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2021-12-06 05:45:50
지난 1년동안 나는 나름 열정적인 의학도였다. 본과에 올라와 몰아치는 시험일정에 지치고 힘들었지만, 생명을 살려내는 귀중한 지식을 하나하나 알아가며 크나큰 기쁨과 뿌듯함을 느꼈다. 죽음이란 나에게 다소 추상적인 개념으로 다가왔었다. 죽음은 불치병이나 암, 사고로 인해 찾아온다고 생각했다. 그런 막을 수 없는 문제 외에는 현대의학이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지난 가을, 외할아버지께서 쓰러지셨다. 특별한 기저질환이 없으셨기에 더욱 갑작스러웠다. 90세라는 고령, 완전한 노화만으로 인해 급속히 꺼져가는 생명을 지켜보며 나는 현대의학이 제시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배우던 의학지식은 병에 대한 끝없는 알고리즘과 선택지를 제시했다. 그러나 모든 기능이 멈춰가는 한 노인의 신체 앞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는 전혀 배운 적이 없었다. 연명치료를 절대 받지 않겠다는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 가족은 연명치료를 중단하였고, 할아버지께서는 편안하게 삶을 마무리하셨다. 이후 죽음과 현대의학, 노화와 연명치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아툴 가완디 지음)', '나이듦에 관하여(루이즈 에런슨)' 등의 책을 읽으며 현대의학 속 소외받는 환자들의 삶과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노인의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큰 인사이트를 얻게 되었다. 세계는 이제 외면할 수 없는 초고령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제 과거의 사람들보다 더 오랜 시간 신체의 기능이 떨어진 노인의 상태로 살아간다. 인류는 고도로 발전한 현대의학을 통해 노화를 나름 잘 통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는 각종 만성질환에 대해 약을 먹고 꾸준히 관리를 하며, 수술을 통해 수명을 늘리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 모두 독립적인 신체기능을 유지하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미국의 노인병 전문의 실버스톤 박사는 "노화 과정에 관여하는 단일하고 일반적인 세포 메커니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그저 허물어질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대의학은 삶을 연장할 수 있는 많은 도구를 가지고 환자의 생명을 지키려 노력한다. 하지만 우리는 질병 뒤에 숨겨진 환자의 삶에 집중한 적이 있었는가? 노화와 질병으로 인해 환자는 자신이 평생 지켜왔던 삶의 가치를 하나씩 잃어간다. 자신이 삶의 마지막까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몰개성화된 투병 과정을 거치며 죽음은 현대의학의 경험으로 변질된다. 노인의학 전문의들은 죽음을 막을 수는 없지만, 우리가 마지막으로 경험할 인생의 여정을 더 존엄하고 가치 있게 보낼 방법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노인에게 필요한 것이 안전과 치료라고 생각하지만, 노인에게도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키며 살아갈 권리가 있다. 우리는 최첨단 기술과 알고리즘에 의존하기보다 환자 개개인의 삶에 귀 기울이고 환자가 마지막까지 원하는 삶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맞춤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나이가 들면 복용하는 약이 늘어나면서 이와 관련한 부작용도 함께 증가한다. 의사는 약으로 인한 부작용을 또 다른 질병으로 오인하고 약을 처방해주어, 환자는 먹는 약이 늘어나지만 몸은 더 피곤해지게 된다. 질병에만 집중하다 환자의 불편함이 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개개인의 상태와 약의 부작용을 면밀히 분석해 꼭 필요한 약만 처방한다면, 환자의 증상을 어느 정도 완화시키고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다. 그들이 삶의 마지막에 어떤 것을 원하는지, 죽음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 평소 충분한 대화를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가치는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다. 사랑하는 이웃, 가족과 이야기하며 평범한 오후를 보내는 것이나 주말 오전 평생 다니던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에 대한 대화는 중요한 의학적 결정을 내릴 때 환자의 삶을 지켜주는 나침반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의료의 패러다임은 나에게 매우 생소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인류보다 오랜 시간 노년기를 보내게 될 우리에게 꼭 도입되어야 할 시스템이라고 직감했다. 아직 우리 사회는 죽음과 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서툴다. 나 또한 삶의 마지막과 죽음은 철학, 종교 분야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원에서 노화와 죽음을 맞이한다. 사람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 가장 가까이 있으며, 죽음을 과학적으로 깊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의사이다. 환자를 살리는 것이 의사의 가장 중요한 소명이지만, 환자가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도 의사의 역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 마지막까지 삶의 가치를 지킬 수 있도록 노인의학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노화와 죽음에 대해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도록 좋은 나이듦에 대한 대화를 활성화해야 한다. 내가 행하는 의료행위가 진정 환자의 삶을 위한 것인지 윤리적인 고민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 물론 노인의학이 우리나라에 보편화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존재한다. 정부의 지원도 부족하고, 관련 전문의 수도 매우 적다. 하지만 이럴수록 의료계의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먼저 의학에 대한 시각을 바꾸고 의술을 베푼다면, 더 많은 사람이 마지막까지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CG 심전도 데이터의 중요성과 해결과제는? 2021-11-29 05:45:50
|메디칼타임즈=이종서 기자| 통계청의 2017년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과거에 비해 심장 질환에 의한 사망률이 높아졌다. 여성과 남성 모두 심장질환이 악성신생물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사망 원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심장 질환은 전체 사망 원인의 10.8%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심장질환의 예시로는 부정맥, 심근경색, 심낭압전, 대동맥 파열, 폐동맥 색전증이 있다. 심장질환에 의한 돌연사, 급사의 90%를 차지하는 것은 부정맥이다. 부정맥의 진단은 심전도 데이터를 측정해 할 수 있다. 현재 사용하는 심전도 검사 방법으로는 표준 12 유도 심전도 검사법, 운동 부하 심전도, 24시간 홀터 검사, 사건 기록 심전도 등이 있다. 이를 통해 얻은 심전도 기록을 기반으로 전문의가 진단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인 부정맥 진단 방법이다. 다만, 부정맥이 만성으로 진행되기 전에 불규칙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어, 병원에 내원해 측정한 심전도 기록에서 부정맥을 진단하지 못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주로 가족력이 있거나, 과거 심장 질환을 앓은 적이 있을 경우 부정맥 고위험군에 포함되고 이 군에 들어가는 환자에게는 면밀한 감시가 필요하다. 감시 방법은 디지털 의료 기기를 사용하는 것인데 크게 스마트 워치와 정밀 디지털 의료기기로 구분할 수 있다. 현재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스마트 워치의 기능을 사용하면 심장이 빨리 뛰고 있는지, 천천히 뛰고 있는지, 그리고 규칙적인지, 불규칙적인지 정도까지 파악할 수 있다. 정밀 디지털 의료기기의 예시로는 에이티센스사에서 개발한 장기 연속 심전도 검사기 '에이티패치'가 있다. 에이티패치는 굉장히 가볍고, 소형으로 제작되어 최대 14일간 환자가 몸에 부착해 사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2주간 심전도 데이터가 끊김없이 기록, 저장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국내에서 이러한 정밀 장기 연속 심전도 검사기가 많이 쓰이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국내에서 보험수가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사 기간도 길고, 분석해야 하는 데이터의 양이 많아 분석하는 데에도 많은 인건비가 들고, 아직 디지털 의료기기에 대 논의 부족이 걸림돌인 것이다. 심혈관 질환에 대한 사망률을 감소시키기 위해 장기 연속 심전도 검사의 보편화는 필수적인 단계이고, 이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2가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 번째는 장기 연속 심전도 검사의 보험수가에 대한 활발한 논의의 필요다. 수가가 결정되어야만 많은 환자들이 편한 마음으로 중요 질환인 부정맥에 대한 지속적인 검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인력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대용량의 심전도 데이터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가능한 인공지능의 개발이다. 심전도 심장의 신호를 알려주는 굉장히 정확한 지표이다. 이를 사용하여 부정맥을 정확하게 진단해낼 수 있는 인공지능을 개발한다면 추후 사용되는 인력을 대폭 줄일 수 있을 것이고, 디지털 의료기기를 한단계 더 발전 시킬 수 있을 것이며, 의료 보험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의대생이 소개하는 '혁신적' 기술 가진 스타트업 2021-11-22 05:45:50
지금 우리는 4차산업혁명 시대에 살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란 정보통신기술의 융합으로 이루어지는 차세대 산업혁명으로, 빅 데이터 분석, 인공지능, 로봇공학, 사물인터넷, 무인 운송 수단(무인 항공기, 무인 자동차), 3차원 인쇄, 나노 기술의 7가지 영역의 기술 발전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의료계에서도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와 관련한 여러 신기술과 스타트업이 등장하고 있다. 특히 질병의 조기진단과 치료의 개인화를 목표로 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으며, 이번 기회를 통해 이러한 혁신적인 기술을 선보이는 국내 스타트업 3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치매 조기진단 및 개인 맞춤형 치료와 관리방안을 제공해주는 '세븐포인트원'이 있다. 치매환자들은 증상이 나타난 이후 병원을 방문해 검사한 후 진단되었기 때문에 질병이 상당히 진행된 뒤 경우가 많았다. 세븐포인트원은 3분 이내에 식물 또는 동물 이름을 생각나는대로 말하게 하여 치매를 조기에 발견하는 솔루션 '알츠윈(Alzwin)'을 개발해 치매 선별검사의 접근성을 높였다. 이용자가 생각나는 대로 이름을 말하면 알츠윈은 음성인식을 통해 뇌 영역과 기능별 능력을 세세하게 분석하고, 50대 이상 특화 음성인식 알고리즘을 통해 기존의 범용 알고리즘보다 더 정확한 진단을 내린다. 이로써 치매가 진단되면, 세븐포인트원은 VR 콘텐츠 솔루션 '센텐츠(Sentents)'를 통해 이용자에게 익숙한 예전 기억을 사용한다. 기억 회상 및 심리 안정 기법을 통해 뇌를 자극한 후 상담과 미술치료 등 여러 활동을 병행하며 인지 능력을 개선하는 방식이다. 기존의 치매 케어 프로그램은 개인에 맞지 않는 난이도의 경우 이용률이 저하되고 치료 효과가 불분명하였던 점에 반해서, 프로그램 시범 제공 결과, 인지기능과 행복지수의 개선과 환자의 높은 치료 만족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뇌와 신경세포에 미세전류 자극을 전달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전자약을 개발하고 있는 스타트업 '뉴아인(Nueyene)'은 국내 최초 전자약 연구/개발 전문 회사로, 생체신호를 모방한 물리적 신호를 홍채를 통해 전달하여 비침습적으로 질환과 관련된 신경과 조직에 원활한 재생과 작동을 유도한다. 개발되고 있는 웨어러블 헬스케어 기기 '셀리나(Cellena)'는 이러한 미세전류 자극을 통하여 눈의 피로함을 해소하고, 최근 임상시험계획이 승인된 'RTN_001' 미세전류 자극기는 녹내장 환자의 안구 주변에 경피적으로 정전류 펄스 전기자극을 가하여 시신경 손상의 치료를 유도한다. 이마와 광대 부위 피부 상에 전기 자극을 가하면 전극 사이의 자극 전류가 안구의 표면을 따라 망막까지 전달되고, 망막의 수용체에서 감지된 자극에 대한 신경 신호는 시각전달 경로를 따라 일차 시각피질까지 도달한다. '메디웨일(MediWhale)'은 인공지능으로 MRI를 분석해 병을 조기 진단하는 등 딥러닝을 의료분야에 적용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통해 간단한 눈 검사로 심혈관 위험을 평가하는 AI 소프트웨어 의료기기 '닥터눈(DrNoon for CVD)'은 국내 8호 혁신의료기기로 지정됐고, 작년 5월 유럽 의료기기 인증을 받았다. 닥터눈은 관상동맥석회화지수를 CT로 분석해야 하는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망막 카메라를 통한 안저촬영으로 심혈관 위험도를 평가한다. 망막카메라는 크기가 작고 저렴하며 촬영 시간도 30초 남짓으로 간편하여 CT촬영이 어려운 1차 의료기관 혹은 개발도상국에서도 심혈관질환 위험도를 효과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기술이 개발되어 질병의 접근방식과 치료에 대해서도 앞으로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개인적으로 희귀 난치성질환과 유전질환의 효과적인 치료 개발과 의료접근성 개선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희귀난치성 질환은 표본 수가 적어 연구하기 어렵고 치료근거도 부족하다. 특히 동물모델을 만들기 어려운 질병은 치료 후보물질을 선별하는 것조차 어렵다. 인공지능과 딥러닝을 활용한다면 여러 의료데이터를 안전하게 수집하거나, 더 많은 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할 수 있어 효과적인 치료가 개발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유전질환이나 선천적인 장애의 경우, 유전자 단위의 문제이므로 현재 임상에서는 근치적 치료가 어렵고 재활 치료가 주를 이룬다. 빅데이터 기술로 유전자를 분석하고, 나노기술로 이를 교정하기 위한 치료제가 개발된다면 환자와 보호자의 삶의 질이 크게 개선될 것이다. 또한 간편하고 개별화된 진단과 치료를 통해 더욱 많은 사람에게 병원 방문의 부담을 줄이고, 발병 전 혹은 초기 단계에 질병을 선별하여 의료비용을 감소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해부학 실습의 당황 '죽은 자가 산 자를 가르친다' 2021-11-15 05:45:50
'Mortui Vivos Docent(모투이 비보스 도슨트)' '죽은 자가 산 자를 가르친다' 의과대학에 입학하기도 전부터 들었던 문장이자, 모 의과대학의 해부학 실습실 앞에 걸린 문구로 잘 알려진 말이기도 하다. 해부 학기를 시작하며, 의과대학에서 배우는 여타의 과목들과 해부학은 전혀 다른 느낌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인체를 직접 보고 만지고 다루는 과목이므로 당연히 그렇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는 크게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선배들의 말과 글로 상상해 볼 수 있는 해부학이라는 학문은 '포르말린 냄새', '땡시', '구연발표(오랄 테스트)', '밤샘' 정도의 키워드로 요약 가능했다. 당연히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은 되었지만 내가 시신을 해부하게 된다는 사실은 막연하고 어렴풋하게만 다가왔다. 여름방학에 진행된 골학을 들을 때까지, 아니 사실 해부학 과목이 개강하고 이론 수업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새로운 지식을 머리에 넣는 데 여념이 없을 뿐이었다. 첫 실습까지는 한참이 남았었던 언젠가, 그저 미리 한 번 봐 두면 적응이 빠르겠다 정도의 마음으로 유튜브에서 'anatomy dissection'을 검색하면 나오는 영상을 몇 개 시청했다. 근육과 신경, 혈관 등이 교과서 그림 만큼은 아니지만 잘 정리되어 있었고 색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편이었다. 이론 공부만 열심히 해 간다면, 금세 실습에 적응해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습 첫 날, 내가 마주한 카데바의 모습은 내 생각과도, 영상과도 많이 달랐다. 처음 비닐을 가르고 카데바를 꺼내던 순간부터, 사람의 시신임이 실감나지 않았다. 등 실습을 위해 카데바 아래로 손을 넣어 뒤집으며 '너무 차갑고 딱딱하다'고 생각했다. 피부를 벗겨내기 위해 등에 칼을 대는 것도 적응되지 않는 감촉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당황스러웠던 것은 안을 열고 나서였다. 등의 오른쪽 절반이 검붉은 색으로 뒤덮여 있었고, 교과서와 영상으로 공부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교수님께 여쭤보니 피가 고여 근육이 녹는 등 상태가 안 좋아진 것이므로, 왼쪽 등 위주로 실습하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실습이 진행되며 다른 조에서 쉽게 찾는 구조물들이 우리 조에서는 보이지 않을수록 누구에게인지 모를 억울함 같은 것이 조금씩 생겨났다. 나는 정말 열심히 공부해 갔는데, 아무것도 모르겠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단 카데바의 상태에서만 기인한 문제는 아닐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그림들과는 다르게, 앞에 놓인 카데바에는 제거해야 할 지방도 많았고 근육 크기도 훨씬 작았으며 혈관과 신경 등이 결합조직과 엉겨 좀처럼 구분해 내기 쉽지 않았다. 해부 기말고사 날까지 며칠이 남았는지 셈하며 한숨 쉬는 시간들이 길고 잦아졌다. 며칠 동안 관성의 힘으로 공부를 하다가, 기증자 분께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가 문득 떠올랐다. 과정을 얼만큼 자세히 알고 기증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실습 전에는 카데바가 너무 살아있는 사람 같을까 봐, 그래서 무서울까 봐 걱정했었는데, 카데바는 해부 실습이 진행될수록 사람의 형체에서 벗어나기만 했다. 그래서 내가 열심히 피부를 벗기고 지방을 떼어내고 근육을 잘라내고 있는 대상이 모형이 아님을 스스로에게 계속 상기시켜야만 했다. 아직 해부학 수업의 중간쯤에 던져져 있는 지금, 적당히만 공부하고 싶은 마음과 싸우며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딱 하나인 것 같다. 기꺼이 시신을 남겨 주신 기증자 분의 뜻에 누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이다. 잘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들 말하는 해부지만, 뭔가 하나라도 더 얻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의 몸을 직접 열어서 해부하며 공부할 수 있는 한 번뿐인 수업인 만큼, 최선을 다해 배우고 고민하고 토론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으로 먼 미래(혹은 가까운 미래)에 한 명의 환자라도 더 고치고 살리는 것이 비단 해부학뿐 아니라 내가 졸업할 때까지 배울 모든 과목의 궁극적 목적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 소중한 가르침의 시간에 제대로 배우고 있는가 고민을 해 본다. 해부학적 지식뿐 아니라 함께하는 동기들과의 관계,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 감당이 버거운 양을 외우는 요령 등 이 기간 동안 대단히 많은 측면에서 새로운 경험을 쌓는다.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치는 만큼 올바르게 대처하기가 쉽지 않고, 부족하고 모자란 나의 모습에 스스로 실망하는 순간도 참 많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의 고민까지 포함한 이 시간들이 나를 조금 더 좋은 사람으로, 또 미래에 좋은 의사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바란다.
강의실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2021-11-08 05:45:50
어느덧 2021년이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눈 깜짝할 새 지나간 듯한 느낌이다. 유독 지난 2년이 짧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갑자기 도래한 코로나 팬데믹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을 한순간에 바꾸어 놓았다. 마스크 착용이 필수가 되었고,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나지 못하게 되었으며, 여행은 꿈꿀 수도 없게 되었다. '1년 뒤에는 끝나있겠지'라고 생각하던 많은 사람의 생각과는 달리, 코로나19는 2년째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코로나19가 나에게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비대면 온라인 강의다. 매일 아침 서둘러 머리를 감고 지각 할까봐 학교로 뛰어가던 나는 수업 시작 5분 전에 일어나 대충 세수를 하고는 컴퓨터를 켜 수업에 접속한다. 우리 학교는 실시간으로 강의를 진행하기에 정해진 수업 시간에 접속해야만 출석이 인정된다. 출석한 뒤에는 교수님의 연설 같은 일방통행 수업이 시작된다. 수업 시작 전에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 같다. "온라인 강의를 하면 컴퓨터에 대고 혼자 떠드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을 직접 보고 수업을 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라고. 캠을 켜면 서로의 모습을 볼 수는 있지만 아주 작은 창으로 보이는 까닭에, 표정이나 제스처의 교환은 힘들다. 교수님이 혼자 떠드는 것 같다고 하시는 것이 이해가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캠을 켜지 않는 한 우리의 모습은 교수님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는 수업 시간에 졸거나, 딴짓을 한 적이 많다. 대면 강의에서는 교수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기에 수업에 집중하려고 노력하지만,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내 방에서 수업을 듣다보면 아무래도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 비대면 강의가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수업을 쉽게 녹화하여 수업 시간에 놓쳤던 부분이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돌려 보며 더 자세히 공부할 수도 있고, 공간의 제약이 없어 내가 원하는 공간에서 수업을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강의실에서 교수님과 상호작용하고, 동기들과 수업 내용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던 대면 강의를 생각해보면, 온라인에서만 만나는 현실이 아쉬울 뿐이다. 최근 많은 국가에서 코로나19가 종식되기만을 기다릴 수 없다며 코로나와의 공존을 모색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 정부도 11월부터 위드 코로나로 전환할 계획임을 밝혔다. 단계적인 일상 회복을 목표로 서서히 사회적 거리두기 규제를 완화함에 따라, 여러 대학의 비대면 강의도 점차 대면으로 바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바로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코로나19 이전의 모습으로 완벽히 돌아가기는 힘들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어도 코로나19가 완전히 종식되지 않는 한 강의실 좌석을 띄워 앉아야 할 수도 있고, 확진자가 나오면 일시적으로 다시 비대면 강의로 전환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온라인 수업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1년 반이 넘도록 비대면 강의를 한 탓에 온라인 수업에 더 익숙해져 있다. 아침 일찍 등교하고 동기들, 교수님과 함께 한 강의실에서 수업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하루빨리 적응하여 잃어버린 일상을 되찾기를 바래본다. 다시 강의실로 돌아가기를 기다리며.
온라인 강의 시대 '의학' 시각 자료의 중요성 2021-11-01 05:45:50
장기화된 비대면 방침에 따라 현재 실습을 제외한 의과대학의 강의는 대부분 온라인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모든 강의록과 수업 자료들은 디지털화되어 학생들에게 전달된다. 강의와 자료 열람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좀더 용이한 필기를 위해 대부분 태블릿PC 를 사용한다. 하지만 디지털 학습자료를 읽는 데에는 인쇄된 자료를 읽는 것과는 사뭇 다른 형태의 인지적 노력이 소요된다. 대학에 오기 전까지 인쇄된 교과서와 문제집에 익숙해져 온 세대로서, 나를 비롯한 주위 동기들은 종종 태블릿 화면으로 강의록을 보면서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수천 장에 달하는 강의록을 하나의 기기에 담는 효율성은 잡았지만, 디지털 자료는 인쇄된 학습자료의 읽기과정과 당연히 다를 것이라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면 여기서 종이자료와 비슷한 집중도, 또는 그 이상의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서울대학교에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텍스트와 시각자료가 함께 제시되는 디지털 학습자료 읽기 과정 메커니즘은 크게 세 단계로 진행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첫 번째 단계는 초기 정신모형(initial mental model) 형성단계로 텍스트를 읽으면서 전체적인 학습내용의 주제 프레임 워크를 희미하게 설정하며, 두 번째 단계에서는 시각 자료와 텍스트로 초기 정신모형의 세부 내용을 채우게 된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형성한 정신모형을 시각자료와 비교되면서 정확한 정신모형을 형성했는지 확인해 학습내용을 반복적으로 종합하게 된다. 이 때 시각자료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세 번째 단계다. 정확한 내용이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시각자료가 수반되지 않으면, 우리는 내용을 이해했을지라도 이를 머릿속으로 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므로 인쇄된 교과서를 학습하던 때와는 달리 디지털 환경에 적합한 시각자료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이는 모든 분야에 해당하는 내용이지만 특히 의학 분야가 가진 특수성과 높은 장벽 때문에 의학 자료는 학습 환경이 급변하는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다. 이와 관련해 최근 조명받는 분야로 '메디컬 일러스트레이션'이 있는데, 이를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메디컬 일러스트란 의사나 환자 및 일반인들이 의학과 관련된 정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2D, 3D 형태로 표현된 그림을 말한다. 전문적 지식을 갖고 정확하고 세밀하게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미술을 기반으로 하지만 해부학적 지식이 수반되어야 한다. 일러스트는 크게 논문지원용, 강의자료용, 환자용의 세 가지 용도로 활용될 수 있다. 첫 번째는 논문지원용이다. 의학자들이 발표하는 논문에는 이미지가 필수로 들어간다. 예를 들어 기존에 실시하던 수술과 비교해 새로운 수술의 차이를 설명할 때 그림으로 비교해서 보여주면 해당 수술법에 대한 정확도와 이해를 높일 수 있다. 두 번째 강의자료에서의 필요성은 앞 문단에서 이미 언급했으므로 넘어가자. 마지막으로 앞의 두가지와는 달리 비전문가들을 위한 메디컬 일러스트의 수요가 존재한다. 그림 자료는 심리적으로 위축된 환자에게 수술이나 치료 방법을 전달할 때 거부감과 두려움을 줄여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단순히 어떤 과가 전망이 좋아질지부터, 어느 곳에 소속되어 일하면 좋을지까지 변화하는 사회에 맞추어 본인의 필요성을 찾아야 할 부담을 느낀다. 하지만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는 고민은 건강한 것임을 이야기하고 싶다. 결국 선택은 본인의 몫이지만, 다양한 경험을 통해 그 고민을 함께 하고 실현시키는 사람들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할 것이다. 이것이 메디컬 매버릭스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한다. 도종환 시인의 시 '처음 가는 길'의 한 구절과 함께 글을 마치며 본인의 비전을 찾아 나가는 모든 의대생을 응원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
'11개월 여아, 잦은 경련‧고열로 응급실 내원'의 답 찾기 2021-10-25 05:45:50
| '11개월 여아가 잦은 경련과 고열로 응급실에 내원하였다.' PBL(problem based learning)의 첫 번째 세션 전체 내용이었다. PBL은 의대에서 이뤄지는 수업 중 하나로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해 자기주도적으로 해결책을 찾는 학습법이다. 팀원들과 상의하면서 환자의 진단명과 진단을 내리기 위해 알아야 하는 점, 진단을 내리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부분이 어떤 것인지를 정한다. 처음 받는 세션의 내용은 딱 저 문장 하나였다. 우리 팀은 경련과 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다양한 계통의 병을 떠올리려 했지만 가지고 있는 지식 내에서 가설을 세우기에는 단서가 부족했다. 두 번째 세션으로는 응급실에 오기 전 여아의 증상, 응급실에서 시행했던 일부 혈액검사결과와 긴급히 처방한 약물, 약물을 복용한 후 여아의 반응이 나타나 있었다. 이 단서들로 한 가지 질병을 강력하게 의심했다. 하지만, 세 번째 세션에서 주어진 전체적인 혈액검사와 어른에서는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신경학적 징후가 영유아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해당 질병의 임상적 양상으로 인해 또 다른 질병을 배제하기 힘들었다. 결국, 두 질병 중 환아의 진단이 무엇인지 감별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아직 전체적인 내용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지식이 부족했지만, 지식이 부족한 만큼 사소한 것도 의심하게 된다. 해당 내용을 알았더라면 환아의 증상, 질병의 특징적인 임상 양상이나 환아의 나이에 잘 발생하는 질병 위주로 추측하고 넘어갈 것 같았는데 수업을 하기 전이라 질병에 관한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환아의 머리둘레 길이는 적당한지 신경계 발달이 적당히 이루어져 있는지, 불완전한 백신 접종력과 이에 관련된 감염을 일으키는 원인균 중에서 선행되는 요인이 있을지 사소한 부분에도 많은 가능성을 열어놓고 보게 된다. 케이스를 보며 공부하는 순간에서는 이런 사소한 사항도 알아보며 개념을 확장하게 된다. 그러나, PBL 시간에서 케이스의 진단명을 찾아내려는 필자는 전체적인 내용을 모르는 채로 개념만 쌓다 보니 방향성을 잃어버린 채로 그룹 토의에 임하는 것 같아 답답한 면도 있었다. 이틀이 지난 후 두 번째 시간에 나온 세션들은 감별에 도움이 되는 추가적인 검사에 대한 내용이었고, 결국 진단명과 추후 환아의 발달 상태까지 나오며 내용은 마무리가 되었다. 교수님들의 피드백 시간 이후에서야 세션에 적혀있는 내용에서 딱 한 문장을 보며 바로 어떤 질병이 아닌지 의심해야 하고, 다른 한 문장으로는 여러 병들 중 감별을 할 수 있는 단서가 되고, 또 다른 한 문장으로는 해당하는 질병의 분류 중 어떤 형태인지 알 수 있었다. 필자나 다른 동기들은 환아의 진단이 조금 더 신경 쓰여서 검사결과나 가설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교수님들은 왜 이런 검사결과를 하고 증상이 나타나는 기전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중요성을 강조하며 해당 내용을 많이 언급하셨다. 본과 2학년이라 환자를 직접 본 적이 없고 2, 3주에 한 번씩 시험을 치는 필자의 처지에서는 많은 내용을 공부하다 보니 질병을 공부할 때 기전보다는 결과나 임상 양상 등 표면적인 부분에 대해 더 공을 들이게 된다. 문제 푸는 데 조금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PBL을 하다 보면 환자가 처음 내원해서 진단하기까지 단순한 질병의 임상 양상보다는 기전이나 검사의 적응증 등 증상이나 신체 진찰을 바탕으로 기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감별 진단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임상에서 이론을 활용하는 것은 시험을 치기 위한 공부보다 더 깊고 자세한 기전을 바탕으로 하는 것 같았다. 매번 블록 때마다 시험 치기 전 내용을 완벽히 학습하는 것은 2학기가 반쯤 지났지만 아직도 이상적인 바람일 뿐이다. 그러나 환자를 대한다는 관점으로, 기존의 관점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 차이를 메꾸어야겠다.
사람은 '섬'이 아니다 2021-10-18 05:45:50
의과대학 실습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접할 수 있다. 그 중에는 환자도 있고, 간호사 선생님도 있으며, 동료 학생도 있고 실습을 담당하시는 레지던트 선생님들과 교수님들도 계신다. 바쁘게 돌아가는 병원 환경 속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면 변화에 무뎌지곤 하지만, 가끔씩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퍼뜩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것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은 실습 케이스로 맡았던 환자분이 돌아가셨을 때였다. 날것 그대로의 죽음을 접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비록 그분이 숨을 거두신 현장에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의무 기록을 통해 그분이 돌아가시는 순간을 접하며 마치 그 곳에 함께 있었던 것처럼 생생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은 생경했다. 그분의 질병으로 케이스 발표를 준비하며, 마치 그 분께서 생명을 바쳐 내게 지식을 남겨주고 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느때보다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발표를 수정했다. 두 번째는 정신과 실습을 돌고 있을 때였다. 사실 실습을 돌면서 환자들과 얘기할 기회는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 특히 COVID-19 감염을 우려해 실습 학생의 출입이 제한되는 병동이 몇 군데 있기 때문이다. 환자를 마주할 때는 양해를 구하고 환자분을 찾아 뵈어 history taking(환자의 질병과 관련한 과거력을 확인하는 과정)을 하거나, 교수님의 뒤를 따라 회진을 돌 때를 제외하고는 많지 않다. 정신과 실습은 달랐다. 폐쇄 병동 안에 일정 시간동안 들어가서 입원 환자들과 얘기하고 놀잇거리를 찾아보고 함께 TV를 본다. 그러다 보면 남들보다 조금 더 자주 얘기하는 환자가 생기기 마련인데, 나의 경우에는 어린 여자 환자였다. 나보다도 나이가 어린 그 환자를 보며 처음부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폐쇄 병동이 답답하게 느껴질까, 하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그 나이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관한 생각도 들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신변잡기적 얘기들 뿐이었지만, 실습이 거듭되고 얘기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환자가 내게 조금씩 마음을 여는 것이 느껴졌다. 실습이 끝날 때 즈음에는 본인의 과거력에 대해 매우 진솔하게 내게 털어놓으며, 수줍게 장래희망에 대해 얘기하기도 하였다. 그때 나는 실습을 돌며 두 번째로 신선한 충격을 받을 수 있었다.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이다. 마지막은 산부인과 실습을 돌때였다. 운좋게도(?) 첫 날부터 분만을 참관할 기회가 주어진 나는, 가족 분만실에 들어가 분만을 진행하는 교수님과 레지던트 선생님들을 돕게 되었다. 산모의 진통이 이어지고, 분만실에 있던 교수님과 간호사 선생님들 모두 입을 모아 산모를 응원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힘 주세요, 아이 머리가 보여요. 아이가 완전히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등허리에 소름이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손에 땀이 흥건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산모가 힘을 주고 있을 때 나도 무의식적으로 같이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생명의 탄생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인지 깨달았다. 정현종 시인의 이라는 시를 좋아한다. 짧은 두 줄로 현대 사회에서의 인간 소외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시인데, 그 시를 읽으면 적막에 잠겨 서로 먼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그려진다. 병원 현장에서 본 사람들은 달랐다. 비록 스쳐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사람들은 뜨겁고 강렬한 감정을 공유하곤 한다. 의사라는 직업의 소중함은 바로 그러한 강렬한 감정의 순간에 함께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의 시작과 끝, 기쁨과 슬픔의 순간에 의사는 옆에 서 있다. 반 년간 실습을 돌며 많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내게 가장 소중한 가르침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카데바를 처음 보다 2021-10-12 05:45:50
2학기가 개강한지 한 달여가 지나갔다. 2학년 2학기는 처음 기초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는 때이므로 의대생에겐 너무나도 소중한 시기이다. 본과 과정을 시작하는 시기라 예과 1학년, 2학년 1학기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수업들이 진행되었다. 낯선 이 느낌에 많이 긴장되기도 하고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앞섰다. 해부학, 생화학, 생리학, 조직학을 배우는데 가장 힘들 것 같은 과목을 꼽으라면 당연히 해부학이다. 여름 방학 동안 비대면으로 골학이 진행됐다. 비대면 골학의 마지막날에 두개골(skull)파트가 배정되었고, 마지막 날 전까지는 탈없이 잘 버텨왔다. 마지막 날 skull 파트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상지 하지를 암기할 때와는 다르게 skull 부분을 암기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 많은 구멍들과 뇌신경들을 외우고 있노라면, 지금 생각해도 정신이 아찔해져 눈이 감기는 것만 같다. 시험 전까지 제대로 다 못 외울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나의 불안한 감은 틀리지 않았고, 제대로 암기하지 못하여 조별로 진행된 시험에서 우리 조가 꼴찌로 골학을 끝마쳐야 했다. 조원들에겐 너무 미안함과 동시에 나 스스로에게 큰 실망을 했었다. 이렇게 나를 힘들게 했던 골학을 베이스로 진행되는 해부학이기에 기초의학 중에서 가장 많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 여파로 해부 실습은 연말로 미뤄졌고, 우선 비대면으로 이론과 실습을 병행했다. 이론 수업이 끝나고 나면 수업한 부위를 e-anatomy를 활용해 영상을 보고 리포트를 제출하는 방법이다. 레포트는 영상 중에서 반드시 찾아야 하는 구조물들을 찾고, 해당 구조물을 찾는 과정을 정리하는 식이다. 아마 실제 카데바를 보기 전에 많은 의대생들이 하는 생각은 '과연 내가 카데바 해부를 볼 수 있을까?'가 아닐까 싶다. 영상으로 카데바를 보게될 나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하기에는 이론 수업 때 암기해야 하는 부분들이 너무 많아서 '이걸 다 외울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더 커져버려, 앞서 생각한 걱정은 쉽게 묻혀버렸다. 우리 학교는 하지, 상지, 머리, 몸통 순으로 수업을 진행해서 가장 먼저 봐야할 카데바의 부위는 다리였다. 이론을 어느 정도 듣고 나서 실습 영상을 봐야 이해가 되겠지만 나는 미리 한 번 봐두면 좋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E-anatomy 홈페이지에서 시신해부 윤리지침을 우선적으로 읽었다. 이 때에는 당연한 윤리의식인 것 같았다. 얼굴 파트는 아직 수업을 하지 않았기에,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얼굴 파트의 실습 영상을 보았다. 카데바를 처음 보는 순간이었다. 몇 주전에 영상으로 본 것이지만 그때의 그 강렬한 인상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검은 천으로 상체가 덮혀 있고, 얼굴만 보이는 시신 한 구가 카메라의 빛을 받으며 누워있었다. 눈은 검은색 선으로 모자이크 되어있었고, 피부는 거뭇거뭇하였다. 나이가 많은 남성의 시신이었다. 미쳤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무서웠다. 정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거 인형아닐까?', '이걸 내가 직접 본다고?', '얼굴 피부를 벗겨낸다고?'… 23년 인생을 살아가며 만나고 접한 사건들 중 가장 미쳤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빠르게 이 순간을 벗어나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해부가 진행돼감에 따라, 카데바는 내가 알고 있는 인간의 탈을 벗어내고, 해부학적 대상으로 변모해갔다. 피는 나지 않고, 근육들과 뼈만 남아있는 모습을 보면 교과서에서 보던 익숙한 그 모습들이었다. 처음에 들던 오만가지 생각은 온데 간데 없이 싹 사라진채, 이론수업 때 말한 구조물들을 찾는데 열중하는 나의 모습만이 모니터 속에 비춰졌다. 처음 해부영상을 보기 전에 보았던 시신해부 윤리지침을 다시 보았다. 당연하게 여겼던 윤리지침들이, 실제 해부의 무게감을 알고 난 뒤에는 해부가 얼마나 엄숙하고 경건한 행위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 말고 또 느낀 점이 있었다. '시신해부의 목적은 오로지 귀중한 생명을 살리는 지식과 의사로서의 윤리적 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것임을 명심하고 좋은 의사로서의 자질을 함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라는 윤리지침서의 마지막 지침인데, 이 문장 속의 좋은 의사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의사는 무엇일까. 공부를 열심히 해 의학적 지식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사람을 살리는 의사일까. 그렇다면 나는 정말,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고 느꼈다. 골학 수업 때 겪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앞으로 더 정진하겠노라고 다짐하게 되었다. 시신기증에 대해서 좀 더 찾아보았다. 시신기증은 사망 후 의학연구 및 해부학 교육을 위하여 본인의 유언과 유가족의 뜻에 따라 아무런 조건과 보수없이 자신의 몸을 의과대학에 기증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기증이 많이 부족한 탓에 무연고자를 연구목적으로 해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기증자가 많이 늘었다고 한다. 아마 내가 본 분도 고귀한 뜻을 가지고 자신의 시신을 기증한 한 분이라 생각된다. 정말 감사한 일임이 틀림없다. 이제 이 글을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는 말로 끝맺음 하려 한다. 좋은 의사가 될 기회를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의사도 누군가의 가족이다 2021-10-05 05:45:50
"오늘은 2018년 2월 27일이지." 2021년 8월 말, 치매 검사라고 불리는 'MMSE(간이정신상태검사)' 진행 중 환자에게서 들은 대답이었다. 뇌출혈로 인지 능력 저하가 나타난 환자라는 정보를 미리 알고 왔기에, 어느 정도 예상된 답변이었으므로, 나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검사자와 나, 피검사자인 환자 외에 옆에서 이 대답을 들은 다른 한 사람은 많이 놀랐던 것 같다. 환자의 침대 옆에서 그를 보살피고 있던 보호자였다. 이후로도 환자의 검사를 위한 질문은 계속되었고, 여기가 어디인지 묻는 질문에 집이라고 대답하는 등 '엉뚱한 대답'은 이어졌다. MMSE 검사를 위한 질문을 모두 마치고 옆을 보았을 때, 그제서야 고개를 푹 숙인 채 거의 울먹일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보호자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보호자는 그러한 슬픈 태도를 금세 숨기고 그 후 운동 검사, 감각 검사 등의 신경학적 검사를 이어서 진행하는 동안 환자가 검사를 더 잘 받을 수 있도록 환자의 순응도를 높이는 격려를 해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셨다. 아마도 치료를 위한 보호자의 의지였던 것 같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환자가 나의 가족이고, 내가 보호자로 병원에 와 있었다면 나는 어땠을까. 며칠 전까지 함께 식사도 하고 대화도 잘 하던,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소위 엉뚱한 대답들을 하며 인지 기능이 저하된 모습을 직접 보게 된다면, 다른 사람이 그런 반응을 보였을 때처럼 놀라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까.'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PK 실습을 돌다 보면 매주 한 명의 환자를 맡아 진단부터 치료, 그리고 그 질환에 대해 공부해보는 기회를 가진다. 그 과정에서 실제로 어떠한 증상이 나타났고, 어떻게 입원하게 되었는지 등의 많은 정보를 환자가 가지고 있기에 환자분께 많은 문진을 하며 정보를 얻곤 한다. 그렇게 20주 가량 실습을 돌았으니, 적어도 20명 이상의 환자와 직접 대화를 해 보았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적은 숫자라고 할 수 있지만, 작년까지 의자에 앉아 의학에 대하여 책과 ppt 파일로만 접하였던 나에게는 무엇보다 큰 경험이었다. 그 경험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를 떠올리면 바로 이 환자가 떠오른다. 그 검사를 진행하던 병동에서의 장면말이다. 모든 사람은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다. 이 당연한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기에 떠올리기 어려운 것 같다. 환자 한 명 한 명이 나의 가족이라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그들을 대하게 될 것인지 생각해본다. 물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대처해야 하는 의사가 항상 감성에 치우쳐 잘못된 판단을 내려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이 당연한 생각을 이따금씩 떠올리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경험을 잊지 않고 더 열심히, 그리고 게으르지 않게 공부해 환자와 보호자가 힘들 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다. 최근 방영하고 있는 의학 드라마에서, 한 주인공이 했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저는 환자를 진료할 때, 만약 내 가족이었으면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항상 떠올려 봐요. 제 가족이었다면 이 방법을 이용하여 치료할 것입니다.' 그런 의사가 되고 싶다.
메트로놈이 펄스였다면 2021-09-27 05:45:50
응급의학과 실습을 돌며 원하는 학생들에 한해 나이트 근무를 설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교수님 말씀에 홀린 듯이 신청했다. 그렇게, 12시간의 밤샘 근무를 하게됐다. 처음엔 역대급으로 많은 환자수에 놀라며 인턴, 레지던트 선생님을 졸졸 따라다니며 술기 등을 참관했다. 4시간쯤 지났을까. 한 환자가 흉부압박을 받으며 소생실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따라들어갔다. 심장무수축(asystole)이었다. 즉시 심장 충격기(Defibrillator, 디피브릴레이터)를 부착하고 압박(compression, 컴프레션)을 교대하며 실시하셨고, 각종 약물투여를 지시하던 교수님께서 "10초 후 학생선생님 들어가세요"라며 나를 바라보셨다. 애니가 아니었다. 멀쩡히 밤산책을 하던 사람이었고, 난 지독히도 연습했던 심폐소생술(cpr)을 하기위해 가슴을 내려보았다. 배운대로 유두(nipple) 위치를 확인하고, 흉골(sternum)에 손바닥을 댔다. 압박을 시작한다. 분당 110회의 박자와 fully recoil할 수 있는 압박. 번갈아 교대하며 대충 40분이 넘어갔을까. 중간중간 맥박 체크와 전기충격이 지나가고,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살리고 싶다는 생각과 내가 조금 더 잘하면 다를 수 있지않을까 라는 생각에 압박 속도가 약간 빨라지는 듯 하자, 110bpm으로 맞춘 메트로놈을 켜주셨다. 이내 멈춰도된다는 말을 하셨다. 거기까지였다. 흉부압박으로 뱉어지는 숨소리와 여러 모니터링 장비의 알람소리로 가득찼던 소생실이 일순간 고요해지고 메트로놈만 속절없이 똑딱였다. 저 메트로놈이 똑딱거리듯 심장이 다시 뛰었다면, 저 밖의 보호자들은 오열하지 않았을 수 있을까. 내가 했던 천 여 번의 압박중 한번이라도 더 잘된 압박이었다면 돌아올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스크럽복과 캡은 땀으로 흥건히 젖었고, 잠시 응급실밖을 나왔다.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넘기고 터져나오는 울음을 주차장까지 참아냈다. 아버지께 전화를 드리며 울음을 토해냈다. "우리 재호가 이렇게 성장해가는구나. 잘했다." 내 손 끝에 죽음을 담은 것은 아득히 슬픈 일이었다. 급성심근경색(AMI)로 십여년전 돌아가신 작은아버지의 기억이 떠오르고, 죄책감을 가졌다. 이내, 또다른 심정지(arrest) 환자가 응급실로 밀고 들어온다. 응급실 의료진은 다시 환자를 살리기 위해 뛴다. 배우고 공부하여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야겠다. 이 땅의 모든 응급의학과 선생님들께 깊은 존경을 전합니다.
우리에게 방학이 필요한 이유 2021-09-13 05:45:50
너무나 짧게만 느껴졌던 방학이 끝났다. 학기 중에는 그렇게 꾸물꾸물 흘러가던 시간이 왜 이리 쏜살같이 지나가기만 하는지! 개강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다음 방학에 할 일을 몰두해서 고민하는 나는 흔한 방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수많은 공부량,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맞이하는 기간은 더 특별하다. 문득, 이렇게 소중한 방학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나름 의대생으로 4년째 방학을 맞이하고 있는 입장에서, 몇주간의 '쉼'의 의의에 대해서 고민해 보았다. 방학은 다양한 것을 시도해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수업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우리는 바쁠 때에는 차마 엄두가 나지 않는 새로운 것을 도전해볼 여유와 용기를 가진다. 우선, 진로에 관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다. 관심분야에 대한 인턴십이나 세미나에 참여해 흥미를 이어가거나, 랩에서의 연구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연구경험을 쌓을 수도 있다. 서브인턴을 통해 병원에서의 삶을 미리 겪어볼 수도 있다. 의학과 다른 분야의 지식을 학습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코딩, 인문학, 경제학 등 언뜻 보면 의학과는 큰 관련이 없어 보여도 우리의 삶의 향상에 도움이 될 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성장할 수 있다. 새로운 취미를 내 삶 속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다. 헬스, 필라테스, 서핑 등의 스포츠를 즐기거나, 요리나 커피 제조 자격증을 취득하고, 창작적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일은 방학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행복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방학이 필요한 이유는 휴식과 자유를 선물해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치료받는 동안 휴식을 취하세요." 병원을 찾았을 때 흔히 듣는 말이다. 휴식은 몸과 마음의 건강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스트레스 때문에 생기는 질환을 예방하는 효과를 지닌다. 하지만 오히려 의대생이라면 휴식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다. 꽉꽉 차 있는 수업과 과제에 치여 열심히 살아보면 쉬는 것에 대해서 막연한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방학은 잠깐 우리가 쉴 수 있게 함으로서 마음의 여유를 제공한다. 방학 기간동안 여러 활동에 도전할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수도 있으며, 물론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쉬기만 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잠깐이나마 즐긴 삶의 여유는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성장하게끔 하고, 앞으로의 일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이번에도 각자의 기간과 추억은 달랐겠지만 모두들 자신만의 즐거운 방학을 보냈기를 바란다. 모두들 하반기 또한 방학에서 얻은 기억을 간직한 채 잘 보낼 수 있기를 응원한다.
나는 오늘, 작년의 교수님과 만난다…강의의 재탕 2021-09-06 05:45:50
아침에 눈을 뜨면 오전 9시가 좀 넘어가고 있다. '도대체 대면 강의하던 시절 선배들은 어떻게 9시까지 강의실에 가서 수업을 들었던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졸린 눈을 비비고는 기숙사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편다. 하루 종일 방에 구어박혀 노박이(한곳에 붙박이로 있는 사람. 충청 지방 방언)로 노트북만 쳐다보고 있는 코로나 시대의 의대생에게, 이 책상은 강의실이요 도서관이요 세상의 창이다. 첫 번째 강의를 틀고 업로드된 강의록을 펼치자, 세 자리 숫자의 페이지 수를 자랑하는 크고 아름다운 분량의 PPT가 나를 반겨준다. 혹시나 중간중간에 강조 표시가 있지는 않을까 실낱 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강의록을 쭉쭉 훑어보지만, 끝없는 글과 그림의 향연만이 있을 뿐이다. 벌써부터 심사가 울민해진 나는 강의 화면으로 시선을 옮긴다. 영상 속에는 나처럼 노트북 모니터를 응시하며 마이크에 대고 어색한 듯 입을 떼는 교수님이 보인다. "네, 여러분, 안녕하세요. 갑작스러운 코비드 나인틴 사태로 인해…" 앗, 잠깐, 코로나가 터진 지 1년 반이 지난 지금 '갑작스러운'이라고? 작년 강의 재탕의 냄새를 맡은 나는 빠르게 선배들로부터 받은 작년 필기를 뒤져 같은 교수님의 강의록을 찾아내 펼쳐 본다. 역시, 강의를 들으면 들을수록 작년 필기 내용과 올해 수업 내용이 일치한다. 무지막지한 양을 모조리 읽어 놓고는, 마지막에 "비록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내용을 전달하느라…"라는 의례적인 수습용 멘트를 덧붙이는 것까지 완벽히 작년 강의와 똑같다. 부디 강의가 똑같은 만큼 시험문제도 작년과 똑같길 바라며, 나는 재빨리 다음 강의의 재생 버튼을 클릭한다. COVID-19 시대, 본과 2학년으로서 나의 일과 중 일부를 약간의 조미료를 쳐서 다소 익살스럽게 재구성해 보았다. 비대면 수업을 시작한 지 2년차에 접어들며 작년과 비교해 생긴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작년과 동일한 강의가 업로드(일명 재탕)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때로는 위와 같이 아예 똑같은 강의가 올라오기도 하고, 때로는 강의 중 일부만 새롭게 촬영한 영상이 올라오기도 한다. 이제는 방에 홀로 앉아 헤드셋을 쓰고 강의를 듣는 데 익숙해지다 못해 이골이 난 2021년의 의대생과, 아직 바뀌어버린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대면 강의를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2020년의 교수님이 모니터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이 진풍경은 COVID-19로 인해 변해버린 의과대학의 교육환경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오해는 마시라, 나는 강의 재탕을 전혀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의대생들에게 가르칠 기초 수준의 내용은 거의 바뀌지 않을 텐데, 한 번 제대로 찍어서 여러 번 활용하고 필요한 부분만 조금씩 보충/수정하면 얼마나 경제적이고 효율적일 것인가? MIT와 같은 곳에서는 아예 유튜브에 MIT OpenCourseWare이라는 채널을 운영하여, 몇 년 전에 촬영된 강의들을 일반 대중들이 원하는 때에 얼마든지 들을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다. 다만 수업을 듣는 학생 입장에서 한 가지 주제넘게 바라는 게 있다면, 한 번 강의를 찍을 때 '잘' 찍었으면 한다. 수많은 교수님의 강의들을 듣다 보면 정말 이해가 쏙쏙 되는 강의도 있지만, 가끔 워드 파일을 그대로 PPT로 만들어 읽고 있는 듯한 강의, 지엽적인 부분을 설명하느라 한참 시간을 쓰고는 뒷부분에 시간이 모자라 정작 중요한 부분은 후다닥 수박겉핥기로 넘어가는 강의도 있다. 물론 하고 싶으신 말씀이 많으시고 바쁘신 시간을 쪼개어 강의를 하시느라 그러신 줄은 알고 있으나, 솔직한 말로 이런 강의는 듣고 나도 도대체 뭘 들은 것인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껏 열심히 강의하신 교수님도 손해고, 강의를 다 들어 놓고 또 따로 교과서와 논문을 찾아봐야 하는 학생도 손해가 아닌가. 적어도 중요한 부분은 중요하다고 강조해주고,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확실히 설명을 해 주는 강의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COVID-19 사태는 앞으로도 한동안은 마무리될 조짐이 보이지 않고, 그에 따라 지금과 같은 온라인 강의 체제도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나중에 다시 대면 수업이 가능해진 뒤에도, 이렇게 수고해서 찍어 놓은 양질의 강의들을 굳이 버릴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애초에 처음 강의를 찍을 때 여러 번 쓸 생각으로 조금만 더 공을 들여 잘 찍은 뒤 몇 번 재활용할 수는 없을까. 이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강의 재활용이라면 적극 찬성한다. COVID-19으로 인해 온라인 수업으로 부득이하게 전환할 수밖에 없게 된 이 상황을, 오히려 교수님들의 수고는 덜고 학생들은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길 바라 본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이 남긴 선물 2021-08-30 05:45:50
방학 중 선택실습을 하게 된 것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아직까지 한번도 의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필자는, 앞으로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학과 공부를 하고 삶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정리와 결단이 필요했다. 현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취재를 하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의학전문지 학생인턴기자 활동을 시작했다. 인턴십 시작과 동시에 코로나 4차 대규모 확산이 시작되어 현장 취재에 참여하기는 어려웠다. 대신, 수술실 CCTV 설치 의무화나 원격진료와 같은 의료계 쟁점들에 대한 학생 입장의 생각을 기고할 수 있었다. 이해당사자별 의견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의료계 이슈에 대해 병원 실습도 아직 돌아보지 않은 학생의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것에 대한 걱정이나 부담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각 주제들과 관련된 여러 기사 및 논문들을 찾아보면서 보다 명확하게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필자가 배우고 경험한 범위 내에서 이해 가능하고 동의할 수 있었던 전문가분들의 의견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생각과 언어로 살을 붙여 내용을 재구성해보기도 했다. 한 쟁점을 둘러싼 다양한 관점들을 살펴보면서 필자의 가치관을 점검하고 만들어갈 수 있었던 값진 경험이었다. 비임상 진로의 길을 걷고 계시는 선배 의사분들을 뵙고 삶의 발자취, 사회구조 및 제도의 현주소와 바람직한 개선방향, 비임상 진로를 위해 학생 단계에서 노력할 수 있는 사항들에 대한 압축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었던 일련의 인터뷰 기사 작성 또한 귀중한 배움의 기회였다. 코로나 대규모 확산 국면에도 불구하고, 대면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기에 학생 후배로서 편안한 마음으로 전문적 내용을 필자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을 듣고, 추가적 궁금증들을 즉각적으로 해소할 수 있었다. 법조인을 꿈꿨었던 적이 있고, 의료법 교과를 체계적으로 잘 가르쳐 주셨던 담당 교수님의 수업에 재미를 느끼면서 열심히 들었던 좋은 기억을 바탕으로 법무법인 인턴십에도 참여했다. 상고 후 파기 환송된 민사 손해배상 사건의 경우 사건기록지가 4000장 가까이에 달하는 등 읽어야 할 내용이 많았지만, 학교에서 기계적으로 시험을 보기 위해 암기했던 지식과 교과서 페이지들이 소송의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순차적으로 준비서면 및 답변서를 읽어가면서 소송의 추이를 예측하고 확인해보는 것뿐만 아니라, 원고와 피고 각 입장의 대응전략에 대해 판례 및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사고하여 글로 정리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또한, 인턴십 과제 수행을 위해 도서관의 보존 서고에서 의료소송 실무에 관한 전문 서적들을 찾아 탐독해보기도 했다. 강의 범위 내에서 개념을 정리하고 수동적으로 암기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던 중에, 필요한 지식을 직접 취사 선택한 후 여러 개념 간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태도를 익힐 수 있었다. 현재 의과대학 교육과정 상으로 선택실습은 본과 4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도록 되어있다. 물론, 임상 지식과 병원 실습 경험을 충분히 갖춘 후에 선택 실습에 참여하면 보다 실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부터 학생들이 의학 외에도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흥미를 느끼는 분야를 탐색해보고 실제 현장 경험을 해본다면 학생 개개인의 진로 설계 및 학업 동기 부여에 있어서 큰 힘이 될 것이라 믿는다. 쳇바퀴 돌듯 끝이 없는 공부에 방황하고 있는 동료가 있다면 본인이 열정을 가지고 있거나, 있었던 분야를 생각해보고 방학을 이용하거나 학기 중 시간을 쪼개서라도 해당 분야와 관련된 서적이나 논문, 강연 등을 꾸준히 접해보고 인턴십과 같은 선택실습의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아서 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빠른 판단력에 정확도까지 필요한 '땡시'의 경험 2021-08-23 05:45:50
본과를 겪은 학생들이라면 모두들 익히 잘 알겠지만, 의과대학에는 '땡시'라는 무시무시한 시험이 있다. 기본적으로는 해부학, 병리학과 같은 기초 과목에서 주로 진행되는데 '땡시'라고 불리는 이유는 교수님이 '땡'하는 종소리를 치게 되면 다음 문제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필자의 학교 같은 경우 한 문제 당 약 50초의 시간을 주기 때문에 50초(이 50초는 문제를 알면 꽤 길지만, 문제를 모르면 정말 찰나에 가깝다)에 한 번씩 종이 울리고, 종의 소리에 맞추어 모든 학생이 다음 문제로 넘어간다. 개요만 듣고 보면 그다지 압박이 심하다거나 악명이 높을 만한 이유를 찾기 힘들지만 실제로 겪어보면 식은 땀이 줄줄 난다. 땡시 문제 같은 경우 과목에 따라 다르겠지만 해부학을 예를 들어 보자면 해부학 실습을 하면서 배운 우리 몸의 장기, 혈관, 신경과 같은 구조물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물어본다. 실제 교수님께서 우리가 실습한 카데바 위에다가 핀과 같은 것을 꽂아 놓고 학생들이 해당 구조물의 이름을 적는 구조이다.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답지와 필기구를 직접 들고 돌아다니면서 푸는 시험이라니. 타 전공을 졸업하고 의과대학을 온 나로선 굉장히 인상 깊었다. 학생들이 실습실을 한 바퀴씩 돌면서 자리를 이동하는 모습도, 그런 학생들을 바라보며 딱딱한 표정을 짓는 교수님의 모습도(그리고 대부분의 구조물을 알아보기 힘든 나의 모습도…) 모두 어색하고 신기한 시험이었다. 또한 문제 당 시간이 철저하게 정해져 있는 시험이다 보니 압박감이 심했다. 한 문제 당 주어지는 시간이 1분이 채 안 되는데 그 짧은 순간에 머릿속에서는 별에 별 생각이 다 든다. 이 문제를 내가 실제로 배웠는지, 이런 구조물이 실존하는지, 심할 땐 딱 그 구조물 이외의 근처 모든 구조물의 이름이 스펠링까지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던 지. 그런 잡다한 생각이 머릿속을 다 지나칠 때 즈음이면 종이 치고 빈칸이 덩그러니 남겨진 나의 답지와 함께 다음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꼭 풀다 보면 미련이 남아서 시간이 조금씩 남을 때 마다 다시 기억을 상기시켜보려고 노력하는 문제가 생긴다. 처음에는 그나마 기억에 이미지가 남아 있어서 머릿속에서 구조물을 헤집어가며 문제를 풀려고 노력하는데 나중에는 해당 구조물이 동맥이었는지, 정맥이었는지, 신경이었는지 분간이 안가서 포기하게 된다. 역시 이럴 때에는 빠른 순간의 판단력과 정확성을 요하는 시험인 만큼 미련 없이 모르는 문제는 넘어가야 한다. 모른다고 해당 문제를 계속해서 떠올리기엔 그 뒤에 문제도 많이 남아 있고 계속 붙잡고 있으면 아는 문제도 못 풀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련은 버리고 얼른 다음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의과대학 생활도 꼭 땡시와 같다고 느껴진다. 빠른 순간 판단력 그리고 그 와중에 지켜야 하는 정확도. 블록 강의를 주로 채택하는 의과대학인 만큼 수많은 과목들이 빠르게 지나가게 된다. 모든 과목을 정확하게 알고 넘어가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학습량 때문에 당연히 실수로 가득한 과목도 생기기 쉽다. 그럴수록 미련을 가지긴 보다 종이 치면 얼른 다음 문제로 넘어가서 새로운 마음으로 과목을 시작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