이 앉아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어 달갑지만은 않았다. 이스탄불 공항에서 주의할 점 하나. 가이드가 미리 귀띔해준 것처럼 출발하기 1시간 20분 전에 출발 게이트가 바뀌었다. 면세점 등을 돌다가 출발시간에 꼭 맞추어 게이트를 찾았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수시로 출발게이트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터키여행은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도 길고, 일찍 숙소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아서 책을 읽을 시간이 많았다. 터키 여행에 들고 갔던 책은 쉴레이만 세이다의 <터키 민족 2천년 사>, 전규태의 <단테처럼 여행하기>, 엘러스테어 보네트의 <장소의 재발견>. 정은길의 <나는 더 이상 여행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이희철 <터키> 등이었다. 물론 떠나기 전에 터키에 관한 다양한 책들을 미리 읽고 준비를 한다고는 했지만, 막상 현장에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아무래도 총기가 예전과 같지 않은 탓이다. 터키에 한 번 다녀왔다는 인연 때문인지 터키와 관련된 뉴스가 귀에 쏙 들어온다. 앙카라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하여 사상자가 났다는 뉴스에 놀라면서도 안타까운 심정이 되었다가도 한편으로는 여행 중에 불상가가 일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이라이트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이스탄불 공항에서 폭발사고가 있었다는 뉴스도 충격이었다(2). 유럽 쪽에 있는 아타튀르크 공항이 아니라 아시아 쪽에 있는 사비하교크첸 공항에서 발생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도심의 공항에 박격포 공격으로 추정되는 폭발사고가 있었다고 하면 터키여행을 다시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3개월에 걸쳐서 터키에 다녀온 이야기를 정리했다. 7박9일 다녀온 것을 무려 27개 꼭지로 뻥튀기했지만, 그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자세히 쓰기로 들면 한없이 늘어질 것 같아서 단체여행을 한다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은 정도로 요약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재하는 동안 응원해준 독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연재를 이어가는데 큰 힘이 되었다. 독자와 특정하지 않은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원고마감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연재물을 이어가는 일은 큰 부담이다. 스페인에 이어 터키 여행기를 사고(?) 없이 마무리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한 달 정도의 쉬는 기간을 둔 다음에 발칸 여행기로 독자 여러분을 만나보게 될 것 같다. 발칸반도는 오랜 세월 동안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면서 유럽의 기독교문명과 충돌한 현장이기도 하다. [끝] 참고자료 (1) 린 마틴 지음.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 131쪽, 글담출판, 2014년. (2) 연합뉴스 2015년 12월 24일자 기사. “이스탄불 공항 폭발사고 '박격포 테러' 가능성 제기”
동서양을 연결하는 터키로…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보스포루스 해협 2015-12-24 05:14:46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보스포루스 해협 이종헌은 보스포루스해협에서 유람선을 타는 일이야 말로 이스탄불관광의 꽃이라고 했다.(1) 뱃머리에 올라 쏟아지는 바람을 맞으면서 바라보는 해협은 세상의 근심과 아쉬움을 날려버리기에 부족함이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양손을 펼치면 왼손으로는 유럽대륙을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아시아대륙을 붙잡을 것 같이 좁은 해협에서 세상의 근심걱정을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세상을 지배한 유럽대륙의 기상과 비상하는 아시아대륙의 생동감을 느껴보라는 권유 역시 와 닿지 않는다. 유럽이 세상을 지배한 것은 20세기 이후의 백여 년에 불과할 뿐이다. 로마제국도 겨우 지중해를 둘러싼 지역만을 다스린 우물 안의 개구리였을 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아시아가 융성할 적에는 유럽에 많은 것을 베풀었지만, 유럽이 힘을 얻었을 적에는 세상을 눈아래 깔고 파괴하는데만 골몰했던 것 같다. 심지어는 20세기 들어 짧은 기간 동안 이룩한 발전을 나누어준다면서 실질적으로는 착취하고 지배하려는 속셈을 숨기고 있었던 것 아닌가? 지배하고 지배를 당하고 하는 것도 오랜 역사를 통하여 보면 눈 깜빡할 사이에 불과하다. 보스포루스해협을 가르며 달리는 유람선에 몸을 싣고 보니 이 좁은 곳을 둘러싸고 티격태격한 인간의 과거사가 그저 허망하지 싶다. 보스포루스다리까지를 왕복하는 유람선에는 우리 일행만 탑승해서인지 여유롭다는 느낌이 든다. 위층에 올라가보니 아무래도 가까운 유럽쪽 해안으로 눈이 간다. 방금 구경한 돌마바흐체궁전을 비롯하여 지금은 호텔로 개조해서 영업하고 있다는 츠라안궁전이 얼마나 대단한 규모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보스포루스대교 쪽 하늘이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히고 휘몰아치는 바람이 심상치 않다. 이내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진다. 결국 위층에서 실내공간인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했다. 빗물이 흘러내리는데 더하여 뿌옇게 흐려진 창문너머로 아시아쪽 해안을 구경한다. 유럽쪽 해안에는 대규모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것과는 달리 아시아쪽 해안에는 주택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유람선 위층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누비는 즐거움이 더했을 것 같은데 아쉽다. 오르한 파묵은 보스포루스에서 노는 즐거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거대하고, 역사적이고, 방치된 도시 속에 살면서 깊고, 힘차고, 변화무쌍한 바다의 자유와 힘을 당신의 마음속에서 느끼는 것이다. 보스포루스의 급류에서 빠르게 전진하는 여행객은 복잡한 도시의 더러움, 연기, 소음의 한가운데서 바다의 힘이 자신에게 전이되고, 그 모든 군중, 역사, 건물 속에서 여전히 홀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2)” 아마도 이스탄불에 사는 터키 사람이기에 가지는 특별한 느낌이 아닐까 싶다. 오르한 파묵은 <이스탄불>에서 자전적인 내용을 적으면서 또한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의 변화, 특히 보스포루스해협에 관한 것들을 많이 다루었다. ‘이스탄불에서는 육 개월 머물러야 한다네’라고 친구 루이 뷔에에게 편지를 썼던 플로베르처럼 서양의 여행자가 남긴 이스탄불에 대한 인상을 비롯하여 보스포루스 풍경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남긴 앙투안 이그나스 멜링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파묵에게 보스포루스는 영원한 탐구의 대상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보스포루스의 물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소식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지도 모른다. 파묵은 소설 <검은책>에서 보스포루스부근의 지각이 올라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적었다. 그리고 미래에는 ‘보스포루스해협’이라고 했던 천국이 번쩍이는 이빨을 유령처럼 드러낸 진흙투성이 난파선이 드문드문 번들거리는 시커먼 늪으로 변하지 않을까 걱정한다.(3) 보스포루스해협의 바다를 잘 들여다보면 바다 속에 있는 길고 좁은 협곡을 따라 흑해에서 지중해 방향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바닷물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반면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다 속에서는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물의 흐름이 있다고 한다. 유라시아대륙에서 흑해로 흘러드는 강물이 섞여든 흑해의 가벼운 물은 바다의 위쪽을 따라 지중해로 흘러가고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무거운 바닷물이 흑해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7500년 전 빙하기가 끝나기 전까지 보스포루스는 유럽과 아시아 대륙 사이에 있는 깊은 계곡으로 된 땅이었다. 빙하기가 끝나면서 빙하가 녹은 물이 흑해와 에게해 그리고 마르마라해에서 쏟아져 들어오면서 바다로 바뀐 것이다.(1) 무섭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보스포루스다리 부근에서 배를 돌릴 무렵부터 가늘어지면서 갈라타 다리 부근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는 멎었다. 다행이다. 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점심을 먹으로 갔다. 이날 점심은 소고기케밥이었는데, 이날따라 향신료를 많이 넣었던 모양으로 조금 불편했다. 점심 후에는 터키여행의 마지막 공식일정인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로 이동한다. 알고 보니 그랜드 바자르는 블루 모스크와 히포드럼을 지나서 가기 때문에 우리는 히포드럼을 세 번째 지나는 꼴이 되었다. 오락가락하는 비 사이로 그랜드 바자르로 이동하는 동안 무슬림 예배시간이 되었는지 아잔소리가 울려 퍼진다, 모든 모스크에서 아잔을 노래하기 때문에 아잔소리가 겹쳐 들린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메카를 향하여 절을 하는 무슬림이 눈에 띄지 않더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터키여행기를 적으면서 아잔소리가 울려 퍼지자 거리에서 예배를 드리는 무슬림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 것 같은데 그 사이에 세상이 변했나 싶다. 터키어로는 ‘지붕이 있는 시장’이라는 의미의 카팔르 차르슈(터키어:Kapalıçar&351;ı)라고 부르는 그랜드 바자르는 비잔틴제국 시절 지어진 것이다.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정복한 메흐메드2세의 명에 따라 1461년 확장한 이래로 여러 차례의 화재와 지진 등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보수와 증축이 거듭되었다. 이스탄불이 오스만제국의 중심이 되고, 시장 밖에 실크로드를 건너온 대상들이 짐을 풀 수 있는 카라반 사라이를 설치하면서 지금은 3만 700제곱미터의 면적에 보석, 카펫, 구리와 가죽제품, 수공예품 등을 파는 4천여 개의 상점이 들어서 있다. 오늘날 하루 25만에서 40만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4) 시장에는 모두 27개의 문이 있고 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 길을 잃으면 방향을 잡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가이드는 1번 게이트에 일행을 풀어놓고 길을 따라 쭉 나가면 7번 게이트에 도착한다고 일러주면서 옆 골목으로 깊이 들어가지 말라고 강조했다. 막상 시장에 들어섰더니 재래시장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현대화된 탓에 보석, 가죽 등 특별해보이지 않은 상품들을 팔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제한된 시간에 제한된 장소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날 그랜드 바자르에서 본 특별한 것은 모든 가게들이 붉은색 터키 국기를 내걸고 있는 점이었다. 그리고 아랍풍의 요술램프가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작은 쟁반에 차를 담아 나르는 남자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상술이 뛰어난 이곳 상인들은 거래에서 차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상인들은 물건을 사려는 사람에게 공손하게 차를 권하고 손님이 차를 받아들이면 일단 거래를 시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참고자료 (1) 이종헌 지음. 우리가 몰랐던 터키 역사기행 112-113쪽, 소울메이트, 2013년 (2) 오르한 파묵 지음. 이스탄불 79쪽, 민음사, 2008년 (3) 오르한 파묵 지음. 검은책1 34-35쪽, 민음사, 2007년 (4) Wikipedia. Grand Bazaar, Istanbul.
동서양을 연결하는 터키로…오스만제국 붕괴의 신호탄, 돌마바흐체 궁전 2015-12-21 05:12:00
오스만제국 붕괴의 신호탄, 돌마바흐체 궁전 터키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전날 밤 선택관광으로 이스탄불의 야경을 즐기고 숙소에 도착한 것은 11시를 훨씬 넘긴 시간이었다. 금요일 마지막 예배를 마치고 귀가하는 사람들이 탄 차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통체증을 유발하는 원인도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전날 밤 늦은 것도 있고, 마지막 날 일정에 여유가 있다고 해서 8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닝콜이 7시에 울리는 바람에 아침시간이 분주해지고 말았다. 짐을 빠트리지 않고 버스에 탈 수 있었던 것이 천만다행이다. 마지막 날 예정된 일정은 선택관광상품으로 돌마바흐체궁전(Dolmabah&231;e Sarayı)을 보고, 이어서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유람선을 탄 다음에 점심식사를 하고서는 그랜드바자르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저녁 9시20분에 떠나는 비행기를 탑승하도록 되어 있다. 돌마바흐체는 ‘정원으로 가득 찬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스만제국의 14대 술탄 아흐메드1세(재위기간 1603-1617)가 이곳에 작은 정자를 세운 뒤로 목재 건물들이 들어서고 아름다운 정원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이름이다. 아흐메드1세 이후에 세워졌던 목재건물들은 1814년에 있었던 대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31대 술판 압뒬메지드는 그때까지 사용해온 톱카프궁전이 유럽의 궁전들과 비교하면 호화롭거나 안락하지 않아 구닥다리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기울어가는 오스만제국의 위엄을 만방에 과시하기 위하여 새로운 궁전을 짓기로 결심한 것이다. 유럽제국들의 위세가 커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 선대 술탄 마후므드2세는 자식들을 유럽으로 유학시켜 근대화된 유럽의 문물을 배우도록 했는데, 파리에 간 압뒬메지드는 당시 막강하던 나폴레옹군대에 매혹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돌마바흐체궁전이 베르사이유궁전을 모방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나보다. 참고로 아흐메드1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황위 계승법을 개혁한 것은 중요한 치적으로 기록된다.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황위 계승에 관한 원칙은 ‘새로 즉위한 술탄은 자신의 형제를 모조리 제거한다.’라는 것이었다. 4대 황제 바예지트 1세의 아들 4형제가 황위계승을 두고 10년에 걸쳐 내전을 벌였는데, 결국 옥좌를 차지한 메흐메트2세가 국법으로 정한 것이었다.(1) 메흐메트2세가 이런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자신의 경험도 있었겠지만 자식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는 전통을 유지하여 단명했던 대셀주크 제국(1037년 ~ 1194년)이나 소아시아 셀주크(1077&8211;1307)의 전례를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후계자들에게 영토를 분배하는 것은 투르크족 국가들의 오랜 관습이었다. 하지만 이 관습은 형제들 간의 유혈충돌을 불러와 나라가 망하는 요인이 되었다. 대셀주크제국의 변방에 있던 오스만공국이 불과 한 세기만에 위대한 제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영토분배의 관습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2) 버스에서 내려 가이드를 따라가다 보면 4층 높이의 시계탑을 먼저 만나게 된다. 이어서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정문을 지나면 화려한 정원에 들어서게 된다. 정원의 가운데 우아한 모습으로 조각된 일곱 마리의 백조가 물을 뿜어 올리는 분수가 있다. 분수를 지나면 돌마바흐체 궁전의 측면에 있는 출입구에 이르게 된다. 유람선을 타고서 보스포루스해협에서 돌마바흐체 궁전을 바라보면 유럽 궁전의 전통적 양식인 양편으로 부속건물을 날개처럼 거느린 모습이다. 궁전의 정면의 정원에는 술탄이 배를 탔던 정박장도 볼 수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터키에서 가장 큰 궁전으로 4만5천 제곱미터의 넓이에 46개의 연회장과 285개의 방을 가지고 있다. 6개의 하맘과 할렘도 갖추고 있다. 1843년 돌마바흐체궁전을 짓기 시작할 무렵 오스만제국의 재정형편은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13년이 지난 1856년에야 완공을 보게 되었다. 궁정 건축가 가라벳 발얀(Garabet Balyan)이 설계한 궁전은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이나 오스트리아의 쉔부른궁전을 모방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유럽의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 양식에 전통적인 오스만 건축을 버무려서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3) 톱카프궁전이 이즈닉 타일과 오스만 조각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과는 달리 돌마바흐체 궁전에는 금과 수정으로 뒤덮었다고도 말한다. 특히 의전실(Ceremonial Hall)에 걸려 있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수정 샹들리에는 영국의 빅토리아여왕이 헌정한 것으로 750개의 램프가 달려있고 무게가 무려 4.5톤에 이르러 세계에서 가장 큰 샹들리에로 꼽힌다. 궁전의 내부를 장식하는데 사용된 금이 14톤 은이 40톤에 이르렀다고 하니, 돌마바흐체 궁전은 한마디로 보물이라고 해야겠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내부는 사진을 찍을 수 없어 눈이 더 호사를 한 것 같다. 하지만 화려하기는 하지만 깊이가 없다고 해야 하나? 으리으리한 궁전을 구경하다보면 사용의 편리보다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의 건축과 장식으로 도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아라베스크와 칼리그래피 등 이슬람 전통문양 이외에도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문양과 그림들을 걸어놓았다. 사람의 형상이나 인간이 만든 무엇도 장식하지 않는다는 이슬람의 전통을 버린 것이다. 압뒬메지드의 뒤를 이은 아들 압뒬라지드 황제는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북쪽으로 1km 떨어진 해안에 츠라안궁전을 새로 지어 사용하였고, 그의 뒤를 이은 합뒬하미드 2세 황제는 츠라안 궁전도 마음에 안든다고 가까운 이을드즈 언덕에 있던 별궁을 증축하여 만든 궁전에서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돌마바흐체 궁전은 불과 20여년 밖에 사용되지 않은 셈이다. 예로부터 제국이 망하려면 여러 가지 증후가 나타난다고 했는데 돌마바흐체 궁전이 첫 번째 징후는 아니었을까? 궁전을 구경하다보면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가 집무실로 사용하던 작은 방도 볼 수 있다. 그의 집무실에 걸려 있는 시계는 그가 죽은 9시 5분에 세워져 있다. 아타튀르크가 오스만제국의 술탄을 꿈꾸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쩌면 신생 터키공화국의 재정을 새로운 대통령궁을 짓는데 쓸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돌마바흐체 궁전을 나와 보스포루스다리까지 돌아오는 유람선을 탔다. 유람선 선착장으로 이동하면서 꾸물거리던 하늘이 한 두 방울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결국 유람선을 타는 동안, 그랜드 바자르로 이동하는 동안 그리고 공항으로 이동하는 동안 수시로 비를 쏟아냈다. 다만 배를 타거나 버스를 타는 동안에 쏟아지던 비가 걸어서 이동하는 동안에는 거짓말처럼 멎더라는 것을 행운으로 돌려야 하나? 서울을 떠나올 때 메는 가방에 넣어 두었던 우산 두 개를 전날 밤 짐으로 부치는 가방에 집어넣었기 때문에 지금은 버스 화물칸에 실려 있으니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터키를 여행하는 동안 이날까지 날씨가 화창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가방에 넣어 메고 다녔는데 정작 비가 오는 오늘은 쓸 수가 없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휴대폰 앱에 나온 일기예보가 맑을 것이라고 해서 우산을 치웠던 것인데 기상청도 믿지 않는 내가 앱을 너무 믿었나 보다. 결국 앱도 기상청의 기상정보를 이용하는 것인데 말이다. 그리고 보니 우리 가이드는 여행하는 동안 쇼핑에 관한 정보 이외에는 기상정보와 같은 소소한 정보를 제공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참고자료 (1) 나무위키. 아흐메트1세. (2) 쉴레이만 세이디 지음. 터키 민족 2천년 사, 애플미디어, 2012년 (3) Wikipedia. Dolmabah&231;e Palace.
동서양을 연결하는 터키로…이스탄불의 중심, 탁심광장(2) 2015-12-17 05:14:01
이스탄불의 중심, 탁심광장(2) 튀넬역에서 로프트레인을 탔는가 싶었는데 벌써 카라쾨이 역에 도착했다. 지상에 있는 승강장에 도착해보니 트램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열차가 'HYUNDAI'라는 로고를 달고 있다. 현대정공에서 만든 열차인가보다. 사진은 찍다가 트램을 놓칠까 겁나기도 했지만, 일단 찍고서 뛰어가기로 했다. 갈라타다리에 가까운 시르케지 역까지는 불과 세 정거장 밖에 되지 않는다. 운좋게 트램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앞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무릎에 토끼를 안고 있어서 놀랐다. 애완용으로 키우는 모양이다.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과 유리창에 비친 할머니의 얼굴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의 장편소설 <에프라시압 이야기>에 나오는 할머니가 이런 모습이었을까? <에프라시압 이야기>는 죽음과 젯잘데데가 목숨을 두고 내기를 하면서 나눈 여덟 꼭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죽음과 젯잘데데가 이야기를 만들어 승부를 내는 방식이다. 주제가 공포, 종교, 사랑, 그리고 천국에 이르기까지 승부가 나지 않는다. 첫 번째 ‘공포’를 주제로 젯잘데데가 죽음에게 한 이야기는 ‘비다즈의 저주’인데, 그 첫머리는 이렇다. “아나톨리아 마을에 사는 아이들의 밤이 아주 길고, 아주 재미있고, 약간은 ‘소름 끼치게’ 지나가는 이유 중 하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들려주는 정령과 요정 이야기들 때문이다. (…) 이야기를 할 때 아이들의 상상력을 장악하는 능력이 거의 입신의 경지에 이른 할머니는 아이들을 더욱더 소름 끼치게 하기 위해 어떤 것을 말해주고 숨겨야 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1)” 생각해보니 돌아가신 큰 고모님이 집에 오실 때마다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대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트램 시르케지역에서 내려 걷다 보니 첫날 지나갔던 길이다. 이번에도 일행들을 놓칠까 정신없이 가다보니 시르케지 역을 그냥 지나쳤다. 시르케지역(Sirkeci terminal)은 1873년 압뒬하미드 2세 때 프랑스 파리에서 이스탄불을 잇는 철로가 개통되면서 문을 열었다. 원래 톱카프궁전에 딸린 건물이 있었지만 1863년 화재로 폐허가 된 터에 들어선 것이었다. 크림전쟁이 끝난 다음 오스만제국에서는 유럽과 이스탄불을 연결한 철도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세 차례에 걸친 계약이 투자금 확보의 어려움으로 거듭 파기된 끝에 1869년 바바리아 출신 벨기에 은행가 모리스 드 허쉬(Maurice de Hirsch) 남작이 루멜리철도(Rumeli Railroad) 부설허가를 받아 공사를 진행한 끝에 1872년 7월 21일 개통을 보았다.(2) 아가사 크리스티의 명작 추리소설 <오리엔트 특급살인>에 나오는 오리엔트특급열차는 공식적으로는 1883년 10월 4일 파리를 출발한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루마니아의 지우르지우에서 다뉴브강을 건너 불가리아의 바르나까지 기차로 운행하고 바르나에서 이스탄불까지는 페리로 운항하는 코스였다. 이후에 알프스 산맥을 관통하는 터널들이 잇달아 개설되면서 취리히, 베니스 등을 거치는 노선들이 추가되었고, 아테네까지 운행하는 노선도 개설되었다.(3) 밀실살인의 고전 <오리엔트 특급살인>에서는 이스탄불을 떠난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베오그라드를 지나서 만난 폭설에 갇힌 상태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는 시리아의 알레포에서 출발하여 이스탄불의 건너편 위스키다르에 있는 하이다르파사역에 도착하는 토러스 급행열차 안에서 시작한다. 토러스산맥을 지날 무렵 실리시아 산협(山峽)을 바라보던 데베남양이 “저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도 즐길 수 없는 제 마음이 안타까워요”라고 애버스너트대령에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스릴러물인 탓에 토러스산맥의 풍광을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았을 터이다. 시르케지역 앞을 지나 왼편으로 돌면 갈라타다리다. 난간을 따라 등불을 매달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갈라타 다리 위에는 한밤중인데도 낚시를 드리운 사람들이 늘어서 있다. 다리 중간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니 다리의 아래층에는 대낮같이 불을 밝힌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우리 일행은 가게 밖에 놓인 좌석을 차지하고 맥주와 커피 등을 시켜 마시면서 금각뿔만의 야경을 즐겼다. 가이드는 물담배를 주문해서 일행들에게 피워보라고 권했다. 물담배는 터키어로 나르길레(nargile)라고 한다. 다양한 향을 가미한 담배잎을 태운 연기를 흡입하기 전에 물을 통과하도록 해서 연기의 자극을 순하게 만든다. 터키 사람들에게 나르길레는 일종의 역사와 풍류를 즐기는 상징이기도 하다.(4) 필자도 예전에는 담배를 피운 적도 있지만 연기를 빨아들여 코로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모습이 생경한데다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기침을 쏟기도 해서 나서지는 않았다. 금각뿔만 한 가운데 있는 전망대에서는 조명을 받아 환한 예니자미(Yeni cami)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새로운 모스크라는 의미의 예니자미는 1597년 술탄 무라드3세의 왕비 사피예의 후원으로 짓기 시작했다. 무라드3세 사후에 왕비의 아들 메흐메드3세가 즉위한 다음에는 규모를 확장하려다가 궁정의 반발을 불러오는 바람에 공사가 지연되었고, 메흐메드3세가 죽은 다음에는 공사를 포기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결국 새로 즉위한 술탄 아흐메드 1세는 사피예왕비를 하렘으로 유폐하여 공사가 중단되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왕비가 죽은 뒤인 1665년 완공하기에 이르렀다. 대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도제 다부트 아가(Davut A&287;a)의 설계로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그 역시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등 우여곡절이 많은 모스크다.(5) 중앙돔의 지름이 17.5미터이고 높이가 36미터에 이른다. 왕실 영묘를 비롯하여 이스탄불의 다른 모스크처럼 병원, 학교, 대상들의 숙소, 시장 등이 부설되어있고, 술탄 아흐메드 3세 시절에는 도서관도 지었다. 이곳에 부설된 시장이 지금의 이집트 바자르(Egyptian Bazaar)이다.&160;&160; 예니자미의 반대편 언덕 위에는 갈라타탑이 붉은 조명을 받고 있다.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의 소설 <안개낀 대륙의 아틀라스>에서는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처음 도착한 제노바사람들이 뱃길을 안내한 비둘기의 둥지가 있던 장소에 탑을 세웠다는 소문을 적고 있다.(6) 갈라타탑이 있는 지역을 갈라타라고 부르는 것은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 사이에 켈트족인 갈라티아인들이 살았다고 해서 유래한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전쟁 때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점령한 베네치아 사람들은 이탈리아 본토에서도 앙숙인 제노바사람들을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쫓아낸 바 있다. 니케아 지역으로 물러나 있던 비잔틴제국의 미하일8세가 1261년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탈환한 다음에 베네치아사람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제노바와 동맹을 맺고 갈라타지역을 할양해준 것이다. 다만 제노바 사람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갈라타지역의 성벽과 성채를 파괴하도록 했다.(7) 갈라타탑은 1348년에 제노바인들이 안전을 위하여 비잔틴제국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웠다.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지은 갈라타탑은 높이가 66.9미터, 이랫쪽 바깥벽까지의 직경이 16.45미터이고 안쪽 직경은 8.95미터이며, 벽의 두께는 3.75미터이다. 16세기 오스만제국은 천문관측소로 쓰다가 16세기 말에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1717년부터는 소방탑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1875년 폭풍으로 첨탑이 파괴되었고, 1794년과 1831년의 대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864년에 수리하였다. 1967년 복원공사를 마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8) 소방탑으로 사용할 적에 화재감시원은 일당으로 10악체(오스만제국의 기본화폐로 사용하던 은화로 1악체는 은 1.154그램으로 만들어졌다)를 받았는데 화재를 제때 발견하면 20악체의 상금을 받았지만, 그러지 못하면 화재가 진압될 때까지 시간당 스무 대의 몽둥이세례를 받았다고 전한다.(6) 9시경에 갈라타다리에서 버스를 타고 아야소피아 박물관 앞 정원으로 이동하여 분수쇼를 구경하였다. 조명이 현란하게 바뀌는 분수를 배경으로 아야소피아성당과 블루모스크의 아름다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터키에서는 저녁이 되면 4천여 모스크가 일제히 불을 밝힌다고 한다. 그리고 보니 예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교회에서 찬송가를 스피커로 틀고 밤이면 십자가에 불을 밝히던 시절이 생각난다. 참고자료 (1)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 지음. 에프라시압 이야기 51쪽, 문학동네, 2009년 (2) Wikepedia. &304;stanbul Sirkeci Terminal. (3) Wikipedia. Orient Express. (4) Wikipedia. Hookah. (5) Wikipedia. New Mosque. (6)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 지음. 안개낀 대륙의 아틀라스 16쪽, 문학동네, 2007년 (7) 유재원 지음. 터키, 1만년의 시간여행1, 188-190쪽, 책문, 2010년 (8) Wikipedia. Galata Tower.
동서양을 연결하는 터키로…이스탄불의 중심, 탁심광장 2015-12-14 05:14:40
이스탄불의 중심, 탁심광장 아야 소피아 박물관을 나오기 전에 나르텍스에 전시하고 있는 유물들을 돌아보았다. 커다란 잔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뱀문양 수조(Snake patterned pool)이라고 표시되어있는 것이 전부다. 대리석을 깍아 만든 이 수조는 2011년에 공개된 비잔틴제국의 유물 가운데 하나이다. 아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거행된 세례식에서 사용되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기아 성당이 모스크로 바뀌었을 때부터는 사원의 내부를 밝히는 등불에 넣을 기름을 담았다.(1) 세례식에 사용하는 물을 담았던 수조에 뱀을 새겨 넣은 이유가 궁금하다. 구약성서에 기록된 대로라면 뱀은 인간이 하느님과의 약속을 깨도록 유혹한 사악한 존재로 인식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아기아 소피아 성당이 아담 혹은 이브에 가장 가까운 존재인 새 생명을 축복하는 세례수를 담은 수조에 뱀을 그려 넣은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다. 벽 아래쪽에 놓인 대리석 석관은 이리니 황후의 유해를 담은 것이다. 2층 지성소 쪽의 벽에 그려진 ‘콤니노스’ 성화에 남편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황제와 함께 그려져 있다. 황후의 유해를 담은 관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죽은 뒤 이승에 남기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도 있겠다. 석관 맞은편 구석에는 구리종이 하나 놓여 있다. 아무 설명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이것은 일종의 화폐로 빙 돌아가면서 아름다운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가이드와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지기에 일단 박물관을 나서면서도 무언가 미진한 느낌이 남는다. 미리 챙기지 못해서 놓친 것들이 발길을 붙들었던 모양이다. 문을 나서자 박물관에 입장할 때는 가이드 뒤를 따라가느라 바빠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중에서도 사디르반(&350;adırvanı)이 눈길을 끈다. 사디르반은 무슬림들이 모스크에 들기 전에 몸을 씻거나 마시기 위한 물을 공급하는 시설이다. 아야소피아 사디르반은 술탄 마흐무드1세 때인 1740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열여덟 개의 작은 기둥을 끼워 넣은 대리석 원통 위에 현란한 문양을 새긴 황금빛 원통과 기둥을 올려놓았고, 서른두 개의 황금빛 막대로 된 반구(半球)를 얹어 놓았다. 위쪽에 있는 튤립 모양의 청동색 띠에는 ‘우리는 모든 것을 물로부터 창조했다.’라고 적혀 있다. 지붕은 여덟 개의 대리석 기둥을 연결한 아치와 처마 위에 배치돔 형태로 덮여있는데, 아야소피아 사디르반은 이스탄불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수로 꼽히고 있다.(2) 아야 소피아와 잠시 작별한 일행이 향한 곳은 다섯 번째 쇼핑을 위한 가게이다. 이동하는 중간에 슐레이만 모스크 곁을 지나지만 일정에 없다는 이유로 버스 안에서 설명을 들어야 했다. 터키한인여행협회가 운명한다는 잡화점이다. 이곳에서 선물로 쓸 터키전통과자와 석류엑기스 그리고 장미오일을 조금 샀다. 가게에서 얻은 수익으로 터키와 한국을 연결하는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쇼핑을 마친 다음에는 이스탄불의 명동이라는 탁심광장으로 갔다. 선택관광상품인 이스탄불 야간 시티투어의 시작이다. 탁심광장에 도착한 일행이 버스를 내린 곳은 1928년 피에트로 카노니카가 만든 공화국 기념비(Cumhuriyet Anıtı) 부근이다. 터키 공화국의 독립 5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터키어로 탁심(taqs&299;m)은 ‘분배’ 혹은 ‘분포’를 의미하는데, 오스만제국 시절 이곳에는 이스탄불 북쪽 지역에 물을 공급하는 석조 저수지가 있었던데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은 이스탄불의 지하철 노선들이 모이는 중심지가 되고 있다.(3) 터키의 노벨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 에서 이스탄불 사람들이 탁심광장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주인공 갈립이 탁심광장을 걸으면서, ‘거대한 칠면조처럼 교통체증과 씨름하고 있는 버스, 그 뒤로 천천히 기어가는 놀란 바닷가재 같은 전차, 항상 어둠 속에 있기를 고집하는 희미한 모퉁이가 있는 탁심 광장이야말로 자신의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4) 공화국기념탑에서 출발해서 이스탄불성당 아래에서 시작되는 보행자도로인 이스티클랄(독립)거리에 들어섰다. 여행객은 물론 수많은 터키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채워 거대한 물결처럼 흐르고 있었다. 보행자도로라면서도 이따금 차량이나 트램이 지나가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탁심광장에서 출발하는 노스타르기지 트램(nostalgic tram)이다. 트램에 매달려 가는 사람이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는 것은 트램이 천천히 달리기 때문인가 보다. 물 흐르듯 밀려가는 사람들 사이에 공간을 만들고 거리공연을 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고, 조그만 손수레에 간식을 파는 사람들도 있다. 거리 양편으로는 나이키, 피자헛, 맥도날드와 같은 외국 브랜드를 파는 가게들 일색이고, 터키 고유의 상품을 파는 가게는 뒷골목에서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뒷골목이 복잡하고 치안상태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멀리 들어가지 말라는 가이드의 경고 때문에 입구에서 기웃거리고 말았다. 일행들과 함께였다면 용기를 내볼 수도 있었겠지만, 호기심이 때로는 사고를 유발할 수도 있다. 객쩍은 용기로 다른 일행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흥미로운 점은 백화점입구에 보안검색대가 있어 들어가는 사람들을 검색한다는 점이다. 그만큼 테러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는 증거일 터이다. 실제로 2010년 10월 31일에는 탁심광장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하여 경찰과 민간인이 부상당하기도 했는데, 이날도 보니 광장 구석에 경찰차가 서 있고, 경찰들이 순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행기간 동안 우리 외교부가 보내는 문자를 매일 받고 있었다. 지난 8월 이스탄불에서 테러사건이 있었다면서 다중이 밀집한 지역을 피하라고 권고하고 있었다. 그런대도 우리는 탁심광장에 나선 것이다. 우리 외교부는 그동안 이라크 및 시리아와 터키의 국경지대에 국한하여 철수권고를 내리고 있었는데, 앙카라에 폭탄테러가 있었던 지난 10월 10일자를 기하여 터키의 나머지 지역에 대하여도 1단계 남색경보를 내리고 있어 여행에 유의해야 한다. 이스티클랄거리가 탁심거리로 갈라지는 곳까지 걸어가면서 거리를 메운 사람들의 열기에 동참해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약속한 집합시간에 탁심광장에 모인 일행은 인근에 있는 한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터키에 와서 처음 먹는 한식이었다. 메뉴는 닭볶음탕과 오징어볶음이다. 닭볶음탕은 더 끓여서 국물을 자작하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고, 추가밥이 1유로라고 잘라 말하는 쥔장의 냉정한 응대가 낯설다는 느낌이 들었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가졌던 한국음식에 대한 그리움마저 가시게 만들었다. 차라리 터키 전통음식을 먹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갈라타다리로 이동한다. 탁심광장 지하에 있는 튀넬역에서 로프트레인, 즉 푸니쿨라(F&252;nik&252;ler)를 타고 카라쾨이역으로 가서 전철로 갈아탔다. 튀넬-카라쾨이선은 1875년에 개통되었는데, 런던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지하철이자 노선 길이가 573미터에 불과하여 세계에서 최단노선이기도 하다. 로프트레인으로 설계한 까닭은 탁심광장으로 오르는 언덕의 경사가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프랑스의 건설회사가 파리 메트로를 놓기 전에 시험삼아 만들어봤다는 설과, 베이오울루 지역에 있는 고급 호텔과 항구를 연결하기 위한 교통수단으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5) 참고자료 (1) Today's Zaman. 2015.12.12. Ancient baptism pool uncovered at Hagia Sophia. (2) Ayasofya M&252;zesi. &350;adirvan. (3) 위키백과. 탁심광장. (4) 오르한 파묵 지음. 검은책 1권 316쪽, 민음사, 2007년 (5) 위키백과. 이스탄불 지하철
동·서양을 연결하는 터키로…기구한 운명 아야 소피아 박물관(3) 2015-12-10 04:50:34
기구한 운명 아야 소피아 박물관(3) 경사진 통로를 따라 7층 높이에 해당된다는 2층에 올랐다. 황후가 2층에 있는 예배장소로 갈 때 가마를 타고 오를 수 있도록 만든 구조라고 한다. 2층 테라스의 한 가운데에 녹색의 돌로 동그랗게 표시된 장소가 황후의 옥좌가 놓였던 곳이다. 이곳은 지성소를 포함한 아래층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자리이다. 지성소 가까이 왼쪽에 있는 정자는 황제가 예배를 드리던 장소이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아야 소피아의 1층은 또 다른 느낌을 준다. 2층의 창문을 통하여 들어오는 빛을 한 올 한 올 헤아릴 수 있어서일까? [사진; 데이시스 모자이크(좌), 단돌로의 관이 있던 자리를 표시하는 대리석판(Wikipedia. Hagia Sophia에서 인용함(1)(좌-20150911_152350)] 황후가 예배를 드리던 자리를 지나면 대리석문을 통해 남쪽 회랑, 그러니까 지성소 쪽을 향해 오른편을 따라 이어지는 회랑으로 가게 된다. 천국과 지옥의 문이라고 하는 문이다. 2층에서는 몇 백 년을 회칠 속에 숨어있다 모습을 드러넨 성화들을 볼 수 있다. 데이시스(De&235;sis) 모자이크를 먼저 볼 수 있다. '데이시스'란 간청 혹은 애원을 의미한다. 심판을 주관하는 그리스도에게 죄인의 벌을 가볍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1261년에 제작되었다. 아야 소피아 박물관에 있는 성화들 가운데 가장 심하게 훼손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은 그나마 양호한 편으로 상반신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지만 성모는 얼굴과 왼쪽 어깨 부분만 남았다. 데이시스 모자이크를 감상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그림을 빛나게 하는 자연광 효과이다. 남쪽 창에 가까이 걸려있는 이 그림은 창을 통하여 들어오는 빛을 풍성하게 받고 있다. 모자이크에 등장하고 있는 세 사람의 배경에는 조개모양의 황금빛 문양을 넣었다. 햇빛이 조개껍질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강하게 산란되는데, 특히 예수상의 후광 부분에서 강하게 느껴진다. 데이시스 모자이크의 맞은 편 바닥에는 HENRICUS DANDOLO라고 새겨진 대리석 판이 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쳐들어온 베네치아의 단돌로의 무덤이 있던 자리이다. 그는 평소 십자군들이 그동안 베네치아에 진 빚을 갚으려면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점령하는 길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가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쳐들어왔을 때의 나이는 무려 95세였다. 단돌로의 빗나간 조국사랑은 기울어가던 비잔틴제국에 치명상을 입힌 결과를 낳았다. 십자군이 물러난 다음 콘스탄티누폴리스 사람들은 단돌로의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내다버린 것도 모자라 무덤이 있던 자리에 이름을 새겨 밟고 다녔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 되고 말았다. 그 골이 얼마나 깊었던 지 사건이 발생한지 800년 가까이 된 2001년에 아테네를 방문한 교황은 그리스 정교회 흐리스토둘로스 대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사과의 뜻을 분명히 했다. "저는 오랫동안 동방 그리스도 신앙의 보루였던 콘스탄티누폴리스의 불행스러운 약탈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지 회복을 위해 떠난 십자군이 같은 그리스도교 형제들을 기습한 사건은 비극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라틴교회에 속한 그리스도교들이었기에 가톨릭교회로서는 더더욱 유감스러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2)" 진정성이 절로 느껴지는, 사과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범이 될 만하다. 이제는 혼네를 담은 사과는 커녕 다테마에 마저도 뒤집어버리려 하는 인간들이 꼭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닐 수 없다. 지성소 쪽의 벽에 두 점의 성화가 걸려있다. 안쪽으로 걸려 있는 성화가 '콤니노스' 모자이크이다.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황제(생몰년 : 1087.9.13~1143.4.8, 재위기간 : 1118.8.15~1143.4.8)와 이리니 황후(1088~1134.8.13)가 성모로부터 축복을 받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1122년에 제작되었다. 황제가 들고 있는 자루에는 돈이 들어 있고 황후가 들고 있는 것은 봉납명세를 적은 문서로 교회에 대한 황실의 기부를 의미한다. 그리고 황태자인 장남 알렉시오스 콤니노스(1106.2~1142)의 모습은 성화의 옆으로 튀어나온 기둥의 옆면을 활용하여 그려졌다. 이들도 불행한 가족이다. 황후가 46세를 일기로 죽은 8년 뒤에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전염병으로 죽었고, 황제 역시 다음해 사냥에서 입은 가벼운 상처가 악화되어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 옆으로 조에 여제의 모자이크가 걸려 있다. 11세기에 제작된 이 모자이크는 파란색 옷을 입고 왼손에 성경을 든 그리스도가 조에여제(생몰년 : 978경~1050.6)와 그 남편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호스(생몰년 : 1000경~1055.1.11, 재위기간 : 1042.6.11~1055.1.11)를 축복하는 모습을 담았다. 다른 성화와는 달리 조에여제의 모자이크라고 하는 이유는 세 차례나 결혼을 했던 조이 여제는 남편이 바뀔 때마다 모자이크에 그려진 남편의 얼굴과 문구도 바꾸었다고 해서이다.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호스 황제 역시 교회에 헌납하는 돈자루를 들고 있고 조에여제는 봉납명세를 적은 문서를 들고 있다. 비계 때문에 무심코 지날 수 있었던 2층 왼쪽 회랑의 박공벽에 있는 성화를 본 것은 우연이었다. 몇 사람의 성인을 그려놓았다는데, 콘스탄티누폴리스 총대주교를 지낸 성 요안니스 흐리소스토모스(왼쪽)와 성 이냐시오(오른쪽)를 카메라에 담았다. 두 성인들은 십자가로 장식된 하얀색 성의를 입고 있다. 아기아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전환하면서 이 성화를 회칠로 덮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2층 천장의 어두운 구석에 있다는 알렉산드로스 3세 황제 모자이크는 보지 못했다. 이 모자이크에서는 왼손에 보주를, 오른손에는 두루마리를 든 알렉산드로스 3세 황제(생몰년 : 866.9.19~913.6.6, 재위기간 : 912.5.11~913.6.6)를 형상화했다. 2층을 모두 돌아보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왼편 회랑에 서 있는 소원기둥 앞에 줄을 섰다. 12세기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따라 땀흘리는 기둥 혹은 통곡의 기둥이라고도 부른다. 이 기둥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으면 축축한 느낌이 드는 것은 초자연적인 현상 때문이라고 하는데, 가이드 말로는 이 기둥이 예레바탄 사라이에 닿고 있어서라지만 확인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소원을 빌기 위하여 손가락을 360도 돌리기에 몰입하느라 정작 소원 비는 것을 깜박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야 소피아 성당을 완공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누폴리스의 만성적인 물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성당 남쪽 회랑 밖 정원을 138미터 길이에 36미터의 너비로 파 들어갔는데, 8미터 정도 파 들어가자 단단한 암반이 나왔다. 그 위에 336개의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씌워 저수조를 만들었다. 최대 8만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저수조의 모양이 바실리카와 흡사한 모습이어서 바실리카 저수조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스만제국 시절부터는 수많은 기둥이 물에 잠겨 있는 모습이 마치 물에 잠긴 궁전과 같다고 해서 터키말로는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ai), '물에 잠긴 궁전'이라고 부른다. 저수조의 가장 깊은 곳에는 메두사의 얼굴을 새긴 두 개의 돌이 하나는 거꾸로, 다른 하나는 옆으로 누여 기둥을 받치고 있다. 일정에 없는 곳은 방문하지 않는 여행사의 일반적인 관행 때문에 우리는 이곳을 가지 못했다. 참고자료 (1) Wikipedia. Hagia Sophia. https://en.wikipedia.org/wiki/Hagia_Sophia (2) 유재원 지음. 터키, 1만년의 시간여행1, 36쪽, 책문, 2010년
동·서양을 연결하는 터키로…기구한 운명 아야 소피아 박물관(2) 2015-12-07 05:14:00
기구한 운명 아야 소피아 박물관(2) '성스러운 지혜'라는 의미의 아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한 것에 대하여 비판적 견해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 성당이 이교의 신앙을 무너뜨리고 세워진 것이라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상 최고의 교회를 지어 하느님과 교황께 바침으로써 황제로서의 권위을 세우고 죽은 뒤에 구원받기를 원했던 유스티아누스 1세 황제는 제국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였다. 수만 명의 건설인력은 물론 건축에 필요한 비용이라면 무조건 지원했을 뿐더러 건축자재 역시 최고급을 사용하였다. 심지어는 에페수스에 있는 아르테미스신전과 그리스 델피신전의 기둥까지 뽑아다 쓰는 바람에 신전들이 무너지고 말았다고 한다. 이슬람은 그와 같은 탄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아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보존하였던 것이니, 그 안에 있는 성화들을 회칠로 가린 정도는 양해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덕분에 비잔틴 미술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미술작품을 현세에도 볼 수 있게 된 것 아니겠는가. 물론 기왕이면 회칠도 하지 않고 보존하여 후세에 전하는 넓은 아량을 베풀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입구에 들어서면 나르텍스라고 하는 성당의 현관에 해당되는 직사각형의 공간이 널찍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황제만이 사용했다는 중앙문을 통하여 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왼쪽 절반을 가리는 공사용 비계 때문에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낙성식을 위하여 성당에 처음으로 입장한 유스티아누스 1세 황제가 “예루살렘의 대성전을 지은 솔로몬 당신을 내가 능가했소”라고 찬탄한 심정이 이해된다. 비록 공사용 비계와 성당에 들어찬 관광객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으로 어수선하지만, 높이 떠 있는 중앙돔이 만들어내는 공간과 이를 받치는 두 개의 반원형 돔이 만드는 공간 그리고 좌우로 시립하듯 늘어서 있는 기둥들이 묘한 조화에 점점 몰입되기 시작한다. 특히 중앙의 돔의 아랫부분에 늘어서 있는 40개의 둥근창과 107개의 기둥이 만들어내는 42개의 아치 위에 있는 창문들을 통하여 들어오는 빛이 허공에서 얽히면서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이었나 보다. 중앙돔이 반원의 돔과 만나는 펜던티브에는 여섯 날개를 가졌다고 해서 ‘육품천사’라고 번역되는 세라핌 천사들이 그려져 있다.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끊임없이 부르는 천사들이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중앙 돔의 천국에서 내려온 황금사슬에 매달린 것처럼 보인다고 했나보다. 머리 위에 띄워놓은 산델리아의 불빛이 오히려 신비한 분위기를 해치는 것 같다. 그래도 유재원은 “아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내부는 소우주일 뿐 아니라 하늘과 천상계의 질서가 구현된 공간이다.”라고 적었다.(2) 다만 아쉬운 점은 중앙돔에 그려 넣은 이슬람 캘리그라피와 2층의 벽에 걸린 이슬람 캘리그라피 원판들이다. 술탄 압뒬메지트 1세 때의 것이라고 하는데 직경이 7.5m로 이슬람세계에서 가장 큰 캘리그라피 원판이라고 한다. 모두 8개의 캘리그라피 원판이 걸려 있다. 알라, 무함마드, 무함마드의 뒤를 이은 4명의 정통 칼리파(아부 바크르,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 우스만 이븐 아판,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그리고 무함마드의 손자 2명(하산과 후세인)을 나타낸다. 중앙 돔에 그려진 캘리그라피와 문양 아래에는 아야 소피아 사원으로 개조하면서 회칠로 덮인 성화가 숨어있을 것이다. 앞쪽으로 나가면 오른쪽 바닥에서 원형의 대리석들이 조합된 옴팔리온을 볼 수 있다. 그리스어로 배꼽을 의미하는 옴팔리온은 세계의 중심을 상징한다. 중앙에 있는 큰원을 열 두 개의 작은 원이 둘러싸고 있는데, 열두개의 작은 원은 12사도를 나타낸다. 유스티아누스 1세 황제가 아기아 소피아 성당을 만든 이후로 동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들은 바로 이 자리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3) 성당의 맨 앞 지성소의 예루살렘으로 향한 전면에는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한 창이 있고, 그 아래로는 중심에서 조금 오른쪽으로 치우친 미흐랍이 있다. 미흐랍은 메카쪽 방향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기아 소피아 성당을 축조할 당시만 해도 빠른 시일 안에 완공하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기 때문에 내부 장식은 최소화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도안으로 성모와 예수, 성인, 황제, 황후 등의 모습으로 성당 내부를 장식하게 되었다. 아기아 소피아 성당이 아야 소피아 모스크로 바뀌면서 이들 성화를 회칠로 가렸던 것인데, 20세기 들어 시작된 복원작업을 통하여 일부 성화들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회칠 위에 그려진 이슬람 문양을 제거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성화의 복원은 80년이 넘도록 중단되고 있다. 사전 준비가 철저하지 못했던 필자는 몇 가지를 챙기지 못했지만, 현재까지 복원된 성화 모자이크들을 찾아보는 것도 빠트리지 말아야 한다. 나무위키 ‘하기아 소피아’편에 잘 정리되어 있다. 제일 먼저 황제의 문 위쪽 나르텍스의 박공벽에는 ‘예수 앞에 엎드려 탄원하는 레온 6세’로 알려진 모자이크가 있다. 중앙의 옥좌에는 성경을 든 예수 그리스도가 앉아 있다. 펼쳐진 성경에는 요한복음 20장 19절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리고 8장 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구절이 적혀있다. 왼쪽에 있는 동그라미에는 기도하는 성모마리아가, 오른쪽 동그라미에는 대천사 가브리엘을 그려 넣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는 사람은 레온 6세 황제(생몰년 : 866.9.19~912.5.11, 재위기간 : 886.8.29~912.5.11)로 알려져 있지만,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옌니토스 황제(생몰년 : 905.9.2~959.11.9, 재위기간 : 913.6.6~959.11.9)라고도 한다. 레온6세 황제는 비잔틴제국의 기반을 다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기구한 삶을 살았다. 출생의 비밀을 의심받은 그는 아버지 바실리오스1세 황제와 불화를 빚었다. 바실리오스1세가 사고로 죽자 황제에 등극했지만, 세 명의 황후가 잇달아 죽고, 세 번째 황후가 나은 아들마저도 죽는 불행을 당한다. 교회와 갈등을 빚어가면서 네 번째 결혼을 하고 결국은 아들을 얻어 황위를 잇게 한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경배하면서 무엇을 청원했는지 짐작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남서쪽에 있는 입구에도 모자이크로 된 성화가 있다. 가운데 옥좌에 무릎에 아기예수를 앉힌 성모 마리아가 앉았다. 성모의 좌우에 있는 동그라미 안에 적힌 ΜΡ와 ΘΥ는 Μ&942;τηρ(어머니)와 Θεο&973;(하느님의)을 나타내는 것으로 성모 마리아임을 나타낸다. 성모의 오른쪽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왼쪽에는 유스티아누스 1세 황제가 아기아 소피아 성당을 각각 들어서 성모자에게 바치는 모습을 그렸다. 중앙돔의 앞쪽으로 지성소 위에 있는 반원형 돔의 가운데에는 성모자의 상(Apse mosaics)이 그려져 있다. 6세기 무렵 그려졌다가 성상파괴운동으로 파괴되었던 것을 9 세기 무렵에 복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화는 현존하는 모자이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성모의 키가 무려 5미터에 달하지만 높은 곳에 그려져 있기 때문에 조그맣게 보인다. 2층에 올라가면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볼 수도 있다. 금을 많이 써서 화려하면서도 성모자의 모습은 세속적이지 않다. 원래는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아 신비로움을 더했던 것인데, 조명을 밝히는 바람에 선명하게는 보이지만 신비로운 느낌은 사라지고 말았다. 참고자료 (1) Wikipedia. Hagia Sophia. https://en.wikipedia.org/wiki/Hagia_Sophia (2) 유재원 지음. 터키, 1만년의 시간여행2, 36쪽, 책문, 2010년 (3) 나무 위키. 하기아 소피아.
동·서양을 연결하는 터키로…기구한 운명 아야 소피아 박물관(1) 2015-12-03 05:10:53
기구한 운명 아야 소피아 박물관(1) 역사학자 토인비가 '인류 문명의 살아 있는 옥외 박물관'으로 불렀다는 이스탄불로 다시 돌아왔다. 그동안 타고 다니던 버스를 전날 이즈미르에 두고 왔기 때문에 새로운 기사가 버스를 가지고 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아야소피아박물관 부근에 있는 터키식당에서 케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보니 차가 다니는 길까지 나와 구걸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시리아난민 아이라고 한다. 지난 해 대선에서 승리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적 노림수라는 평가도 있지만, 아랍국가들이나 유럽국가들이 외면한 이들을 받아주었다는 점은 크게 평가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터키의 집권당인 정의개발당은 우리가 터키를 다녀온 뒤, 11월 1일 실시한 총선에서 550석 가운데 316석을 차지하였다. 6월 총선에서는 단독 내각을 구성하기에 18석이 모자란 258석에 머물렀던 것과 비교하면 압승이라고 할만하다. 상황이 바뀐 것은 쿠르드족 반군의 유혈사태 등으로 야기된 안보불안 때문이라고 한다.(1) 이날 점심으로 먹은 닭고기 케밥은 지금까지 먹은 닭고기 요리 가운데 제일이었다. 점심 후 짧은 자유시간에 아내와 터키커피를 마셨다. 처음 마실 때는 텁텁한 듯 진한 커피맛이 좋다. 하지만 절반이 넘어가면 커피가루가 씹혀 불편하다. 터키 스타일은 맑은 위쪽만 마신다고 한다. 터키사람들은 커피를 마신 뒤에 남는 커피가루의 모양을 보고 점을 친다. 커피점은 컵에 남은 커피 가루를 그대로 보는 방법과, 다 마신 후에 컵받침을 뚜껑 삼아 위를 덮고 한번 뒤집은 후에 컵에 남은 것을 보는 방법이 있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옛 말이 있듯이 점사를 잘 풀어내는 일이 중요할 것 같다.(2) 이날은 커피점보다도 커피를 마시는 일이 중요했다. 뜨거운 커피를 식혀가며 마시다 보니 약속시간이 다 되었다. 급하게 집결장소로 갔는데 일행들이 벌써 출발해서 꽁무니가 저만치 가고 있다. 제 시간에 갔는데… 헐레벌떡 쫓아가 겨우 따라 잡는다. 길모퉁이를 돌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히포드럼이다. 블루모스크를 지나 아야소피아 박물관으로 향한다. 이곳은 휴대품 검색을 거친 다음에 입장이 가능하다.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입장하는 순간 성당의 왼쪽 절반을 가득 채운 비계를 발견하고 실망한다. 성당의 내부를 제대로 카메라에 담을 수가 없다. 그래도 웅장한 성당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데 넓은 성당의 가장자리를 따라 늘어선 기둥을 제외하고는 내부에는 기둥이 하나도 없는 놀라운 공법을 그 옛날 구사했다는 것이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쉬운 것은 174개나 되는 기둥은 새로 깍은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그리스와 로마의 신전에서 뽑아온 것 이란다. 이 성당을 지은 사람들은 이민족의 믿음을 무너뜨린 위에 자신들의 믿음을 세웠던 것이니 제대로 된 믿음이 될 수 있었을까? 이곳은 비잔틴제국 시절에는 아기아 소피아(Hagia Sophia) 성당으로, 오스만제국이 점령한 이후로는 그리스 이름인 아야 소피아(Aya Sofya)사원으로 부르다가 1934년부터는 공식적으로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 부르고 있다. 그래도 성당으로 916년, 사원으로 481년 그리고 박물관으로 81년의 세월을 사랑받아왔으니 참 다행이다. 지금 전하는 건물은 세 번째로 세워진 아기아 소피아 성당이다. 목조로 된 첫 번째 성당은 콘스탄티누스2세 황제 시절인 360년 2월에 같은 장소에 세워졌는데, 404년 아르카디우스황제의 아내 에브도시아 황후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박해하여 추방하는 것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폭동이 일어났을 때 불타버렸다. 두 번째 성당은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 의하여 415년 10월 세워졌지만, 532년 1월 유스티아누스 1세 황제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역시 불타버렸던 것이다. 반란을 진압한 황제는 제국의 영광과 위엄을 과시하기 위하여 성당이 소실된 지 39일 만에 재건을 시작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그리스도교의 우주관을 구현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동서 길이 77미터, 남북 너비가 71.7미터의 직사각형 구조물 위에 남북지름이 30.9미터의 타원형 돔을 얹게 되었다. 성당 내부에는 기둥이 없는데 이는 교회의 통일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건물 내부에 기둥을 세우지 않고서도 지름 30.9미터의 타원형 돔을 올려놓는 일은 당시 로마의 건축술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돔의 무게를 줄이기 위하여 다른 벽돌의 12분의 1에 불과한 로도스섬의 공기구멍이 많은 진흙벽돌로 만들었지만 돔의 전체 무게는 여전히 엄청났다. 그런 돔을 무너지지 않게 올려놓은 것은 이오니아 트랄레스 출신인 안테미오스(Anthemios)와 밀레토스 출신인 이시도로스(Isidoros)였다. 두 사람은 건축가가 아니라 기하학과 수학에 정통한 수학자들이었다. 이들은 돔의 무게를 네 개의 커다란 아치로 분산시키고, 아치와 아치가 만나는 곳에 기둥을 세웠다. 그 아치들을 작은 아치와 반원의 돔으로, 그리고 그 아래로 더 작은 아치와 작은 돔으로 이어지도록 하였다. 성당의 내부에는 107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42개의 아치가 하중을 떠받치고 있다. 이런 구조는 지진에 취약하여 557년에 콘스탄티누폴리스 일대를 강타한 지진의 영향으로 558년에는 동쪽 지성소의 돔과 아치가 무너졌다. 아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설계한 이시도로스의 조카 이시도로스가 돔의 높이를 7미터 더 높이면서 골조를 강화하고, 남북 쪽의 외벽을 더 두껍게 보강하여 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16세기에는 오스만제국의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성당의 외부에 네 개의 미나렛을 세워 하중 떠받치도록 보강했다. 지진 등 자연재해가 아기아 소피아 성당을 손상시켰지만 결정적으로 피해를 입힌 것은 사람들이었다. 730년 레오3세 황제가 모세의 십계명에 우상숭배를 금하고 있음을 들어 성상을 파괴하라는 내용을 담은 칙령을 공포한 것이 발단이 된 성상파괴운동이 벌어지는 동안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 있는 많은 모자이크와 성화들이 파손되었다. 지금 볼 수 있는 성화들은 9세기 후반에 복구한 것들이다. 아기아 소피아 성당에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힌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도였다. 1204년 갑자기 콘스탄티누폴리스로 쳐들어와 점령한 제4차 십자군들은 도시를 마구잡이로 약탈하였다. 이들은 성당 안에 있던 금은보화는 물론 성유물까지 빼돌려 팔아먹었다. 심지어는 아기아 소피아를 가톨릭 성당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그 만행이 오죽했으면 동로마 제국의 동방정교회 신도들은 "십자가 든 악마에 견주면 초승달 이교도가 그래도 사람이다."라면서 두고두고 이를 갈았겠는가. 1453년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점령한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드2세는 신하와 장군 그리고 이슬람 이맘을 대동하고 아기아 소피아 성당에 도착하였다. 말에서 내린 술탄은 마당의 흙을 한 줌 쥐어 자신의 터번에 뿌려 승리를 내려준 알라에 감사를 표하였다. 성당의 내부를 둘러본 술탄은 병사들의 약탈을 금하고 성당을 모스크로 바꾸라고 명령했다. 이때 선임 이맘은 설교단에 올라 "알라후 아크바르(Allahu Akbar; 알라는 위대하시다)!"라고 외쳤다. 역시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이슬람의 전통에 따라 내부의 모자이크에 회칠을 하여 성화들을 가리도록 했다. 오스만제국이 성화들을 뜯어내지 않고 회칠을 한 덕분에 우리는 비잔틴제국이 남긴 동방정교의 성화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회칠을 걷어내는 작업은 1932년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회칠한 위에 그려진 문양들 역시 500년이나 내려온 뜻깊은 문화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되겠다.(3~5) 참고자료 (1) 연합뉴스 2015년 11월 2일자 기사. “터키 총선 대이변…쿠르드 반군 유혈사태가 결정적” (2) 스텔라 카페 블로그. ‘[세계의 점술] 세계의 점슬 시리즈3 커피점. (3) 나무 위키. 하기아 소피아. (4) Wikipedia. Hagia Sophia. (5) 유재원 지음. 터키, 1만년의 시간여행2, 32-52쪽, 책문, 2010년
"삭감 근거가 도대체 뭐냐? 빅브라더!" 2015-11-30 12:16:45
|황진철 원장 칼럼(그랜드비뇨기과)| 매달 중순, 비뇨기과 의사인 나는 국가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 ‘염증성처치가 단순처리로 삭감’ ‘각종 검사를 포함한 진단 및 치료행위는 진료상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만 실시될 수 있도록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국가 소속의 그들은 비뇨기과를 아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한 처치나 치료에 대해 대단히 해박하다. 아니 나를 뛰어 넘는 듯하다. 그리고 평가를 한다. 나를 심사하고 평가하는 그들이다. 전지전능하다. 난 의학적인 근거에 합당하게 검사를 하고, 정확하게 진단하려 노력하며, 필요한 진료와 치료를 한다. 그런데 전지적 시점의 그들의 판단은 다르다. ‘... 삭감 처리함’ 그들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내가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고, 병원을 운영하는 경제적 토대의 절반 이상을 그들이 평가한다. 국가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날, 난 한없이 작아진다. 자료를 준비해서 다시 그들에게 호소를 하고, 평가를 기다린다. 며칠이 지나 건조한 종이 몇 장이 내 책상 위에 놓여있다. ‘거기 비뇨기과 원장! 우리가 맞다니까, 괜히 고생 말고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해. 그럼 그만큼 돈으로 줄게!!’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물론 의학적 근거와 결과가 그 힘이다. 그렇지만 매번 평가를 받아야 한다. 난 진심으로 비뇨기과에 대해 자부심이 큰 사람이다. 그런데 개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질환보다는 미용을 하는 나의 친구가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적게 버는 것이 자존심을 다치게 했던 적.. 적어도 나는 아니다. 내 친구는 전자차트를 구비할 필요도 없다. 질환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에 심사를 받고 평가를 받지도 않는다. 비급여.. 본인 스스로 양심과 의학적 근거에 맞춰 진료하고 행복을 찾는다. 그런데 난 아니다. 진료실에도 찬 기운이 느껴지는 늦가을, 뚱한 표정의 여성이 내 앞에 앉아 있다. 한달에 두 번 정도는 방광염으로 고생을 한다고 한다. 그때마다 항생제를 먹으며.. 그녀는 한달의 절반을 항생제와 함께 사는 것이다. 안타까웠다. 문진을 하는 과정에 성매개감염병이 의심됐다. 충분히 설명하고 검사를 하고 치료를 했다. 치료 종료 후 얼마나 지났을까? 뚱한 표정은 어디로 가고 환하게 웃으며 따뜻한 커피를 담아 왔다. 병원 밖의 찬공기도 그녀의 따뜻함을 이기지는 못하는 듯하다. 직원들에게도 나눠 주며,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갔다. 참으로.. 진심으로.. 행복했다. 그리고 보름이 더 지났다. ‘각종 검사를 포함한 진단 및 치료행위는 진료상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만 실시될 수 있도록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환자인 그녀는 만족했다. 나는 더욱 감사하며 행복했다. 그녀의 뚱한 얼굴과 환한 미소가 내 눈가에 사라지기도 전, 그 진료는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가 아니란다. 너무 허탈했다. 화가 났다. 미친 듯이 허공에다 대고 외쳤다. “넌 도대체 근거가 뭐냐? 빅브라더!” 진료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 난 뚱한 표정으로 걷는다. 매서운 찬 바람을 헤치며.. 그리고 ‘십센치’ 노래를 듣는다. ‘십센치’ 노래를!! youtube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터키로…아, 이즈미르 2015-11-30 05:10:53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터키로…아, 이즈미르 터키에 도착해서 여섯 번째 맞는 아침이다. 이날은 6시에 모닝콜을 받았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가장 늦은 시간이었다. 전날 일찍 잠들었기 때문인지 3시 반에 이미 깨어 있었지만 아내가 곤하게 자는 것 같아서 침대 속에서 뒤척이고 있었다. 샤워를 하면서 거울을 보니 얼굴이 보름달 같다. 전날 밤에 서울에서 가져온 컵라면을 먹고는 금방 잠들었기 때문이다. 터키에서 먹는 것이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얼큰한 국물이 아쉬웠고, 다음날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로 이동하려면 가방을 정리할 필요도 있었다. 우리가 탈 페가수스항공은 탁송화물이 15kg이 초과하면 돈을 내야 한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미리 알려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버릇처럼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언덕이 있었다. 집들 사이로 모스크가 있음을 알리는 미나렛이 곳곳에 서 있다. 옛날에 필자가 살던 월곡동이나 봉천동 달동네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익숙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미나렛들을 교회당 십자가로 바꾸면 말이다. 언덕 위에는 커다란 터키 국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정말 터키 사람들의 국기사랑은 본받을 만하다. 기왕 나왔으니 터키 사람들 이야기를 더해보자. 터키를 다녀온 사람들은 대부분 터키 사람들이 친절하다고 이야기한다. 때로는 오지랖이 넓다 싶을 정도이다. 친절함도 종류가 있겠지만 터키사람의 선한 눈을 보면 진심이라는 것을 알겠다. 공연한 오지랖이랄 수도 있겠지만 나이가 든 터키사람들 가운데 배가 나오고 몸집이 비대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터키 어린이는 물론 청년들까지도 날씬하고 잘 생긴 것을 보면 선천적인 것은 아닌 듯하다. 느긋한 성격 때문일까? 사실 느림은 장수에 유리한 요소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지나치게 달거나 짠 터키의 음식문화 탓일 수도 있겠다. 2013년에 발표된 OECD 보건통계를 보면 2007년 50대 중반이던 터키국민의 기대여명은 2011년에는 74.6세에 이르고 있다. 기대여명이 우리나라와 비교될 만큼 획기적인 개선을 이룬 유일한 나라이다. 터키도 고령화사회에 접어들면서 고혈압 당뇨와 같은 만성생활습관질환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즈미르에서 하루를 묵었으면서 시리아 난민 문제를 빠트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유럽으로 이주하려는 난민들 이야기는 스페인여행기에서도 적었지만, 최근에는 터키와 그리스를 경유해서 유럽으로 가는 경로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분할하는 과정에서 터키 근해에 있는 섬들이 그리스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최근 터키를 경유하는 난민을 막기 위하여 그리스 정부는 터키와의 국경선에서 감시를 강화하였지만, 해상경로를 감시하는 것은 쉽지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터키에서 바다를 건너 그리스로 가는 길이 EU국가로 가는 최단거리가 되었다. 터키 근해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의 섬들 가운데 사모스섬이 가장 가깝다. 수학자 피타고라스의 고향이기도 한 사모스섬은 이즈미르에서 그리 멀지 않다.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가려고 하는 난민들은 주로 시리아사람들이 많다. 지난 9월 2일 이즈미르와 가까운 보드룸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되어 유럽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준 세 살 바기 아일란 쿠르디도 시리아에서 유럽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아일란의 죽음이 있고서야 유럽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중동 및 아프리카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시리아의 난민사태는 1971년부터 이어진 알아사드 독재정권에 대한 반정부세력의 저항이 커지면서 내전상태에 빠져들면서 심각해진 것이다. 시리아 국내에는 헤즈볼라와 이슬람전선, 쿠르드인민수비대 등 반정부세력들이 정부군과 대치해왔다. 최근에는 IS가 이를 이용하여 국가를 세우려고 시리아에서의 활동을 강화하면서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정부군과 반정부세력 사이에 낀 국민들 가운데 정부로부터 쫓겨 난민신세가 된 사람들이 무려 400만명에 이른다. 터키는 일찍 시리아난민들을 받아들이기로 해서 곳곳에 난민캠프를 운용하고 있다. 이번 여행길에서도 몇 군데 난민캠프를 지나기도 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오만 등 아랍 부호국가들은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1) 시리아 난민들을 수용한 터키 정부지만 시리아와 이라크 등지에서 몰리고 있는 쿠르드난민들에게는 우호적이지 않은 것 같다. 터키 국내에 거주하는 쿠르드민족을 통제하는 것도 부담스러울 터이다. 이라크와 시리아 그리고 터키의 국경지대에서 떠도는 쿠르드난민들의 어려운 삶은 국경없는 의사회에서 활동하는 조너선 캐플런이 쓴 에서 엿볼 수 있다. 터키-이라크 국경의 터키 군인들은 강 건너의 이라크 쪽 난민 캠프에서 진료를 막고, 터키 영토에 진료소를 세우는 것을 겨우 허락하였다는데, 결국은 이라크 쪽의 쿠르드난민 환자가 터키 쪽으로 와서 진료를 받아야만 할 정도이다.(2) 호텔을 나선 버스는 30분 정도 달려 이즈미르공항에 도착했다. 이즈미르의 신공항은 인천공항설계팀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외관이나 내부 분위기가 인천공항과 흡사해서 공연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보안검색을 마치고 탑승 게이트에 도착하니 탑승까지 2시간이나 남았다. 멍 때리고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놀이 개발자 전기호씨는 2014년 10월 27일 서울광장에서 뇌를 쉬게 하자는 취지의 ‘멍때리기 대회’를 열기도 했다. 멍때리기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순간을 의미한다. 잠시의 멍때리기는 뇌가 쉴 수 있는 짬을 주고, 휴식을 취한 뇌에서는 뇌신경회로가 활성화되어 정보전달이 더 잘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기억력이 좋아지고 무의식 상태에서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다고 한다. 다만 멍때리기를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하게 되면 세포의 노화가 빨라져 기능이 쇠퇴할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일 것이다. 비행기에 탑승하고 보니 날개 위에 있는 비상구 옆이다. 여기 앉는 승객은 비상시에 다른 승객들이 탈출하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다. 따라서 이 자리를 배정할 때는 승객의 의향을 묻기 마련이다. 평소 같으면 절대로 앉지 않는 자리인데 탑승수속을 할 때 그런 질문을 받은 기억이 없다. 비행기가 활주로로 나가면서 스크린이 내려오고 탑승안내를 시작한다. 승무원복장을 한 여자 어린이가 설명하고 남자 어린이가 시범을 보이는 모습이 정말 깜찍하다 그리고 보니 승객들도 모두 어린이들이다. 모두들 동심으로 돌아가 탑승을 즐기란 메시지가 읽힌다. 발상이 참신하다. 저가항공인 탓인지 비행 중 식사는 물론 음료도 비용을 지불하는 승객에게만 제공한다. 1시간여 비행 끝에 비행기는 이스탄불 국제공항에 착륙한다. 고도를 낮추는 비행기는 마치 바다로 돌진하는 듯해서 손에 땀을 쥐게 하지만 홀연 육지가 나타나 숨을 돌리게 한다. 영화 인디애나존스에서 절벽 밖으로 한 발을 내미는 순간 홀연히 건너편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나타나 듯 말이다. 터키에 도착하던 날 이용했던 국제선청사 바로 옆에 있는 국내선 청사에서 짐을 찾아 밖으로 나간다. 참고자료 (1) 테크홀릭 2015년 11월 7일자 기사. 시리아 난민 사태는 왜 일어났을까. (2) 조너선 캐플런 지음. 아름다운 응급실 131-208쪽, 서해문집, 2006년
동·서양을 연결하는 터키로…소아시아 신앙의 중심 에페소스(3) 2015-11-26 05:08:35
소아시아 신앙의 중심 에페소스(3) 하드리아누스 신전에서 켈수스(Celsus) 도서관으로 가는 쿠레테스(Kouretes) 길은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신관을 가리키는 쿠레테스에서 따왔다고 한다. 대리석 기둥과 석상이 서 있었음직한 좌대가 길가에 늘어서 있다. 서기 135년에 완공된 켈수스도서관은 110년 소아시아의 집정관을 지낸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퀼라(Gaius Julius Aquila)가 92년에 집정관을 지낸 아버지,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켈수스 폴레마이아누스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도서관의 지하에 켈수스의 관을 모셨다고 한다. 그가 남긴 2만5천 데나리온은 도서관을 짓고 양피지로 된 1만2천권의 장서를 구입하고, 도서관을 유지할 정도로 막대한 돈이었다고 한다. 도서관과 장서들은 262년에 지진과 화재로 파괴되고 파사드만이 남았다. 400년 무렵 오락시설로 전용된 파사드 마저도 10~11세기 무렵 지진으로 무너졌다. 1970년에 독일 고고학자 볼커 미카엘 스트록카(Volker Michael Strocka)가 시작한 재건운동이 결실을 맺어 1978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아홉 개의 계단 위에 모두 열여섯 개의 코린트식 기둥을 세운 2층 건물이다. 1층과 2층의 기둥사이 공간을 엇갈려 배치한 독특한 모습이다. 아래층 기둥 사이에 만든 네 개의 벽감에는 각각 켈수스가 가졌던 네 개의 미덕을 상징하는 여신상을 세웠다.(1) 왼쪽부터 지혜(Wisdom, Sophia), 덕(Virtue, Arete), 사고(Intelligence, Ennoia), 학문(Knowledge, Episteme)이다. 원래 에페소스에 있던 여신상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에페소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이곳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켈수스 도서관의 내부에 들어서면 열람실이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아침 햇빛이 잘 들어오도록 한 배치라고 한다. 입구의 맞은편에는 학문과 예술의 여신 아테나 상이 서있던 공간이 있다. 페르가몬 도서관처럼 3층의 서고가 둘러싸고 있고, 외벽과 서고 사이에는 91cm의 통로를 두었다. 책에는 치명적인 습기를 막기 위한 장치였고, 이 통로를 따라가면 켈수스의 대리석 석관이 있는 현실에 이르는 이중구조다. 켈수스도서관에서 바라보면 정면에는 유곽으로 사용된 건물이 있다. 1세기 무렵의 전형적인 유곽형식의 2층짜리 주택이다. 대리석으로 된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세면대가 있는 대기실이 나온다. 그 안에는 분수가 있는 작은 정원을 중심으로 욕탕이 딸린 방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도서관에서 오른쪽으로는 코린트식 기둥 네 개가 서 있다. 본래는 3층으로 되어 있던 하드리아누스황제의 문의 일부이다. 도서관 왼쪽 옆으로는 남쪽 아고라의 정문이 있다. 세 개의 아치형으로 된 문은 기원전 3세기에 리시마코스가 건설한 신도시의 시장으로 통하는데, 기원전 3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그의 사위 그리파에게 헌정된 것이다.(2) 문을 나서면 아르테미스 여신을 모신 작은 동굴이 있고, 대리석길로 나갈 수 있다. 아카디아대로가 원형경기장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면서 시작하는 대리석길은 켈수스도서관 앞 유곽부근에서 쿠레테스거리로 연결된다. 널찍한 사각형 대리석이 깔려 있어 보기도 좋고 걷기도 편한 대리석길의 양편으로는 코린트식 기둥이 늘어서 있는데, 그 옛날 이 기둥에 횃불을 걸어 가로등을 삼았다고 한다. 원형극장 쪽으로 이동하는 가이드를 따라가느라 바빴는데 대리석길 중간에 있는 ‘네로의 홀’ 부근의 인도에는 인류 최초의 광고라고 알려진 대리석판이 있다고 한다. 왼발과 왕관을 쓴 여인 그리고 사각형이 새겨진 유곽 광고로, “여왕처럼 예쁜 여자가 있습니다. 이곳을 출입하려면 발이 그림보다 커야 하고 어음도 받습니다.”라는 내용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드디어 항구로부터 올라오는 아르카디아대로가 닿은 원형극장에 도착했다. 4세기 무렵 플라비우스 아르카디우스황제는 항구에서 도심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수시로 넘치는 강물에 잠기는 불편함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공사를 벌였다. 도로를 돋우고 넓혀 길이가 550m 넓이가 10m에 달하는 아르카디아대로를 만든 것이다. 도로에는 대리석을 깔았고, 길 양편으로는 코린트식 기둥을 세워 밤에는 횃불 가로등을 걸어 뱃사람들이 쾌적한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르카디아대로의 끝에는 원형극장이 있다. 피온산 서쪽 기슭에 있는 이 원형극장은 기원전 100년경에 처음 지어졌다가 기원후 1세기 무렵에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 2만5천명이 동시에 입장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의 원형극장은 당시 제일 큰 규모였을 것이다. 이토록 커다란 극장의 무대에서 주고받는 대사가 좌석 맨 끝까지 전달될 수 있도록 객석 아래에 청동관과 토관을 묻어 공명이 되도록 보완했다고 한다. 2층으로 되어 있던 무대는 1층만 남아 있다. 무대의 아래로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여덟 개의 방이 있는데, 검투사 경기가 있는 날에는 검투사와 맹수가 이동하는 통로가 되었다. 로마시대에는 연극보다는 검투사경기가 자주 열렸다고 한다. 최근에는 세계적인 가수들의 공연을 열기도 했는데, 음향효과는 여전히 뛰어나다고 한다. 원형극장에서 자유시간을 얻었다. 대부분 일행들은 북문 쪽에 있는 선물가게로 몰려간 사이에 아내와 나는 안내표지를 따라 성모 마리아교회를 찾았다. 원형극장에서 아카디아대로를 따라가다 북문으로 가는 도로가 아닌 왼쪽 샛길을 따라가면 된다. 에페소스지방에는 사도 요한이 서기 37년에서 48년 사이에 성모 마리아를 이곳으로 모시고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예루살렘에서 63세로 죽었다는 것을 정설로 한다. 에페소스에서 남쪽으로 7km쯤에 있는 ‘마리아의 집’은 기적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19세기 중엽 독일 수녀 카테리나 에미리히가 꿈에서 성모 마리아를 만났는데 그녀가 안식한 집의 위치와 모습을 상세하게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카테리나수녀는 에페소스 근처에도 와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카테리나 수녀는 1824년 사망했고, 1891년 그녀가 생전에 남긴 책을 토대로 탐사에 나선 나사렛파의 에오겐 풀린 수사가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에페소스 북쪽에 있는 성모마리아의 교회는 원래 예술의 여신, 무사이(Mousai)에게 헌정된 건물이 있던 자리이다. 3세기 무렵 사람들이 폐허의 서쪽에 바실리카 형식의 교회를 세워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였다. 이 교회는 성모마리아에게 봉헌된 첫 번째 교회이다. 이때부터 에페소스는 성모 마리아를 수호신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431년 이 교회에서 제3차 공의회가 열렸다. 성모 마리아의 교회 역시 오랜 세월이 흘러 폐허가 되었지만 지금은 교회 안쪽 벽의 일부가 복원되어 있었다. 성모마리아의 교회 왼쪽으로도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곳에는 시장, 광장, 가게 등이 들어서 화려했다고 한다. 교회 오른쪽 너머에는 130년에 하드리아누스황제에게 헌정된 올림페이온 신전 터가 있었지만 400년 무렵 광신적인 그리스도교도들에게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에페스 유적을 떠난 우리 일행이 이즈미르에 있는 라마다 르네상스 플라자호텔에 든 것은 4시반경이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 있는 여유이다. 그러면 에페스를 더 자세하게 돌아볼 수도 있지 않았던가 싶다. 저일찍 저녁을 먹고 쉬는데 미세하게 떨리는 느낌이 지나간다. 혹시 지진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된다. 터키 역시 지진 피해가 많은 곳이 아니던가 말이다. 떨림이 반복되지 않아 안심을 했다. 다행이다. 참고자료 (1) Wikipedia. Library of Celsus. https://en.wikipedia.org/wiki/Library_of_Celsus (2) 유재원 지음. 터키, 1만년의 시간여행2, 40-47쪽, 책문, 2010년
동·서양을 연결하는 터키로…소아시아 신앙의 중심 에페소스(2) 2015-11-23 05:10:00
소아시아 신앙의 중심 에페소스(2) 한낮의 따가운 햇볕을 피하기 위하여 한 뼘의 그늘을 찾는 일에 관심이 더 간다. 그러다보니 보아야 할 것에 가까이 가는 일이 소홀해진다. 가이드를 따라가는 구경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볼거리를 전체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마치 네비게이션을 따라가면 쉽게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지만,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기억에 남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는 에페소스의 북쪽으로 입장하였는데, 도리아식이던 북문은 폐허로 남았다고 한다. 에페소스 유적에 들어서면서 세 개의 아치만 남은 무너진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로마 목욕탕이다. 로마 목욕탕을 지나 국립 아고라가 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인 돌덩이들이 늘어 서 있고, 그 사이에 흩어져 있는 나무그늘에 의지하여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다. 야외음악당인 오데이온(Odeion)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에페소스 구경을 시작했다. 국립 아고라와 오데이온 사이에는 ‘신성한 길(Hiera hodos)이 나 있다. 길 양쪽으로 이오니아식 기둥이 늘어서 있다. 지금은 1단이나 2단만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대단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아르테미스축제 때 아르테미스 신상을 모시고 행진을 한 길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2세기 무렵 에페소스의 부유한 시민 푸불리우스 베디우스 안토니우스(Publius Vedius Antonius)와 그의 아내 플라비아 파이아나(Flavia paiana)가 지은 오데이온에서는 각종 공연이나 귀족들의 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1500명이 동시에 입장할 수 있는 오데이온의 무대는 2층으로 되어 있었고, 기둥으로 장식되었다. 오케스트라석보다 1m 정도 밖에 높지 않은 지휘대(podium)는 좁았는데, 무대에서 지휘대로 통하는 3개의 문이 있었다. 오데이온은 상황에 따라서 나무로 된 지붕으로 덮을 수 있었다. 오데이온을 지나 서 있는 두 개의 기둥은 최고위직 사람들의 집합소 프리타네이온(Prytaneion)의 유적이다. 프리타네이온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지었던 것인데, 이곳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순수하고 성스러운 불을 모셨다고 한다. 흩어진 돌더미 사이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은 혹시 유적복원을 위하여 조사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신성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에는 기둥들이 이어지지만 왼쪽으로는 축대가 시작되는 내리막길로 연결된다. 축대가 끝난 곳에는 길 양쪽으로 조각이 새겨진 돌이 있다는데, 앞서가는 일행을 뒤쫓아 가는데 정신이 팔려 놓쳤다. 한쪽에는 여행자를 보호하는 신 ‘헤르메스’가 어린 양과 같이 있는 모습과 그의 상징, 발이 세 개 달린 솥을 휘감고 있는 뱀을 새겼다. 다른 쪽에는 아폴론이 숫양과 함께 있는 모습과 지구의 배꼽인 바위 그리고 발이 세 개인 솥을 새겼다. 두 개의 돌은 구역을 가르는 표시였다. 우리가 지나온 구역은 고위관리들이 업무를 보는 프리타네이온, 회의장소인 오데이온, 도시의 영웅을 모시는 사당, 신성한 불을 지키는 헤스티아 신전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한마디로 에페소스를 움직이는 중요한 장소였던 것이다. 에페소스 사람들은 이 구역을 ‘행정지구’라고 불렀다. 이곳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흩어진 돌더미 사이로 조각상이 몇 개 붙어 있는 건물의 잔해를 볼 수 있다. 로마 공화정 말기 독재관을 지낸 술라의 손자 멤미우스(Memmius)에게 바친 기념비이다. 헬레니즘양식으로 된 이 기념비는 기원전 1세기 중엽에 세워졌다. 참고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Lucius Cornelius Sulla Felix; 기원전 138 - 78)는 6개월로 되어 있던 독재관의 임기를 없앴다. 공화정 로마에서 개인이 처음으로 절대 권력을 차지한 사례로, 뒷날 카이사르가 이를 본받아 공화정이 무너지고 제정으로 이행하게 되는 길을 터놓은 셈이다.(1) 멤미우스 기념비를 지나면 두 개의 돌기둥이 길을 가로막는다. 기둥에 헤라클레스가 새겨져 있어 ‘헤라클레스문’이라고 부르는데, 기둥 아래에 세 개의 계단을 설치하여 말이나 수레가 지나갈 수 없도록 하였다. 일종의 하마비(下馬碑)인 셈이다. 헤라클레스문에 못 미쳐 왼쪽, 그러니까 멤미우스 기념비 건너편에 있는 널찍한 폐허는 도미티아누스광장이고, 헤라클레스문을 장식했던 승리의 여신 니케의 대리석판이 있다. 가이드가 헤라클레스문과 니케여신상을 중점적으로 설명하고는 지나치는 바람에 이 부근에 몰려 있는 칼키디움이나 에페소스에 물을 공급하는 수로를 건설한 섹스틸리오스 폴리오를 기리는 기념비, 도미티아누스 신전과 저수조 등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헤라클레스문을 조금 내려가면 트라이아누스(Traianus) 저수조가 있다. 기원전 2세기 무렵 세워진 이 저수조는 2층으로 된 건물이었는데 많은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고 한다. 에페소스의 곳곳에 저수시설을 만든 것은 로마시대에 대중문화로 자리 잡고 있던 목욕탕에서 사용할 물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으리라. 로마 사람들은 그 옛날 이미 개인위생을 철저하게 하고, 상하수도 체계를 분리함으로써 전염병의 확산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북문 가까이에서 만난 로마목욕탕을 비롯하여 에페소스에는 여러 개의 목욕탕이 있었다. 하드리아누스신전 뒤쪽에 붙어 있는 스콜라스티키아 목욕탕은 남녀공용으로, 시간을 달리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탈의실을 비롯하여 온탕, 냉탕, 열탕, 증기탕 등 요즈음 우리나라의 목욕탕에 가면 볼 수 있는 모든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 목욕탕에는 일종의 수세식 화장실도 있었는데 벽을 따라 좌변기가 늘어서 있고, 좌변기 밑에는 도랑이 있어 물이 흘러가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황제에게 봉헌된 신전은 셀수스 박물관과 함께 에페소스에 남아 있는 건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터키의 20리라 지폐에 인쇄되어 있을 정도이다. 푸불리우스 퀸틸리우스(Publius Quintilius)에 의하여 117년부터 119년 사이에 건축된 원래의 신전은 4세기 무렵 지진으로 무너졌고, 지금 남아 있는 신전은 그 이후에 다시 세운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신전이라기보다는 기념비에 가까운 것으로 하드리아누스황제, 아르테미스여신 그리고 에페소스의 시민들에게 봉헌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2) 신전은 문간방(pronaos)과 작은 주실로 구성되었다. 문간방에는 코린토 양식의 기둥으로 받쳐진 두 개의 아치가 세워져 있다. 첫 번째 아치에는 도시의 수호여신 티케(Tyche)의 흉상이 가운데 새겨졌고, 두 번째 아치에는 아칸서스 잎으로 둘러싸인 메두사의 반신상이 새겨졌다. 사실 이 건물이 아르테미스여신에게 봉헌되었다고 하면 첫 번째 아치에 아르테미스 여신을 새겼어야 할 것이다. 가이드는 이 상이 아르테미스여신상이라고 설명했는데, 아마도 티케라는 이름 자체가 도시의 수호여신을 말하는 것이라면 틀린 것도 아닐 것 같다. 메두사를 새긴 이유를 악귀와 불행을 쫓아주는 부적의 의미였다는 설명도 있지만, 우리 가이드는 미의 여신의 안내를 받아 신전에 입장하면서 뻣뻣하게 고개를 들 수 없도록 하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문간방의 아치 옆으로는 부조가 새겨진 네 개의 패널이 있다. 처음 세 개의 패널은 신화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에페수스를 건설한 안드로니코스가 맷돼지를 뒤쫒는 장면,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 등 그리스 사람인과 아마존의 여전사 사이의 전투가 새겨졌다. 3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4세기 무렵 재건축될 때 여기에 자리한 것이다. 네 번째 패널은 4세기 무렵 제작된 것으로 이교를 금한 테오도시우스황제와 가족들이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여신을 비롯하여, 아테타, 아폴로, 안드로클로스, 헤라클레스 등 그리스신들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새겼다. 이런 이유로 테오도시우스황제가 이 신전을 재건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참고자료 (1) 나무위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2) Temple of Hadrian, Ephesus. http://www.sacred-destinations.com/turkey/ephesus-temple-of-hadr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