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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걸린 편지 - '내가 의학도가 되기까지의 시간' 2019-11-12 05:45:00
벌써 8년 전 일이다. 공학도가 꿈이라던 친구가 의대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듣고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평소보다 성적이 잘나왔다는 이유로 의대에 진학해버린 것이었다. 필자는 당시 '의사는 안정적이고 돈 잘 버는 직업' 혹은 '대의보다는 성적으로 가는 곳' 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보편적일 수 있는 이러한 편견들로 필자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인생의 궁극적인 꿈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대 진학에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필자는 의학을 공부하고 있다. 나에게는 어떤 인식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가장 큰 계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받았던 수술인 것 같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증상으로 3시간 후 필자는 응급실에 누워있게 됐다. 그리고 담당 교수님을 만났다. "괜찮다"는 그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안정됨을 느끼고 있는 환자인 '나'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교수님의 단 한 마디에 필자뿐 아니라 걱정하던 모든 사람들이 걱정을 한시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한 명의 의사가 한 사람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 더 나아가 이 사회에 큰 힘과 위로가 될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의사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은 사실이다. 의료사고의 증가로 환자가 의사나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 일이 증가하고 있으며, 의사는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힘쓴다는 비판적인 내용의 기사가 심심찮게 올라오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필자는 의료계를 긍정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일로, 일부 의사들은 수고에 비해 연봉이 적다고 하는 반면 언론에서는 의사들이 돈을 더 벌려고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현실이 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이분법적인 프레임 씌우기는 어느 쪽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일부는 전체를 대변할 수 없으며 또 개인적인 생각이 모두의 생각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의대 진학을 단순히 '대의보다는 성적' 혹은 '돈을 쫓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과거와 같이 말이다. 세상 모든 것들은 입체적이다. 10년 전 의료계 밖에서 필자가 생각했던 이 집단에 대한 모습과 현재 의료계 안에서 바라본 이 집단의 모습은 확실히 다르다. 의대 진학 후 필자가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언론을 통해 생긴 이미지와는 달리 병원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병원에서는 어떻게 하면 환자들을 더 건강하게 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의료진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에게 고마워하는 환자들을 볼 수 있었다. 자기 집단의 이익을 옹호하는 세력들로 보이는 의료집단 내에는 누구보다 환자를 걱정하고 쾌유를 바라는 의료계 종사자들이 있다. 이것이 밖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진정한 내부의 모습인 것이다. 얼마 전, 필자는 10년 전 수술을 해주셨던 교수님께 감사편지를 전해드리고 왔다. 나에게는 왜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어쩌면 이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일지도 모른다. 환자와 의사가 서로 신뢰하고 함께 할 때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 한 명의 환자로서, 한 명의 의학도로서 환자와 의사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사회가 머지않아 오리라는 희망을 조심스럽게 품어본다.
정신질환자 대책, 국가책임 강화‧인식 개선 시급하다 2019-11-04 05:45:50
최근 상영되고 있는 영화 '조커'는 관객의 호불호를 떠나 소위 가장 핫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차별과 배제 등 감추고 싶은 우리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 아서 플렉은 광대 아르바이트를 하며 최고의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살아가는 소시민이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그의 발작적인 웃음은 위화감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 결국 코미디 방송 프로그램에서 전국적인 웃음거리로 전락한 그는 분노와 광기로 끝내 살인마 '조커'가 되고 만다. 아서 플렉이 조커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끔찍한 살인은 어떠한 이유로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정신질환에 따른 살인의 책임을 온전히 그에게만 물을 수 있는 것일까? 이 사회가 부담해야 할 몫은 정녕 없는 것인가? 정신질환자에 대한 관리와 케어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의사의 역할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영화 '조커'는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고민하게 한다. 보건복지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는 50만명 정도의 중증 정신질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중 정신의료기관이나 요양시설 또는 재활시설에 등록돼 있는 정신질환자는 약 1/3 수준인 17만 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33만명 정도는 관리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그로 인해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를 시발로 최근의 정신과 의사 살해사건, 진주 안인득 사건 등 참담한 사건들이 정신질환자에 의해 연이어 발생했다. 이 사건들은 정신질환자에 대한 세간의 심각한 우려를 낳았고, 이들에 대한 정부의 관리대책과 제도개선을 강력히 촉구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부가 제시한 중증 정신질환자에 대한 관리대책이 실효성을 거두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위험이 높은 중증 정신질환자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행정입원 제도를 도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마저도 정신질환자에 대한 인권침해라는 이유로 소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효과적일 것으로 보이는 몇몇 정책마저도 인력 및 예산 부족으로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올해 보건 예산 중 정신건강 관련 예산은 1.5%에 불과하다. 이 수치는 WHO가 권고하는 5%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따라서 정신질환자에 대한 국가책임을 강화하고, 예산 확대를 통해 중증 정신질환자에 대한 실효성 있는 관리체계를 조속히 수립해야 한다. 한편, 정부의 책임 아래 중증 정신질환자에 대한 관리시스템을 확립하는 것과 더불어 반드시 수반돼야 할 또 다른 과제가 있다. 그것은 정신질환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개선과 조기 진료 및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다. 조현병과 같은 정신질환은 완치되기가 쉽지 않지만 적절한 치료가 진행된다면 얼마든지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질병이다. 범죄를 저지르는 정신질환자는 실제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이들이다. 따라서 모든 정신질환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해 사회적 격리로만 해결하려는 시도는 필요충분한 대책이 아니다. 다행히도 의료인 선배님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2, 3인 병실의 보험급여는 정신병원과 의료재활시설에서도 적용받을 수 있도록 확대됐다. 또한 정신질환자의 약제비용을 '일당정액제'가 아닌 별도로 분리 청구할 수 있게 돼 좋은 약을 싸게 처방받을 수 있게 된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과 적절한 치료 및 케어를 위한 의료인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필자는 미국 교환학생 시절, 자폐통합센터라 할 수 있는 'Emory Autism Center'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곳에서는 자폐질환자의 치료 및 연구는 물론, 자폐질환자의 부모를 대상으로 올바른 케어방법을 교육하고, 나아가 자폐아동과 일반아동이 함께하는 공동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특정 질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의료인들이 환자에 대한 연구와 치료를 넘어 환자와 관련한 행정 및 교육 전반에까지도 역할을 확대해야함을 시사해주는 현장이었다. 의료인은 정신질환자를 가장 잘 이해하며, 정신질환자가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치료란 환자의 병을 고치는 것만이 아니라 환자의 감정을 주의 깊게 살피고, 완치 후 환자가 사회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이다. 지금도 밤낮 없이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의료인들에게는 과도한 주문일 수 있겠지만,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의 잘못된 인식과 편견을 바로잡고, 그들이 차별과 배제 없이 사회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의료인들의 사회적 책임감과 행동이 더욱 요구되는 시기이다.
EMR 셧다운 "언제까지 다른 사람으로 살아야하나" 2019-10-28 05:45:00
| "ㅇㅇㅇ님의 근무 시간이 8:00까지로 예정돼 있어 10분 뒤에 강제로 종료된다." 현재시각 오전 10시 59분, 하지만 옆에 전공의 선생님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수술 스크럽을 서고 계신다. "저 선생님, EMR 곧 꺼진다고 하는데.. 혹시 어떻게 하면 되나요?" "확인 버튼 누르면 그냥 계속 사용할 수 있어요. 확인 눌러주세요." 비단 특정 과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확인 버튼을 무한히 반복해 누르며 사용하는 마이너과들은 양호한 편이다. 전공의 수가 많은 과들은 당직표가 실습 도는 피케이 학생들에게도 내려온다. 밤에 케이스를 만들거나 다음날 수술 일정을 보기 위해 EMR에 접속할 때 당직 선생님의 아이디로 들어가 확인한다. 전공의들의 경우에는 처방을 내다가 정규 근무시간이 끝나 EMR이 꺼져 마무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면, 당직 전공의의 아이디를 빌려 서로 사용하고 공유한다. EMR 셧다운제는 현재까지 가톨릭대서울성모병원, 강북삼성병원, 경희대병원, 순천향천안병원, 아주대병원 등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경남, 충남과 같이 전국 곳곳에서 시행하고 있다. 사실은 표면적으로 전공의법 준수를 위해 시행되는 제도로 꼼수에 가까운 방법이다. 80시간 내에 업무를 마치지 못해 EMR이 강제로 꺼지는 상황이 발생해 전공의들이 불편함을 호소해도, 병원에서는 그 시간 내에 업무를 마치지 못한 전공의의 잘못으로 오히려 책임을 전가한다.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에서 이 전 회장에 따르면 수련병원의 EMR 셧다운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고 한다. "첫째, 전공의의 정확한 수련시간 산정을 막아 초과 근무를 해도 당직비 등을 인정받지 못하게 한다. 둘째, 강제로 EMR 접속을 차단해 다른 의료인의 명의로 처방을 하도록 유도해 전공의들을 의료법 위반하게 만든다. 셋째, 전공의법에 명시된 상한 근로시간인 80시간이 유명무실해져 수련환경 개선을 어렵게 한다." 그렇다면 이제야 병원에 첫 걸음을 디딘 의과대학 실습생인 우리는 어떠한가. EMR 셧다운제와 조금 비슷한 문제점으로 피케이 학생들은 본인 아이디로 EMR에 접근하는 경우는 드물다. 여러 의과대학에 실태를 조사해본 결과, 실습 학생 아이디가 학번 당 하나만 있는 경우도 있고, 실습 학생 개개인이 모두 아이디를 부여받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학생 아이디의 환자 접근 권한은 거의 없다. 환자의 접근 권한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권한을 신청해야하고 원무과가 이를 허가해주면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을 대부분의 의과대학에서는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환자의 접근 권한을 일일이 신청하는 데에는 번거로움이 있고, 원무과가 근무하는 정규 시간 내에 EMR에 들어가 신청하기에는 실습 일정만으로도 빽빽하게 짜여있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불편함 때문에 학생들은 전공의 아이디로 EMR에 접근하는 실상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살아야하는 것인가. 이를 위한 해결책으로는 유럽에서처럼 예비면허를 도입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대학병원은 교육병원임을 환자들에게 확실히 인식시키고, 면허가 있는 교수나 전공의들 지도하에 실습 학생들에게도 처방 권한을 부여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학생 EMR 아이디는 활성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러한 실습 학생들의 EMR 접근 제한을 병원 쪽에서도 문제점으로 인식해 해결방안을 찾아보려고 노력한다면, 미래의 의료인들에게 실습 도는 기간 동안 더 좋은 교육 환경이 제공되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전공의들에게 더 좋은 수련 환경이 오며, 학생들에게는 더 좋은 교육 환경이 오는 날까지 You are not alone, Just Be a Medical Mavericks!
|신세한톡|문제에 무감각한 수직적 조직문화 2019-10-23 10:41:21
"이러면 무서워서 어떻게 의사 하냐…" 지난해 지하철에 앉아 집에 가던 도중 문득 옆의 대화가 들렸다. 작년 7월, '익산 응급실 폭행 사건'으로 응급실 폭행 문제가 다시 한 번 이슈화됐다. 당시 예과 1학년이었던 나는 '그러게… 생각보다 훨씬 문제가 심각하네'라는 생각만 하고 넘겨버렸다. 사실 병원 내 폭행은 이미 이전부터 비일비재했던 이슈이다. 이는 비단 환자와 의사 사이만의 일이 아니다. 의료인들 사이에서도 있는 일이며, 심지어 수술실 내에서의 폭언 및 폭행 녹화 영상이 올라온 적도 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폭행이 훨씬 다양한 형태로 의료계 내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으며, 이는 너무나 관대한 처벌, 제도적 문제, 근무 환경 등 다양한 이유를 들 수 있다. 응급실 폭행에 대한 처벌 강화, 그리고 전공의 특별법 등 문제 해결을 위해 법적으로 여러 노력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나 피해자 및 내부고발자 보호 등 아직도 미흡한 점이 많은 상태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시 무뎌진다. 대처는 여전히 미온적이며, 조직 내에서의 문제는 계속 가려진다. 교육부의 '국립대학병원 겸직 교직원(교수) 및 전공의 징계 현황(2017년)'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7년까지 폭행 등으로 징계 받은 교수와 전공의 313명 중 81.1%가 단지 경고를 받는 것으로 마무리됐고 기록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보건복지부의 '전공의 폭행 사건 피해 현황'에 의하면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보고된 전공의 폭행 사례는 16건, 피해 전공의는 41명에 달한다. 제대로 보고되지 않은 사례들도 합하면 실제로는 훨씬 많을 것이다. '뉴욕대 심리학자 존 조스트 교수에 따르면 어떤 큰 구조적 문제가 존재할 때, 나라 경제가 좋지 않다거나 취업이 잘 안 되거나 등등 그걸 처음부터 '구조적' 문제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추상적이고 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인지적으로 많은 능력과 노력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문제를 가급적 작고 구체적으로 명시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심리학 칼럼니스트 박진영 씨의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의료계뿐만 아니라 의과대학 내의 고질적인 문제가 떠올랐다. 병원, 그리고 의과대학 내에서의 크고 작은 문제를 우리는 잘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데 굳이 나서지 말자고, 그리고 별일 아니라고 치부하고 문제를 쉬쉬한다. 특히 내가 속한 집단에서 일어난 일은 더더욱 그렇다. 구조적인 문제를 숨길수록, 그 심각성은 과소평가 되고 비슷한 문제가 꾸준히 일어나면서 악순환이 계속된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던 문제를 다른 사람들이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나 또한 감정이 무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내가 해결할 수 없다고 단정 짓고 바보같이 잊어버린 경험들이 떠올랐다. 심지어 가끔은 이게 문제인지 아닌지 마저도 헷갈리고 내 주관마저 흔들릴 때도 많았다. 이런 생각이 들자 눈치 보느라 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내 목소리가 아예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두려웠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자 마음먹었고, 동시에 좀 더 내 주변의 문제를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살려고 노력 중이다. 물론 이런 수직적이고 좁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문제를 공론화시키는 것이 어려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무감각은 너무 무섭지 않은가? 우리가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할 때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제도적으로도 큰 변화가, 그리고 개개인의 차원에서는 더 큰 인식변화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내 의견 또한 누군가에게 피력이 되는 사회, 그리고 조금 더 개방적인 사회를 꿈꾸며.
|신세한톡|쓸데 없는 '딴짓'을 위하여 2019-10-14 10:54:46
생명화학공학을 전공하다가 신소재공학으로 전과했을 때, 과대표/과학생회장을 맡아서 바쁘게 돌아다녔을 때, KAIST 학부총학생회 부총학생회장에 올인하겠다고 1년을 휴학했을 때, 경영학 복수전공을 하고 싶다고 졸업을 1년 더 연기했을 때, 가지 않아도 되었던 군대에 자진해서 입대했을 때, 공과대학원에 진학하는 대신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경영/정책대학원에 지원했을 때, 해외 명문대 경영대학원을 합격하고도 의과대학 편입학 준비를 하겠다고 진로를 변경했을 때, 의대 입학 직후 '딴짓하는 의대생 모임'을 만들었을 때, 공모전을 통해 창업을 준비했을 때, 유급당한 것도 아닌데 사업에 집중하겠다고 휴학원서를 제출했을 때, 그럴 때마다 가장 많이 들었던 조언은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것이었다. 부모님들과 선생님들은 '하라는 공부'를 안하면 '쓸데 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오로지 정해진 길을 따라 대학에 입학하고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서 안정적인 직장을 갖는 것을 최고의 가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오죽하면 올해 노벨화학상 수상자가 인터뷰 중에 "한국 학생들은 어릴 때 부터 사교육에 시달려 스스로 호기심을 개발할 시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학생들은 진로에 대해 앞선 세대, 특히 부모님 말씀을 너무 맹목적으로 따라서는 안 됩니다 (2019 노벨 화학상 뷔트히리 교수 인터뷰 중)" 라는 발언을 했을까. 세상은 쓸데없이 딴짓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해왔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기르려면 자꾸 딴짓을 해야 한다. 그리고 딴짓을 정말 잘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 "쓸데 없는 일을 잔뜩 하지 않으면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는다. 머리가 유연하지 않으면 안되고 끈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2019 노벨 화학상 일본 요시노 아키라 기자회견 중)" 존경하는 페이스북의 마크 주커버그,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애플의 스티브잡스도 학창시절에 쓸데 없는 짓 만 골라가면서 하고 심지어 대학까지 때려친 문제아였다. 그 뿐인가? 이곳 저곳 대학을 옮겨 다니다가 결국 졸업은 하지 못했지만 세계적인 기업 오라클을 창립한 엘리슨, 어린 나이에 신문배달부에서 시작해 라스베가스 베네시안과 싱가포르 마리나베이 샌즈 등을 운영하는 호텔왕 아델슨, 대학교수로서 안정적인 삶이 보장될 수 있는 스탠포드 박사과정을 중퇴하고 구글을 공동창립한 래리페이지와 세르게이브린, 최초의 온라인 결제 회사 페이팔과 전기자동차 회사 테슬라를 창립한 엘론머스크까지, 세상을 바꾼 위인들 중에는 정해진 길을 따라가지 않고 딴짓을 했던 사람들이 많다. 이처럼 대학까지 때려칠 정도로 심하게 딴짓을 하던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킨 사례는 의료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이 지금의 세계적인 명성을 향유하게 만들어준 석유왕 록펠러는 무학력자였고, 미국에서 가장 큰 사립 의학연구소 (25조 기금) HHMI를 설립한 하워드 휴 또한 대학을 중퇴하고 회사 경영자이자 영화감독으로 다양한 활동을 했으며 비행기를 조종하다가 수 차례 추락사고까지 낸 사고뭉치였다. 한국에서 가장 큰 병원이 된 아산병원을 설립한 정주영 회장님도 소학교 출신이고, 글로벌 헬스케어 기업을 만든 정세주 대표님도 홍익대학교 전자공학과를 다니시다가 중퇴하신 인물로 지금은 휘하에 하버드, 옥스포드, 연세대 출신 의사들을 두고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 혁신을 이끌고 있다. 나는 대학에서 이렇게 위대한 업적을 남기신 분들과 나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일까 고민해 왔고 '나에게는 용기가 부족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도 나름대로 도전정신을 가지고 노력했지만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딴짓을 정말 잘하는 방법을 잘 몰랐던 것이다. Medical Mavericks는 의대생들이 '쓸데 없는 딴짓'에 끈기를 가지고 도전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 그 일을 함께 잘 해낼 수 있도록 서로 도움을 주고받기 위해서 조직한 단체이다. 우리가 말하는 '딴짓'은 꼭 비임상진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당장 성적에 도움이 안되더라도, 당장 내게 돈을 벌어다주지 못하더라도,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방황하는 모든 의대생과 의사선생님들을 환영한다. You are not alone, Just Be a Medical Maverick!
|신세한톡|의대생의 비임상 진출이 가져올 순기능 2019-10-06 18:00:00
2018년 인권의학연구소에서 실시한 의과대학 학생들의 인권상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의과대학 학생들 중 수업이나 병원실습 중 전체 응답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49.5%의 학생들이 언어폭력에 노출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회식 참석을 강요당한 경험이 경우가 전체 응답자의 60%였고, 음주를 강요당한 경우는 46%에 달했다. "세상 많이 좋아졌다"라는 말은 아직 의과대학엔 찾아오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부조리가 아직도 잔존해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아마 그 원인은 이런 일들을 당하고도 침묵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당하고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대부분의 의대생들이 의과대학 6년을 졸업하고 나면 바로 대학병원으로 가 인턴과정을 수료하고, 또 그 후에는 같은 병원에서 레지던트로서 근무하게 되는 수직적인 구조에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를 다니며 선배들 눈에 나게 된다면 앞으로 있을 직장생활 까지도 영향을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가해자의 구성에 대해서 보자면 병원실습을 시작한 본과 3, 4학년 학생들에게서 폭력, 성희롱의 주요 가해자가 교수, 인턴과 레지던트, 학생 순이었고 실습을 시작하지 않은 본과 1, 2학년 학생들에서 주요 가해자는 학생, 교수, 인턴과 레지던트 순서였다. 그 외 가해자로는 1차 병원 파견 의사, 졸업한 학교 선배, 외부 강사 등 주로 의사 직종에 의한 가해가 대부분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통계는 위에서 이야기한 수직적인 구조가 부조리의 원인이라는 데에 힘을 실어 준다. 이런 구조는 학교 내의 선후배 관계가 직업군내 선후배 관계로 밀접히 연결되는 체육학과, 항공서비스학과 등에서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데, 같은 방식으로 의과대학 내의 부조리가 일어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므로 의과대학 학생들이 대학 졸업 후 대부분이 대학병원에 소속되는 단편적인 시각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이러한 문제들도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의대생의 비임상계로의 진출은 개인의 편익과 관심사에도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를 넘어서 전체 의과대학 학생사회의 발전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임상 진로를 꿈꾸는 학생들이 모여 만들어진 단체 중 대표적으로 메디컬 매버릭스가 있다. 메디컬 매버릭스는 단순히 의과대학을 졸업하면 의사가 된다는 틀에서 벗어나 의대생들에게 보다 다양한 진로의 기회를 제시해 줄 수 있는 싱크탱크로서 발돋움하기 위해 만들어진 팀이다. 올해 8월말 개최된 비임상 진로세미나를 기점으로 해 인턴사업이나, 타학과와의 네트워킹과 같은 방법으로 앞으로 의대생들이 진로로 선택할 수 있을 만한 다양한 방향성을 마련할 예정이다. 물론 메디컬 매버릭스 하나의 존재만으로 위에서 제시한 문제들이 당장에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메디컬 매버릭스가 학생사회의 발전으로 나아가는 첫 번째 발걸음이 될 수는 있다. 그리고 이를 뒤따르는 발걸음들이 하나 둘 모인다면 의과대학 내 학생사회의 변화 또한 도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세한톡| 나의 꿈은 진정 '나'의 꿈이었을까? 2019-09-30 05:45:00
의사이신 아버지, 의사이셨던 조부님, 의사로서 다방면으로 사회에 헌신하고 계신 여러 친척 분들, 그리고 의과대학에 진학한 친형. 어찌 보면 필자는 태어날 적부터 의과대학에 진학해 의사가 되는 게 숙명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적부터 자연스레 직간접적으로 필자에게 강요될 수밖에 없었던 의사라는 꿈은 어느새 교복을 입던 시절의 필자가 장래희망 란에 스스로, 자발적으로 적는 꿈이 돼있었다. 여러 고등학생들에게 의대 진학은 마치 하나의 로망과도 같았고, 필자를 포함한 주위의 많은 친구들은 그 꿈을 좇았다. 진정 그 꿈을 응원해서 그런 것이었을까, 본인의 의무이기에 그런 것이었을까, 실적을 위해서 그런 것이었을까? 필자가 다녔던 고등학교에 근무하시던 많은 선생님들께서는 그 꿈을 강하게 장려했고, 의대 진학을 희망했던 많은 학생들이 가슴 속 품고 있던 불에 장작을 지폈다. 외적 강화 요인의 끊임없는 피드백 속에서 의대에 진학한 필자는, 무언가가 쥐어준 의대 진학이라는 목표를 의사가 되고 싶다는 스스로의 꿈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진학 후에야 깨달았다. 마음에 와 닿는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었던, 허구한 날 되풀이되는 따분한 의대 생활에 염증을 느껴서일까, 필자는 굴레에서 벗어나 다양한 경험들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이것저곳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타과생들과 함께했던 경희대학교 중앙동아리 활동과 미래정책위원 활동, 다양한 가치관과 사고를 가진 의대생들과 함께했던 의대협 활동 등을 포함한 가지각색의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여러 경험들을 통해 필자는 우물 밖에서 그제야 탈출해 넓은 세상으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고, 진정 스스로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진정 내가 즐기는 게 무엇인지 탐색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예과 2년이라는 기간은 식견을 넓히기에는 적당한 시간이었지만, 목표를 설정하기엔 너무나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큰 아쉬움을 안고 생활하던 중, 인연이 닿아 'Medical Mavericks'라는 다양한 꿈을 좇는 의대생들을 위한 단체 발족에 함께했다. 방황하던 의대생은 혼자가 아님에 큰 위안을 얻을 수 있었고, 무언가에 대한 추상적인 욕구와 갈증을 느끼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뻐할 수 있었다. 'Medical Mavericks'를 발족한 인원 중 필자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학부 졸업 후 의전원 신입학 혹은 의과대학 편입학을 하신 분들 중 구체적인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학부 때부터 가진 채 이 단체의 발족에 힘써주신 분들도 계시고, 머지않아 의사면허를 취득하고 본격적으로 의사 생활을 하실 분들도 계신다. 이에 비해 필자는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장'의 역할을 할 이 단체에 '고민하는 자'의 대표로 합류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는다.'라는 말이 있다. 마음에 그늘이 생기면 결국 그 사람이 녹슬고 만다는 의미인데, 혹여 꿈이나 목표에 대한 고민으로 마음이 그늘진 분들이 계신다면, 이젠 홀로 외로이 고뇌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마치 정해져 있는 듯 한 표준에서 벗어난 꿈, 목표, 방향성, 가치관 등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함께 나아갈 분들을 기다립니다.
|신세한톡|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2019-09-23 05:35:55
강남역의 작은 술집에 모여 앉아 친구들과 각자가 꿈꾸는 미래를 토로하던 2019년의 어느 봄날이 Medical Mavericks의 시작이었다. 친구들 앞에서나 터놓는 "의대에서 다른 꿈꾸기 참 어렵고 외롭다."는 푸념은 곧 열망이 됐다.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다. 지금까지 이러한 경험을 해보지 않은 열 댓 명의 의대생들이 59일 만에 대규모 행사를 개최하고 전국 단위의 의대생 단체를 발족시키는 것. '불가능과 가능'의 여부 따위를 점쳐보지 않았던 간절함이 맺은 결실이었다.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한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주위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지금껏 쌓아온 커리어와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KAIST 재학 시절, 금융·정치·공학·경영·스타트업 등 다채로운 꿈을 꾸며, 더욱 많은 활동과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 증권사 리서치센터 인턴, 정책 자문연구원, 한국장학재단의 홍보대사를 비롯해 1000여 명 앞에서 강연하고, 팟캐스트 방송으로 학생들과 거리를 좁히기도 했다. 누군가는 전공에 도움 되지 않는 활동을 한다고 의문을 제기했지만, 이 과정에서 필자는 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금껏 길러온 공학적 전문성과 경영학적 마인드에 의학적 전문성을 접해 사회에 기여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의학도의 길에 접어들었다. 다양한 분야와 빠르게 협업하는 의료계를 꿈꾸고 의전원에 진학했다. 하지만 필자가 본 의학도의 세계는 예상과 너무나 달랐다. 다양한 꿈을 꿀 여유도, 정보도, 기회조차 부족했다. 마치 선택지가 정해진 OMR카드에서 인생을 선택하는 듯 한 현실과,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에 혼자만 방황하는 듯했다. 물론 타전공의 학생들과 커리큘럼도 다르고, 단기간에 학습해야 하는 학습량도 무척 많은 편이다. 하지만 이런 환경은 꿈을 재단하는 이유가 되기보다는 더 친절히 다양한 진로에 대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강력한 동기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Medical Mavericks의 목적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비 임상 진로를 희망하는 학우들이 기회를 얻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장을 여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임상 의사가 될 학우들이 급변하는 의료계에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돕는 것이다. 직간접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경험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의학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기대한다. 핵심은 모든 꿈에 대한 응원이다. 이미 의대생들은 다양함을 원해왔다. 2019년도에 대한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 협회 대외실무국(국장 주인기)의 발표 자료에 따르면 '의대생들이 선호하는 강연주제'에 대해서 1000여 명 중 43.9%가 '의대 졸업 후 다양한 진로'라고 답했다. 이는 Medical Mavericks 진로 세미나에도 확연히 나타났다. 기존 200여 명으로 예상했던 참가자는 300명을 돌파해 조기마감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전국 40개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전체에서 학교당 최소한 한 명의 학우가 참여했다는 점이 고무적이었다. 의대생의 다양한 진로가 더는 개인의 외로운 고민이 아닌, 모든 이가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아젠다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파우스트의 한 구절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목적 없는 방황처럼 보였던 여정은 방향을 찾기 위한 뜨거운 노력이었다. 아직 쓰이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자유롭고 당당하게 마음껏 방황하고자 한다. 우리의 열정이 모두의 긍지로 이어지기를.
|다낭여행기7| 호이안을 찾는 이유 2019-09-21 19:21:41
호캉스, 즉 호텔에서 즐기는 바캉스를 염두에 두고 여행을 왔지만 그래도 나름 한국을 벗어나 베트남이라는 외국을 온 것이기에 오롯이 방 안에서만 지내다 가기에는 조금 아쉬웠다. 한국보다 더 더운 날씨였기에 더위가 두려웠지만 그래도 서울과는 다른 베트남의 더위를 한번 쯤은 겪어보고 싶었다. 최대한 태양 볕에 타지 않도록 원단은 얇지만 긴 옷을 입고 챙이 큰 모자를 쓰고 나갔는데 이런 모든 조치는 역부족이었다. 리조트 밖으로 나서는 순간 온 몸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그냥 더운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후덥지근해서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더위였다. 이왕 나온 김에 조금이라도 바깥 구경을 할 생각으로 일단 시내로 데려다 주는 리조트의 셔틀버스에 올라탔는데, 가는 내내 이게 과연 올바른 선택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었다. 막상 나갔다가 곧바로 돌아와야 할 것 같은데 고민을 하는 틈에 버스는 이미 시내에 다다르고 있었다. 함께 셔틀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은 그다지 힘들어보이지 않았다. 원래 이 정도로 더운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지 이미 오랜 시간 베트남에서 여행하며 익숙해 진 것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 엄살을 떠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다른 사람들은 설레는 표정으로 버스에서 내려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 다낭에서는 시내를 거의 돌아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다낭만의 특색은 잘 모르겠으나 호이안은 작은 골목길을 따라서 온갖 상점들이 쭉 줄지어 서있는 모습이었고, 다낭보다 좁은 길이지만 길가에 오토바이가 무척이나 많았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수많은 오토바이들이 떼지어 다니니 오토바이에서 나오는 매연과 열기가 더해져 길가를 걷는 일이 더 힘들게 느껴졌다. 호이안에서의 즐거움은 골목길을 걸어다니며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것인데 밖에서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어렵다보니 억지로 즐거움을 찾아 나선 기분까지 들었다. 베트남에 가면 한국사람들이 흔히 찾는 콩카페가 있는데, 달달한 커피로 유명한 곳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아메리카노는 즐기지 않지만 그래도 단 맛이 나는 커피는 좋아하는지라 베트남에 오면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도를 보면서 그곳을 찾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을 만큼의 더위였다. 하지만 우리를 다시 데리러 오는 셔틀버스는 앞으로 한 시간 남짓이 지나야 오기 때문에 강제로 한 시간의 여행을 해야하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발길 닿는 대로, 다만 길을 잃을 만큼 너무 멀리는 가지 않기 위해 신경 쓰면서 돌아 다녔는데 조금씩 해가 질 무렵이 되자 인파가 점점 더 많이 몰리기 시작했다. 더위가 좀 풀리려 해서 그런건가? 싶었지만 더 큰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인파들 너머로 많은 사람들이 호이안을 찾는 이유가 되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보는 내 마음도 어쩔 수 없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다낭여행기6| 최상의 휴가 2019-09-18 19:16:42
친절한 직원의 안내를 받아 리조트 안으로 들어가니 보통의 호텔들과는 달리 어두운 톤의 원목 위주로 이루어진 로비가 반기고 있었다. 대리석과 같은 차가운 소재보다는 원목 탁자, 지붕, 협탁 등을 이용한 인테리어라서 좀 더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직원 안내에 따라 로비 의자에 앉아 기다리니 갖가지 종류의 열대 과일을 가져다 주었다. 예쁜 접시에 놓인 과일을 먹으면서 앞으로의 리조트 생활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니 설렘이 배가 되었다. 로비 뒤쪽으로 보이는 풀장과 숲길처럼 마련된 조용한 산책길은 리조트에서의 휴식을 만끽할 수 있게끔 조성된 최상의 조화였다. 이 리조트는 구관과 신관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구관은 좀 더 클래식한 느낌이라면 신관은 그 이름처럼 현대적이고 넓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보다 여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한국에서 미리 알아보았을 때는 구관의 투숙객들이 신관의 시설을 이용할 수 없다고 들었는데, 막상 도착해서 보니 구관과 신관의 시설 이용 간에 따로 제한을 두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신관과 구관이 갖고 있는 풀장 종류도 달랐지만 둘 다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어서 좋았다. 베트남이 더운 편인 것은 알았지만 방문했을 당시에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덥게 느껴졌다. 사실 이럴 것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리조트에 머무는 시간이 길 것이라 생각하고 계획을 짰으나 정말로 시내에 나가기 힘들 정도로 잠시 바깥에만 나가도 땀이 줄줄 흘렀다. 이러다 호이안 시내를 한 번도 못 보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일단 리조트에서 많이 쉬고 휴양하는 것이 가장 주된 여행의 목적이었기에 짐을 풀고 그 다음 일정에 대한 부담감은 내려놓기로 하였다. 로비와 마찬가지로 룸 인테리어도 원목으로 꾸며진 방이었고, 널찍한 공간에 은은한 나무향과 아로마향이 어우러져 휴식을 취하기에 제격이었다. 가만히 누워 쉬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휴가는 없겠다 싶었다. 요새 ‘호캉스’(호텔과 바캉스를 합친 신조어)가 유행하는데 어차피 호텔에서 쉬는 것이라면 무엇을 위해 타지로 여행을 가느냐 하는 반문이 있기도 하지만 호캉스를 즐겨 보면 그곳이 어디든 간에 한 번쯤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에는 이리 저리 바쁘게 돌아다니고 최대한 많이 보고 겪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여행을 곧 휴가의 연장선으로 생각하다 보니 어딘가로 가서 별 것을 하지 않아도, 특별한 것을 경험하지 않아도 그것이 곧 여행이자 휴가가 될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여행, 휴가의 형태가 자유로운 방식으로 다양화되면서 호캉스도 일상 탈출의 한 방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 아닐까 싶다. 반나절 정도 쉬었을까. 뜨거운 태양이 어느덧 내려앉을 기운이 보이자 석양을 보면서 한가로이 수영을 하면 좋겠다 싶어 수영할 채비를 하고 호텔 일층으로 내려왔다. 오후가 되면서 더위가 한 풀 꺾이고 풀장 바로 옆에 야외석을 마련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한국에서 종종 먹었던 분짜라는 베트남 음식을 시켰는데 대단한 음식은 아니었지만 소소하게 맛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뷔페식으로 이것저것 먹는 것 보다는 음식 한 두 개만 시켜놓고 그 자체의 맛에 집중하면서 먹는 것이 더 먹는 기쁨을 배가 시키는 것 같다. 음식도 맛있고, 날씨도 괜찮고 무엇보다 내 마음이 편하니 이보다 더 좋은 휴가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좋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