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가 2022-01-17 05:45:50
임상 의사라는 획일화된 진로를 추구하기보다는 의학 외에도 흥미를 느끼고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접목하고 싶다는 개인적 가치관과 메디컬 매버릭스(Medical Mavericks)가 추구하는 가치가 상통한다고 생각해 단체 발족 이전부터 비임상 진로와 관련된 활동들을 지속적으로 해왔고, 매버릭스에 계속 몸담게 되었다. 운영진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회원으로서 진로 세미나, 의연회 게더링(gathering), 부스 운영 등에 참가하며 여러 분야로 진출한 선배 의사 선생님들의 경험과, 비임상 진로에 관심 있는 선후배 학생선생님들을 만나 교류했다. 그 다음 해부터는 운영진으로서 의학교육 및 시사 이슈에 대한 정기적 칼럼 기고, 의대생 진로탐구생활 인터뷰에 참여했다. 관심사가 비슷한 회원들끼리 행사가 끝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교류하거나 관심분야별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운영할 수 있는 교류의 장을 마련하고자 관심분야별 오픈채팅방을 만들어보고, 네트워킹 소모임도 구성해보았으나 진행에 있어서 녹록치 않았다. 모니터 너머에 존재하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보다는 실제로 눈 앞에 있는 사람을 마주하고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훨씬 교류에 있어서 원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코로나의 영향으로 모임 인원 제한이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학교 및 학년이 서로 다른 의대생들의 경우 각자 학사일정이 매우 상이하기 때문에 공통된 오프라인 모임 일정을 잡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300명이 넘는 회원들 간의 교류는 고사하고, 전국에 흩어져있는 20명 가량의 운영진들간에도 실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바쁜 학사일정을 소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체에 대한 애정과 비임상 진로에 대한 열정을 기반으로 진로 세미나 및 각종 인턴십, 인터뷰, 멘토링, 봉사활동을 조직적으로 기획하고 성공적으로 진행한 동료 운영진분들, 각 학교에 꾸준히 매버릭스 행사를 홍보해주신 학교 대표분들께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 번이라도 매버릭스의 행사에 참여해 본 적이 있거나, 아직 매버릭스를 잘 알지 못하더라도 임상 외의 다른 길에 흥미나 궁금증이 있는가? 그렇다면 주저하지 말고 매버릭스의 회원 또는 운영진으로 함께 하며 자신이 원하는 학교 밖 배움의 기회를 스스로 만들고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Do what you like, just be a Medical Maverick!
독단적인 전공의 정원 확대, 수련환경 개선 역사 오점 2022-01-10 12:14:00
수련환경평가위원회는 보건복지부 장관 직속 기구로 지난 2017년, 『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에 의해 전공의 수련환경과 관련한 주요 정책을 심의하기 위해 구성되었다. 수련환경평가위원회는 총 6개의 분과위원회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교육평가위원회는 전공의 정원책정, 전공의 추가 수련, 수련 교과과목 등에 관한 사항을 논의한다. 2022년도 전공의 모집 계획은 지난해 10~11월 교육평가위원회를 거쳐 본회의에서 심의를 마쳤고 레지던트 모집은 이에 따라 진행되어 12월 24일 합격자 발표까지 마쳤다. 그런데 지난 5일 보건복지부는 황당한 보도 자료를 배포했다. 코로나19 치료기관에 미충원 정원 50명을 배정하고, 코로나19 치료 의료기관뿐만 아니라 내과 미충원 정원이 있는 수련병원은 총 50명까지 추가 모집할 수 있도록 하여 전국적으로 내과 전공의 최대 100명을 추가 모집한다는 것이다. 추가 배정 기준은 코로나19 병상 규모, 병상 운영 기간 등을 명시했다. 또한 복지부는 감염병 치료의 질을 제고하기 위해 감염내과, 호흡기내과, 중환자실 수가 개선방안을 검토 하고 필수의료협의체에서 1분기 중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했다. 복지부가 발표한 미충원 정원의 추가모집 및 정원 확대는 수련환경평가위원회에서 논의된 바가 전혀 없다. 내과 정원 확대에 대해서도 대한전공의협의회뿐만 아니라 내과학회 또는 의사협회와 논의한바 역시 없다. 정부 발표 후 지난 6일, 복지부 담당자에게 문의 시 '전공의 정원은 보건복지부장관이 정한다'는 전문의의 수련 및 자격 인정 등에 관한 규정 제8조를 들며 "수련환경평가위원회는 수련 환경을 논하는 자리이므로 정원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고, 논의할 필요도 없다"라는 답을 했다. 또한 이번 정원 확대로 충원되는 인원은 3월에서야 현장에 투입될 것으로 당장 코로나19 보다는 추후 감염병 위기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자 선제적으로 대응한 것이라고 밝혔다. 수련환경평가위원회는 복지부 직속 기구다. 정원 책정이 보건복지부의 고유 권한이라는 이유로 스스로 만든 절차인 수련환경평가위원회 논의를 생략한 것은 복지부의 전공의수련환경 개선 역사에 큰 오점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특히 교육평가위원회의 주요 업무를 전공의 정원 책정으로 명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련환경평가위원회는 정원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입장은 복지부의 수련환경평가위원회에 대한 이해 수준을 보여준 셈이다. 전문가 및 유관 단체와 단 한 번의 상의를 거치지 않은 것 역시 매우 독단적인 태도다. 복지부가 보였던 전공의 수련환경개선 및 양성을 위한 노력을 생각해볼 때, 내과 정원 증원을 통해 감염병 위기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겠다는 주장은 매우 허황되어 보인다. 먼저 많은 수련기관이 코로나 전담병원으로 전환되며 해당 병원의 전공의들은 중대한 수련의 질적 저하를 마주하게 되었다. 코로나19와 무관한 과목을 수련하는 전공의는 수련을 이어 나가는 것 자체가 어렵고 코로나19와 관련된 과목을 수련하는 전공의 역시 코로나19 이외 질환을 접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복지부는 이러한 문제에 대비책을 마련해두지도, 마련할 의지도 없어 보인다. 전공의협의회는 해당 병원들에서 이동수련의 수요 및 필요성, 절차적 어려움에 대해 당사자와 논의하며 해결법을 모색하고 있다. 또 2019년 의사양성비용 국가지원을 활발히 논의하던 때에도 복지부는 특정 직종에 대한 양성 비용을 지원하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며 국고지원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연차별 수련교과과정 개선을 위해 일부 예산을 편성했으나 2021년에도 26개 전문 과목 중 8개 과목 편성에 그쳤다. 바라건대, 복지부에서 진심으로 감염병 위기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자 한다면 내과 전공의 증원이 아닌 전공의 수련환경개선을 위한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행보를 보여주었으면 한다. 전문가 단체와 충분한 논의를 거쳐 의료 인력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해주길 바란다. 전공의 증원이 필요하다면 감염병 치료의 질을 제고하기 위하여 감염내과, 호흡기내과, 중환자실 수가 개선방안을 검토 하고 필수의료협의체에서 1분기 중 방안을 마련 한 뒤 증원을 진행하여 수련 과정이 그 목적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면 한다. 또한,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자 한다며 정원 배정 기준을 수련환경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코로나19 병상 규모, 병상 운영 기간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결정을 철회하길 바란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전공의 수련환경을 개선하고자 노력한 병원에 가산점을 주는 등 목적에 맞는 추가 정원 배정의 기준을 명확히 수립하고 공개하여 보건복지부의 의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소통을 시작하길 바란다. 수련환경평가위원회 본회의는 2021년 11월을 마지막으로 실질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다. 소통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개선을 이루어내기 어렵다. 복지부 수련환경평가위원회 홈페이지(http://cgmt.or.kr)에 적힌 '전공의 수련환경개선이 수련교육의 질 제고와 우수한 전문의료인력 양성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그 역할을 충실히 해 나아가겠습니다'라는 약속이 글로만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도와주러 왔는데, 도움 받아 갑니다 2022-01-10 05:45:50
난 주러 왔을 뿐인데 오히려 내가 받고 갑니다 눈물 닦아주러 왔을 뿐인데 내 눈물만 흘리고 갑니다 씻어주러 왔을 뿐인데 오히려 내가 씻겨졌습니다 고쳐주러 왔을 뿐인데 오히려 내가 치료되어 갑니다 (난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 유은성) 봉사활동의 사전적 정의는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쓰는 모든 활동이다. 이 정의에서 중요한 부분이 모든 활동의 방향이 국가나 사회 또는 남에게 향해 있다는 것일터이지만, 개인적으로 경험해온 봉사활동에서의 방향은 나 자신과 남 모두에게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칼럼에서는 봉사자가 봉사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들과 실질적인 유익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필자가 경험해왔던 봉사활동들을 기반으로 봉사활동이 주는 유익들을 네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 봤다. 첫째는 새로운 환경에서 만나는 봉사 대상자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친구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프리카 대륙 중앙에 위치한 에티오피아에서 3주간의 해외봉사활동을 진행했던 학부 3학년 때의 일이다. 우리 봉사단은 현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다양한 실험 물품들과 함께 과학 수업을 준비했고, 또 K-POP 댄스를 미리 연습해 준비해갔다. 현지 초등학생 입장에서 아시아 인종의 어른들이 단체로 와서 친해지겠다고 하면 반감이 들지는 않을지 걱정되었고 그 탓에 한번이라도 더 함께 교류하고자 쉬는 시간만 되면 마당으로 나가서 함께 춤을 추었다. 첫날 어색해하던 아이들이 둘째 날부터 당시 유행하던 강남스타일 말춤을 추며 마당을 누비던 필자를 보고는 피리부는 사나이를 따라다니듯 함께 춤추고 다니기 시작했고 이내 우리는 금방 하나가 되었다. 나이, 환경, 직업, 인종, 국가에 관계없이 동등한 위치에서 만난 봉사자와 그 대상자들은 작은 노력으로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 둘째로, 함께 고생하는 봉사자들 간 끈끈한 유대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대학원 시절 관정 장학생으로 선발된 이후 11회 관정 장학생 모임 회장으로 봉사하던 때, 모임 행사 최초로 연탄 봉사활동을 기획해 장학생의 참여를 독려했던 기억이 난다. 봉사 이후 공통된 피드백이 사회에 공헌하고 싶다는 의지는 있지만, 어떻게 참여하는지 알지 못했는데, 다른 봉사자들이 있어서 큰 부담 없이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록 짧은 순간이더라도 선한 동기와 뜻으로 모인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고생한 이후 느끼는 보람과 뿌듯함, 그리고 속한 단체로부터 느끼는 든든함은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임을 확신한다. 세번째는, 때로는 봉사활동이 진로의 방향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어 주기도 한다는 점이다. 에티오피아 봉사활동 당시, 다친 상처를 일찍 치료하지 않고 방치해 피를 뚝뚝 흘린 채 봉사센터를 찾아오는 한 청년을 보고 조기 진단과 조기 치료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대한 공학적인 해결책을 찾고자 대학원에서 의료기기 연구를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역시 치매 독거노인 방문 및 말벗 봉사와 병행하면서 실질적인 임상 수요를 생각해보고 싶었고, 이를 연구에 접목하여 진행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병과 환자에 대한 이해없이 그들을 위한 연구를 하는 것의 한계를 또 절감하고 의과대학 편입으로 현재까지 이어졌다. 이렇듯 진로 선택에 가장 큰 인사이트를 제공했던 이벤트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봉사활동들이었다. 마지막 네번째, 의대생의 입장에서 고려할 수 있는 선택지인 의료 봉사가 실제로 환자에게 임상적, 심리적 이득을 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2021년 12월 중순, 한국의사들의 세계로의 진출을 꿈꾸는 의사들의 커뮤니티를 설립한 K-DOC 회사와 medical mavericks 봉사 TF팀, 의대생 신문이 힘을 모아 의료 소외 농촌 지역인 충주시에서 1박 2일간 '찾아가는 닥터버스' 봉사활동을 진행했다. 하루에 100여명의 고령 혹은 외국인 환자들이 몰릴 만큼 반응은 뜨거웠다. 병원 실습을 통해 단련된 학생 의사의 입장에서 감사하게도 실제 환자 문진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 기회를 통해 교육 현장 밖의 실제 환자를 문진하는 경험하는 교육적인 효과는 물론, 대부분의 양성 질환 가운데 악성 질환을 감별해내는 훈련도 경험할 수 있어 좋았다. 실제로 여러 악성 질환의 임상양상을 가진 환자들을 로컬 병원으로 인계해드릴 수 있어 충분히 임상적 이득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의료 봉사에서는 약물 처방 없이 impression에 따라 로컬 병원으로 인계까지만 하는 것을 end point로 설정했기 때문에, 환자들의 낮은 만족도를 염려했으나, 결과는 전혀 달랐다. 의료 소외지역에서는 환자들이 단순히 자신의 불편함을 호소하고 들어주는 의사가 증상과 질병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만으로 큰 만족을 느꼈다. 특히나, 평소에 접하기 어렵지만 단순한 혈당검사, 혈압검사, 초음파 검사 등을 받는 것만으로 자신에 건강에 이로운 행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그들이 자신의 건강에 더 관심을 갖고 관리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혹자는 봉사활동을 대학생들의 전유물로 여기기도 하고 수익성이 없으므로 취미활동 정도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매 순간 누군가의 도움을 값 없이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 도움에 감사하며 나도 언젠가 누군가를 도우며 살 것이라고 다짐하는 사람이라면, 상황과 형편에 관계없이 나름의 봉사활동을 지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부를 모르고 살던 사람이 성공해서 10만원 기부하는 것보다 평소 만 원씩 기부하던 사람이 성공해서 10만원을 기부하는 것이 쉬운 일인 것처럼, 시험과 과제로 바쁜 상황이지만 일부를 덜어내어 돕는 훈련을 거친 사람이라야 성장한 이후에 더 큰 도움을 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사실 도와준다고 생각하고 시작하지만, 결국 두 손 가득 도움 받은 채 돌아가는 경험으로 봉사의 매력에 흠뻑 젖어 보시기를 권해본다.
소청과의 붕괴…환자가 없으면 의사도 없다 2022-01-03 05:45:50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로 의식주를 꼽는다. 추위를 막아줄 옷이 있어야 하고, 살아가기 위한 음식과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의식주 이전에 우선적으로 챙겨야 할 것은 당연히 건강이다. 건강하지 않아 생기는 괴로움은 의식주가 부족해 받게 되는 괴로움과 버금갈 것이다. 만약, 그 대상이 나라의 미래 기둥이 될 소아청소년이라면 그 나라의 미래가 그리 희망차지만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소아청소년들이 없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놀랍게도 이런 기본적인 것들도 누리지 못하는 소아청소년의 국적이, 선진 의료를 주도하는 대한민국일 수 있다. 바로 소청과의 붕괴 때문이다. 코로나의 장기화와 초저출산 문제, 진료환경 악화 등의 문제로 소청과는 크나 큰 위험에 직면해 있다. 2020년 154개소의 소청과 의원이 폐업했고 소청과 전공의 지원율은 지난 6년 사이 5분의 1 가까이 줄었다. 소청과 지원율은 2017년 113.2%, 2018년 113.6%, 2019년 101.0%로 정원보다 지원자가 많았다. 하지만 2020년도 모집부터 지원자가 줄기 시작해 지원율 78.5%로 감소했으며 2021년도 전공의 모집에서는 37.3%, 그리고 2022년도 전공의 모집에는 30%가 뚫려 26.3%를 기록했다. 모집 인원 보다 더 적은 인원이 지원했다는 것은 필요한 수보다 적은 수가 모였음을 뜻하고 이는 멀지 않은 미래의 의료 공백을 의미한다. 환자를 치료할 의사가 없다는 것은 더 이상 환자가 살아갈 환경이 안된다는 얘기다. 저출산을 포함한 복합적인 이유들이 소청과 전공의 지원율 급감과 소청과의 붕괴를 야기하고 있고 이는 다시 저출산과 진료환경 악화 등의 문제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 피해는 소청과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소아청소년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수도권이 아닌 의료취약지에서 한밤중 환아를 받을 수 있는 병의원이 과연 몇 군데나 있을까. 거의 전무할 것이다. 21세기 서울에서는 이럴 일이 적다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소아청소년들에게는 수도권 역시 의료취약지가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소청과학회에서는 특단의 조치로 소청과 전공의의 수련 기간을 4년에서 3년으로 단축시키기로 결정했다. 모 교수님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소청과의 전공의 수련기간 단축은 당연한 수순이지만 수련교육과 맟물린 의료현장의 공백도 걱정된다고 말씀하셨다. 의료현장의 공백 말고도 전공의의 수련 기간이 줄어듬에 따라 전문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생기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 같다. 최근 들어 초저출산과 맞물린 소청과 전공의, 전임의 지원률 감소 문제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하지만 문제의 심각성과는 달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이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며칠 전 주변 친구들에게도 이러한 문제들을 인지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절반 정도의 대답만이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대답이었고, 소청과의 붕괴에 대해서는 의대생이 아니라면 거의 모르고 있는듯 했다. 소청과학회나 소청과의사회 모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야를 가리지 않고 노력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러한 문제들을 좀 더 공론화하고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이 글 역시 공론화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쓴다. 의사가 없으면 환자가 살 수 없고, 환자가 없으면 의사도 없다. 국민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나라의 존망을 가를 만큼 중요한 문제를 정부와 의료계의 협의 하에 모두가 노력하여 하루 빨리 문제가 해결하면 좋겠다. 건강하고 미래가 희망찬 대한민국을 되찾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의대생 친구들, 기초 랩 인턴 외않헤(왜안해)? 2021-12-27 05:45:50
우리 학교에는 '의학연구'라는, 다른 의대에는 잘 없는 특별한 블록이 하나 있다. 이 블록은 본과 2학년 마지막 10주 정도를 할애해 아무런 이론 수업을 하지 않고, 실험실 인턴으로 근무하게 하면서 기초의학을 체험하게 하는 과목이다. 평소 연구에 뜻이 있던 학생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고, 연구에 별 관심이 없는 학생이라 하더라도 시험의 압박이 없기에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이라 모두가 기다려 마지않는 수업이다. 나의 경우 본과 1학년 때부터 관심을 두고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 인턴 활동을 하던 실험실이 있어, 그 실험실에서 전일제로 연구에 참여하며 내가 계획한 간단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만 1년이 약간 넘는 시간의 인턴 활동 경력만 가지고, 기초의학자의 진로가 이렇느니 의사과학자의 이점과 고충은 저렇느니 하고 논하는 것은 가당찮은 일일 것이다. 그보다 나는 이 글에서, '의대생'으로서 실험실 인턴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왜 실험실 인턴이 의대 생활 중 한 번쯤은 해볼 만한 일인지에 대해 내 일천한 실험실 생활을 근거 삼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우선 의과대학의 기초 실험실은 정작 의사는 없는 '홍철 없는 홍철팀'인 경우가 많다. 이런 가운데 자교 의대 실험실에 인턴을 해보고 싶다고 손을 든 의대생은 그 자체로 천연기념물로, 어딜 가나 환영 받는 존재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의대생은 '라이선스'가 보장된다는 특성상 다른 자연대/공대 출신 사람들에 비해 보다 심리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 '안정성'이라는 무형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한데, 감이 잘 오지 않는 사람은 수능을 치기 전 수시를 하나라도 붙어 놓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된다. 정말로 많은 대학원 지망생들이 (이제는 막바지에 다다른) 약대 편입과 대학원 진학을 놓고 고민을 하고, 입학 후에도 마음고생을 많이 한다. 이런 면에서 실험실 생활을 정말 '경험 삼아' 해볼 수 있다는 것은, 의대생 스스로는 잘 자각하지 못하는 큰 특권이다. (물론 이는 역으로 의사 출신 연구자들이 이공계 출신 연구자들에 비해 '덜 절박하게' 만드는 요소일 수 있다. 실제로 내가 만났던 한 인턴 선생님은 이러한 이유로 MD가 아닌 교수님 랩을 선호한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런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왜 (적어도 자기소개서에서만큼은) 붕정만리의 꿈을 안고 입학한 의대생들은 하나 둘 죄다 사라져버리고 다만 몇 명만 남아 실험실에 침전하는 걸까? 아무래도 모두가 꼽는 제일의 이유는 시간의 부족일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의를 듣고 필기를 한 후, 밤에 강의록을 복습하다 잠에 드는 일과 가운데 실험실에 가서 기웃거릴 여유는 없다. 주말, 시험이 끝난 날, 방학 등 의대생이라고 여가시간이 없는 건 아니나 그 잠깐의 소중한 시간마저 연구실 인턴 활동에 쏟으라는 건 정말로 연구에 뜻이 있는 학생이 아닌 다음에야 너무도 가혹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나도 지난 일 년 간 비대면 수업이라는 이점을 살려 학기 중에 실험실에서 하루 종일 있어 봤지만, 하루 7개씩 쏟아지는 수업을 듣고 강의록에 필기를 하다 보면 겨우 실험실 안의 허드렛일을 돕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활동의 전부였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사람은 자기에게 꼭 필요하다 싶으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게 돼 있다. 학생들이 연구에 시간을 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은 애초에 자신과 기초의학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임상이라는 확실하고 인기 많은 길을 두고 굳이 기초라는 아무도 가지 않고 돈도 잘 못 버는 길로 방향을 틀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차피 기초의학을 하지 않을 건데 실험실에 들어가 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무어냐. 이것이 내가 주위에서 관찰한 일반적인 의대생의 사고의 흐름이다. 학생들의 기초의학 진로 탐색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는 편이라는 서울대학교도 이럴진대, 하물며 다른 학교는 어떻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의대생들에게 나는 고(故) 정주영 회장의 유명한 한 마디를 해주고 싶다. "해보기나 했어?" 사람은 아무리 이론을 공부한다 해도 그 일을 해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잘 하는지 모른다. 왜 이미 본과 시절 모든 블록 수업을 다 들어 본 수련의들에게 각 과를 돌게 시키겠는가? 병원의 다양한 환경에서 경험을 쌓으라는 뜻이겠지만 그 안에는 전공을 정하기 전 직접 경험해보고 판단하라는 의미도 분명 내포돼 있을 것이다. 실제로 선배들 얘기를 들어보면 실습을 나가고 인턴을 돌다 보면 이론으로 배우던 것과는 완전히 또다른 별천지가 펼쳐진다고 한다. 기초의학도 마찬가지이다. 유세포 분석을 이론으로 배우는 것과 실제로 내가 세포를 하나하나 분리하고 적절한 형광 항체를 붙여 만든 샘플이 기계를 통과하면서 컴퓨터 화면에 점이 톡톡 찍히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 것은 그 감회가 천양지차이다. 내가 세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실험실 사람들과 논의&8212;사실 포닥 선생님의 일방적인 지적인 경우가 많지만&8212;를 해가며 실험 계획을 세우고, 실험을 진행한 결과가 내 예상과 맞아 떨어질 때의 그 '뽕맛'도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심지어 이런 과학적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알아가는 능력은 이미 알려진 정보를 습득하는 능력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기에 의대 성적이 나쁘다고 해도 큰 문제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야말로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인데, 기초의학이라는 이름에 지레 겁먹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물론 정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실험 결과가 척척 나와서 실험 결과가 척척 나와서 p값이 0.001보다 작다고 그냥 뜨고 그래프마다 별이 3개씩 박히는 ‘희망편’ 가능세계가 있다면, 하는 족족 예상과 달리 결과가 제멋대로 나오고 시간만 날리는 ‘절망편’ 가능세계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나마 임상 연구에서 결과가 안 나오면 환자를 치료했다는 사실이라도 남지, 기초 연구에서 실험이 망하고 나면 남는 것은 싸늘한 쥐의 사체와 실험장비 사용료 청구서(물론 이것은 내가 아니라 교수님이 내시는 것이긴 하다), 그리고 망연히 실험실 책상에 앉아 있는 나 자신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마저도 해보지 않는 것보다는 의대생 때 일찍 해보는 편이 좋다. 이런 경험이 아예 없는 상태에서 막연히 ‘기초의학 연구는 매일 새로운 연구로 가득하겠지!’ 하는 로망을 갖고 전문연구요원으로 지원했다가, 끝없는 파이펫팅 지옥과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실험 결과의 연속에 학을 떼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그 밖에도 랩 인턴으로서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은 많다. 학부생 인턴에게는 교수님의 평가가 훨씬 너그러워지며, 실험 방법 및 배경지식에 대한 무지가 허용되고, 성과가 나오지 않아도 독촉 대신 격려가 돌아온다. 고가의 실험장비를 다뤄볼 기회를 제공받기도 하고, 연구원으로 등록이 되면 작게나마 연구비를 받을 수도 있다. 자, 글을 마무리지으며 나는 약간은 가혹한 말을 하고자 한다. 물리적인 시간도 부족하고, 설령 시간이 난다 하더라도 마음의 여유가 없는 의대생의 심정은 너무도 잘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실험실 하나를 정해 한 번의 방학이라도 시간을 내어 실험실에 다녀볼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설령 최악의 경우 '이건 때려 죽여도 못 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더라도, 일찌감치 자신과 상극인 분야를 하나 걸렀으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아마 대부분은 그보다는 조금 온건한, '흥미로운 부분도 있지만 지루한 날들도 많다'라는 애매모호한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정말 어쩌면, 자신도 몰랐던 연구 분야의 재능을 찾아낼 수도 있다. 이 경험은 후제 본격적인 의사과학자가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임상 의사로 활동하며 다른 기초의학자들과 소통하는 교두보가 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당신에게 기초의학은 더 이상 '본과 1학년 때 보고 치운 책 속의 과목'이 아닌, '내가 한번 체험해 봤던 의학의 한 분야'가 될 것이다. 자, 지금도 기초의학 교수님들은 언제든 여러분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변해줄 준비가 돼 있다. 여러분은 그냥 재밌어 보이는 실험실을 하나 골라, 교수님께 이메일을 쓰기만 하면 된다. 어떤가? 조금만 용기를 내보지 않겠는가?
의대생 비임상 진로 설계에 대한 노력 2021-12-20 05:45:50
최근 의대를 졸업하고 학위만을 갖고 제약회사, 의료기기 회사에 들어가거나 전공의 과정까지 거친 다음 창업을 하려는 시도들이 눈에 띄게 많이 보인다. 실제로 최근 닥터나우의 장지호 대표, 실비아헬스의 고명진 대표는 학부를 졸업하기 전, 재학생의 신분으로 창업을 성공시키고 막대한 자금의 투자를 유치하여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이렇게 학부생들 외에도 창업에 성공한 선배들의 사례가 늘어가기도 하며,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의사라는 직업에 만족하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자 하는 학생들이 많아 의과대학생이 타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하나의 트랜드로 자리잡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많은 의대생들은 자신들의 관심사를 확인해보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자 학업만으로도 부족한 시간을 쪼개어 도전하고 있다. 본인 또한 창업을 꿈꾸며, 딥러닝에 대한 공부를 시간 내어 꾸준히 하는 중이다. 나중에 진정으로 내가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있고, 사업 아이템에 바로 적용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하고 있는 것이다. 본인이 이러한 흐름 속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는 해결하고 싶은 문제에 중점을 두고 그에 대한 공부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현업에 계신 의대 출신 사업가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팀에 속한 사람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하여 프로그래밍, 법률, 비즈니스 관련 공부를 많이 하고 계신다. 이런 부분에서 미리 많은 경험을 쌓아두고 프로그래밍 공부와 같은 공부를 많이 해 둔다면 분명 미래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핵심은 성공한 의대 출신 사업가들은 자신들의 전문 분야에서 어떠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을지 그 문제점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이를 사업으로 연결했다는 점이다. 예로 닥터나우의 장지호 대표의 인터뷰만 살펴보더라도, 그는 소외계층의 병원과 약국에 대한 접근성의 부족을 자신이 원격의료를 사용하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의대생들이 스타트업이라는 거대한 경쟁에서 우위를 살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문분야를 확실하게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방법은 의료 산업에서 우리가 도전하여 해결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한 통찰을 가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한번, 부족한 시간을 쪼개서 비임상 진로에 도전하고 있는 수많은 의대생들을 응원한다.
PA 합법화, 의료인력 부족 문제의 합리적 해결책일까 2021-12-13 05:45:50
진료보조인력(PA) 문제는 의료계의 구조적 모순에 기인한 문제로 수년 전부터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지난 5월 서울대병원이 PA 간호사를 '임상전담간호사(Clinical Practice Nurse, CPN)'라는 용어로 대체하고 양성화를 시도하면서 PA 문제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보건복지부가 10월 27일 '진료지원인력 관련 정책방향 공청회'를 열면서 논의가 본격화되었지만, 여전히 병원계와 간호계, 의료계의 입장은 첨예하게 대립 중이다. 필자는 의료서비스의 질 확보를 위해 무면허 의료행위를 근절하는 것이 본질이지, PA 합법화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입장이다. PA 합법화로는 저수가 체계가 만들어낸 구조적 의료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PA란 Physician Assistant의 약어로 의사가 수행하는 수술을 보조하거나, 환자 진료에 관여하기도 하는 보조인력이다. 미국에서는 PA가 법제화되어 있고 별도의 교육과정과 면허가 존재하지만 우리나라의 PA는 법제화되어 있지 않으며 업무경계 또한 모호하다. 즉, PA 간호사의 수술 참여는 의료법 제2조에 의거했을 때 엄연한 무면허 의료행위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 PA가 도입된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의료인력 수급의 문제이다. 저수가 체계로 인해 수술로 얻는 비용이 책정된 의료수가보다 낮은 과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 의사보다 PA 간호사를 고용하는 것이 선호된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의사를 더 뽑기 어려운 상황인데, 전공의 특별법 시행으로 전공의 노동 시간이 주당 80시간으로 제한되면서 의료인력이 급격하게 부족해진 것이다. 둘째, 병상 수의 증가로 인한 업무량의 증가이다. 환자들이 1차, 2차 병원이 아닌 3차 병원에 몰리고 있으며 이 병원들이 이익 추구를 위해 병상 수를 계속해서 확대하고 있다. 상급종합병원의 병상 수가 늘어남에 따라 환자 처치 및 수술 건수는 급증했고 이를 감당하기 위해 더 많은 의료인력이 필요해졌다. 이러한 실정을 보았을 때, PA 양성화를 통한 의료인력 수급은 당장이라도 도입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PA 제도화는 여러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 PA 간호사가 임상경력이 많다고 하더라도 전공의가 밟은 정식 교육과정을 수료한 것이 아니기에 정확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업무에 임한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PA 간호사가 온전한 의료인력으로 자리잡으려면 적절한 교육과정과 수료 절차를 밟아야 할 텐데, 이러한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질지 의문이다. 만약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이는 전공의의 교육 기회 박탈로 이어질 수 있다. 전공의 수련 과정은 수술 참여 및 교수와의 상호작용이 중요한데, PA 간호사가 합법화된다면 교수와 전공의 간의 접촉 기회가 줄어 수련의 질이 하락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면허 의료행위를 근절하기 위한 대안으로 PA 제도화 외에 어떤 것이 있을까? 첫째, 의료수가를 현실화시켜 필수 의료인력을 적정하게 배치해야 한다. 저수가 체계로 인한 구조적 악순환을 끊어내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둘째, 입원전담전문의 제도를 활성화시켜 의사들의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입원전담전문의 제도를 통해 병원은 숙련된 인력을 확보할 수 있고 환자는 더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셋째, 불법 의료행위에 대한 철저한 감시가 필요하다. 정상적인 의료인력을 확보할 수 있음에도 PA 간호사를 고용하는 병원이 있는지 지속적으로 감시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무면허 의료행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병원계와 의료계가 입장차를 좁혀야 한다. 병원계는 무리한 병상 수 늘리기로 인한 의료인력 부족 문제가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의사들은 자신의 자리가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반대만을 위한 반대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 의사가 아닌 보조인력에게 수술받기를 원하는 환자는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2021-12-06 05:45:50
지난 1년동안 나는 나름 열정적인 의학도였다. 본과에 올라와 몰아치는 시험일정에 지치고 힘들었지만, 생명을 살려내는 귀중한 지식을 하나하나 알아가며 크나큰 기쁨과 뿌듯함을 느꼈다. 죽음이란 나에게 다소 추상적인 개념으로 다가왔었다. 죽음은 불치병이나 암, 사고로 인해 찾아온다고 생각했다. 그런 막을 수 없는 문제 외에는 현대의학이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지난 가을, 외할아버지께서 쓰러지셨다. 특별한 기저질환이 없으셨기에 더욱 갑작스러웠다. 90세라는 고령, 완전한 노화만으로 인해 급속히 꺼져가는 생명을 지켜보며 나는 현대의학이 제시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배우던 의학지식은 병에 대한 끝없는 알고리즘과 선택지를 제시했다. 그러나 모든 기능이 멈춰가는 한 노인의 신체 앞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는 전혀 배운 적이 없었다. 연명치료를 절대 받지 않겠다는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 가족은 연명치료를 중단하였고, 할아버지께서는 편안하게 삶을 마무리하셨다. 이후 죽음과 현대의학, 노화와 연명치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아툴 가완디 지음)', '나이듦에 관하여(루이즈 에런슨)' 등의 책을 읽으며 현대의학 속 소외받는 환자들의 삶과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노인의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큰 인사이트를 얻게 되었다. 세계는 이제 외면할 수 없는 초고령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제 과거의 사람들보다 더 오랜 시간 신체의 기능이 떨어진 노인의 상태로 살아간다. 인류는 고도로 발전한 현대의학을 통해 노화를 나름 잘 통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는 각종 만성질환에 대해 약을 먹고 꾸준히 관리를 하며, 수술을 통해 수명을 늘리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 모두 독립적인 신체기능을 유지하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미국의 노인병 전문의 실버스톤 박사는 "노화 과정에 관여하는 단일하고 일반적인 세포 메커니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그저 허물어질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의학은 삶을 연장할 수 있는 많은 도구를 가지고 환자의 생명을 지키려 노력한다. 하지만 우리는 질병 뒤에 숨겨진 환자의 삶에 집중한 적이 있었는가? 노화와 질병으로 인해 환자는 자신이 평생 지켜왔던 삶의 가치를 하나씩 잃어간다. 자신이 삶의 마지막까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몰개성화된 투병 과정을 거치며 죽음은 현대의학의 경험으로 변질된다. 노인의학 전문의들은 죽음을 막을 수는 없지만, 우리가 마지막으로 경험할 인생의 여정을 더 존엄하고 가치 있게 보낼 방법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노인에게 필요한 것이 안전과 치료라고 생각하지만, 노인에게도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키며 살아갈 권리가 있다. 우리는 최첨단 기술과 알고리즘에 의존하기보다 환자 개개인의 삶에 귀 기울이고 환자가 마지막까지 원하는 삶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맞춤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나이가 들면 복용하는 약이 늘어나면서 이와 관련한 부작용도 함께 증가한다. 의사는 약으로 인한 부작용을 또 다른 질병으로 오인하고 약을 처방해주어, 환자는 먹는 약이 늘어나지만 몸은 더 피곤해지게 된다. 질병에만 집중하다 환자의 불편함이 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개개인의 상태와 약의 부작용을 면밀히 분석해 꼭 필요한 약만 처방한다면, 환자의 증상을 어느 정도 완화시키고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다. 그들이 삶의 마지막에 어떤 것을 원하는지, 죽음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 평소 충분한 대화를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가치는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다. 사랑하는 이웃, 가족과 이야기하며 평범한 오후를 보내는 것이나 주말 오전 평생 다니던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에 대한 대화는 중요한 의학적 결정을 내릴 때 환자의 삶을 지켜주는 나침반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의료의 패러다임은 나에게 매우 생소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인류보다 오랜 시간 노년기를 보내게 될 우리에게 꼭 도입되어야 할 시스템이라고 직감했다. 아직 우리 사회는 죽음과 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서툴다. 나 또한 삶의 마지막과 죽음은 철학, 종교 분야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원에서 노화와 죽음을 맞이한다. 사람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 가장 가까이 있으며, 죽음을 과학적으로 깊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의사이다. 환자를 살리는 것이 의사의 가장 중요한 소명이지만, 환자가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도 의사의 역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 마지막까지 삶의 가치를 지킬 수 있도록 노인의학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노화와 죽음에 대해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도록 좋은 나이듦에 대한 대화를 활성화해야 한다. 내가 행하는 의료행위가 진정 환자의 삶을 위한 것인지 윤리적인 고민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 물론 노인의학이 우리나라에 보편화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존재한다. 정부의 지원도 부족하고, 관련 전문의 수도 매우 적다. 하지만 이럴수록 의료계의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먼저 의학에 대한 시각을 바꾸고 의술을 베푼다면, 더 많은 사람이 마지막까지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CG 심전도 데이터의 중요성과 해결과제는? 2021-11-29 05:45:50
|메디칼타임즈=이종서 기자| 통계청의 2017년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과거에 비해 심장 질환에 의한 사망률이 높아졌다. 여성과 남성 모두 심장질환이 악성신생물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사망 원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심장 질환은 전체 사망 원인의 10.8%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심장질환의 예시로는 부정맥, 심근경색, 심낭압전, 대동맥 파열, 폐동맥 색전증이 있다. 심장질환에 의한 돌연사, 급사의 90%를 차지하는 것은 부정맥이다. 부정맥의 진단은 심전도 데이터를 측정해 할 수 있다. 현재 사용하는 심전도 검사 방법으로는 표준 12 유도 심전도 검사법, 운동 부하 심전도, 24시간 홀터 검사, 사건 기록 심전도 등이 있다. 이를 통해 얻은 심전도 기록을 기반으로 전문의가 진단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인 부정맥 진단 방법이다. 다만, 부정맥이 만성으로 진행되기 전에 불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어, 병원에 내원해 측정한 심전도 기록에서 부정맥을 진단하지 못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주로 가족력이 있거나, 과거 심장 질환을 앓은 적이 있을 경우 부정맥 고위험군에 포함되고 이 군에 들어가는 환자에게는 면밀한 감시가 필요하다. 감시 방법은 디지털 의료 기기를 사용하는 것인데 크게 스마트 워치와 정밀 디지털 의료기기로 구분할 수 있다. 현재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스마트 워치의 기능을 사용하면 심장이 빨리 뛰고 있는지, 천천히 뛰고 있는지, 그리고 규칙적인지, 불규칙적인지 정도까지 파악할 수 있다. 정밀 디지털 의료기기의 예시로는 에이티센스사에서 개발한 장기 연속 심전도 검사기 '에이티패치'가 있다. 에이티패치는 굉장히 가볍고, 소형으로 제작되어 최대 14일간 환자가 몸에 부착해 사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2주간 심전도 데이터가 끊김없이 기록, 저장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국내에서 이러한 정밀 장기 연속 심전도 검사기가 많이 쓰이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국내에서 보험수가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사 기간도 길고, 분석해야 하는 데이터의 양이 많아 분석하는 데에도 많은 인건비가 들고, 아직 디지털 의료기기에 대 논의 부족이 걸림돌인 것이다. 심혈관 질환에 대한 사망률을 감소시키기 위해 장기 연속 심전도 검사의 보편화는 필수적인 단계이고, 이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2가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 번째는 장기 연속 심전도 검사의 보험수가에 대한 활발한 논의의 필요다. 수가가 결정되어야만 많은 환자들이 편한 마음으로 중요 질환인 부정맥에 대한 지속적인 검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인력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대용량의 심전도 데이터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가능한 인공지능의 개발이다. 심전도 심장의 신호를 알려주는 굉장히 정확한 지표이다. 이를 사용하여 부정맥을 정확하게 진단해낼 수 있는 인공지능을 개발한다면 추후 사용되는 인력을 대폭 줄일 수 있을 것이고, 디지털 의료기기를 한단계 더 발전 시킬 수 있을 것이며, 의료 보험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의대생이 소개하는 '혁신적' 기술 가진 스타트업 2021-11-22 05:45:50
지금 우리는 4차산업혁명 시대에 살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란 정보통신기술의 융합으로 이루어지는 차세대 산업혁명으로, 빅 데이터 분석, 인공지능, 로봇공학, 사물인터넷, 무인 운송 수단(무인 항공기, 무인 자동차), 3차원 인쇄, 나노 기술의 7가지 영역의 기술 발전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의료계에서도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와 관련한 여러 신기술과 스타트업이 등장하고 있다. 특히 질병의 조기진단과 치료의 개인화를 목표로 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으며, 이번 기회를 통해 이러한 혁신적인 기술을 선보이는 국내 스타트업 3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치매 조기진단 및 개인 맞춤형 치료와 관리방안을 제공해주는 '세븐포인트원'이 있다. 치매환자들은 증상이 나타난 이후 병원을 방문해 검사한 후 진단되었기 때문에 질병이 상당히 진행된 뒤 경우가 많았다. 세븐포인트원은 3분 이내에 식물 또는 동물 이름을 생각나는대로 말하게 하여 치매를 조기에 발견하는 솔루션 '알츠윈(Alzwin)'을 개발해 치매 선별검사의 접근성을 높였다. 이용자가 생각나는 대로 이름을 말하면 알츠윈은 음성인식을 통해 뇌 영역과 기능별 능력을 세세하게 분석하고, 50대 이상 특화 음성인식 알고리즘을 통해 기존의 범용 알고리즘보다 더 정확한 진단을 내린다. 이로써 치매가 진단되면, 세븐포인트원은 VR 콘텐츠 솔루션 '센텐츠(Sentents)'를 통해 이용자에게 익숙한 예전 기억을 사용한다. 기억 회상 및 심리 안정 기법을 통해 뇌를 자극한 후 상담과 미술치료 등 여러 활동을 병행하며 인지 능력을 개선하는 방식이다. 기존의 치매 케어 프로그램은 개인에 맞지 않는 난이도의 경우 이용률이 저하되고 치료 효과가 불분명하였던 점에 반해서, 프로그램 시범 제공 결과, 인지기능과 행복지수의 개선과 환자의 높은 치료 만족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뇌와 신경세포에 미세전류 자극을 전달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전자약을 개발하고 있는 스타트업 '뉴아인(Nueyene)'은 국내 최초 전자약 연구/개발 전문 회사로, 생체신호를 모방한 물리적 신호를 홍채를 통해 전달하여 비침습적으로 질환과 관련된 신경과 조직에 원활한 재생과 작동을 유도한다. 개발되고 있는 웨어러블 헬스케어 기기 '셀리나(Cellena)'는 이러한 미세전류 자극을 통하여 눈의 피로함을 해소하고, 최근 임상시험계획이 승인된 'RTN_001' 미세전류 자극기는 녹내장 환자의 안구 주변에 경피적으로 정전류 펄스 전기자극을 가하여 시신경 손상의 치료를 유도한다. 이마와 광대 부위 피부 상에 전기 자극을 가하면 전극 사이의 자극 전류가 안구의 표면을 따라 망막까지 전달되고, 망막의 수용체에서 감지된 자극에 대한 신경 신호는 시각전달 경로를 따라 일차 시각피질까지 도달한다. '메디웨일(MediWhale)'은 인공지능으로 MRI를 분석해 병을 조기 진단하는 등 딥러닝을 의료분야에 적용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통해 간단한 눈 검사로 심혈관 위험을 평가하는 AI 소프트웨어 의료기기 '닥터눈(DrNoon for CVD)'은 국내 8호 혁신의료기기로 지정됐고, 작년 5월 유럽 의료기기 인증을 받았다. 닥터눈은 관상동맥석회화지수를 CT로 분석해야 하는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망막 카메라를 통한 안저촬영으로 심혈관 위험도를 평가한다. 망막카메라는 크기가 작고 저렴하며 촬영 시간도 30초 남짓으로 간편하여 CT촬영이 어려운 1차 의료기관 혹은 개발도상국에서도 심혈관질환 위험도를 효과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기술이 개발되어 질병의 접근방식과 치료에 대해서도 앞으로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개인적으로 희귀 난치성질환과 유전질환의 효과적인 치료 개발과 의료접근성 개선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희귀난치성 질환은 표본 수가 적어 연구하기 어렵고 치료근거도 부족하다. 특히 동물모델을 만들기 어려운 질병은 치료 후보물질을 선별하는 것조차 어렵다. 인공지능과 딥러닝을 활용한다면 여러 의료데이터를 안전하게 수집하거나, 더 많은 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할 수 있어 효과적인 치료가 개발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유전질환이나 선천적인 장애의 경우, 유전자 단위의 문제이므로 현재 임상에서는 근치적 치료가 어렵고 재활 치료가 주를 이룬다. 빅데이터 기술로 유전자를 분석하고, 나노기술로 이를 교정하기 위한 치료제가 개발된다면 환자와 보호자의 삶의 질이 크게 개선될 것이다. 또한 간편하고 개별화된 진단과 치료를 통해 더욱 많은 사람에게 병원 방문의 부담을 줄이고, 발병 전 혹은 초기 단계에 질병을 선별하여 의료비용을 감소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해부학 실습의 당황 '죽은 자가 산 자를 가르친다' 2021-11-15 05:45:50
'Mortui Vivos Docent(모투이 비보스 도슨트)' '죽은 자가 산 자를 가르친다' 의과대학에 입학하기도 전부터 들었던 문장이자, 모 의과대학의 해부학 실습실 앞에 걸린 문구로 잘 알려진 말이기도 하다. 해부 학기를 시작하며, 의과대학에서 배우는 여타의 과목들과 해부학은 전혀 다른 느낌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인체를 직접 보고 만지고 다루는 과목이므로 당연히 그렇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는 크게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선배들의 말과 글로 상상해 볼 수 있는 해부학이라는 학문은 '포르말린 냄새', '땡시', '구연발표(오랄 테스트)', '밤샘' 정도의 키워드로 요약 가능했다. 당연히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은 되었지만 내가 시신을 해부하게 된다는 사실은 막연하고 어렴풋하게만 다가왔다. 여름방학에 진행된 골학을 들을 때까지, 아니 사실 해부학 과목이 개강하고 이론 수업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새로운 지식을 머리에 넣는 데 여념이 없을 뿐이었다. 첫 실습까지는 한참이 남았었던 언젠가, 그저 미리 한 번 봐 두면 적응이 빠르겠다 정도의 마음으로 유튜브에서 'anatomy dissection'을 검색하면 나오는 영상을 몇 개 시청했다. 근육과 신경, 혈관 등이 교과서 그림 만큼은 아니지만 잘 정리되어 있었고 색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편이었다. 이론 공부만 열심히 해 간다면, 금세 실습에 적응해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습 첫 날, 내가 마주한 카데바의 모습은 내 생각과도, 영상과도 많이 달랐다. 처음 비닐을 가르고 카데바를 꺼내던 순간부터, 사람의 시신임이 실감나지 않았다. 등 실습을 위해 카데바 아래로 손을 넣어 뒤집으며 '너무 차갑고 딱딱하다'고 생각했다. 피부를 벗겨내기 위해 등에 칼을 대는 것도 적응되지 않는 감촉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당황스러웠던 것은 안을 열고 나서였다. 등의 오른쪽 절반이 검붉은 색으로 뒤덮여 있었고, 교과서와 영상으로 공부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교수님께 여쭤보니 피가 고여 근육이 녹는 등 상태가 안 좋아진 것이므로, 왼쪽 등 위주로 실습하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실습이 진행되며 다른 조에서 쉽게 찾는 구조물들이 우리 조에서는 보이지 않을수록 누구에게인지 모를 억울함 같은 것이 조금씩 생겨났다. 나는 정말 열심히 공부해 갔는데, 아무것도 모르겠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단 카데바의 상태에서만 기인한 문제는 아닐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그림들과는 다르게, 앞에 놓인 카데바에는 제거해야 할 지방도 많았고 근육 크기도 훨씬 작았으며 혈관과 신경 등이 결합조직과 엉겨 좀처럼 구분해 내기 쉽지 않았다. 해부 기말고사 날까지 며칠이 남았는지 셈하며 한숨 쉬는 시간들이 길고 잦아졌다. 며칠 동안 관성의 힘으로 공부를 하다가, 기증자 분께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가 문득 떠올랐다. 과정을 얼만큼 자세히 알고 기증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실습 전에는 카데바가 너무 살아있는 사람 같을까 봐, 그래서 무서울까 봐 걱정했었는데, 카데바는 해부 실습이 진행될수록 사람의 형체에서 벗어나기만 했다. 그래서 내가 열심히 피부를 벗기고 지방을 떼어내고 근육을 잘라내고 있는 대상이 모형이 아님을 스스로에게 계속 상기시켜야만 했다. 아직 해부학 수업의 중간쯤에 던져져 있는 지금, 적당히만 공부하고 싶은 마음과 싸우며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딱 하나인 것 같다. 기꺼이 시신을 남겨 주신 기증자 분의 뜻에 누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이다. 잘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들 말하는 해부지만, 뭔가 하나라도 더 얻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의 몸을 직접 열어서 해부하며 공부할 수 있는 한 번뿐인 수업인 만큼, 최선을 다해 배우고 고민하고 토론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으로 먼 미래(혹은 가까운 미래)에 한 명의 환자라도 더 고치고 살리는 것이 비단 해부학뿐 아니라 내가 졸업할 때까지 배울 모든 과목의 궁극적 목적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 소중한 가르침의 시간에 제대로 배우고 있는가 고민을 해 본다. 해부학적 지식뿐 아니라 함께하는 동기들과의 관계,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 감당이 버거운 양을 외우는 요령 등 이 기간 동안 대단히 많은 측면에서 새로운 경험을 쌓는다.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치는 만큼 올바르게 대처하기가 쉽지 않고, 부족하고 모자란 나의 모습에 스스로 실망하는 순간도 참 많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의 고민까지 포함한 이 시간들이 나를 조금 더 좋은 사람으로, 또 미래에 좋은 의사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바란다.
강의실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2021-11-08 05:45:50
어느덧 2021년이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눈 깜짝할 새 지나간 듯한 느낌이다. 유독 지난 2년이 짧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갑자기 도래한 코로나 팬데믹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을 한순간에 바꾸어 놓았다. 마스크 착용이 필수가 되었고,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나지 못하게 되었으며, 여행은 꿈꿀 수도 없게 되었다. '1년 뒤에는 끝나있겠지'라고 생각하던 많은 사람의 생각과는 달리, 코로나19는 2년째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코로나19가 나에게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비대면 온라인 강의다. 매일 아침 서둘러 머리를 감고 지각 할까봐 학교로 뛰어가던 나는 수업 시작 5분 전에 일어나 대충 세수를 하고는 컴퓨터를 켜 수업에 접속한다. 우리 학교는 실시간으로 강의를 진행하기에 정해진 수업 시간에 접속해야만 출석이 인정된다. 출석한 뒤에는 교수님의 연설 같은 일방통행 수업이 시작된다. 수업 시작 전에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 같다. "온라인 강의를 하면 컴퓨터에 대고 혼자 떠드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을 직접 보고 수업을 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라고. 캠을 켜면 서로의 모습을 볼 수는 있지만 아주 작은 창으로 보이는 까닭에, 표정이나 제스처의 교환은 힘들다. 교수님이 혼자 떠드는 것 같다고 하시는 것이 이해가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캠을 켜지 않는 한 우리의 모습은 교수님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는 수업 시간에 졸거나, 딴짓을 한 적이 많다. 대면 강의에서는 교수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기에 수업에 집중하려고 노력하지만,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내 방에서 수업을 듣다보면 아무래도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 비대면 강의가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수업을 쉽게 녹화하여 수업 시간에 놓쳤던 부분이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돌려 보며 더 자세히 공부할 수도 있고, 공간의 제약이 없어 내가 원하는 공간에서 수업을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강의실에서 교수님과 상호작용하고, 동기들과 수업 내용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던 대면 강의를 생각해보면, 온라인에서만 만나는 현실이 아쉬울 뿐이다. 최근 많은 국가에서 코로나19가 종식되기만을 기다릴 수 없다며 코로나와의 공존을 모색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 정부도 11월부터 위드 코로나로 전환할 계획임을 밝혔다. 단계적인 일상 회복을 목표로 서서히 사회적 거리두기 규제를 완화함에 따라, 여러 대학의 비대면 강의도 점차 대면으로 바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바로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코로나19 이전의 모습으로 완벽히 돌아가기는 힘들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어도 코로나19가 완전히 종식되지 않는 한 강의실 좌석을 띄워 앉아야 할 수도 있고, 확진자가 나오면 일시적으로 다시 비대면 강의로 전환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온라인 수업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1년 반이 넘도록 비대면 강의를 한 탓에 온라인 수업에 더 익숙해져 있다. 아침 일찍 등교하고 동기들, 교수님과 함께 한 강의실에서 수업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하루빨리 적응하여 잃어버린 일상을 되찾기를 바래본다. 다시 강의실로 돌아가기를 기다리며.
온라인 강의 시대 '의학' 시각 자료의 중요성 2021-11-01 05:45:50
장기화된 비대면 방침에 따라 현재 실습을 제외한 의과대학의 강의는 대부분 온라인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모든 강의록과 수업 자료들은 디지털화되어 학생들에게 전달된다. 강의와 자료 열람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좀더 용이한 필기를 위해 대부분 태블릿PC 를 사용한다. 하지만 디지털 학습자료를 읽는 데에는 인쇄된 자료를 읽는 것과는 사뭇 다른 형태의 인지적 노력이 소요된다. 대학에 오기 전까지 인쇄된 교과서와 문제집에 익숙해져 온 세대로서, 나를 비롯한 주위 동기들은 종종 태블릿 화면으로 강의록을 보면서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수천 장에 달하는 강의록을 하나의 기기에 담는 효율성은 잡았지만, 디지털 자료는 인쇄된 학습자료의 읽기과정과 당연히 다를 것이라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면 여기서 종이자료와 비슷한 집중도, 또는 그 이상의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서울대학교에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텍스트와 시각자료가 함께 제시되는 디지털 학습자료 읽기 과정 메커니즘은 크게 세 단계로 진행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첫 번째 단계는 초기 정신모형(initial mental model) 형성단계로 텍스트를 읽으면서 전체적인 학습내용의 주제 프레임 워크를 희미하게 설정하며, 두 번째 단계에서는 시각 자료와 텍스트로 초기 정신모형의 세부 내용을 채우게 된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형성한 정신모형을 시각자료와 비교되면서 정확한 정신모형을 형성했는지 확인해 학습내용을 반복적으로 종합하게 된다. 이 때 시각자료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세 번째 단계다. 정확한 내용이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시각자료가 수반되지 않으면, 우리는 내용을 이해했을지라도 이를 머릿속으로 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므로 인쇄된 교과서를 학습하던 때와는 달리 디지털 환경에 적합한 시각자료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이는 모든 분야에 해당하는 내용이지만 특히 의학 분야가 가진 특수성과 높은 장벽 때문에 의학 자료는 학습 환경이 급변하는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다. 이와 관련해 최근 조명받는 분야로 '메디컬 일러스트레이션'이 있는데, 이를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메디컬 일러스트란 의사나 환자 및 일반인들이 의학과 관련된 정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2D, 3D 형태로 표현된 그림을 말한다. 전문적 지식을 갖고 정확하고 세밀하게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미술을 기반으로 하지만 해부학적 지식이 수반되어야 한다. 일러스트는 크게 논문지원용, 강의자료용, 환자용의 세 가지 용도로 활용될 수 있다. 첫 번째는 논문지원용이다. 의학자들이 발표하는 논문에는 이미지가 필수로 들어간다. 예를 들어 기존에 실시하던 수술과 비교해 새로운 수술의 차이를 설명할 때 그림으로 비교해서 보여주면 해당 수술법에 대한 정확도와 이해를 높일 수 있다. 두 번째 강의자료에서의 필요성은 앞 문단에서 이미 언급했으므로 넘어가자. 마지막으로 앞의 두가지와는 달리 비전문가들을 위한 메디컬 일러스트의 수요가 존재한다. 그림 자료는 심리적으로 위축된 환자에게 수술이나 치료 방법을 전달할 때 거부감과 두려움을 줄여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단순히 어떤 과가 전망이 좋아질지부터, 어느 곳에 소속되어 일하면 좋을지까지 변화하는 사회에 맞추어 본인의 필요성을 찾아야 할 부담을 느낀다. 하지만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는 고민은 건강한 것임을 이야기하고 싶다. 결국 선택은 본인의 몫이지만, 다양한 경험을 통해 그 고민을 함께 하고 실현시키는 사람들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할 것이다. 이것이 메디컬 매버릭스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한다. 도종환 시인의 시 '처음 가는 길'의 한 구절과 함께 글을 마치며 본인의 비전을 찾아 나가는 모든 의대생을 응원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
'11개월 여아, 잦은 경련‧고열로 응급실 내원'의 답 찾기 2021-10-25 05:45:50
| '11개월 여아가 잦은 경련과 고열로 응급실에 내원하였다.' PBL(problem based learning)의 첫 번째 세션 전체 내용이었다. PBL은 의대에서 이뤄지는 수업 중 하나로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해 자기주도적으로 해결책을 찾는 학습법이다. 팀원들과 상의하면서 환자의 진단명과 진단을 내리기 위해 알아야 하는 점, 진단을 내리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부분이 어떤 것인지를 정한다. 처음 받는 세션의 내용은 딱 저 문장 하나였다. 우리 팀은 경련과 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다양한 계통의 병을 떠올리려 했지만 가지고 있는 지식 내에서 가설을 세우기에는 단서가 부족했다. 두 번째 세션으로는 응급실에 오기 전 여아의 증상, 응급실에서 시행했던 일부 혈액검사결과와 긴급히 처방한 약물, 약물을 복용한 후 여아의 반응이 나타나 있었다. 이 단서들로 한 가지 질병을 강력하게 의심했다. 하지만, 세 번째 세션에서 주어진 전체적인 혈액검사와 어른에서는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신경학적 징후가 영유아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해당 질병의 임상적 양상으로 인해 또 다른 질병을 배제하기 힘들었다. 결국, 두 질병 중 환아의 진단이 무엇인지 감별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아직 전체적인 내용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지식이 부족했지만, 지식이 부족한 만큼 사소한 것도 의심하게 된다. 해당 내용을 알았더라면 환아의 증상, 질병의 특징적인 임상 양상이나 환아의 나이에 잘 발생하는 질병 위주로 추측하고 넘어갈 것 같았는데 수업을 하기 전이라 질병에 관한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환아의 머리둘레 길이는 적당한지 신경계 발달이 적당히 이루어져 있는지, 불완전한 백신 접종력과 이에 관련된 감염을 일으키는 원인균 중에서 선행되는 요인이 있을지 사소한 부분에도 많은 가능성을 열어놓고 보게 된다. 케이스를 보며 공부하는 순간에서는 이런 사소한 사항도 알아보며 개념을 확장하게 된다. 그러나, PBL 시간에서 케이스의 진단명을 찾아내려는 필자는 전체적인 내용을 모르는 채로 개념만 쌓다 보니 방향성을 잃어버린 채로 그룹 토의에 임하는 것 같아 답답한 면도 있었다. 이틀이 지난 후 두 번째 시간에 나온 세션들은 감별에 도움이 되는 추가적인 검사에 대한 내용이었고, 결국 진단명과 추후 환아의 발달 상태까지 나오며 내용은 마무리가 되었다. 교수님들의 피드백 시간 이후에서야 세션에 적혀있는 내용에서 딱 한 문장을 보며 바로 어떤 질병이 아닌지 의심해야 하고, 다른 한 문장으로는 여러 병들 중 감별을 할 수 있는 단서가 되고, 또 다른 한 문장으로는 해당하는 질병의 분류 중 어떤 형태인지 알 수 있었다. 필자나 다른 동기들은 환아의 진단이 조금 더 신경 쓰여서 검사결과나 가설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교수님들은 왜 이런 검사결과를 하고 증상이 나타나는 기전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중요성을 강조하며 해당 내용을 많이 언급하셨다. 본과 2학년이라 환자를 직접 본 적이 없고 2, 3주에 한 번씩 시험을 치는 필자의 처지에서는 많은 내용을 공부하다 보니 질병을 공부할 때 기전보다는 결과나 임상 양상 등 표면적인 부분에 대해 더 공을 들이게 된다. 문제 푸는 데 조금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PBL을 하다 보면 환자가 처음 내원해서 진단하기까지 단순한 질병의 임상 양상보다는 기전이나 검사의 적응증 등 증상이나 신체 진찰을 바탕으로 기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감별 진단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임상에서 이론을 활용하는 것은 시험을 치기 위한 공부보다 더 깊고 자세한 기전을 바탕으로 하는 것 같았다. 매번 블록 때마다 시험 치기 전 내용을 완벽히 학습하는 것은 2학기가 반쯤 지났지만 아직도 이상적인 바람일 뿐이다. 그러나 환자를 대한다는 관점으로, 기존의 관점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 차이를 메꾸어야겠다.
사람은 '섬'이 아니다 2021-10-18 05:45:50
의과대학 실습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접할 수 있다. 그 중에는 환자도 있고, 간호사 선생님도 있으며, 동료 학생도 있고 실습을 담당하시는 레지던트 선생님들과 교수님들도 계신다. 바쁘게 돌아가는 병원 환경 속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면 변화에 무뎌지곤 하지만, 가끔씩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퍼뜩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것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은 실습 케이스로 맡았던 환자분이 돌아가셨을 때였다. 날것 그대로의 죽음을 접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비록 그분이 숨을 거두신 현장에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의무 기록을 통해 그분이 돌아가시는 순간을 접하며 마치 그 곳에 함께 있었던 것처럼 생생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은 생경했다. 그분의 질병으로 케이스 발표를 준비하며, 마치 그 분께서 생명을 바쳐 내게 지식을 남겨주고 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느때보다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발표를 수정했다. 두 번째는 정신과 실습을 돌고 있을 때였다. 사실 실습을 돌면서 환자들과 얘기할 기회는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 특히 COVID-19 감염을 우려해 실습 학생의 출입이 제한되는 병동이 몇 군데 있기 때문이다. 환자를 마주할 때는 양해를 구하고 환자분을 찾아 뵈어 history taking(환자의 질병과 관련한 과거력을 확인하는 과정)을 하거나, 교수님의 뒤를 따라 회진을 돌 때를 제외하고는 많지 않다. 정신과 실습은 달랐다. 폐쇄 병동 안에 일정 시간동안 들어가서 입원 환자들과 얘기하고 놀잇거리를 찾아보고 함께 TV를 본다. 그러다 보면 남들보다 조금 더 자주 얘기하는 환자가 생기기 마련인데, 나의 경우에는 어린 여자 환자였다. 나보다도 나이가 어린 그 환자를 보며 처음부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폐쇄 병동이 답답하게 느껴질까, 하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그 나이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관한 생각도 들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신변잡기적 얘기들 뿐이었지만, 실습이 거듭되고 얘기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환자가 내게 조금씩 마음을 여는 것이 느껴졌다. 실습이 끝날 때 즈음에는 본인의 과거력에 대해 매우 진솔하게 내게 털어놓으며, 수줍게 장래희망에 대해 얘기하기도 하였다. 그때 나는 실습을 돌며 두 번째로 신선한 충격을 받을 수 있었다.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이다. 마지막은 산부인과 실습을 돌때였다. 운좋게도(?) 첫 날부터 분만을 참관할 기회가 주어진 나는, 가족 분만실에 들어가 분만을 진행하는 교수님과 레지던트 선생님들을 돕게 되었다. 산모의 진통이 이어지고, 분만실에 있던 교수님과 간호사 선생님들 모두 입을 모아 산모를 응원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힘 주세요, 아이 머리가 보여요. 아이가 완전히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등허리에 소름이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손에 땀이 흥건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산모가 힘을 주고 있을 때 나도 무의식적으로 같이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생명의 탄생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인지 깨달았다. 정현종 시인의 이라는 시를 좋아한다. 짧은 두 줄로 현대 사회에서의 인간 소외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시인데, 그 시를 읽으면 적막에 잠겨 서로 먼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그려진다. 병원 현장에서 본 사람들은 달랐다. 비록 스쳐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사람들은 뜨겁고 강렬한 감정을 공유하곤 한다. 의사라는 직업의 소중함은 바로 그러한 강렬한 감정의 순간에 함께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의 시작과 끝, 기쁨과 슬픔의 순간에 의사는 옆에 서 있다. 반 년간 실습을 돌며 많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내게 가장 소중한 가르침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