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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협회관 때문에 땅값 떨어질라…도색해드릴게요"

안창욱
발행날짜: 2013-02-22 06:47:10

Back to the 의료계더부살이에서 시작해 안착…이전 필요성 대두

<메디칼타임즈>는 의료계의 과거의 다양한 모습을 짚어보고 이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 'Back to the 의료계'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대한의사협회가 발간한 <의협 100년사>에 따르면 의협의 모체인 '의사연구회'가 창립된 것은 1908년. 당시 한국인 의사는 일본에서 면허를 취득한 의사의 1/4도 되지 않았다.

조선에 체류중이던 외국인 의사가 거의 300명에 육박했지만 우리나라 의사는 60명에 불과했다.

의료제도와 의학교육의 기틀이 마련되지 않은 1908년 11월 15일 한성 안팎의 뜻있는 의사들이 모여 국내 의사단체의 효시인 '의사연구회'를 창립했다.

굴욕적인 한일 강제병합으로 국권을 송리리째 빼앗기면서 '의사연구회'도 1910년 8월 강제해산됐고, 1945년 해방 때까지 한국인 의사들은 일제로부터 온갖 수난을 겪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 의사들이 중심이 된 '조선의학회'와 '경성의사회'가 각각 발족했고, 이에 맞서 한국인 의사들은 '조선의사협회'와 '한성의사회'를 조직했지만 일제 말기에 이르러 강제 해산되고 일본 의사들이 조직한 의사단체에 강제 통합됐다.

해방 직후 개원의 중심의 '건국의사회'와 의대 교수들이 조직한 '조선의학연구회' '조선의사회' 등이 혼재했지만 1947년 5월 10일 전국 규모의 '조선의학협회'가 발족하면서 하나로 뭉쳤다.

이후 1948년 9월 21일 임시총회 결의를 거쳐 대한의학협회로 명칭이 변경됐다.

창립 이후 의협은 자체 회관을 마련하지 못해 서울대병원, 사회부 차관실, 보건부 의정국으로 옮겨 다니며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러던 중 1955년 11월 12일 의협이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있는 구 의친왕궁을 회원들의 기부금과 외부 지원금으로 매입하면서 처음으로 자체 회관을 마련했다.

관훈동 회관은 충분치 못한 예산으로 매입하다보니 부족한 재원을 충당할 조치가 필요했다.

의협은 1958년 6월 의협 정기총회를 열어 회관 매입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의협 신입회원 입회금으로 1만 5000환을 징수하는 문제를 상정, 격론 벌에 입회비로 1만환을 징수키로 결론 내렸다.

의협 관훈동 회관은 1955년부터 단 5년간만 사용했다.

1960년 11월 불의의 화재로 회관이 소실됐기 때문이다. 이 화재로 의협의 각종 서류와 비품, 문헌 등이 모두 불에 타 버렸다

1963년 구 심호선 내과의원 자리에 차려진 의협 관철동 회관<대한의사협회 100년사 발췌>
이 때문에 당시 제12대 회장 윤치왕을 비롯한 의협 임원진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전원 자진 사퇴하기도 했다.

의협은 관훈동 회관 화재가 발생하자 종로구 관철동에 있는 약사회관에 임시 사무소를 마련하는 등 고충을 겪었다.

의협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사회 의결을 통해 1961년 1월 14일 관훈동 회관 대지를 매각하고 같은 해 3월 중구 쌍림동 4층 콘크리트 건물을 새 회관으로 매입했다.

그러나 쌍림동 회관 매입은 의협 내부 불화로 적지 않은 파동을 일으켰다.

예산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추진하다보니 부채가 점차 늘어나 1961년 9월 말 은행부채 642만환을 포함한 총 847만환의 부채를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의료계 내부 불화와 회원들의 추궁이 빚어졌고, 회원끼리 성명서와 그에 대한 해명서를 내놓는 등 마찰이 심했다.

결국 쌍림동 회관 매입 계약에 참여한 일부 이사들이 자진 사퇴하는 것으로 회관 매입 문제를 마무리하긴 했지만 후유증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의협은 1961년 10월 정기대의원총회에서 쌍림동 회관을 매각한 돈으로 부채를 갚고, 나머지 기금으로 새 회관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쌍림동 회관을 3000만환에 매각하고, 같은 해 6월 초 서울역전에 있는 구 세브란스병원에 임시 사무소를 마련했다.

의협은 1962년 1월 22일 매입 당시부터 말썽이 된 쌍림동 회관이 협소한데다 회관 매입으로 생긴 빚 등을 청산하기 위해 새 회관을 짓기로 결정했다.

5월 3060만원에 매매 계약을 맺은 후 7월 회관을 양도해 주고, 1963년 관철동 대지를 매입해 회관을 신축했다.

지상 3층 콘크리트 건물인 새 회관을 4개월만인 9월 초 완공하고, 9월 14일 준공식과 함께 입주했다.

56평 대지 위에 145평으로 지어진 관철동 회관 건축에는 주한미군원조계획처로부터 기증받은 3000달러 상당의 건축자재와 국내 의사 회원들의 성금 등 300여만원이 투입됐으며, 9월 14일 오후 2시 회관 옥상에서 준공식을 가졌다.

관철동 회관은 구 심호섭 내과의원 자리다.

현 한강회관 신축 논의는 1969년 4월 제주도에서 열린 제21차 정기총회에서 종래 사용해온 관철동 회관을 매각하고 대형회관을 새로 짓도록 집행부에 위임하면서 시작됐다.

1970년 4월 8일 한강회관 신축공사장<대한의사협회 100년사 발췌>
두차례 공매 입찰 끝에 1969년 10월 2820만원에 관철동 회관을 매도하기로 계약하고, 11월 6일 동부이촌동 한국수자원개발공사로부터 1893만 8500원에 구입했다.

1970년 3월 회관건립위원회를 소집해 지하 1층, 지상 7층 매머드건물을 신축하되 제1차로 지하 1층, 지상 1층 공사만 하기로 결의했다. 자금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협은 1969년 12월 관철동의 시사영어학원 건물 3~4층을 빌려 임시로 사용했다.

1970년 제22차 정기대의원 총회에서 새로 선출된 한격부 회장을 비롯한 새 임원진은 2층에서 7층까지 골조공사를 진행해 12월 22일 상량식을 가졌다.

1971년 111월 남대문 우남빌딩에 전세 들어있던 임시 사무실에서 한경변에 새로 세워진 신축회관으로 옮겨 입주식을 거행했다.

새 회관에 입주한 다음에도 기금 모금이 순조롭지 않아 내장공사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72년 4월 제24차 정기총회에서 새로 선출된 조동수 회장이 모금운동을 다시 전개해 1973년 6월 7층까지 내장공사를 다시 착수해 1974년 초 완공했다.

이어 승강기와 전화교환대 및 대소강당 장치 등을 완성해 1974년 4월 26일에야 준공식을 열었다.

임원진이 3대가 교체되고, 5년여에 걸쳐 완공된 현 한강회관은 전국 회원들의 정성어린 성금과 동아제약 1000만원, 한격부 회장 500만원, 재일본한국인의사회 권영범 전임회장 100만원 등의 특별희사금이 모여져 이룩한 전례 없는 거대한 공사였다.

현 의협회관 3층과 7층의 동아홀과 사석홀은 동아제약 강중희 사장과 한격부 회장의 뜻을 기리기 위해 명명한 것이다.

당시 한강회관은 용산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일 정도로 위세를 자랑했지만 의협 조직이 커지고, 주변에 모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회관 건립 필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건물이 노후화되면서 주변 고가 아파트 입주민들이 땅값 하락을 우려해 의협회관 건물을 무료로 도색해줬다는 황당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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