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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지현 정신과 전문의
  • 기사입력 2003-06-01 22:17
지난 주 의사동네를 뜨겁게 달군 사건은 아마도 ‘마지막 의사의 유서사건’이었을 것이다. 5월 26일 월요일 밤 11시 54분에 무찌마 익명게시판에 ‘유서’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이제 나는 이 모진 어둠의 터널에서 해방되려 합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1억원의 빚을 내서 개업한지 1년이 되면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던 병원에 심평원직원이 실사를 나와 3일간 진료시간에 3시간씩 차트, 서랍등을 뒤지고 간후 환자가 반이하로 줄어들어버렸다.

이제 1-2년후면 빚도 갚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희망이 보였는데 이렇게 실사를 맞고 환자도 줄어들고 무엇보다 죄인취급을 받았다는 것과 부당청구를 일삼는 병원으로 환자들에게 낙인찍힌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의욕도 없고 문을 닫을 결심을 하였다. ‘제 인생도 이제 끝이 나는 것 갔군요’ 라는 말을 하며 저녁신문 가십란을 보라는 말을 하며 끝을 맺었다.

늦은 밤에 올라온 글이고 무찌마에는 하루에도 3000여건의 글이 올라오기때문에 왠만한 글이면 그냥 묻혀버렸을 테지만 워낙 충격적인 내용이었기에 의협게시판을 포함한 여러 게시판으로 빠르게 퍼져나가 다음날 오후가 되자 의사사회 전체의 핫이슈가 되어버렸다.

사건은 일파만파로 퍼지면서 의협은 메디게이트에 글쓴이를 추적해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원칙적으로 익명게시판의 글쓴이는 민형사적 문제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알아보지 않지만 이 경우 만에 하나 불행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에 아이디를 추적하였다.

아이디를 찾아내 연락을 해보았지만 글쓴이로 추정되는 분의 연락처는 모두 불통이었다. 다만 다음날 오전에 접속을 했던 기록이 있어서 최소한 전날밤에 유서를 쓴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며 약간의 안도를 할 수 있었다.

이후 연락을 부탁한다는 쪽지를 날린후 화요일 오후 늦은 시간에 연락을 할 수 있었다. “아! 됐다!, 살아있구나!”라는 환호가 마음속에서 일어났지만 그것도 잠시. 연락된 분은 오전에 그 글을 이미 보고 공감은 하였지만 자신이 쓴 글은 아니라고 밝혀 사건은 다시 미궁으로 빠져버렸다.

오랫동안 암호를 바꾸지 않았기에 아마도 누군가 아이디를 도용했을 거라는 추측에 나는 그렇다면 주변의 지인이 그 분의 아이디로 글을 썼을 가능성이 있으니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하고 찜찜한 마음을 갖고 전화를 끊지 않을 수 없었다.

무찌마 게시판도 원한다면 아이디 추적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타인의 아이디를 써서 유서를 올릴 정도라면 한편으로는 정말 자살을 저지르지 않을 정도의 이성은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정도의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면 이미 비극이 벌어졌을지 모르겠다는 그동안의 경험을 통한 부정적 결말이 머릿속에서 동시에 그려졌다.

다행히 수요일 오후 5시에 메디게이트 프리보드에 ‘메디게이트 회원 여러분께,,,’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와 유서를 썼던 장본인을 나와 연락했던 분이 찾아낼 수 있었고 그로부터 들은 당시의 정황을 올렸다.

그 글을 올릴때에는 ‘힘든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부족하여 생긴 일이지만 그 당시는 정말 죽으려 했다는데, 그날 밤, 잠든 아이와 부인을 보고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열심히 살기로 했다’고 한다. 현재 잠시 병원을 다른 분에게 맡기고 가족들과 여행을 간 상태라고 한다.

이렇게 사건은 삼일만에 일단락이 났지만 이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이번 일이 이토록 며칠만에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에는 여러부분 다양한 계층의 의사들이 공감할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갈수록 전방위로 압박해 들어오는 심평원의 심사기준과 실사의 위협이다. 이는 꼭 개원의가 아니라하더라도 모든 임상의사가 겪는 문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머릿속의 의사결정구조속에 그동안 배워왔던 교과서나 임상경험보다 보험적용기준이란 것이 앞줄에 서있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거기다 일반 자영업자나 사업자가 국세청 실사를 맞고 나면 경영에 심대한 타격을 받거나 심한 경우 업체의 문을 닫는 일이 벌어질 정도로 두려운 존재이듯이 심평원의 심사는 아무리 친절하고 공명정대하게 하고 규정대로 할뿐이라고 해도 일개 개원의 입장에서는 무섭고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런 공감대가 있었기에 유서사건은 일파만파로 퍼졌고, 의협에서도 이와 관련해 ‘불법, 부당 실사에 대한 문제점 및 대한의사협회의 요구’라는 성명서를 내며 심사평가원 및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국민건강보험법 제83조에 근거한 자료제공 협조 요청권한을 남용하고 있다며 진료시간 내 실사 금지, 실사 협조요청서 발급, 실사 방문시 의사회 관계자가 동반 방문, 실사권 남용 공단 직원에 대한 징계 및 내부 감사 촉구, 실사시 진료에 지장을 초래하여 국민에게 피해가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관련규정을 개정할 것을 촉구하는 정책적 의견개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두번째는 국민과 정부가 갖고 있는 의사들에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다. 법적으로 판결을 받기 전까지는 죄가 없는 자로 취급받아야하는 것이 법치국가의 기본태도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의사로 산다는 것은 잠재적 범법자가 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에 그동안 갖고 있던 의사들의 피해의식이 응집되 드러난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감을 많이 한 부분은 아마도 빚 문제일것이다. 의약분업이후 초유의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면서 많은 의사들이 수억원을 신용대출하여 개업을 하였다. 그러나 최근들어 개원가가 포화가 되고 경기가 급격히 안좋아지면서 개원가의 경영이 어려워지고 일부에서는 이자를 갚는 것도 어려운 상황에 빠지거가 폐업후 신용불량자가 되었다는 흉흉한 얘기도 들린다.

산술적으로 3억원을 빌린 경우 매달 약 200만원의 이자를 갚아야하고 1000만원의 원금을 매달 갚는다고 해도 삼년가까이 꼬박꼬박 갚아야 빚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런데 경기가 나빠져 수익이 줄거나 만약 지금의 저금리기조가 흔들리면서 대출금리 인상이 이어지면 빚에 눌려 질식사할 의사가 한 두명이 아닐 것이다.

의사대출수수료로 코스닥 상장기업을 접수한 회사가 있는 반면 빚때문에 짓눌려 남은 인생을 날라간 개업자금을 갚느라 허덕일 의사의 수는 점차 늘어날 것이라는 것이 불행한 이십일세기 한국의 현실이다.

이런 모든 상황이 있었기에 그저 장난이었거나 글만 이렇게 올린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일을 저지를지 모를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많은 분들이 함께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의사의 유서’사건은 짧은 시간에 전 의사사회의 공감대를 얻으며 퍼져나가고 다양한 의견개진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답답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의사는 좋으나 싫으나 누가 뭐라고 하던 이 나라의 보건의료를 묵묵히 짊어지고 나가야만한다. 그게 우리가 지금 처한 Catch-22다.


정신과전문의 하 지 현



주) Catch-22 : 미국 소설가 조셉 헬러의 1961년도 소설제목이기도 하며 개인이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 자신의 삶을 자기의 소망대로 이끌어 가려고 아무리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뜻대로 성취할 수 없는 상황을 묘사할때 쓰이는 단어다.
  • 기사입력 2003-06-01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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